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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2차 예언
민 23:13-26
13 발락이 말하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
14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
15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뵐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니라
16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사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17 발람이 가서 본즉 발락이 번제물 곁에 섰고 모압 고관들이 함께 있더라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18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20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21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22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의 힘이 들소와 같도다
23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24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
25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
26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
민 23:13-26 /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발락이 발람에게 다시 부탁하였다. `자, 다른 곳으로 가서 저들을 살펴봅시다. 그러면 저들이 또 달리 보일 것이오. 그곳에서는 저들이 쳐놓은 진영이 다 보이지 않고 일부만 보일 것이오. 제발 이번만은 저들에게 화가 내리도록 저주를 빌어주시오. 부탁입니다.' 14) 그러고는 그를 데리고 소빔으로 가서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들은 거기서도 일곱 제단을 쌓고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 한 마리씩을 바쳤다. 15)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바친 이 번제물 곁에서 기다리시오. 내가 또 가서 여호와를 뵙고 오리다.' 16)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나타나시어 발락에게 전할 말을 이르셨다. 17) 발람이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발락은 번제물 곁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모압 지도자들도 그 곁에 함께 서 있었다. `대체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더이까?' 하고 발락이 묻자 18) 발람이 또 이렇게 노래를 지어 읊었다. `발락이여, 일어나 들어 보시오. 십볼의 아들이여, 내 말에 귀기울여 보시오. 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라. 거짓말을 떡 먹듯하는 사람이 아니시라.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라. 쉽사리 생각을 고쳐 먹는 인간이 아니시라. 약속하신 것 무엇이든 기어이 지키시고야 마시는 분. 말씀하신 것 무엇이든 반드시 실천하시고야 마시는 분. 20) 복 빌라 그분 말씀하시니 나 어찌 그 말씀 뒤로 하고 저주를 퍼부으랴! 21) 야곱에게 무슨 화가 닥칠까? 이스라엘에게 무슨 불행이 밀어 닥칠까?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들과 함께 계시니. `여호와 우리의 왕이시라' 외쳐 대는 그 소리 하늘을 찌르는구나. 22) 애굽에서 저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 힘차게 내달리는 들소와 같아라. 23) 그 어떤 마술이 있어 야곱을, 그 어떤 주술이 있어 이스라엘을 쓰러뜨릴 수 있으랴? 사람마다 이스라엘 바라보고 뭇 백성 입모아 `하나님 하신 일 엄청나구나' 그렇게 말하는구나. 24) 아, 저 무리가 암사자같이 불끈 일어나는구나. 수사자같이 힘차게 일어나는구나. 움켜 쥔 것 먹어 치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구나. 잡은 먹이의 피를 마시지 않고는 그 속이 풀리지 않는구나.' 25) 그러자 발락이 발람에게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저주를 퍼부어 달라고 하였더니 끝내 내 청을 들어주지 않는군요. 정 그러시면 저들에게 축복만은 하지 마시오.' 26) `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소이다.'하고 발람이 대답하였다.
발락이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저주로 바꾸려고 예언의 위치를 바꾸었으나 한결같은 하나님의 축복의 예언을 듣고 크게 좌절합니다.
2차 예언 준비(13-17) 발락은 발람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예언의 장소를 바꿉니다. 1차 예언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의 많은 인구를 보고 주눅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발락은 2차 예언을 위해 이스라엘 진영의 끝자락만 보이는 곳으로 발람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칼에 직면했던 발람은 두려운 마음에 감히 임의로 예언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2차 예언(18-24) 발람의 2차 예언은 발락을 향하여 꾸짖는 내용입니다. 발락은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려 하였으나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발락의 이름을 호명한 후 자신의 속성을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후회가 없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복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며, 하나님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합니다. 또한 이 예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핵심 구절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입니다(21). 이스라엘이 반역하지 않는 한, 곧 언약을 깨뜨리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왕과 인도자가 되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롬 8:33-39).
발락의 실망(25-26) 발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했습니다. 그는 고작해야 “네가 저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가서 그들을 축복하지는 말라”고 발람에게 부탁할 뿐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발람은 하나님께서 입에 넣어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비록 발람이 불의의 삯을 위해 모압 왕을 만난 것은 잘못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입에 넣어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은 그나마 잘한 일입니다. 사역자들은 청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인위적인 메시지를 꾸미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요 17:3). 당신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인도 선교사로 유명한 윌리엄 캐리는 본래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었을 때 일부 사람들이 “당신은 옛날에 구두 짓는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평가하려고 했으나, 그는 "아닙니다. 저는 구두를 짓지 못하고 겨우 수선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의 은혜를 의지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둘 때 시편 51편 1절을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 설 교 >
축복하시는 하나님
민수기 23:13~26 / 이상우 목사
지난 월요일 저녁 무렵에 서재에 있는데 큰 아들 녀석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큰 아들 녀석은 한 번씩 필요한 용건이 있으면 서재에 있는 저에게 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 녀석의 표정을 보니까 뭔가 어려운 부탁을 할 것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습니다. 소파에 앉더니 미안한 마음에 그러는지 큰 소리로 말을 못하고 작은 소리에 계면쩍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말을 들어보니 친구들하고 1박 2일로 놀러 가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이틀 동안 제 차를 빌려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안 하던 공부를 한다고 자기 나름대로 고생도 했고, 또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신 집에 있으면서 제가 바빠서 못하는 허드레 일들을 시켜 왔기 때문에 수고에 대한 보상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가급적이면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거리도 전라도 무주이면 너무 멀어서 위험부담도 있고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일단 차를 빌려 주는 것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대신 다른 교통편을 이용해서 갈 수 있도록 교통비와 필요한 경비를 주기로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없는 돈에 아들 녀석이 요구한 경비를 하나도 안 깎고 그대로 주었습니다. 마침 지갑에 요구하는 대로 줄 수 있는 돈이 있었습니다.
