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Ⅲ. 원의 통치
1. 몽고제국
1206년 성스러운 오논강의 발원지에서 코릴타(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각 족장, 장로, 전사들이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하얀 깃발들을 세워 올렸다. 칭기즈칸의 개인적인 수호신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아홉은 마법의 숫자였다.) 그리고 몽골과 모든 종속된 부족들, 씨족들이 모인 코릴타는 테무친을 징기스칸으로 선출하였다. 징기스칸은 종래 몽골의 부족제 사회를 개혁하여 백호, 천호에 바탕을 둔 사회적 군사적 단위를 기초로 하는 조직을 형성했다. 즉위 이후 우선 서하를 격파한데 이어 즉위 6년 금나라의 북변 3도에서 남하하여 연경(北京)으로 육박하여 1여년 후 이를 함락하였다. 금나라의 영토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징기스칸은 서정을 결심 서요를 멸하고, 영토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동인도, 남러시아에 이르렀다. 1224년 동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사이 금나라의 국력은 더욱 쇠약하여 이웃 나라인 서하와 송나라가 솥(鼎)의 경중을 묻기에 이르렀다.징기스칸은 1227년 서하를 멸하고 여세를 몰아 금나라를 멸하려 하였으나 육반산(六盤山)에서 병을 얻어 66세에 찬란한 인생의 막을 내렸다. 태조 징기스칸은 거란인 야율초재(耶律礎材)를 신임하여 “하늘이 내집에 준 마지막 인물”이라 칭찬했다. 2대 태종 역시 그를 중용하여 중국식 조의를 정하고 도읍을 카라코룸으로 옮겼다. 몸소 남진하여 금을 채주에서 멸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서정을 치중하여 조카 바투는 멀리 러시아의 대부분과 폴란드를 석권하고 볼가강 입구에 킵차크 한국(迀國)을 세운 것이 이 때다. 태종의 사망으로 정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현종 몽케칸이 뒤를 이어 운남 대리국을 병합, 안남을 정벌하여 남송 포위망을 완성하였다. 동생 훌라구로 하여금 페르시아를 경략시켜 일칸국을 세우게 했다. 이 후 한반도를 석권하고 남정하여 송나라를 공격하려다가 사천에서 사망하였다. 이 후 제국 내의 내전이 발생하여 쿠빌라이가 이를 평정하였다. 쿠빌라이는 원나라 창립의 영웅으로 도읍을 연경으로 옮기고 이어서 남송을 멸하여 중국 전토를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세조의 경략 이후 이후 일본에도 미쳐 이를 원구의 역(元寇之役)이라 하며 결국 실패로 끝났다.
2.원 통치와 사회적 영향
2.1 지배 방식
몽골 대칸국(大迀國)의 중국 통치는 태조와 태종의 지방 분권적 간접지배로부터 헌종 시대에는 점차 중앙 집권적 직접지배로의 형태로 이행하여 드디어 세조의 직접 지배, 즉 원나라 정권의 성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금나라 멸망 전후하여 북중국에는 북위시대에 비해 강대한 지방적 할거세력 즉 세후들이 존재하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몽골군은 지방에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대관을 파견하여 감독 정치를 행했다. 초기의 다루가치는 조정 또는 중국에 파견된 몽골군과의 연락하에 점령지의 치안 유지 공부의 징집, 세후의 감독을 행하였으며, 주로 거란, 위구르, 회교도, 투르크인들 등 정주민 출신에게 맡겼다. 또한 오늘날 성(省)의 기원이 된 행중서성(行中書省)에 의거하여 독립왕국에 가까운 지방분권적 통치정책을 수행하였다. 태종에 이르러 중국 땅에 대한 정책은 야유초재에 의해 약진하여 세제, 군제, 민정 방면에서 이라는 자주적 통치 정책을 보기에 이르렀다.
태종 사망 후 10년의 공위(空位) 시대를 걸쳐 헌종이 즉위했다. 헌종의 치세는 절대 군주권의 확립으로 일간된 시대이며 재정정무를 각기 신설하여 연경등처행상서성(燕京等處行尙書省) 별실팔리등처행상서성(別失八里等處行尙書省) 등 중앙정부의 지청의 관할 하에 두었다. 또한 임자년적(壬子年籍)의 작성, 포은세(包銀稅)의 제정으로 중앙 집권화를 공고히 하였다. 이에 따라 원나라는 통치 하의 주민을 크게 나누어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으로 구분하였다. 몽골인은 지배 민족으로서 모든 특권과 자유를 누린 것은 사실이지만 다음에 색목인(위구르, 탕구트, 회회)을 등용하여 우대하였다. 이에 비해 한인(거란인, 여진인, 금나라 치하의 한족),과 남인(남송의 유민)은 몽골인과 색목인에 비해 월등히 불리했다. 1270년 조사에 따르면 몽골 색목인은 40만으로 전체 인구의 3%, 한인은 200만으로 15%,남인은 1100만으로 82%를 차지했다. 몽골, 색목인은 소수파로 스스로 우족귀신(右族貴身)이 되어 한족을 차별하였다. 몽골지상주의 이념 하에 호풍 호복을 숭상하였으며 몽골어와 몽골문자를 공용어로 정하였다. 이는 원이 전대(대표적 북위)의 정복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2.2 제도(관료 군사 경제 종교)
원의 대부분 제도는 몽골지상주의 하에 신분제도 대부분이 한인, 남인에게 불리하였다. 관료사회에서 백관의 장은 몽골 인으로 하고 몽골이이 없을 때는 색목인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다보니 상급 관리 대부분은 몽골인과 색목인이었다. 당시 국정을 쥔 자는 모두 색목인이고 한족은 하나도 없다 라거나 어사대, 중서성의 요직은 모두 북인(北人)이 차지하고 한인과 남인은 만의 한 둘도 없었다. 이에 인종 원년 (1314)에 과거제도가 실시하였으나 한인과 남인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신 과거 합격자 수를 똑같이 배정하여 얼핏 보면 평등해 보이지만 인구수에 대비해 보면 이 또한 불평등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원나라 군정은 몽골민족의 사회제도에 의거한 군단제(백호제, 천호제)를 시행하였다. 중앙에 정병을 집중하고 양자강 연안에 중병을 주둔시켰으며,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파견하여 군정에 지방적 색채가 드러났다.
