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여백의미 라는분이 어느가계의 누구이신지 모르겠고 논조가 무엇인지 알수도 없습니다
그기다가 선조의허물을 논한다느니 논죄를한다느니하는 막말을 카페를 통해서 주장하는것은 아주 잘못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p.c도없고 hㆍp로 글을 보고 쓰려니 아주 어렵고 힘듭니다만 귀하가 주장하시는것중에서 몇가지만 반론을 제기합니다
용흥사의변 ㆍㆍ에서1논점 묘가 증거다. 라는 주장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고
우리 흥양이가의 最古의모소는 대사헌의 묘소이고1438년에. 귀하가 얘기하는 청백리공의 묘소는 1483년에 경북상주시 낙동면 물량리에 반장하신것으로 기록되고 묘사도 매년 지내고 있는데고흥 풍양에 수백년간 모셨다는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고
흥양이씨 지명 운운에서
흥양군의 아드님의 휘자도 전혀 들어보지못한 이름들이고 서술하신 내용이 우리 족보와는 거리가 먼 얘기이고 혹시나 타성의 족보를 얘기하시는건 아닌지?
여러가지로 불합리하고 수긍할수없는내용을 네쪽이나 올리시고 불경한 어투로 글을 올려서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어떻튼 귀하와 논쟁을 하고져 이글을 올리는것은 아니고 귀하가 주장하시는 내용들이 맞지 않다는것을 알리고져 함 입니다
혹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면 죄송하게 생각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첫댓글 월간 파의 이권 회장님 고흥의 역사서인 흥양 읍지에는 부윤공 이언 할아버지가 청백리로 녹선된 사실과 함께 그분의 묘소가 현의 서쪽 풍양면 소곡리 홍곡에 있다고 명확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1483년에 묘를 상주로 옮겼다면 이후 정기적으로 수정 보완된 읍지기록에서 묘소 위치가 삭제되거나 상주로 이장되었다고 적혀야 합니다
하지만 읍지는 수백년간 할아버지를 고흥의 인물로 묘소를 소곡의 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저의 내력은 아래의 글들에 자세히 밝혀 두었으니 다시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고조부때부터 저의 집안은 소곡에 들어가서 그 묘소를 지키고 묘사를 고흥에서는 시제라고 하지요 준비하고 주관했던 집안의 후예입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묘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고흥의 사원이나 인물을 다루는 내용에서 부윤공 할아버님은 고흥을 빛낸 본고장의 선조로 등장합니다
특히 그할아버지의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하며 내려온 보천을 정통 세거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입니다
묘소를 옮겼다면 그 일가는 더이상 그땅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국가의 기록은 500년 넘게 그곳을 흥양이씨 보천파의 발상지로 공인하고 있습니다
하여 창석 할아버님께서는 나의 뿌리는 보천이라는 글을 남기신겁니다 가첩에요
국가의 기록인 흥양읍지와 창석 할아버님의 친필가첩 현장의 묘소 오래된 묘비라는 삼위일체가 형성됩니다
상주파의 주장은 1934년 목판본 가첩 이후의 주장이고 상주에 있다는 청백리 할아버님의 묘는 가묘이거나
상징적으로 조상의 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묘일것입니다
집안의 일반적 주장으로 국가의 공인 기록을 바꿀수는 없는것입니다
그리고 용흥사 목판본 이전의 필사가첩과 족보를 다시한번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000년에 대종회장 이종수 어르신과 당시의 유사들이 이러한 기록을 인터넷 족보에서 바로잡은 사실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사정을 자세히 살펴 주실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흥양이씨 보천파 언림 할아버지 29세손 보천파 지파 5대종손 이방일 삼가 머리숙여 올립니다 ...........................................