사실 제 형편을 생각하면 아들 녀석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저에게는 무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복합적으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우선 아들이 아버지에게 뭔가를 요구하면 아버지인 제 마음에는 뭐든지 내가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다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은 힘든 형편에도 최선을 다해서 저를 길러 주신 부모님의 사랑이 저에게 깊게 새겨져있기 때문에 저도 자식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 녀석이 아버지에게 뭔가 요구를 할 때에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아버지가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를 믿어주는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 기대감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들 녀석은 경험해 보고 누려보도록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제 곧 대학에 입학을 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한번 멋지게 바람을 쐬고 와서 열심히 공부를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보는 앞에서 지갑을 열어서 아들이 요구한 액수대로 여행 경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제 지갑은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는데도 그걸 받아가지고 서재를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를 가슴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두 가지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아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되어서 행복했고, 또 하나는 그걸 받아들고서 마음속으로 좋아라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제 마음도 왠지 모르게 행복해 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저의 마음은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이요 곧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인 민수기 23장 13~2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인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을 마음껏 축복하시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실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민수기 23장은 22장부터 24장까지 하나의 묶음으로 읽고 이해해야 더 잘 이해가 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 접경지대인 여리고 건너편 요단강 가 모압 평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 애급한지 40여년의 세월 끝에 이제 목적지인 가나안 땅 코앞에 도착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숱한 사건과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출 애급의 대역사가 그렇고 추격하는 애급 군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홍해 한 가운데 수장되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홍해 한 가운데 마른 땅으로 건넌 것이 그랬으며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 또한 그랬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신 일이 그랬으며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일이 또한 그랬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신 사실이 그랬으며,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을 주셔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사실이 또한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이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하나님과 세우신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전체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불평’이라는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은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였던 이방 백성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원망과 불평의 불신앙적인 모습은 금방 백성들 가운데 전염이 되어서 그들마저 원망하며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진 끝을 불로써 사르셨던 ‘다베라’ 사건부터 시작해서, 만나로 그들을 배불리셨더니 고기를 안 주신다고 불평함으로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주셔서 먹게 하실 때에 그들의 불평의 대가로 임한 징벌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형벌을 받았던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 곧 ‘탐욕의 무덤’ 사건이 그들의 과거를 아프게 만드셨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일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이인 미리암이 모세의 지도력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했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 정탐에 투입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2명만 제외하고 모두가 부정적인 불신앙적인 보고를 하게 되면서 온 백성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원망과 불평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하나님의 재앙으로 죽게 하시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레위 자손들의 후손들 가운데 고라가 중심이 되어서 일으킨 반역 사건, 곧 고라 일당 250명의 반란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 모두가 하루아침에 죽게 되는 무서운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가데스 므리바에서는 다시금 백성들이 마실 물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자 지도자 모세가 격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가나안 땅 입국 불허 처분을 받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는 그들의 길이 험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또다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많은 백성들이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가게 되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불 뱀에 물린 자마다 모세가 장대 높인 매단 놋 뱀을 쳐다봄으로써 살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계속적인 패역함의 역사의 흐름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기 위해서 그들 앞의 장애물들이었던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의 공격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심으로써 가나안 땅 근방에서 첫 번째 승리를 안겨 주심으로써 용기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화친제의를 거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행 여정을 가로막은 아모리 왕 시혼을 물리쳐 주셨으며, 여세를 몰아 가나안 땅을 향한 진군을 계속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공격해 왔던 바산 왕 옥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고 승리를 안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베풀어주셨던 은혜와 사랑, 축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그만 어려움에도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적인 행동을 보였던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연거푸 승리를 안겨주심으로써 그들을 무조건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은혜요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더 놀랍고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태도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파죽지세로 대적들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향해서 진군해오자 이들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은 모압 왕 발락이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점쟁이 인 발람이라는 이방 신의 선지자를 불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저주하도록 했는데 오히려 발람 선지자가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내용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파괴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발락 왕의 악한 계획을 분쇄하시고 한결같이 마음껏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동안의 불신앙적인 행동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그들을 축복하시기를 즐겨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발락 왕은 어떻게 해서든지 발람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해서 위기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했고, 발람 선지자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백성을 감히 저주하는 일을 시도하고자 하나님의 동의를 구하는 일을 네 번씩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22장 12절에 분명히 밝혀 놓았는데,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본문 19절 말씀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방의 신들은 인간의 요구대로 들어주며, 따라주는 신이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이행하시며, 자신의 백성들에게 한결같으신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가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인 줄로 믿습니다.
