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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토아이코의 "뭐가 우습나" 25
何がおかしい(2020 佐藤愛子)
25 다민족 시대
아내이자 어머니이지만 여자가 아닌 자신---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질문을 받았다. 그것이 요즘의 30대 가정 주부의 고민이라고 한다.
아내이자 어머니이지만 여자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라고 내쪽에서도 질문하고 싶어졌다. 여자이기 때문에 아내이고 어머니가 아닌가? 지금 아무리 줏대없는 남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해도, 남자가 아내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물으니 상대방은, 그런 질문을 받을 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라고 실망스런 표정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정색을하고 나무라면 민망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토 선생님은 아마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이라고 머뭇거리면서
"그런데 어쩌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서의 즐거움...여자다운 생활...삶의 보람이랄까, 그런 것이 없어요...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해 집니다. 뭔가 하고싶다! 라고 줄곧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점점 더 안절부절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 그래요?" 라고 나는 알듯 말듯 건성으로 외국어라도 들은 듯한 기분으로 "끈질긴 것 같지만, 아내로서의 자신, 어머니로서의 자신은, 여자로서의 자신이 아닌가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자로서의 자신은 어떤 자신입니까?" 라고 묻는다.
그런데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자신이 있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라면서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웃음은 자조의 웃음 같기도 하고, 나의 무지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본은 세계에서도 드문, 국민의 대부분이 동일민족이기 때문에 서로가 한마디 말로 열마디를 알아 듣는다. 많은 말을 쓰지 않아도, 서로가 곧바로 알 수 있는 공통의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활하기 편하다, 라고들 말하고 있다.
열마디의 말 중 여덟까지만 말하고, 나머지 두 마디는 일부러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듣는다는 신뢰 관계가 암묵적으로 성립되어 있어, 오히려 그렇게 하는 편이 함축성이 있어 서로가 좋아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미국 같은 곳에서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영국계, 스페인계 등등, 다민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양한 감성이 집합되어 있어 아무래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매사를 에두르지 않고 분명하고 단순한 형태로 말하지 않으면 이해 받기 힘들게 된다.
일본인처럼 '함축'이란 것을 소중히 하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말하면 입술이 추워지는 가을 바람(무심코 한 말에 스스로 후회한다)'는 바쇼(松尾芭蕉:에도시대 하이쿠 시인)의 시에도 나와 있듯이 하이쿠에 해박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일본인이라면 대체적인 그 뜻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단지 가을의 정취를 느낄 뿐만 아니라, 이 시구에 함축되어 있는 속뜻까지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다---라고 오랫동안 나는 생각하고 있다. 외국인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칠지도 모르는 일본인의 ‘싱긋싱긋 웃는 웃음’도 말 이외의 뭔가를 전하고 있다는 뜻의 웃음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그러나 요즈음, 자꾸만 머리에서 맴도는 것은, 일본도 최근에 이르러 다민족 국가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일본인끼리니까 헤아릴 수 있다는 편안한 마음이 없어지고 있다. 일본인끼리이기 때문에 '서로 통한다'는 것은 감성이나 발상의 토양이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은 같지만 다른 토양에 다른 감성, 다른 가치관을 키워온 세대가 나타나고 있다. "어머니이자 아내이지만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라는 생각의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이다.
오래된 토양에 조심스러운 꽃을 피워 온 노년층은, 어머니이자 아내인 것 이상으로 뭔가 더, 활기찬 자신의 길이 없는가 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 길을 가려면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한 채로,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위치를 감수하고 일생을 보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개인은,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실격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며 살았지만 '여자로서의 삶의 보람'을 만끽한 것은 아니다. 더 말하자면 '인간으로서의 삶의 보람'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여자로서의 삶의 보람'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여자로서의 삶의 보람"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조차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념적으로도 모르고 실감으로도 모른다. 동년배의 옛 친구에게 이것을 말하자, 그녀는 한마디로 말해 버렸다. "그런거, 우스운 말이야! 뮈가 여자로서의 인생이야!"
