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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호경의 수필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정호경
/집중조명/interview-정호경
대담-변종호
-해학과 유머로 빚어지는
우리 시대의 따뜻한 이야기
꽃보다 연두빛 초록이 더 아름다운 계절에 선생님을 뵙게 돼 기쁩니다. 여수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빨간 지붕의 아담한 단독주택을 상상했는데, 아파트에 사시는군요.
어렸을 적 항구가 아닌 포구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울에 살면서도 언제나 갯벌이 있는 바다가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6․25사변을 전후해서 한동안 살았던 여수가 그리워서 퇴직하자 곧장 여수로 이삿짐을 싸들고 왔습니다. 그 당시 서울 친구가 여수 돌산에 사 놓은 땅이 있으니 거기에다 집을 지어서 살라고 했어요. 이는 내가 소망하는 만년의 꿈이었지만, 친구의 말은 고마워도 자녀가 모두 서울에 살고 있으니 수시로 오르내려야 할 형편이어서 외딴 집을 며칠이고 비워 두고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아파트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바닷가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잘 때만 제외하고 눈만 뜨면, 바로 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돌산의 단독주택 못지않게 공기 좋고, 살기 좋은 곳입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예전에는 낚시를 즐기신 걸로 압니다. 지금도 낚시를 하시는지요? 여수는 생선의 종류가 많은데, 즐겨 드시는 생선은 무엇인지요?
바다에서 불어오는 짭짤한 해풍이 몸속으로 스며들어와 소독을 해 줘서 그런지 비교적 건강한 편입니다. 그러나 바닷가의 주택도 일장일단이 있어요. 여름철에 태풍이 밀어닥칠 때는 무서워서 한두 번은 의무적으로 기절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를 대비해 그 비싼 청심환을 한 통 사서 준비해 뒀는데, 작년의 태풍은 미풍으로 지나가버려서 그 비싼 청심환이 대추처럼 말라 비틀어져서 효과가 소멸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렇잖아도 여수로 내려온 1차적인 목적이 낚시였는데, 그것도 근해에서는 잘 안 돼서 먼 섬으로 배를 타고 나가야 하니까 나이 먹은 노인에게는 무리한 일이어서 주변의 저수지에서 붕어낚시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서울 수산시장에서도 여수생선이 맛이 있다고 값을 올려 부를 정도로 여수 생선은 이름이 나 있습니다. 수많은 생선 중에서도 여수 명물로 알려져 있는 군풍셍이(표준명은 ‘군평선이’)를 비롯해서 민어, 가자미, 서대 그리고 머리와 입가에 가시가 밤송이처럼 뾰쪽뾰쪽 돋아 있는 쏨뱅이, 쐬미 등 못 생긴 고기일수록 맛이 좋아서 주로 이런 것들이 밥상에 자주 오르고 있어요.
존경받는 원로수필가이자 유머수필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어디서나 좀처럼 드러내질 않으십니다. 그러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나이만 먹었을 뿐, 존경받을 만한 원로수필가도 아닌데, 이런 자리에 자주 초대받고 보니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흔히들 유머수필도 공부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안 되는 일은 없겠지만, 주변 문인들의 말이나 우리 집안의 내력으로 봐서는 일종의 유전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선친께서 유머가 대단해서 어느 자리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선친 가까운 자리로 묘여 들어 함께 웃고 즐기기도 했는데, 내 형제자매들까지 남을 잘 웃기는 것을 보면, 이는 선천성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서나 유머를 좀처럼 드러내질 않는다고 하셨는데, 젊었을 적 학교 수업시간에는 선친 못지않은 해학으로 시종 학생들의 폭소 속에서 학습효과를 얻기도 했지만, 무슨 알이든 너무 잦으면 그 진가가 감소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필요할 때만 쓰는 경제적 효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넘치는 유머와 익살로 독자와 주위 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에 동의하시는지요?
나의 유머는 일상적인 것입니다. 난센스(엉터리)가 잦을수록 웃음이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나는 문학의 본질이 다른 학문과는 달리 흥미(재미)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유머수필은 물론이거니와 꼭 그것이 아니라도 일상의 이런저런 글들을 쉽고 재미있게 쓰다 보니 모두들 반기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수필 <낭패기>를 발표한 뒤 많은 독자들의 편지나 전화를 받았는데, 이들 대부분의 독자는 남녀를 막론하고 한 번쯤은 옷에 똥을 싸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서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습니다.