한편 성경은 네 번에 걸친 발락 왕과 발람 선지자의 저주 시도를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의 백성을 마음껏 축복하시는 기회로 삼았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방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며,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위기 상황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축복하심으로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며 좋아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허물과 패역한 삶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마음껏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며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변 환경이 어떠하든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신실하신 사랑에 의해서 결국은 모든 시련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된 사실을 감사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엇을 가장 후회하는가?
민 23:19 / 김원효 목사
인생을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일까요? 온라인에 보니 남녀 세대별로 잘 정리해놓은 것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먼저 남자 1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엄마한테 대들지 말 걸 3. 친구랑 다투지 말 걸 4. 게임 끊을 걸 5. 욕 배우지 말 걸 / 남자 2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엄마 말 좀 들을 걸 3. 그 여자 잡을 걸 4. 돈 좀 아껴 쓸 걸 5. 사고치지 말 걸
남자 3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돈 모아 집 사둘 걸 3. 그 회사 그냥 다닐 걸 4. 그 여자 잡을 걸 5. 아랫사람에게 잘해줄 걸 / 남자 4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술 어지간히 먹을 걸 3. 땅 좀 사둘 걸 4. 그 여자 잡을 걸 5. 아내한테 못된 짓 한 것 / 남자 5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겁 없이 돈 날린 것 3. 아내한테 못된 짓 한 것 4. 인생 대충 산 것 5. 부모님께 효도할 걸
남자 60대입니다. 1. 돈 좀 모을 것 2. 술 줄이고 건강 챙길 걸 3. 아내한테 못된 짓 한 것 4. 배우고 싶었는데... 5. 노는 것 좀 배워둘 걸 / 남자 70대입니다. 1. 아내 눈에 눈물 나게 한 것 2. 노후자금 모아둘 걸 3. 배우고 싶었는데... 4. 아들 공부 더 시킬 걸 5. 술 줄이고 건강 챙길 걸
이번엔 여자 1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엄마한테 거짓말 한 것 3. 친구랑 싸우지 말 걸 4. 학교 잘못 고른 것 5. 좋은 친구 사귈 걸 / 여자 2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엄마 말 좀 들을 걸 3. 친구랑 싸우지 말 걸 4. 더 화끈하게 놀 걸 5. 사표 낸 것 / 여자 3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이 남자랑 결혼한 것 3. 전공 선택 잘못한 것 4. 결혼 후 직장 그만 둔 것 5. 부모님께 잘할 걸
여자 40대입니다. 1. 공부 좀 할 걸 2. 아들 교육 신경 더 쓸 걸 3. 내 인생 즐겨볼 걸 4. 결혼 잘못 한 것 5. 부모님께 잘 할 걸 / 여자 50대입니다. 1. 아들 교육 신경 더 쓸 걸 2. 결혼 잘못 한 것 3. 공부 좀 할 걸 4. 남편 바가지 긁은 것 5. 돈 좀 잘 굴릴 걸 / 여자 60대입니다. 1. 아들에게 더 잘할 걸 2. 배우고 싶었는데... 3. 돈 좀 모아둘 걸 4. 이 집안에 시집 온 것 5. 부모님께 잘할 걸
여자 70대입니다. 1. 배우고 싶었는데... 2. 먼저 간 남편한테 잘해줄 걸 3. 돈 좀 모아놓을 걸 4. 부모님께 잘할 걸 5. 평생 고생만 한 것 / 이를 통합해보면 1위. 공부 좀 할 걸 2위. 부모(배우자, 자녀)에게 잘할 걸 3위. 돈 좀 모아둘 걸 4위. 배우자 잘못 고른 것 5위. 건강 챙길 걸 순서입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가장 후회되는 것 5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좀 다르겠지만 최근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있습니다. 호주의 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 둔 환자분들을 돌보신 한 간호사가 쓴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위. 남들을 위한 삶이 아닌 내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어야했다. 2위.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는데... 3위. 내 감정을 표현하는 용기를 가졌어야 했다. 4위. 친구들과 조금 더 자주 연락할 걸 5위. 내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해줘야했다.