라고 그 친구는 내 말에 진정성이 없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녀의 추찰로는, "여자로서의 인생을 살고 싶다" 라고 하는 것은, 아마, 예를 들면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독신 시대와 같이 기분내킬 때 가고 싶은 곳에 놀러 가고, 세련되게 멋부리고 외도나 연애 같은 것을 하며 즐기며 마음조려 보고 싶다…는 그런 것이라고 처음부터 그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그녀는 말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하라주쿠 주변의 카페 테라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담배를 태우고 있으면, 맞은편 테이블에 있는 신사와 문득 시선이 맞주치고, "좋은 날씨입니다." "그렇군요. 산들바람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혼자 오셨어요?" "네? 네에..." "이렇게 하고 있으니 마치 파리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아, 파리.." "마로니에가 아름다울 무렵입니다..."
등등, 해도 않해도 좋을 것 같은 이야기를 거드름피우며 나누고, "또다시 언젠가 뵙기를 바랍니다." "네? 하지만 다시 만날 일이 없지 않을까요? 우연이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아니, 그건, 간단해요. 의지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군요.." ---이런 말로 서로 즐거워한다.
그렇게 하여 그것이 이윽고 의사연애로 발전하고, 바람을 피우게 되고 또 고민하게 되고 행복감에 젖게 되고 갑자기 멋쟁이가 되었다고 주위로부터 그런 말을 듣게 되어 기뻐하기도 하고...모두가 부질없는 일이다,
그래, 그런 것이야--라고 마음대로 정의를 내리고 우리는 분개한다. 저속적이다고 해도 우리의 세대는 기껏 그렇게 밖에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아내이고 어머니인 것이 싫증이 닌다? 싫증이 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그만큼의 힘 밖엔 없다는 것이니 어쩔 수 없잖아!"라고 갑자기 화가 치민다. 그렇게 말하다 보니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보내 와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린 자신에게 생각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되돌릴 수도 없다, 라고 해도 희망찬 앞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자신의 일생을 생각하면 바보가 된 것 같은 절망적인 마음이 들기 때문에 가능한한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자고 하며,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열심히 살아 왔어. 남편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라고 억지로 자랑스러워 하지만 내심으로는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어쩌지하며 암담해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남편이 먼저 세상울 떠나도 별로 암담하지 않다. 생활의 기반만 확실하면 오히려 남편이 먼저 가도 나쁠 것이 없다. 아무튼 나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할 일은 다해 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만족감은 있어요!"
라고 마음 속에서 혼자서 속시원하게 불만을 누르고 만족해 한다. 우리 세대는 그 날 그 날을 일심불란하게 살아야 하는 조건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생활밖에 없다! 아! 이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따위의 불만을 토로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촌각의 여유도 없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 일해 온 세대와, 여유가 너무 많아, 여자로서의 자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라고 고민하고 있는 세대가 지금,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게다가 또 하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사는 것은 삶의 흐름인데, 이와는 달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라고 잘라 말하는 신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그 세대들은 고민하는 주부들을 향해 말할 것이다.
"오로지 가족만을 위한다는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자꾸자꾸 하고싶은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라고 실로 간단 명료하다. 그러나 '자꾸자꾸 하면 된다'라고 해도 무엇을 자꾸자꾸 하면 좋을지 모른다.
젊은 세대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고 결연히 선언하고, 하는 일이라는 것이 파트타임으로 하루 일하고 오는 것도 생각해 보면 "여자로서 삶이다" 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설령 직장에서 약간의 연애사태가 있었다고 해도.
그런 것을 보고, 노년층은, "남편도 아이도 있는데, 무슨 짓이야!" 라고 화를 내겠지만, 젊은층은 "그게 어때서, 즐거우면 그만이지." 라며 대수롭지 않아 한다.
그렇게 해서 '번민히는 중년주부'들은 더 즐거운 것, 더 불타는 것을 지향하여 안달하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여자끼리이지만, 지금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모 부인잡지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요즘 인터뷰 같은 것은 거절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그것은 앞서 언급한 '다민족 사회'에서는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할 자신감이 없어서이다), 억지스런 의뢰에 어쩔 수없이 승락은 하였지만, 그 때 사진도 찍는다고 해서 주저했다.