우선. 여백의미라고하니 대화하기가 거북하고 무슨파 모모의 몇대손등 제가 누인지를 알아야하고 지파종손이라는 말은 적절하지않은말인듯하고 우리흥양이가의 보편적으로 쓰는 가령 흥양파 누구누구의 주손이라고해야 알듯하고
청백리공의 산소는. 대사헌공산소와 부자분을 아래위로 모시고 있어며. 흥양 군위 상주 단밀파의 자손들이 매년 돌아가면서 벌초와 묘사를 모시고 있는데. 귀하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이런 얘기를 카톡으로 턱도 아닌 주장을 하니 더는 대화하기가 싫습니다
이것은 대종회차원에서. 규명하고 판단을 해야하니 카톡으로 얘기하지마시고. 대종회로 통보하십시요
추가로 한 마다 더 말씀드린다면 아레에 내가 썼던 홍곡단풍혈의 전설의 모티브가 될만한 사건이 여기에 있지 않나? 하고 생각되는 점이 있습니다 1483년에 상주시 낙동면 반장 하였다는 기록입니다
홍곡 단풍혈 전설에 의하면 오랜 옜날에 무슨일인지 파묘를 단행하였다 건너편 논에 농부들이 하얀 김같은 정기가 빠져 나오는것을 보았다 알렸다 하지만 늦어서 용새가 무덤을 똟고 날아 올랐다 용바위에 앉았다가 용치강 물에 투신했다
이것을 보면서 후손들은 후회하면서 묘를 그대로 유지했다 재발복을 기다리며 소름 돋지 않습니까? 1983년에 상주 어르신들이 청백리 할아버님의
묘를 이장하려 시도 하였으나 이와 같은 전설의 배경으로 인하여 그냥돌아가셔서 묘를 이장했다고 기록했거나하여 목판본에 그러한 이장했다는 기록이 실렸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청백리공 할아버님의 묘소는 그대로 흥양 즉 고흥 소곡리 남쪽 문중산에 그대로 계시고 제가 정확히 그위치를 알고 있으며 어릴때 할아버님 손을 잡고서 참석하여 시제를 지내고 어른들이
가반하는동안 뛰어 놀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집안 어른들을 통해서 이 이야기를 들은것이 아니고 타성씨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이유는
아마도 이는 가문의 비사이고 문중간의 다툼의 기록이기도 하기에 그곳이 홍곡단풍혈의 명당이라는 사실만 가르쳤지 전설은 전해주지 않았고 그것을 들어서 알고있는 제 친구에게 듣게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래의 글들에서 누누이 밝혔습니다 흥양이 고흥이라는 지명과 우리흥양이씨 본관과는 무관한가라는 글을 보시면 나옵니다
회장님 흥양 보천파이고 언림 할아버지의 29세손이며 증조 할아버지 종자화자 함자 할아버지 함자 채자화자 아버지의 정자윤자 함자까지 다 밝혀놓았습니다 그리고 제이름 이방일까지도요
그리고 전 일방적인 제주장을 하는것이 아니고 조선시대 관에서 편찬한 흥양읍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객관적인 자료로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머리숙여 깊이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전 이곳이 흥양이씨 종친회로 되어있어 이곳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따로 대동회 게시판이 있다면 알려주신다면 다시한번 거기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겠숩니다
구보에도 귀하의 신원이 확인되지않아. 대화할 필요를 못느낌니다
이사항은 대종회에 연락하고 협의해서 구명하시도록하고 확인되지않은사항으
로 조상을 폄훼하지 마십시요
참고로 돌아가신어른의 이름은 휘자라하고 살아있는어른의 이름은 함자라하고. 또 귀하가 얘기하는 종손은 주손으로 얘기해야 맞지싶습니다
참고하십시요
더는 이건으로 카톡에서 토론하지말고 대종회를 통해서 구명하십시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합니다
회장님 구보에 신원이 획인이 되지 않는다고 하셔서 저도 자세히는 보지 않았던 족보를 찬찬히 뜯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 가문은 이러합니다 수직 계보입니다 ~~~ 11세 청백리 부윤공 ~~~~~19세(창석공) 할아버지 곧 상주에서 나의 근원은 보천이다 하신분입니다 월간공 할아버님의 동생이 되시죠~~~~20세이영회 창석공 활아버지의 3남 ~~~~~~~25세이석 저의 고조부이십니다 ~~~~26세 이종화 저의 증조부이십니다 ~~~~27세 이채하 저의 조부님이십니다(일제시대를 지내면서 면에서 주로 호병계장을 하시면서 나중에 은퇴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최종 직위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중 어른들과 대소사를 논하시고 문중일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28세 이정윤 저의 아버님 함자입니다 주로 풍양면 소곡부락에서 이장을 오래하셨습니다~~~그리고 저 29세 이방일입니다 대동보에도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증조부때까지는 형제분들이 게셨으나 할아버지부터 저까지는 단손으로 이어져 제가 3대 독자가 됩니다 하여 제일 가까운 친척들이 저에게는 5촌 정도 되는 분들입니다 하니 제 족보에 이상이 있다는 말씀은 받아 들이기 어렵습니다