물론 이 내용은 호주라고 하는 서양 사람들의 마인드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의 마인드하고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즉 서양 사람들은 일단 자기 자신의 행복 추구에 초점을 맞추고 후회를 하는 반면 한국 사람들은 가족들과 타인과의 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는 후회 중에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걸” 즉 하나님 사랑에 대한 실천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는 “내가 만나고 대했던 사람들에게 좀 더 잘해줄 걸”입니다. 즉 이웃 사랑에 관한 실천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저 역시 25살에 군대 제대 후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뼈저리게 후회되는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좀 더 일찍, 좀 더 열심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 동안 하나님이 안 좋아하는 일들만 많이 했구나!”
그래서 그 후 제가 다시는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누구보다 전도에 힘을 썼고, 누구보다 기도에 열심을 냈고, 누구보다 봉사에 열심을 냈습니다. 한 마디로 열심이 특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청년 시절을 뒤돌아보면 후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30살에 주의 종이 되어 이제 33년이 지났습니다. 누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제가 어떻게 대답할까요? “목사님, 솔직히 목사님이 되신 것에 대해 후회를 해보신 적이 있지 않았나요?” 이에 대한 저의 솔직한 대답은 한 번도 후회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이 다시 저를 목사로 불러주면 “주여,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고 크게 절하며 기쁘게 아멘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있습니다. 제가 주의 종으로 사역하면서 부족한 점이 많아서 늘 하나님께 죄송하고, 성도님들에게도 미안하고, 가족들에게도 미안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저를 주의 종으로 부르신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글쎄요. 끝까지 가봐야 되지 않겠어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세우고 난 후 나중에 후회하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상15:11절에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물론 사울은 처음에 겸손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난 후 교만에 빠졌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회개를 촉구했지만 도리어 변명을 하며, 나중에는 사무엘 선지자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합한 사람인 다윗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으로 인해 크게 근심을 하며 온 밤을 새워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삼상15:11)
여러분, 기독교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괜찮게 출발했다가 나중에는 끝이 안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육체로 마치는 사람입니다. 즉 신앙을 잃거나 변질이 되어 타락하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후회가 되시겠습니까?
오늘 각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시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에이, 그러게 좀 더 잘해야지! 야- 김원효! 좀 더 열심을 내봐. 잘 할 수 있잖아.”
여러분,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듯이 저희 교회도 지난 2년 동안의 COVID-19 기간을 지나면서 교회의 여러 성도님들이 신앙을 잃고 교회생활과 믿음생활을 포기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의 열심이 식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들어보니 지난해에 제가 어느새 62세가 되었고, 올해는 벌써 63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제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목회를 마치면 내가 평생에 후회가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게 힘을 주시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를 불러주신 하나님이 저 때문에 후회를 하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마지막 힘을 쏟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굳이 후회되는 일들을 알아보는 것은 그런 후회스런 일들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자는 의도입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보다 보람 있게 살아야지, 후회하며 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또 다른 사건이 나옵니다. 창세기 6:5-6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공동번역 : 후회하시며 마음이 아파하셨다.)”
이를 좀 더 쉽게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을 땅을 치며 통곡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자식이 살인죄 같은 중한 죄를 짓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부모의 참담한 심정과 같습니다. 그때 부모는 속으로 이런 후회의 말을 하게 됩니다. “아- 차라리 내가 저 자식을 낳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마음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 내가 인간들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음 그 자녀들인 인간들이 가장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각종 죄를 날마다 지었습니다. 그 결과 행복은커녕 노아의 대홍수 심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고로 하나님의 마음은 매우 슬픕니다. 너무나 안타까워 죽을 지경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행복해야할 저와 여러분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심판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면 하나님은 매우 슬픕니다. 후회가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드리기 위해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심판을 당해 지옥에 가야하는 불신자들을 목숨 걸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고 좋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종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도 후회를 하십니까?” 물론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결코 후회를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본문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23:19) 그리고 로마서 11:29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 구절 외에도 5번이나 더 그러니까 총 7번에 걸쳐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삼상15:29, 시110:4, 렘4:28, 겔24:14, 히7: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라고 무려 열두 번이나 나옵니다.(창6:6, 출32:14, 신32:36, 삿2:18, 삼상15:11, 삼상15:35, 삼하24:16, 대상21:15, 시106:45, 렘26:19, 암7:3-6, 욘3:10)
