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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동지점/ 외환계
✍️ 그때 그 시절: 광희동 지점 1부-3부 (첨삭 및 재구성)
Writer: 제갈종한
작성시간: 2019.06.20
■ 1부: 광희동 지점 부임과 결심:
정기 인사이동으로 인해 나는 대리 3호봉으로 광희동 지점에 부임했습니다. 점포장님의 계이동 명령으로 대리 2명, 외환차장 1명, 그리고 직원 6명으로 구성된 외환계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적은 수로 구성된 국제영업부 외환계(차장 1명, 대리 3명, 주임 십여 명)보다도 숫자적으로 적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자존심 상했던 인사부의 사령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순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집이 강동구 풍납동이어서 출퇴근 시간이 짧다는 점이 그나마 새 부임지에서의 위안이 되었습니다.
외환계 근무 첫날, 이차장(국제영업부 수출계 전임대리)으로부터 간단한 거래처 구성 현황과 현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더욱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출입 목표는 합해서 2백만 불이었고, 주요 업체들은 대행수입업체 S통상(북창동)과 수출업체인 당시 마스터 네고업체 부거래처였던 B무역, 그리고 대부분 영세한 십여 개의 로컬 네고 업체들이었습니다.
그중 다행스러웠던 거래처는 외환 수익의 3분의 2 이상을 가져다준 "호텔 신라"의 환전 실적이었습니다. 호텔 신라만 아니었다면 광희동 외환계는 적자 외환 점포로 당연히 진작 문을 닫았어야만 했습니다.
수출 실적을 맞추기 위해 이차장은 국제영업부에 자주 들러 기존 국제영업부 업체들에게 통사정하여 **불충분한 서류(사후 보완)**로 실적을 맞추곤 했습니다. 올라온 결제 서류들 다수량이 사후 보완 건이었기에 나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더욱이, 영세한 업체들은 무역의 첫걸음을 걷는 초보 업체들이었기에 은행에서 업무를 가르치며 서류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외환 초보 학부 출신 주임들도 애를 먹었고, 창구에서 한번 불평하면 다른 외환 점포로 거래를 옮겨버려서, 우리 실무자 모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친절을 베풀면서 악조건에서 근무해야만 했습니다.
옆자리 원 대리는 행원 시절 외환 경력 및 그간 시급 점포에서 달구어진 경력으로 인해 결제 및 업체 관리에 있어서는 초 베테랑급이었습니다. 우리 두 대리는 섭외 등 외출 시에는 점포에 남아있는 대리가 너 것 내 것 없이 올라온 서류를 결제하곤 했습니다.
원 대리는 금융 쪽 담당이었기에, 나는 금융 쪽은 문외한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주임에게 질의하면서 금융 서류를 결제했습니다. 또, 관련 직무서, 한은(한국은행) 관련 공문서 등을 수시로 참조하면서 그쪽의 부족한 금융 분야 실력을 쌓아 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외환 점포에서 내가 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달 후에, 몇 가지 중대한 업무 처리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습니다.
**** (은행 창구 위에서 이루어지는 악수 이미지 - 금융 거래 및 신뢰 구축을 상징)
첫째, 어차피 시급 점포는 원칙대로 결제가 안 되므로, 변칙을 쓰되, 기본은 원칙을 알고 존중하면서 변칙을 써야 한다. 원칙 없는 변칙은 사고와 직결합니다.
둘째, 외환관리법, 인증법은 절대로 변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상공부 위임 사항인 행장 도장으로 인증 결제 시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원칙을 존중한다. (본 건은 자주 직원들에게 나의 소신을 연수시켰음)
셋째, 나는 외환 대리 실무자로서, 신용 거래액은 차장, 점장 사항이므로 나는 단지 담보물 관리만 하자가 없이 서류를 챙긴다. 주지하다시피 외환은 전결, 승인 한도 내에서 사전 결제하고 사후에 점포장에게 결제를 올리며, 대외 신용장 수출 관련, 송금 수표 매입이나, 수입 신용장에 대한 선적 서류 도착 후 대불 발생 건은 완전히 보증 취급과 같은 사항으로 난 그쪽에 더 심도 있게 관리해야 된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더욱더 중대한 결심은 업무 취급 소홀로 내가 개인적으로 금전 "변상을 당하면 안 된다... 난 가정이 있다" 였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결심을 하고 나니, 불완전한 외환 서류도 사후 보완에 신경을 쓰면서 결제하니 날이 갈수록 마음의 평정도 되찾아 나아졌고 시급(?) 외환 점포에 적응도 잘 되었으며 근무 태도가 밝아지고 활기스러워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나는 이차장과 S은행에 거래하고 있는 퇴계로 2가에 회사가 있는 U실업에 섭외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스터 네고가 한 달에 미화 십만 불가량 되는 것을 알고 유치에 구미가 당겨 섭외 후에 이차장께 부거래 유치를 건의드렸습니다.