중요한것은 새로 알게된 사실인데 제가 창석 할아버지의 직계손이라는것과( 창석 할아버지의 3남 영자회자 할아버지후손) 월간 창석 할아버지의 부친이 되시는 이자 수자 자인 할아버지도 흥양분이셨고 월간 창석 할아버지도 흥양에서 상주로 이주하신걸로 파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석 할아버지의 3남인 영회 할아버지가 흥양으로 다시 돌아오셔서 본향을 지키신거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전 막연히 보천파이기에 월간 창석 할아버님계서 저의 직계가 되시는지를 몰랐습니다 이번에야 제가 창석할아버님의 직계손인걸 확실히 알게되었습니다 다 제가 무지하고 모자른 탓입니다 ~~~~이렇게 알고보니 갑장산 용흥사의 변이 일어난 배경이 어느정도 파악이 되기도 합니다 ~~~~국가 공인 실록 선조실록및 선조 수정실록에 임진왜란초기 전라도 지역의 의병봉기 기록이 나오는바 흥양고을의 이전(월간) 이준(창석)형제가 가산을 털어서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조달하여 호남과 영남의 전선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입니다 흥양읍지에도 기록되어있고요 임진년 4월 왜적이 칩입하자 이전 이준 형제가 보천에서 격문을 띄워 고을의 장정 수백명을 모아 의병을 창의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창석 할아버님이 직접 쓰신 창석유고에도 본향에서 전란을 만나 형님과 함께 의연히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는걸로 전해집니다 이것은 이 두분 형제가 상주로 가시기 전의 일로 보여집니다 즉 고향인 흥양에서 거병하여 영남일대까지 가셨다가 상주에 정착하셨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 참고문헌 선조수정실록 권26(1592년7월1일기사) 흥양읍지 인물편 ~충절부분 ~사묘부분 ~성씨조 부분 보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기록이 뚜렸합니다 즉 월간 창석 할아버님은 원래 상주분이 아니고 흥양보천에서 태어나셔서 의병을 일으키고 활동 하시는 가운데 상주로 가신것입니다 ...다시한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유재란떄 상주파의 희성 할아버지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하신 희열 할아버님은 창석 할아버님의 손자가 되십니다(창석할아버지의 3남 영회 할아버지의 아드님)
귀하가 얘기하시는건 전혀 사실이 아니고우리족보에 없는내용입니다
첫째 청백리공은10세
창석공은15세
창석공의 3남은16세로서 세수가 전혀 안맞고
둘째
창석의3남의. 휘자는 文圭이시고 귀하가 주장한 이석이 아니고
귀하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아버님의. 휘자는 저희 족보에 없는분이니 귀하는 우리와 일가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족보에 대해서. 더이상 논하지 말기 바랍니다
선조실록이 거짓말을 하거나 흥양읍지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2000년대 후반에 종이책으로 발간된 최신판 대동신보에는 저의 가계가 그대로 수록이 되어있습니다 대동종친회 인터넷 족보에도 들어가 있다는 확인을 받았습니다 다시한번 확인해주시기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이종린어른과 용흥사 목판본에 대해서 그토록 분노하며 논죄를 할뻔 했던 이유가 그토록 종계를 되집어 없는 인물을 만들어 내고 뺴고하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족보를 찍어냈기 떄문입니다 ~~~지금은 제가 그토록 일갈했던 문중 즉 창석 할아버님의 직게손이 바로 저라는것을 알고 황당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해도 저의 가문과 용흥사보첩사건 주도한 사람들과는 무관하니 안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우선 귀하가 어느집자손인가?
귀하의 가계를 알고. 글로 옮겨야합니다
괜히 나의 집에 들어와서 옳지못한사실과 기록을. 상상과 생각으로 엮지 마십시요
먼저 대동회에서 최근 만들어낸 인터넷 족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대동신보도요 거기엔 저뿐만 아니라 부족하지만 제딸들 둘 보미와 금하까지 30세로 당당히 올라가 있습니다 이제 저뿐만 아니라 제 여식들까지 이제 올립니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 내용은 흥양읍지 내용은 우리문중 사람 아무도 모르는것일수도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해주신 덕분에 자료를 찾는과정에서 저도 우연히 발견한거니까요 하니 선조수정실록 26권 (1592년 7월1일 기사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흥양읍지 인물편에서 충절조와 사묘 성씨조를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그후 다시 이야기를 나눌수있게 되기 바랍니다 다시 머리숙이며 이만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데로 귀하는 우리 일가가 아닌걸로. 생각됩니다
인터넷족보는 저희는 자료를 준 바도 없고 동의하지않는 것임을. 밝힙니다
왜 남의 집에 들어와서 시끄럽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꼭 하실 얘기가 있어시면 대종회를 찾아가서 하시기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여백의미에대한 일부 답변입니다