“아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일곱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반면 열두 번이나 ‘여호와께서 후회하셨다’고 나오니 이게 웬일입니까? 왜 이렇게 성경은 모순이 많습니까?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겁니까?”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줍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라는 것은 마음이 비통하고 매우 슬프다는 감정의 표현이고, 성경 번역상의 문제이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처럼 판단미숙과 계산착오로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하여 뉘우치고 후회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결론입니다. 이전의 후회되었던 일들을 돌아보면서, 혹은 남들이 후회되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각자는 앞으로 후회될 일을 줄여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로 인해 부모님이, 배우자가, 하나님이 슬퍼하고 후회하도록 하면 안되겠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연약무지한 존재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크게 후회될 일이 없기를, 그리고 후회될 일을 줄이면서 보다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불변성)
민 23:19 / 최영기 목사
어제 우리는 팔월 한가위 추석을 맞이했습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이후 가장 강력한 태풍으로 알려진 '루사'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5조원이 넘는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아직도 재고 쌀 처리를 위해 행복한 고민을 해야 하는 복된 나라임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 대한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아니 하사, 반세기 동안 허리가 동강난 채로 극한 대립을 해 오던 한반도에,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을 위한 착공식이라는 엄청난 추석 선물을 안겨 주셨으니,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아니할 수없습니다. 처음에는 조그만 구멍으로 새던 물이 나중에는 방축을 무너뜨리고 제방을 삼켜 버리는 것처럼, 금명간 뚫릴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의 구멍을 통해서, 삼팔선이 붕괴되고 휴전선이 완전히 무너지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6주째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있고, 하나님을 알아야 나 자신을 바로 알 수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영생에 이를 수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본질-1)영이신 하나님 2)인격적이신 하나님
3)유일하신 하나님 4)자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1)거룩하신 하나님 2)영원하신 하나님
3)전지하신 하나님 4)전능하신 하나님
5)무소부재하신 하나님 6)공의로우신 하나님
7)사랑의 하나님
오늘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에 비하여 우리 인생은 너무도 변화가 무쌍합니다. 그래서 作心三日이란 말이 있고, 인심은 朝夕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0하러 갈 때의 마음이 다르고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변심하기 잘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들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변덕을 아시지요? 그는 다급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장 애굽에서 떠나라고 했다 가도, 위기만 넘기면 금새 또 강퍅하여져서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곤 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 '변치 않는 친구를 구하려거든 무덤으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나와 친구의 우정) 그러니 친구도 변하고 우정도 변합니다. 여자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도 같고, 바람에 날리는 새털과도 같다는 노래도 있습니다. 東家食 西家宿이란 말을 아십니까?
남자의 변화 단계란 유머가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1)초반기-'내가 지금 막 걸려던 참이었는데..'
2)진행기-'지금 어디야..? 우리 만나자.. '
3)과도기-'내가 나중에 다시 걸면 안될까..?'
4)권태기-'넌 꼭 사람 바쁠 때 전화질이냐..?'
5)말년기-'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 샘으로 연결됩니다`
<여자가 감기에 걸려서 콜록거렸을 때>
1)초반기-'여기 약 지어 왔어 자기야. 헉..헉...'
2)진행기-'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 흑...'
3)과도기-'그러게 왜 그렇게 싸돌아다녀!'
4)권태기-'야...야! 음식에 콧물 떨어지잖아!'
5)말년기-'아까 니가 입댄 컵이 어떤 거냐?'
변해버린 사랑에 눈물짓고, 배반당한 사랑에 몸을 떠는 자 그 얼마입니까? 이처럼 세상은 우정도 변하고 사랑도 변합니다. 유행도 변하고, 사조도 변하고, 이데올르기도 변합니다. 공산주의의 몰락을 보십시오. 길제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라고 읊었지만, 노산 이은상 시인은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말 옛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하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혹은 이웃에게 실망을 느끼는 것 중에 한 가지를 들면, 그것은 바로 '변덕'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변덕이란 것은 우리의 사회에 불신과 위선의 풍조를 만드는 제일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본질과 성품, 의지에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원불변의 존재이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미쁘시며 신실한 분으로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함없는 하나님을 인생들이 영원히 의지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변치 않으신 이유
1)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불변한다는 것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동은 스스로의 내적 요인과 외적인 힘에 영향을 받을 때 발생합니다. 가령 인간의 변덕의 원인을 살펴보면, 그 자신의 내적인 강박성 혹은 외부의 압력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며, 더 중요한 원인은 자기 스스로 어떤 일에 흥미를 잃는 데서 변덕이 생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유한하며 상대적인 존재이기에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요, 창조주요, 절대자이시기에 어떤 외적인 요인과 영향력에도 전혀 자유로우시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2)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잠 19:21에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인생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변화와 변혁은 필수적입니다. 인간이 성장 발전해 나가는 데는 때로 긍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그러한 변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이 수시로 바뀔 때도 있습니다. 역사의 가치관, 시대의 풍조도 사람의 변화에 따라 자주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시행착오도 많이 범하게 됩니다. 정부의 정책-교육 정책? 인구. 주택 정책?
그러나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신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변화가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상과 의지도 변함이 없으며, 그 행사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2. 변치 않으시는 내용들
1)본질과 성품
하나님은 신으로서의 본질, 그 능력과 거룩하신 성품들이 변치 않으십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이 땅에서 육신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들의 죄악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품위와 능력과 성품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셨고, 또 침해도 당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한결같이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서 그 신성이 재확인되셨으며, 인생 구원의 의지도 불변하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도 그럴진대,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야 그 무엇에 변함을 받으시겠습니까?