그 업체는 중동에 양말을 수출하는, 자체 공장이 없었던 임가공 계약에 따라서 수출을 이행하는 직원 7~8명으로 이루어진 중소 업체였습니다. 몇 주일 후에, 점포장의 결정으로 유실업이 광희동 지점에 부거래 외환 거래와 당좌 일반 거래를 개시했습니다!
아! 유실업이 광희동 근무 2년 내내 운명의 장난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 2부: 유실업과의 관계 심화와 '선 네고'의 압박:
유실업은 외환 거래가 시작된 후 곧바로 어느 토요일 오후에 단합 대회를 위해 책임자(대리 2명, 차장 1명)들을 초대했습니다. 회사 직원들과 함께 경기도 어느 한적한 호수가에서 즐거운 오후를 보냈고, 어둠 속에 귀가하며 제2차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가라오케 밴드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중략 - 디스코 춤과 젊은 시절 회상)
그해 가을 추석 때에는 유실업에서 놀랍게도 책임자와 창구 직원 전원에게 양복표 티켓 한 장씩을 돌렸습니다. 나는 입행 후 처음으로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아서 속이 편치 못해 한 달간 서랍 속에 티켓을 쳐 박아 두었다가 결국 무교동에 가서 옷을 한 벌 맞추어 입었습니다. 하지만 1년 후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쥐약표(?)처럼 쓰레기통에 처박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80년대 초반에 국제 유류 파동이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유실업을 포함한 모든 중소 무역 업체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수출 네고 담당인 나로서는, 옆에서 보아하니 C자금을 취급하고 나면 며칠 후에 유실업에서는 담보 물건을 은행에 하나씩 제공하는 거래 방식을 엿보았습니다. 즉, 원자재 구매를 위해 로컬 L/C를 발급해 주면, 은행으로 돌아온 것은 일부는 원자재를 구입하고 나머지 액수는 회사 명의로 부동산을 구입해서 은행에 담보물로 제공한 것입니다. 유실업 무역 업체가 부동산업체로 둔갑했나 의심스러웠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금융 담당이 아니기에 얼마의 여신 한도를 사용하는지 또 담보 내용도 지점에 얼마, 몇 개나 설정되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회사는 1층 당좌계에 돌아온 어음 막기에 고전하기 시작했으며, 그 여파는 마스터 네고 쪽으로 자금줄이 이동하기 시작했고, 선 네고에 나는 압박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 선 네고(Pre-Negotiation)란?
선화증권(B/L) 없이 은행 자금을 퍼주는 것!
대리 전결로 집행해서 유사시에는 변상하고 혼자 감옥 가는 것!
윗선에서는 은근히 해주기를 바라며, 공개적으로는 말을 못 함!
선 네고에 도장을 못 찍으면 외환 대리 자격이 없다고 함!
80년대에는 감독 기관에서도 묵시적으로 인정함.
해주고 나면 목에 쇠사슬이 업자 손에 걸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순서가 뒤바뀌는 것!
서류 보완 후 대내 서류는 하자를 달고 늦게 결제 올린 것!
회사 자금 담당 이차장은 아침 영업 개시 후부터 옆 보조 좌석에 앉아서 오후 3~4시까지 연달아 줄담배를 피우면서 눈치만 살피며 대기했습니다. 업무 방해(?)를 해서 시달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날! 나는 내 모든 책임 하에 3일 내 B/L 보완 조건으로 한다는 이차장의 굳은 구두 약속을 받아내고선, 결제하고 당좌계에 돌아온 교환 자금을 막아주었습니다. 즉, 나는 내 목에 스스로 쇠사슬의 족쇄를 채워야만 했었습니다.
3일이 지난 후에도, 회사는 서류 보완을 해주지 않았으며, 더욱이 또 다른 선 네고 서류로 당좌계 교환 어음을 막아달라고 아침부터 이차장은 서성거리면서... 속된말로 감언이설까지... 말하면서... "우리 사장님의 대학 동기생이 이재국에 있어서 내가 원하면 미주 지역으로 해외 발령을 내주겠다"고 유사장이 말했다고까지 했습니다.
나는 대꾸도 안 하고 같은 말만 입이 마르도록 했습니다. "보완 서류 가지고 와!" "당신은 사나이로서 약속을 했잖아!" 그때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지만, 일반 당좌계에서 업체한테 당하고 남에게 말 못 하고 후회한 많은 담당자들을 보아왔습니다.