최근 몇 개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 많아, 자거나 일어나거나, 하루 종일, 잠옷을 입은 채로 지내고 있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머리의 세트 정도는 해야 하고, 기모노도 입어야 한다. 그것이 싫어서 사진 촬영을 수반하는 취재는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상대방의 열의에 못이겨 (강하게 거절할 만큼의 에너지가 없어), 승낙은 하였지만 약속의 날이 다가올수록 부담감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병약한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부담감이다)
그런데 약속 전날의 일요일, 잡지사의 담당청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저어, 내일, 찾아뵙게 되어 있는 ××입니다만 내일 선생님의 차림은 기모노입니까, 양복입니까?" 대답의 말을 찾는 데 시간이걸린 이유는 그 질문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할까. 인터뷰에서 사진을 찍을 경우는 기사의 첨부사진로 게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모노인지 양복인지를 애써 전날에 전화를 걸어 문의해 오면,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라고 당황해 하는 것이다. 이쪽은, 기사의 첨부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승낙했는데, 이야기하는 투로 봐서는, 마치 컬러 그라비아 촬영이라도 하는 것 처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우선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추운 날에는 기모노를 입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대는 거듭해 물었다. "기모노의 색상은 어떤 색깔입니까?"
"무슨 색깔이라니...이제와서 왜 그런 것을 묻는 겁니까? 나는 여배우가 아니니까... 내 같은 할머니 사진 따위 아무려면 어때서요."
내 서슬에 상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내 안에서는 분노가 응어리져 있다. 그 분노는 상대방의 진의를 모르는 것과 모르는 채로 화내버린 것에 대한 뒷켕김 때문이다.
다음날, 나는 뒷켕김을 가진 채 카메라맨과 인터뷰기자를 맞이했다. “어제는 화를 내어 죄송했습니다” 라고 사과한다. 계면쩍음을 감추려고 억지로 웃어 보였고, 어쨌든 인터뷰는 순조롭게 끝났는데, 사진을 찍는 차례가 되어 카메라맨이 이렇게 말했다.
"이전의 시노야마키신(篠山紀信1940~写真家) 씨가 짝은 사진 정말 훌륭했지요. 오늘은 그에 못잖은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그말을 듣고 나는 "아하" 하고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카메라맨은 자기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시노야마 씨보다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고 염원했다. 그 때문에 기모노인지 양복인지 어떤 색인지 물어, 미리 이것 저것 준비를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담당자는 그 취지를 나에게 설명해 쥤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카메라맨이 얼마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고 열정을 태우고 있는지 그 때문에 기모노는 무슨색인가를 물어 달라고 한다는 설명을 듣게 되면, 나는 화내지 않고 납득했을 것이다. "본분 열심"을,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여기는 나는, 기꺼이 어떤 색의 기모노를 입고, 겉옷은 이렇게 허리띠는 이것으로,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아무리 일본인은 열마디 말 중에 여듭만 말해도 통한다고는 하지만 한마디 말로는 열을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잡담으로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하니까, 젊은 세대에 속하는 남성이 말했다.
"아니, 그런 말 귀따갑게 들었어요. 그건 OX식으로 자란 세대의 특징이랍니다. 표현하거나 설명하거나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전후 국어교육의 잘못입니다.”
"흠, 그래요... 그런 것이군요." 라고 대꾸하는 나는 맥이 빠졌다. OX식으로 자란 세대의 특징입니다, 라고 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교육의 책임인 것이다.
"뭐야, 그렇게 말히는 태도는!" 라고 같은 세대끼리라면 나무랄 수 있고 그러면 네 하고 고친다. 그러나 지금은 OX식 교육으로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잔소리를 하는 쪽이 이상하다고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난처해 한다.
이 단절을 어떻게 메우면 되는지, 나로서는 모른다. 그사이에 우리 세대가 죽어 사라져 버렸을 때에는 OX식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끼리, OX식 민족 국가로 돌아가 OX식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겠다 라고 나는 자포자기 상태로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