2)사상과 뜻
시 33:11에 '여호와의 도모는 영원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천지 만물과 특별히 인간의 창조 사역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타락과 죄의 오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한 계시록을 읽어보면 창세기에 언약하셨던 하나님의 원래의 뜻이 모두 인생과 만물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정하시고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변치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결코 다른 구세주, 다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3)하나님의 말씀과 언약
마 5: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했고, 시 89:34에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고 했으며, 민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아니하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언약은 영원불변하십니다. 히 13:20에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언약의 피'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만민을 대속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은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속대로 오셨고, 그 약속대로 사셨고, 그 약속대로 죽으셨으며, 그 약속대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또한 그 약속대로 영원한 성령으로 역사 하시고, 그 약속대로 마침내 재림하실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마고 약속하신 자는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라고 찬송할 수있는 것입니다.
3. 변치 않는 하나님과 인생
1)하나님의 공의가 불변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롬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며, 히 9:27에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한 인생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자에게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 끝날 백보좌 대심판에서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2)하나님의 사랑이 불변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렘 31:3에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라고 했고, 요 13:1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변함이 많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 고전 13:8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3)회개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이 불변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호 6:1-3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라'고 했습니다.
4)하나님께서 주실 기업이 영원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 9:15에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진동치 못할 나라 곧 하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썩지 않으며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요, 하늘에 간직된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산 소망입니다.
5)하나님의 권세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8:18을 보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셨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그 권세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지금까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부터 오늘까지 복음 전파에 막대한 방해가 있었으나, 동서고금 각국의 방방곡곡에 오늘날까지 복음이 계속 퍼지는 것을 보아도, 그 권세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세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서 쾌락한 안식을 영원무궁토록 누릴 것입니다. 교회를 보호하시는 권세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 사도 때부터 오늘까지 교회가 받은 핍박이 말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듯 하였으나, 핍박이 있을 때마다 교회가 오히려 더욱 왕성하여지는 것은 주님의 보호하시는 권세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질문들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민 11:23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군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를 내려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원망이 생겼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서 백성들은 애굽을 그리워하며 울게 되고, 그 때문에 모세는 괴로워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코에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1개월간' 고기를 먹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이나 되는 무리들에게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고기와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까?' 하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이유 있는 항변이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답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하시더니,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모아서 약속하신 대로 실컷 고기를 먹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고 물으심은 홍해를 가르시던 하나님, 만나를 비처럼 내려 주시던 하나님을, 너희들이 벌써 잊었단 말이냐? 그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은 다 없어지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신랄하게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불신앙과 의심으로 어떠한 이유를 내세우던, 하나님은 여전하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손은 결코 짧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일의 쉽고 어려움에 따라서 제한되지 않고, 오직 우리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제한될 뿐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역경중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낙심하고 좌절하는 분이 있습니까? 의심과 불신앙으로 망설이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이 지금은 짧아졌느냐?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능력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던 주님의 능력이, 죽어서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일으키시던 주님의 손이 지금은 짧아졌느냐?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은 다 사라져 버렸느냐?" 이러한 질문에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은 결코 짧아지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는 믿음의 답변을 하실 수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없는 용기와 소망을 되찾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불변하신 하나님만 믿고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라고 찬송을 한 성도처럼 살아가시고, ♪이스라엘 백성아 주만 믿고 바라라. 주의 깊은 은총에 우리 구원 있으니, 변함없는 주님만 믿고 기다릴지라♪라고 한 찬송가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다
민수기 23장 13-26절
모압 왕 발락은 복술가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내용이 아닌 축복하는 말들을 넣어 주셨습니다. 이에 화가 난 모압 왕 발락은 장소를 옮겨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들이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간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다 보이지 않고 끝자락만 보이기에 혹시 ‘이렇게 먼 곳에서 저주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지 못하진 않을까?’ 하는 아둔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죠. 이에 발람은 2번째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한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은 복술가 발람의 입에 저주가 아닌 축복의 말을 넣어 주셨습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은 먼저 모압 왕 발락에게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 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밝히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복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찌 이들이 비스가 산 꼭대기로 자리를 옮겨 저주한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시겠습니까? 19절 말씀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마음을 바꾸다.”, “변덕을 부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약속을 하고도 그 마음이 변하여 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신 약속은 영원한 약속이며 변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짓말 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신 일은 반드시 실행 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겠다고 한 내용들을 한 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야곱의 허물을 용서하심.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기서 ‘허물’이란 단어는 사악한 자들의 ‘악행’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보실 때 무수히 많은 악행을 행했습니다. 허물이 많은 백성이고 말 그대로 패역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신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시고 크신 인자와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의 연약함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돌아보시는 놀라운 은혜를 나타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허물이 사함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입은 사람’은 얼마나 복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바로 이 복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우리 안에 무수히 많은 허물이 있고, 우리 마음 가득 죄로 인한 패역함이 머물지만, 언제라도 십자가 그늘 밑에 나아가 우리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회개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주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또 연약함으로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주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 입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심
21절에 보면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사실 이 당시 이스라엘 보다 강하고 화려한 문명을 이룬 민족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히 다른 민족들보다 똑똑하거나 인물이 빼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들만큼 목이 굳고 교만하고, 죄짓기에 빠르고, 하나님 원망하는 것을 밥 먹듯이 한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말씀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놀라운 사랑을 다시금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21절 말씀을 보면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왕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큰 노래 소리가 이스라엘 진영에 있다는 말 입니다. 또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향한 백성의 환호 소리와 ‘승리의 나팔 소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이스라엘 진영에서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의 찬양 소리가 머무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인한 은혜를 찬양하는 기쁨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넘쳐 납니다.