한번 자금을 틀어 막아주어서... 다음에 또 교환 들어와서 어제 막아주었던 본전 생각나서 부도 대전 못 작성해서 또 빌려서 2차 막아주고 3차에 부도 내어서 종국엔 되로 막을 것을 말로 막아서 막대한 변상을 당했던 당좌계 직원들의 처절한 실정을!
보완 서류 완결되면 또 선 네고 다시 실행해주는 이 방식이 내 방식이었습니다! 보완 서류 없이 다시 선 네고는 완전히 밀린 방식이며 은행이 물려, 죽습니다! 보완 서류 약속 못 지킨 업체의 믿음을 어찌 믿고 또다시 선 네고를 해주겠습니까?
그날, 나는, 유실업 수출 담당 이차장을 따돌리면서, 혼자 오후 이른 시간에 점포 밖으로 나와서 버스 정류장의 전화 통에서 주임에게 전화해서 "먼저 조기 퇴근하니... 내 뒷 서랍 열쇠를 잠그고 내일 출근해서 나에게 키를 주라"고 말을 남기면서 천호동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외환 이차장이 외환 대리를 집합시켜서 회의 중에 날 호되게 나무라지 않겠습니까! 듣고만 있다가 나도 대꾸하면서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싫으면 계이동 시키면 될 걸요!!" 그는 "알았다"고 하면서 회의는 끝났고, 근무 중에 옆 원 대리가 어제 선 네고 서류에 결제를 해서 부도를 막아준 것을 나중에 나는 네고 주임을 통해서 알았었습니다. (그 선 네고 서류는 영원히 보완이 안 되어서 나중에 원화 대전으로 매입 외환 입금 기표 처리했으며, 후에 감독원의 조사 대상이 되었음)
그 주 마지막 토요일 아침에 나는 일찍 출근해서 서류 정리 중에 김 점장님께서 잠시 나 좀 보자 하시면서 점장실로 호출해서 들어갔더니... "내일 일요일 날 11시에 반포 우리 집으로 오라! 이 사항은 극비다! 뉘한테도 말하지 말라" 하면서 점장님 집 주소를 써서 주셨습니다. 며칠 전에 이차장과 언성이 높게 다툰 사항을 점장께서 모두 옆 점장실에서 듣고 계셨음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은행 근무 18년 동안 한 번도 소속장들 집에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남들은 다들 연초에 인사하러 잘들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나는 괜히 부족한 직원들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분 집에 공적이나, 사적으로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내일 일요일 날 김 지점장님 댁에 방문할 것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사가야 하는가 한동안 고민하면서 음료수 주스 한 병을 사 들고 다음 일요일 날 반포동 점장 집 아파트를 향해서 풍납동에서 좌석 버스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 3부: 점장님과의 독대와 금융 책임자로의 계이동:
난생처음으로 소속장 집 방문과, 그리고 한 번도 한국에서 아파트 내부 구경을 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김 점장님 댁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내내 버스 창가를 보면서 궁금한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내 집 풍납동 집은 삼표골재 뒷문 바로 옆에 위치한 37평형 단독 주택이었기에 일 년 내내 골재 모래 먼지를 먹고 살았었고, 일 년 내내 장독 위에 석회 가루 흰 먼지가 뿌옇게 깔렸었습니다.
더욱이 전체 방 4개 중 방 2개는 각각 따로 전세를 주어서 안방과 골방에서 3딸과 우리 부부가 기거하면서 은행 주택 대출 이자와 적금, 보험금을 납부하고 나면 매달 적자로서 외상으로 쌀, 연탄을 구입 후, 다음 월급에 변제하곤 해서 생활고에 매우 시달려야만 했었습니다.
어느 날엔, 동네 친했던 이웃 부인이 우리 집에 와서 "저기 건너편 국민은행 대리 집은 항상 대형 냉장고에 고기, 생선, 과일 등이 꽉 차 있는데 우리 집은 왜 그리도 초라하고 냉장고가 비어있느냐?"고 핀잔을 주고 갔다며 울 여보가 나에게 울먹이며 이야기를 해서 나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었습니다.
나와 비교해서 지점장 댁은 얼마나 부유하게 살까가 무척 궁금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점장님 댁에 도착하니, 사모님과 자녀들은 외출해서 보이질 않았고, 점장님께서 "어서 오너라"고 문을 열어주시며 응접실로 안내해주셨습니다.