인생 역정
선생님께서는 태평양전쟁, 여순반란사건, 6.25를 겪으셨습니다. 특히 여순반란사건 때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기도 했습니다. 회억하기 괴로우시겠지만, 친구를 잃은 참담한 심정과 그로 인해 선생님의 문학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요?
태평양전쟁은 일본인들이 말하는 소위 ‘대동아전쟁’인데, 이 전쟁이 끝난 해는 1945년 8월로 내가 중학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일제 치하에서 성장했는데, 이들의 탄압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도 혹독했다는 느낌입니다. 농민들의 강제공출에다 강제징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 말기에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놋그릇에다 교량의 철근난간까지 다 잘라갔고, 그 당시의 어린 국민학생들까지 송탄松炭 채취에 동원되어 그때의 비상시국은 그야말로 결사적이었습니다. 1945년 광복 직후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장삿길 따라 하동에서 순천으로 이사를 가서 내가 순천중학 4학년 때 ‘여순사건’을 만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시체를 가장 많이 본 사건이었어요. 사건 당시의 경찰관들과 난국 수습 후 반란군들의 시체였습니다. 여수 신풍 손양원 목사의 아들이며 내 친구였던 손동신이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학년의 학생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 바로 그때의 사건이었지요. 그런 뒤 6.25사변을 만나 다시 많은 친구들을 잃었어요. 이렇게 나는 불과 20년 정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큰 전쟁을 세 종류나 겪었으니 정말 불운의 세대라고 할 것입니다. 1994년 7월에 발간한 내 최초의 수필집 ≪까마귀야 까마귀야≫에 실은 <불발탄에서 얻은 생명>이 여순사건 현장에서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을 소재로 한 수필입니다. 이는 길가에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속에서 살아 도망친 경찰관의 목숨을 다룬 글입니다. 내가 겪은 이런 전쟁의 비극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조그만 일에도 무서워 떨게 되는 겁쟁이 심장병 환자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죽음을 제재로 한 글을 심심찮게 쓰고 있습니다.
장비나 의료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30여 년 전, 위암으로 통째로 위를 들어내는 수술을 받으신 걸로 압니다. 어려운 수술과 치료를 끝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진 않으셨는지요.
내가 위암수술을 받았을 때는 서울 광화문에 있는 대학입시학원인 대성학원에 재직하고 있을 때인데, 그때의 나이가 42세였던가요. 건강했지만, 공복 시에는 언제나 속이 쓰려서 임시조치로 약방에서 파는 위장약을 사 먹는 것으로 견뎌오다가 아무래도 미심쩍어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위경검사를 받았더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위염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위암이라는 사실은 수술을 받은 몇 달 뒤에서야 알게 됐지요. 그 당시만 해도 의술이나 의료기구가 발달하지 못 한 때라 위암이라고 하면 10 중 8,9는 사망하는 것이어서 내 가족은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포기 상태에 있었다고 했는데,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그런 고비를 겪은 탓인지 수술 후의 나는 대학입시를 위한 재수생을 계속 가르치면서 내 자신이 또한 인생을 다시 사는 재수인생이 되어 욕심 부리지 않고 열심히 그러면서도 낙천적인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변하더니 그것도 한두 해가 지나니까 다시 세속의 욕심과 번뇌 속으로 되돌아와 버렸어요. 그 무렵에 쓴 수필이 <가을 삽화>입니다.
타고난 소질
선생님의 넘치는 해학 감각은 타고난 소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품<육교 부근>을 보면 “나는 몹시 완고한 가정에서 자랐다.”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완고하셨지만, 유머감각이 뛰어나셨던 선친의 유전자를 물려받으신 건 아닌지요? 선친에 관련된 일화를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친은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생활고로 굶는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남다른 형제애로 조부모님의 기일에는 맨 위의 고모님 가족을 비롯해서 숙부님들의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모두 모여 방안 가득 둘러앉으면 선친은 습관성인 코똥을 팡팡 뀌면서 으레 옛날의 그 가난했던 시절의 고생담이 또 시작됩니다. 그 고생담은 수십 번을 들은 이야기라서 나는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더니 아버지는 벌써 내 낌새를 눈치 채셨는지 문 옆에 앉아 있는 동생에게 재빠른 명령을 내립니다. “한 놈이 지금 도망갈라고 발가락을 꼬물거리고 있으니 저 문고리 좀 빨리 걸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도 소리를 높여 “아버지, 인제는 다른 이야기 좀 해주세요.” 하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이야기는 하루 열 번 들어도 좋은 기라. 한번 굶어 봐라. 하늘이 노랗다.” 하시면서 언성을 높입니다. 담배 한 대로 숨을 돌린 다음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는 역시 가난한 집안의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주고받은 짜디짠 ‘참게다리’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가난에 관한 이야기인데, 내용이 함축적이고 해학적이어서 한 편의 ‘짧은수필’을 읽는 맛입니다.