3. 하나님이 인도하사 힘 있게 하심.
22절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고 복을 주셨습니다. ‘들소’는 힘을 상징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땅도 없고, 가진 소유도 적고, 힘도 없는 나그네 민족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하시며 광야에서 친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해 가시니 이들이 아무런 거친 없이 들판을 달리는 용맹스런 들소와 같이 강하고 두려운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놀라운 복 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비록 우리 힘은 연약하고, 우리의 능력은 부족하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을 힘 있게 하시니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심으로 말미암아 날로 날로 주의 강한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원수 사탄도 우리를 넘어 트릴 수 없습니다.
4. 야곱을 해할 점술과 복술이 없다.
23절 말씀을 보니, “(민 23:23)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하였습니다. ‘사술’과 ‘복술’은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사용하는 모든 술수를 나타냅니다. 오늘 모압 왕 발락이 술사 발람을 부른 이유는 고대 사회에서는 ‘사술’과 ‘복술’이 군사력보다 강력한 무기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강력한 무기로도, 사탄의 술수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고,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술가 발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내용대로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고 나서 보니 그 복의 내용이 생각만해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23절 후반부에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고 말했습니다. 발람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실상을 깨닫게 된 것이죠. “아, 이 민족은 보통 민족이 아니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꽉 붙잡고 보호하시고 책임지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람들이구나?”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불려온 복술사 발람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고 감탄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이 모든 축복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됩니다. 주의 백성은 어떤 죄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삶을 인도하사 들소처럼 강하게 하시며, 어떤 저주도 어떤 해함도 당치 않게 하십니다. 이처럼 주의 백성을 복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기에 주님의 뜻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가 맛있는 일류 요리를 준비한다고 해도, 그릇이 더러워서는 준비한 요리를 담아 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복을 예비 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이 거룩함을 떠나 죄의 더러움에 머물면 이 크신 은혜를 공급 받지 못합니다. 죄로 얼룩진 우리의 마음의 그릇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예수의 피로 정결케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러한 주의 백성에게 반드시 놀라운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부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자가 없다
민 23:13-26 / 임진남 목사(예본교회)
모압 왕 발락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다시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제는 장소를 바꾸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저주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13절 말씀의 해석이 그렇게 잘 번역된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 발락은 발람에게 그대가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의 전부를 보지 못하고 끝부분만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전부 볼 수 있는 곳에서 보고 다시 저주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발락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여 더 이상 이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할 자들이 없다는 것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발락이 이방인이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없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락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서 발람선지자를 통해 축복하여 주신 그 말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저주의 말이 선포되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모압 왕 발락의 생각은 오늘날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신들을 섬기고 그 신들의 마음까지 변경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 정성을 보여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찾는 다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발락은 여호와 하나님이 변할 수 있는 분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자신이 하신 말씀에 아주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발락의 생각이 단순히 불신자인 이방인에게만 적용된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서도 충분히 우리는 발락과 같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을 달래고, 하나님께 정성과 성의를 다 보여드리면 반드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다 드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귀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인간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섬긴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 발람의 모습 또한 믿음의 성도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발람선지지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이끌려 오게 된 것이 불의의 돈을 탐내고 있었고 이미 하나님은 발락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발람은 앞부분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입에 계시의 말씀을 주시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여 주셨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지자라고 하면 당연히 더 이상 발락의 요구에 굴하지 않고 뒤 돌아 가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마치 신앙이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면서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이 모습에 우리는 속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변개하시지 않으십니다. 발람이 참 선지자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뜻에 즉각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발견할 수 있습니까?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신 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신이 애쓰고 노력해서 그야말로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씀을 성경이라고 하는 이 책에 다 담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거의 다가 기도해서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무시하고 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자신의 음성을 이 말씀에 다 기록하여 대대로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이 구호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음성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모든 은혜의 방편이 이 성경에 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성경을 통해 말씀되고, 증거되고 있다면 더 이상 발람과 같이 기도와 번제를 드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지 발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다른 뜻을 얻기 위해 이렇게 인간이 열심을 내는 일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열심을 내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을 변화게 하려고 열심을 내는 것은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여러 번 묵상하면서 왜 발람이 이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불의의 삯인 돈을 사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돈을 사랑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어설프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것은 단지 소문으로 들은 정도의 아주 미숙한 지식을 가졌습니다. 