응접실엔 미리 방석 두 개가 깔려있었고 그 중간에 작은 상 위에 엽차 잔과 흰 색깔로 막 데운 주전자가 놓여있었습니다. 점장님께서 엽차를 따라주셔서 나는 감사히 한 잔 마시면서 주위를 옆눈으로 살펴보니, (집 구경을 시켜주지 않았음) 가지런히 정리된 가구에다가 서민적인 장식에 약간은 실망했었습니다. 한마디로, 생각보다는 너무 검소하게 사신다고 생각했고 별로 큰 평수의 아파트는 아니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엽차 3잔을 근 한 시간 동안 마시면서, 점장님은 나를 편하게 대화 상대로 하시면서, 전반적인 외환 거래처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하나하나, 업체별로 위험도 측면에서 나의 생각을 묻곤 하셔서 나는 솔직하게 내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20여 개의 광희동 외환 거래처를 생각해 가면서 (모범 답안 준비 없이) 문제점들을 즉석으로 생각하며 말씀을 올렸습니다!
김 점장님께서는 S대 출신에 은행 경력 및 외환 경력이 월등히 높고, 연배이시고 일개 야전군 대대장님으로서 소위 초년생인 신삥 소대장한테 허심탄회하게 독대하면서 의견을 청취하시고, 야전 전투를 승리로 지휘하시려고 하시는 그 겸손함에 나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대대장님은 개인보다는 먼저 단체를 위하여, 단체보다는 더욱이 조직을 위해서, 투철하고 사고 대출 없이 점포를 하자 없이 운영하실려고 하시는 점장님의 지론에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위풍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나는 김 점장님께서 외환 책임자 미팅에서 항상 말씀하셨던 주의 권고 사항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대리라고 해도, '내가 지점장이다'는 Mind로 또 '내가 Owner다'.. 그러니, 업체 섭외 시에는 심지어는 그 업체의 화장실에 들어가서 화장지가 잘 정리되었는가.. 또 담배꽁초가 바닥에 널려 있나.. 하나하나 체크해서 그 업체에 대한 정보로서 마음에 간직하고 평가를 해야 한다!!!"는 점장님의 평소 말씀이 나는 아직 오늘까지 내 귀에 반향하며, 나는 평소 근무 시에는 그대로 실행하며 전투 대대장님께 목숨을 걸고 전투에 승리로 충성하자고 그 당시에 맹세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실업에 대해서 나의 관심과 업체에 대한 평가를 솔직하게 말씀드렸으며 요주의 업체 1위라고만 말씀드리고 대다수의 업체가 유류 파동으로 언제 넘어질지 모르니.. 나도 정신 차리고 근무하겠다고 마지막으로 말을 올리고 점장님 댁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후, 몇 주 후에 나는 외환계 대리 계이동으로 금융 책임자로 명을 받아서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금융과 외자 관련 업무를 배우게 되었었습니다! 금융 업무는 대 한국은행의 업무 지침서가 주종이었고, 담보물에 대한 사항으로 크게 구분되었었습니다.
나는 행원 시절에 대부 시다(보조)는 몇 점포에서 해보았지만, 실제적으로 주임 업무는 해보지 못해서 처음 몇 달간은 외환 이차장은 나의 업무 실력에 분명히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이차장은 국제 영업부 외자 통이 아니셨습니까!
곧바로, 나는 아래층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모든 업체들의 채권 서류를 들고 나와서 시간 중에 내 나름대로 한 장씩 한 장씩 종이 위에 모든 업체의 담보 현황 내역과 기일 도래. 보험 만기일, 채권 서류 만기일, 신용 보증서 만기 도래, 신용 평가서 내용 등을 부기하면서 일목요연하게 내 나름대로 보기 좋게 파일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 그중에서, 나는 유실업의 담보 내용을 보고 심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부 승인 7억에 담보 5억, 신용 2억이라... 담보는 무려 보증서 포함해서 물건이 16개나 담보로 제공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임야, 영동의 아파트, 주택, 빌라 등으로 알짜 담보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처럼 나는 유실업에 대해서는 비상 5분 대기조로서 언제 비상이 걸릴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며 마음을 굳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후에는 금융 업체로서는 유일하게 자체 공장을 가리봉동에 소재한 무역 B업체가 또, 흔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공원 근 60여 명의 섬유 업체로서, 광희동이 부거래인 외환 업체였습니다. 금융이 만기가 도래 되어서 연체가 발생하면 벌써, 그 업체는 경종을 울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연체 중에는 모든 로컬 거래의 개설이 중지 되어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고,.. 자금의 흐름이 일단 막히면 자체 회사 현금 자금으로 연체 금융을 막아야 하는데 (무역 업체는 네고해서 금융 결제를 해야 함이 정상적임) 현금으로 금융을 막는 자체는 벌써 무언가 회사가 잘못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를 방문해서 보니.. 회사는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수출 네고의 지연으로 인해서 연체가 발생된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그 회사는 일단 한 번의 고비를 넘기면 소생하겠다는 확고한 판단이 서고 김 이사와 진솔한 대화 중에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편법을 써서라도 살려야 한다..