자녀분 중에 선생님의 유전자를 받은 자제분은 누구이며, 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뒤를 이은 해학諧謔은 장남입니다. 지난번에 현대상선 중국 칭다오靑島 지사장으로 4년 동안 파견돼 있다가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1년이 지난 작년에 또 태국 지사장으로 발령이 나서 가게 되니 자주 바뀌는 아이들의 학교문제가 가장 두통거리였어요. 그래서인지 중학교 3년생인 그의 막내딸이 하는 말인즉 “아버지를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고 말했다니 문제의 해학이 벌써 손녀에게까지 유전됐나 봅니다. 그런데 문학과 관련된 자식은 지금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고전하고 있는 둘째아들인데, 이 녀석은 중학교 다닐 때부터 학교수업은 전폐하고 문학을 한답시고 시집이나 들고 돌아다니더니 작년에 간신히 수필로 문단에 발을 올려놨습니다.
소질이 있더라도 갈고 닦지 않았다면 빛이 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해학작품에 영향을 준 작가와 작품을 소개해주시지요.
뭐 영향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일본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우찌다 햑겡內田 百間입니다. 그는 소설에서는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수필을 쓰면서 호평을 받아 알려진 작가인데, 그의 작품으로는 <속취俗臭>, <여자의 수다에 관해서> 등이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소설가인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 <봄∙봄>, <금 따는 콩밭> 등과 그 외에도 경남의 오영수, 전남의 오유권 등의 단편소설에서도 각각 향토색 짙은 해학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학이 우리나라의 수필에서는 아직 그런 수준에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있어 아쉽네요.
소통의 장
이번에는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맞춰 시공간을 초월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신 ‘정호경의 수필마을’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정호경의 수필마을’이라는 문학카페를 만들어 직접 운영하시는 걸로 압니다. 회원 300여 명, 회원 수 비례 월등한 방문 횟수를 보입니다. 운영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여수로 집을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소식을 알게 된 이곳의 수필 지망생들의 요청에 의해 여기저기 장소를 옮겨 다니며 어렵게 수필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10여 년을 계속하는 동안에 신인도 여러 사람 배출하여 즐겁고 보람 있는 공부모임이 계속되긴 했지만, 나이도 들고, 나의 건강이 여의치 않아 최근에 중단하고 집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집사람과 이웃에 사는 수필가의 권유로 전국의 기성수필가들과 수필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한 ‘정호경의 수필마을‘이라는 수필카페를 만들어 공부도 하고, 상호간의 일상 소식도 교환하는 사랑방의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수필카페’에서는 익명이 아닌 본명과 우선 사진으로 얼굴을 밝혀야 하는 것이 세간의 카페와는 다른 점입니다.
인용이나 표절방지를 위해 철저하게 걸어 잠근 다른 블로그, 카페와는 달리 “정호경의 수필마을”은 ‘정호경의 수필’ ‘우리말과 한자어 공부’방 등 모든 게시판에서 복사와 스크랩을 허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시나 소설 그리고 수필 등 문학작품은 좋든 궂든 세상에 발표하여 서로 나누어 읽고, 감상하기 위한 것이라면, 구태여 문을 잠가 가두어 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히 수필의 경우, 기본이 튼튼하고 좋은 글의 바탕을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내 나름으로 글쓰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비롯하여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숙어 나아가서 문장수사법 등 수필 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본 자료를 카페에 올려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말, 한자 공부’ 방은 후배 문인들에게 자기발전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라는 당부 같습니다. 손수 자료를 찾아 올리고, 문제를 내서 고사를 보게 하는 등 이 많은 일을 하시려면, 어려움이 있을 걸로 압니다. 카페를 운영하는 보람을 언제 느끼시는지요?
