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답사(21) : (봉화) <분천역>/<승부역>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과 철도가 있는 봉화지역에서 한동안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2023년 여름 거센 장마가 철길과 주변 도로를 휩쓸어갔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협곡 열차>는 멈췄고 기다림은 길어졌다. 겨울에 굳이 단기거주지를 한반도 동부 쪽에 잡은 것도 이 지역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2023년 말에 복원되길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던 분천의 <산타마을>은 갈 수 없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기쁜 소식을 접했다. <영동선> 봉화지역 노선이 복원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협곡 열차>라는 특별 노선을 제외하고는 하루 4차례씩 운행한다. 인터넷에서 분천역과 승부역을 예약했다.
<분천역>은 ‘산타마을’이라는 말처럼 역에서 내리자마자 마을 전체가 산타로 뒤덮여있었다. 동화 속 마을처럼 살포시 미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산타로 포장된 마을도 아름다웠지만, 그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마을의 모습이 훨씬 더 정감이 갔다. 역에서 산과 하천을 지나는 ‘동네 한 바퀴’ 코스는 깊은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소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여유롭고 푸근한 분위기가 이국적인 붉은 색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이 곳만의 특색을 보여주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산책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분천역>의 매력은 이 곳에서 다양한 둘레길로 향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외씨버선길>은 봉화에서 영월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역과 역 사이를 걸으며 깊고 깊은 오지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낙동정맥길>은 ‘승부역’으로 이어졌다. 원래는 기차를 타고 갈 예정이었지만, 걸어서 가기로 했다. 거리는 약 10km정도로 부담되지는 않는 코스였다. 길은 두 개로 구분되었다. 반은 평평한 도로를 따라 걸으며 웅장한 산들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었으며, 나머지 반은 산을 오르는 코스였다. 산에 오르자 따뜻한 날씨임에도 아직 눈은 깊게 쌓여있었다. 태양 때문에 탄력을 잃은 눈길을 따라 힘들게 올라갔다. 과거 우시장을 찾아서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라 한다. 길은 곳곳에서 끊겼고 어떤 길은 바위들이 뒤섞여 길을 막았다. 고개에 오르자 과거의 슬픈 역사를 알려준다. <울진삼척 간첩> 사건 때 무장공비들이 산골에 살던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이었다. ‘승부역’의 이름도 한국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아직도 그런 모습에서 전쟁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산에서 내려오자 매우 독특한 모습의 광경이 펼쳐졌다. 상당히 넓은 폭의 ‘낙동강천’이 흐르고 있었고 높은 산과 하늘은 무심한 모습으로 고독한 ‘세평의 승부역’을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찾지 않는 화요일과 수요일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적막한 공간이다. 빨간색의 현수교는 소박하지만 단단한 역사와 함께 오지에 터를 잡고 있는 승부역의 매력을 더 크게 확산시키고 있었다. ‘세 평’이라는 역과 달리 역 주변은 크고 넓었다. 산과 하늘과 물이 역의 크기와 매력을 무한대로 펼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에서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는 집들은 고요한 적막이 감싸고 있었다.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가용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깊지만 여유로운 공간이 깔끔한 공기와 함께 방문객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자연과 만나는 절대 고독이라는 수사적 표현이 과장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저녁이 되자 기온이 내려갔고 추워졌다. 영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려면 약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텅 빈 플랫폼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5시간 이상 걸어서인지 더 걷고 싶지는 않았고 길도 애매했다. 다행히 임시 대합실에 난풍기가 작동되었다. 온도를 올리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서서히 어둠이 플랫폼에 내려앉았고 산과 물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제 남은 것은 플랫폼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뿐이다. 정말로 외진 지역에서 진짜 고독의 느낌을 접한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기차 오는 소리를 듣는다. 혼자서 헤메다, 혼자서 기다리고, 혼자서 열차를 탄다. ‘승부역’의 특별한 기억이다.
첫댓글 - 저 다리 건너서 옥수수 나눠 먹던 추억이 눈앞에.... "어둠이 플랫폼에 내려앉았고 산과 물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