걸린 신용 대출이 이 문제가 아니고 종업원들의 미래가 눈에 떠올랐습니다!
나는 로컬 L/C 신청서를 받고 발행하고서 직접 들고서 (어제 날짜로 소급해서) 김 이사와 함께 동대문 모 지점으로 가서 수혜자 명의로 매입 의뢰해서 그 회사 통장에 넣어서 자금을 현찰로 인출해서 마대로 현금을 이송해 와서 곧바로 지점의 출납에 소급해서, 어제 날짜로 입금하고, 연체를 결제시켰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007 작전으로 B회사를 소생시켰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 작전을 지시하지 않았으며 나는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단독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김 이사는 감사하다며,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준 것을 나도 같이 마시면서 "앞으로 잘 하시라"고 응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필히 회사에서 촌지를 주는가 본데.. 나는.. 절대로.. 죽어도 업체하고는 돈(쥐약) 거래는 하지 않은 것을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인간적인 마음만 통하면 나는 항상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 나는 자주 문제 외환업체라고 생각되면 회사 실무자와 퇴근하고 자주 1차로 소주, 2차로 맥주 등을 많이 했습니다. 왜냐면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소주에 맥주를 타면 나중엔 횡설수설해져서 회사의 비밀 이야기가 무언중에 튀어나오고 해서 나도 술 취해 미친 척하면서 모두 귀담아들어서.. 그 회사의 정보로 이용을 했기에 과하게 늘 원치 않은 자리에 합석했었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은행의 안전 여신을 위하여 정보원 노릇을 했었습니다.
그 변칙적인 사건이 있는 후론 B회사는 정상적으로 잘 가동 되었으며, 지점에 일반, 외환에 손익면에서 기여도가 높았었습니다.
몇 주간 조용히 잘 나가던 유실업이 드디어, 연체 발생의 위험에 직면하면서 외환계는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외환계 책임자 미팅 시간에 이차장께 건의 올렸습니다. "저의 사견 생각으로는 절대 유실업의 금융 이자 부담으로 인해서 회사가 지탱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수출 실적이 급상승하는 것도 아니니, 사장님께 종용해서 은행에 들어온 담보물을 일부 처분해서 금융을 변제해서 금융 비용을 축소하면 회사가 소생할 여지도 있으니 어떻게 생각하신지?
아니면, 유 회사의 생존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보증 포션을 늘려주어서 여신 확대를 하시던지?" 하면서 감히 건의 올렸습니다!
나의 솔직한 결론이건대.. 수출해서 그 당시 어느 대한민국 무역 업체가 채산을 맞추겠느냐? 그래서 유실업 사장은 부동산을 많이 구입해서 은행에 담보로 넣고 상승한 차액을 몇 년 후에 노리는 술수를 경영 전략으로 쓰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제안은
결국 무시되었고.. 이럭저럭 회사는 연체를 현금 결제하더니... 몇 주 후에는 거액 금융액이 날짜가 도래해서 선적할 물건은 없고.. 진짜 위기가 와서.. 윗분들은 마지막 부도를 낼 작정으로 결심을 해서 (로컬 개설 중지) 나도 초긴장하며 우리는 대기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는 본부 승인 대출로서 보증이 2억이 걸렸어도 전행이 아니고 승인 사항이니 점장 변상의 책임이 없다고 쉽게 유사시에는 부도 결정되는 것이 은행의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이점에서 나의 판단과, 경영 소신은 달랐습니다. 승인 대출도 불실로 물리면 신용 대출액이 은행에 손실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음날 아침,
책임자 미팅 시간에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유실업에 대한 마지막 나의 해결 카드를 건의 올렸습니다!
■"회사도 살고, 우리 은행도 사는 (보증금 회수) 길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지금 부도 내면 회사도 죽고 은행도 2억이 물린다.
말하자면 둘 다 죽는다. 그러니, 둘 다 사는 길을 찾고 그 기간은 앞으로 60일이 걸립니다!!"■
외환계 이차장은
무척 궁금해서 "어서 말해 보라"하시며 날 다그치면서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 다음 편인 마지막 편을 기대하십시오.
■그당시 외환계
금융책임자 제갈대리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