위에서 말한 대로 글쓰기의 튼튼한 바탕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기본 자료를 카페에 올렸으며, 이런 자료들을 익혀 각자의 것으로 얼마만큼 소화를 시켰는지 확인학습을 통해 실력을 평가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사문제를 통해 알게 된 여러분의 성적을 좋건 안 좋건 솔직하게 카페에 알려 주었을 때 나는 큰 보람을 느낍니다. 기성인이나 신인이나 우리 카페에 열성으로 호응하는 회원이 역시 수필 솜씨도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문학과의 인연
선생님께서 문학의 길로 처음 들어서게 된 시기는 언제인지요?
맨 처음 문학작품을 대하게 된 때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 마루에 굴러다니던 책으로 그 당시에는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읽었는데, 그 후 중학교에 들어가서 이 책이 다름 아닌 이태준의 단편집 ≪돌다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의 재미에 끌려 중학교 2학년 때 문예반에 들어가 많은 시집과 소설집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 소설, 동요 자장가 작사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수필과의 인연이 되었는지요?
중학교 3,4학년 때 시 <고독孤獨>, <동우冬雨> 등을 ≪中學生≫, ≪學生時代≫ 등의 잡지에 발표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요. 그 뒤 대학시절에도 계속 시를 썼으며, 4학년 2학기 졸업 직전에 지금까지 썼던 시 중에서 10편을 골라 국문과의 연례행사인 작품발표회도 가졌습니다. 졸업 후에는 교편생활을 하면서 단편소설을 써서 어느 일간지 신춘문예에 응모했더니 ‘선외가작’에 내 작품명만 올라 있고, 당연히 낙선되고 말았습니다. 진주여고에서 서울 동성고東星高로 옮긴 4년 후에 입시학원인 대성학원大成學院이 광화문에서 문을 열어 그곳으로 옮겨 재직하고 있던 중 그 당시 관동출판사關東出版社'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1972년 순수 수필지인 ≪隨筆文學≫을 창간한 친구 김승우 사장이 나에게 그 해학의 소질과 맛을 살리려면, 시보다는 수필을 해야 한다며 적극 권유해서 1973년 초에 <육교 부근>을 발표하게 된 것이 그 동기이며 또한 수필 쓰기의 시작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수필 쓰기는 그때를 시작으로 하여 올해 40년이 지났는데도 세월만 흘렀지 내놓을 만한 글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기왕 말이 났으니 아득한 옛날에 썼던 졸시 한 편과 소프라노 이인숙이 부른 자장가 가사를 여기 올려 그때를 잠깐 추억합니다.
진달래
한을 한으로 삭이지 못하고
사무침은 겨우내 홍역으로 번지더니
두견새 울음 끝에 오늘을 맞아
환한 나의 꿈은 진달래로 피었구나.
마주 서면 뜨거운 두근거림으로
한마디 사연도 숨 막히더니
보내고 그리는 사무침이야
산을 태우겠네
산을 태우겠네.
자장가
작곡 김용호
작사 정호경
자장자장 잘 자거라 우리 아가야
달여울 은하수에 나들이 간다.
강가에 띄워 보낸 나뭇잎 배에
꽃소식 전해 올까 맞으러 간다.
자장자장 잘 자거라 우리 아가야
바닷가 띄워 보낸 비단조개를
한 아름 치마폭에 담으러 간다.
자장자장 잘 자거라 우리 아가야
지금까지 출간하신 수필집은 몇 권인지 소개해 주십시오. 또한, 그중에서 대표작을 고른다면 어떤 작품을 선택하시는지요?
<육교 부근>으로 등단한 이후 40년이 흘렀으니 남이 보기에는 그 동안 쓴 글이 많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많지 않습니다. 여기 발간한 연대순으로 몇 권 적습니다. 그리고 대표작을 작자 자신이 말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다수 독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알려진 것에 따라 말한다면 <폐선>을 들어서 좋을는지요.
수필집
1994년 7월 <까마귀야 까마귀야>(고려출판사)
2000년 12월 <오늘같이 즐거운 날(교음사)(현대수필작가 100인선)
2002년 11월 <폐선>(다빈치)(우수문학도서로 선정)
2004년 12월 <현대의 섬>(운디네)(우수문학도서로 선정)
2007년 11월 <낭패기>(좋은수필사)(현대수필가 100인선)
2010년 12월 <오늘도 걷는다마는>(다룸과이룸)(우수문학도서로 선정)
2013년 1월 <육교 부근>(선우미디어)(선우명수필선)
저서
2006년 9월 좋은 글쓰기의 힘
2009년 6월 춤추는 수필(현대해학수필선집)
2013년 11월 따뜻한 사람들('정호경의 수필마을' 동인지-창간호)
작품론
다음은 작품에 관해 여쭙겠습니다.