원나라 경제정책은 통제적, 독점적 성격과 영리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는 초법(鈔法)과 전매국영 사업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원나라는 교초(交鈔), 즉 지폐로 종래 여러 잡다한 통화의 통일을 꾀하였다. 금은의 매매까지 금지하는 등 교초를 원나라 유일한 통화로 지정했다. 이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제도이다. 초법의 실시에 따라 물자의 원활한 유통, 동전을 주조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의 절가 등 이점이 있었다. 전매제와 국영사업은 멸망한 송나라의 옛 제도를 계승한 것이지만 정부에 의한 기업독점이라는 적극적 성질을 가진 점은 송나라와는 다르다. 이를 실시하여 얻어진 막대한 부는 몽골의 제왕(諸王)을 비롯하여 수많은 예속 몽골인에 대한 사여(賜與)로 소비되었다. 오히려 전매법은 민간업자의 폭리를 방지하고 일반 민중의 복지를 꾀하는 공공적 성격이 아닌 상인주의적 입장의 제도였다. 원의 영토는 광활하여 통치하의 민족도 다양하여 종교도 그리스도교(景敎), 회교, 불교, 도교가 있었다. 원나라는 본래 고유 신앙으로서 샤머니즘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어서 서장의 불교인 라마교를 존중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례와 신비한 기도를 생명으로 하는 라마교의 이상한 매력에 단순하고 소박한 몽골이이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종교정책은 다른 종교를 억압하지 않고 매우 관대한 태도를 나타냈다. 오직 불교만은 라마교와 관련 있다하여 특별한 보호와 존숭을 받았다. 원의 종교정책의 기조가 실로 관용적 태도였으므로, 반몽골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는 한 이들 종교에 대해 보호 회유정책을 취하였다. 라마교의 절대적 신봉에 따른 폐단과 관대한 종교 정책은 후일 백련교의 난을 촉진시켰으며 원나라 멸망 제1원인이 되었다.
3. 원의 쇠망
원의 쇠망 제 1원인 백련교의 난은 백련교가 원의 악정에 분노한 하남지방의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백련교야 말로 세상을 구하는 미륵의 하생, 명왕의 출세이며 원나라를 대신하여 황제가 될 사람이라 하여 반 몽골의 기치를 올렸다. 이후 군웅 중 하나인 주원장이 금릉(金陵 : 남경)과 강남을 중심으로 하여 마침내 연경을 포위, 원나라 순제가 상도 개평으로 도주하여 원이 무너지고 명이 성립되었다.
◈ 참고문헌
강정설(1982), 『北魏時代 漢族門閥 貴族에 대한 小考 = (A) Study on the Han Lineages in the northern Wei Dynasty Era』,「北族 貴族과 漢族 貴族」(梨花女子大學校 大學院)
김종래(2002),『유목민 이야기』, (서울 : 자우출판사).
김희영(2006),『이야기 중국사』, (서울 : 청아출판사).
박현정(2000), 中國 異民族 王朝의 服飾政策 比較 : 北魏와 淸을 중심으로 = Comparison of costume policies of foreign dynasties in China : centering around Bei-Wei(北魏) and Qing(淸),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병국(1991),『이민족 중국 통치사』, (대륙연구소).
서병국(2006),『거란제국사연구』, (파주 : 한국 학술 정보).
이공범(2003),『위진남북조사』, (서울 : 지식산업사).
John K. Fairbank 著, 김한규, 전용만 譯(2007),『동양문화사 上』,(서울 : 을유문화사).
Ren's Grousset著,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譯(1998),『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서울 : 사계절)
1) 원래 정(鼎)은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것으로, 정의 경중(輕重)을 묻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좌전(左傳)》 선왕(宣王) 3년조(條)에 있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주(周)나라 정왕(定王) 때, 제후(諸侯)의 한 사람인 초(楚)의 장왕(莊王)이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정왕의 사신에게 주왕(周王)의 상징인 9정(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 그러자 사신은 왕위(王位)라는 것은 덕(德)에 있는 것이지 정(鼎)의 경중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周)의 덕은 쇠퇴하였으나 천명(天命)은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정의 경중은 묻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2)몽골제국의 태종(太宗) ·정종(定宗) ·헌종(憲宗) 시대의 수도. 중국의 문헌에는 각라화림(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화림(和林) ·화령(和寧) 등으로 쓰인다. 1235년 몽골왕조 제2대 황제 오고타이에 의해 몽골고원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오르강 상류 우안에 건설되었다. 그 뒤 정종 ·헌종까지 3대 약 20년에 걸쳐 몽골제국의 수도로서 번성하였으며, 유라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절 ·전도사 ·상인 등이 모여들었다. 쿠빌라이가 수도를 중국 내부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긴 뒤에는 몽골의 옛 도읍지 또는 화림행성(和林行省)의 소재지에 불과한 지방 도시가 되었다.
3) 임자년 (1272)을 기하여 천하에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4) 서병국(1991).『이민족 중국 통치사』,(대륙연구소), p.182.
첫댓글 몽골족은 어차피 적었기에.............
몽골족은 선비족의 후예라는 점에서 북위와 원을 비교해봤습니다. 원이 단지 수가 적어서 멸망한 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