참 신앙이란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 분이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 아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지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탐욕이 일어나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작금의 목사들이 탐욕 때문에 범죄하는 것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면 탐욕이 일어나도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죄악의 길에 들어가는 것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외함이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하여 본다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타락의 모습은 하나님을 바르게,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주일학교 교재와 교육비를 투자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지식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결국 우상종교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발람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다고 하는 이 모습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발락과 발람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장소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또 다시 하나님은 발람 선지자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은 지난번 주신 말씀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축복하였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다시 발람의 입을 통해 증거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발락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발람의 입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먼저 이 계시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어떤 피조물이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시면 그 일을 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후회하거나 변개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축복하여 주셨고 그 축복을 계속 주신다고 하는 것을 변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발락은 신은 인간의 정성으로 인해 신의 뜻을 바꾸는 존재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신들의 뜻이 자주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고 행동하는 존재들입니다. 거기에다가 신들은 거짓말도 잘하는 존재들입니다. 변덕스럽고 거짓말도 잘하는 신들이 세상 신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인간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변덕스러운 신들과 인간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타락하여 거짓을 말하고 자주 변하는 그런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주신 계명 속에서 자신의 성품을 반영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은 타락한 인간들이 거짓을 행하고 말하고 그렇게 거짓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달래고 뜻을 변화시켜 달라고 해도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발락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과 같은 수준의 신이라고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확신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하는 그런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언제 우리가 저 지옥의 처소에 떨어질지 모르고 불안과 두려움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모른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아예 더 확실하다고 지금 발람의 입으로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축복받은 자들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확실하다고 확증하여 주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허물까지 보시지 않고 그들의 반역까지 보시지 않으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는 표현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 간에도 상대방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허물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허물이 보여도 그 것 때문에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물을 보이고 급기야는 반역하여 우상을 숭배하여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여인들과 신들을 섬기는 그런 패역한 일을 저질렀어도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민 25장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과 같이 그렇게 변덕스럽고 쉽게 거짓을 말한다면 우리는 위로와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확증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발람은 자신이 저주를 하고 싶어도 저주할 수 없습니다. 이 불변하신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은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적자들에게는 엄청난 상실감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불변하심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 예수 안에 거하면 우리를 정복하려고 하는 그 어떤 존재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마저도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들 앞에서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왕의 왕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장의 가장 앞에서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고 자기 백성들을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은 다 멸망당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발람의 입에 이스라엘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비유로 들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이끌고 나오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발락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지도자이십니다. 그러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들소와 같다고 말하여 줍니다. 뿔이 달린 들소를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없습니다. 물론 사자도 나옵니다. 그러나 들소를 말하는 것은 그 힘이 사자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들소의 힘과 그 힘의 뿔에 받히는 짐승들은 다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만큼 강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의 그 어떤 영적인 힘들이 도전해도 결국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면서 인간이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맞이합니다. 영적인 힘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은 그 어떤 영적인 도전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장로였다고 하는 사람이 자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영적으로 영험한 중을 데려다가 점도 보았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부 사업가나, 정치가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 중에 이름난 무당을 찾지 않는 자들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업과 정치에 거치는 일들을 제거하고 앞으로 탄탄대로의 길을 가기 위해 다른 영적존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발락과 같은 자들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귀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독사의 자식들이고, 마귀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능욕하고 짓밟는 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자들이 받는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들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발람은 이스라엘이 암 사자와 같고 숫 사자와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잡고 먹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말은 발락의 사지를 떨게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들이 힘만 강한 들소와 같은 자들이 아니라 이제는 정복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암 사자와 숫 사자는 자신들의 먹잇감을 보면 봐주지 않습니다. 결국 사냥에 성공하는 짐승들 가운데 최고의 왕입니다. 발락은 지금 자신이 발람의 저주가 임하면 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숨에 다 진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의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그 위치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모압이라고 하는 자신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패망 직전에 놓였다고 하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더 이상 발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었다가는 지금 당장 자신들이 다 멸망당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저주의 말이나 축복의 말을 하지 말라고 발람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발람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 가운데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신실하셔서 자신이 하신 말씀에 언제나 거짓이 없으십니다. 그들의 허물과 죄악이 비록 있다고 할지라도 다 간과하시고 의로운 백성들로 여겨주십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속 선포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구원하여 주신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시고 있습니다. 성령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자신의 통치를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들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에 있어서 사자처럼 일어나라”. 이 말처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때론 예수님은 사자처럼 나타나시는 강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사자처럼 강하게 일어나 주님을 섬기고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다양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싸움에서 사자처럼 강하게 일어나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을 우리에게 뿌려주시고,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에게 자신의 음성을 늘 듣고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경을 통해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모든 악한 자와 대항하여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의 손에 보호받고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강하게 일어나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자같이 일어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