문학평론가 김우종 선생님은 <육교 부근>을 읽고 “그의 문학은 다분히 예술적 향상성이 강하다. 다만 회화적 세계가 지니는 내면적 주제가 너무 깊숙이 감춰져 있기에 조금은 드러내며, 그 형상이 다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역작용을 더 용이하게 하는 장치도 지닐 필요가 있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제를 조금 드러냈으면 하는 평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요?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육교 부근>은 지금의 ≪에세이문학≫ 이전의 ≪수필공원≫ 그리고 또 그 이전의 ≪수필문학≫(발행인 김승우. 주간 김효자)에 1973년 초에 발표한 등단작품으로 내 딴에는 매우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신변잡기에서 벗어난 본격수필에의 지나친 의욕과 고민으로 주제가 글의 깊숙이 숨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폐 선>
이 작품은 여수 봉산동 일대에 즐비하게 늘어선 폐선과 젊은 택시기사의 무차별적 폭언이 <폐선>의 모티브가 된 셈이지요, 당시의 굴욕감은 상상하기도 싫으시겠지만, 결과론으로 보면 이로 인해 명작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택시기사가 쏟아낸 욕설이 품위를 이유로 ≪에세이문학≫ 편집부에서 삭제된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표현은 규제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수필은 자신이 체험한 바를 진솔하게 나타내는 고백문학이라고 하지만, 자칫 일상의 신변잡기로 떨어지고 마는 경우를 고려하여 이런저런 문학적 장치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소설과는 다른 수필의 경우 글의 품위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수필과 소설이 가지는 무드(분위기)의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소설의 경우는 제 아무리 험한 육두문자를 구사해도 별다른 후유증이 없지만, 과연 수필의 경우에도 그것이 용납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대화는 작중인물의 것이지만, 수필 속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자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폐선> 중 “나의 경우 과식으로 인한 설사 몇 번 하고 나니 내 인생은 다 가고 말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과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요?
잘 지적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폐선>의 주제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남기게 한 원인이 되는 사실이 다름 아닌 택시운전수의 과도한 욕심에서 폭발한 육두문자입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그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기에 그런 폭언이 터져 나올 법도 했겠지만, 그곳은 도로 확장공사 구간임을 알면서도 그랬다면, 그 운전수의 무지몽매한 독설에 우리는 이 저속한 사회를 개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의 현실에 숨이 막힌 나는 그 길로 돌산 ‘무술목’의 바닷가에 가서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청마靑馬 시인을 목이 터지도록 불렀습니다.
“파도야, 나는 어쩌란 말이냐.”
<무성영화>
선생님의 작품 중 <무성 영화>는 윤오영의 달밤보다도 더 압축된 ‘단수필’입니다. 어찌 보면 짧은 수필은 장문의 글을 싫어하는 요즘 세태에 잘 맞아 떨어지는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짧은 수필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무성영화>를 비롯한 <모성애>, <운수 좋은 날>, <향수> 등 6,7편의 짧은 수필은 등단하기 전의 글로서 1970년대 초반에 쓴 것들입니다. 나는 태생적으로 몸이 가볍고, 호흡이 짧아서 육상경기에서도 초등학교 때부터 마라톤보다는 100미터에 능해서 언제나 추계운동회 때에는 100미터선수로 뽑혔어요. 그래서인지 수필에서 나도 모르게 압축성을 필요로 하는 ‘짧은수필’이 나의 체질에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를 산문시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짧은수필’은 어디까지나 운문이 아닌 산문이면서 많은 말을 함축하는 짧은 산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무성영화>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 격이라고 과분한 칭찬을 해주기도 했는데, 이 찬사가 많은 사람에게 널리 퍼져나갔다가는 내가 자칫 애매한 살인자로 몰릴까 걱정입니다.
신체의 고통을 문학으로
<낭패기>, <변비 체험기>,<이 야릇한 소리>는 많은 독자를 행복하게 만든, 뛰어난 해학작품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한두 번 배변의 욕구로 곤란을 겪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겠지요, 하지만 이 작품 배경은 위암 수술 이후의 신체변화에 따른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해학이란 품위가 있는 익살이라는 단서가 붙는데,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면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해학작품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학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후천적인 노력으로도 가능하겠지만, 역시 태생적인 소질이 아닌가 합니다. 작품 창작 일반이 다 그러하겠지만, 첫째 사물을 보는 눈이 남다른 해학적 센스가 있어야 하겠지요. 나의 경우 해학수필로 알려져 있는 글들이 불행하게도 ‘똥’을 소재로 한 글이 3,4 편이나 되는데, 이는 우연한 선택일 뿐, 의도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 자칫 잘못 다루었다가는 고약한 냄새만 풍길 뿐, 독자에게 오히려 불쾌감을 주고 말 것이니 함부로 선택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소재의 종류가 아니라 어떤 소재를 선택했건 그것에서 얻은 발상 즉,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위트 있는 순간적 포착이 소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글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글에서나 일상의 대화에서나 상대방을 울리기는 쉬워도 웃기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왜냐 하면 해학에는 자기만의 발상과 예리한 센스가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연스러운 해학수필이 소설 못지않게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문학관 文學觀
수필의 정의
겹치는 질문인 줄 압니다만 견해차가 있을 거라는 가정으로 여쭙겠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을 검색하면 ‘수필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이라고 나옵니다. 이런 사전적 ‘수필의 정의’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국어사전에서 말한 수필의 정의에서 “수필은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형식의 글”이 라고 했는데, 이 정의에 따라 정직하게 ‘생각나는 대로’ 썼다가는 사람 망신당하기 알맞은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문학의 다른 장르 즉, 시나 소설에 비해 비교적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글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일 뿐, 어떤 종류의 글이 됐든 앞뒤 말의 차례가 없는 글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나는 대로’라는, 얼른 보아 무책임한 듯한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편의 수필에도 주제가 있고, 이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각자 나름의 구성법이 있지 않겠어요.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 삶의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한 편의 수필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문학의 다른 어느 장르보다 쓰기가 어렵고 힘이 드는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수필의 발전적 방향
독자로부터 사랑받고 매체로부터 인정받는 수필이 되려면 수필가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수필도 문학임을 안다면, 근엄한 성현의 교훈을 통한 설교나 주장으로 남의 인생을 억지로 지도 편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바를 쉽고 재미있게 써서 독자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글이라면, 누구나 즐겨 읽을 것이고, 따라서 수필을 공부하는 지망생들도 이를 본받아 더욱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글에는 내 말이 많아야 할 것인데도, ‘일찍이 칸트가 말하기를’, ‘일찍이 단테가 <신곡>에서 말하기를’ 등의 인용으로 자신의 유식함과 글의 무게를 잡으려고 한다면, 독자는 뜻하지 않은 두통으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게 될 것이요, 그 필자는 영원히 촌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수필을 쓰는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체취를 풍기는 참신하고 개성적인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
선생님께서는 주제는 하나이나, 각기 다른 이야기로 구성한 형태의 작품을 발표하신 걸로 아는데, 몇 편이며 어떤 작품인지 말씀해 주세요.
우리나라의 현대수필이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질적인 변화도 없이 양적으로만 팽만한 현실에서 내 나름의 새로운 시도라고 할까요. 다시 말해 하나의 주제 아래 짤막한 여러 가지 이야기 7,8개를 묶어 구성한 형태의 글입니다. 나의 이런 형태의 수필은 2011년 초에 쓴 <해가 뜨고 달이 뜨고>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남긴 글은 15편 정도입니다.
감동을 주는 글이 곧 재미있는 글
선생님은 ‘감동을 주는 글이 곧 재미가 있는 글’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재미있는 글이란 어떤 글이며, 재미있는 글쓰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면 이 기회에 말씀해 주세요.
‘재미있는 글’이라는 말에는 반드시 ‘쉽다’는 말이 앞선 ‘쉽고 재미있는 글’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글을 쓰기까지에는 다름 아닌, 오랜 동안의 ‘문장수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의 정지용, 소설의 이태준, 수필의 피천득 등, 이분들의 글에 우리가 재미를 느끼고 감동하는 것은 오랜 동안의 각고 끝에 얻은, 자연스럽고 세련된 문장 때문일 것입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말하듯이 쉽고 재미있게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두서없고 장황한 질문에 답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수필은 객관적인 세계의 형태의 선과 색채로 이루어진 재미있고 아름다운 그림일 뿐이다.” 라고 어떤 평론가는 말했습니다. 진정성이 강점인 수필이 많은 독자에게 자리매김하기까지 수필가들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깊은 성찰과 관찰에서 얻어진 체험으로 감동 있고 재미있는 글을 써야 함을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수필과비평> 2014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