제가 족보를 검토 해보니(창석할아버지직계손이라 하셨는데) 족보상 수자생자 할아버지 손인 십이세 희성,희증,지증,세분이있는데 지금 글을 올린분은 지자증자 후손으로 창석공의 직계는 않입니다, 창석공은 수자천자(수천)언 선조님의 삼자입니다
원철님 대종회 공식보첩기준으로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창석 이준 할아버님의 함자는 수인으로 명시되어있고 삼남 영회 할아버님으로부터 나(이방일)로 이어지는 계보가 일직선으로 박혀 있습니다 대종회에서 기록한 족보가 틀린걸까요? 만약에 틀렸다면 그것이 왜 틀린것인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께서 본족보는 수생조상님후손21세 갑령의자 22세중 종순,종배,종인 삼형제분인데 수천조상님 은 자가 태년,조년,구년,희년 이구요 손자가 침,탁,이구요,증손자가 탁의후손이 14세 수인,홍인,호인, 종인,우인,처인 입니다
댓수를 잘못 알고 있는 지 궁금합니다
확인 바랍니다
월간 종친회 이건 회장님 단언 하실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대종회의 인터넷 족보가 틀렸다는 말씀인데 그것이 왜 틀렸는지 논거를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이종린 어르신의 허물 운운 한글에서 ~~~~용흥사 목판본 가첩이 가계를 심하게 뒤틀리게 한 원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회장님 께서는 그 목판본이 옳단 주장을 하고 계시는건지 궁금합니다
상주 사찬 읍지인 상산지에는 월간 창석 할아버님을 세가인으로 기록하지 않고 이거인 우거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양읍지가 적극적으로 흥양출신임을 강조하는것과 맥을 달리합니다 더군다나 이 상산지는 창석 할아버님이 편찬하는데 많은 영향을 행사한 사찬 상주 읍지입니다
우거인(寓居人) 기록: 이는 단순히 '이사 왔다'는 의미를 넘어, 가문의 원적(原籍)이 여전히 흥양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상주 입장에서는 이분들이 상주를 빛낸 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읍지의 편제상 뿌리가 외지에 있는 '우거(잠시 머물거나 옮겨와 사는)' 성씨의 범주에 넣은 것입니다
나는 우리 일가도 아닌분하고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싶지 않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6.04.20 15:13
판단은 개인의 몫이지만 공인된 자료들은 어찌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저를 종친으로 인정하든 않든 제겐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회장님이 부정하신다고 제가 제아버님의 아들이 아니게 되겠습니까? 제조부님의 손자가 아니게 되겠습니까?
저도 몰라서 이리저리 헤매면서 가지만 설령 저의 시조님이 농부였다고 해도 나무꾼이었다고 해도 어부였다고 해도 혹은 어느댁의 노비였다고 해도 부끄럽지도 않을거고
유구한 세월속에 잘못 기록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찾아서 바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노비 조상님을 만난다고
해도 전 오늘의 저를 있게한 그 인연의 힘앞에 고개 숙일거고 감사의 인사를 올릴것입니다 왜곡된 기록이라면 설령 그 근원이 천자 제후 신에 닿았다고 할지라도 거부할것입니다
전 왜곡되지 않은 진실된 저의 뿌리가 중요하고 그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을 뿐입니다
대종회가 공인한 전자족보 753페이지에 저의 이름 석자가 박혀 있습니다 여기엔 상주계로 구분이 되어있군요
만약에 아니라고 생각되시면 무조건 아니라고 하시지 말고 객관적 근거자료와 함께 제시하시면 그걸 대종회에서 받아들이면 전 인정하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럴가능성은 거의 없을겁니다
원철님
18세 이수인(창석할아버지의 아버님)~~~~19세 파조 이준 (창석 할아버님)~~~~ 20세 이영회(창석 할아버지의 3남~~~~21세 이성지~~~22세 이필기~~~23세 이만휘~~~24세 이진웅 ~~~25세 이사익(저의 고조부님)~~~~26세 이종화(증조부님) ~~~~27세 이채하 (조부님) ~~~~28세 이정윤(아버님) ~~~~29세 이방일~~~~이렇게 가계가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대동보 기준입니다 그런데 원철님이 제시하시는 족보는 어느걸 바탕으로 하시는건지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알고 있는 부분이 있나 싶어서입니다
방일님
흥양이씨전자족보에보면 이수인은 14세이고 이준은 15세입니다,방일님이 보여주신 대수하고는 4대차이가납니다
이준님은아들이 대규,원규,문규,광규,정규,신규이구요 영자회자는 없느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흥양이씨 대종회 에 접속하시여 검색 하여 주시면 나와 있습니다
참고하십시요
14세 이수인( 창석할아버지의 아버님)~~~15세 이준(창석할아버지)~~~16세(대규,원규,문규,광규,산규 5형제중 3남은 문규입니다)
참고하세요^^
낙동면 물량리 대사헌공 묘소입니다.
방일님
전자족보 기준으로 방일님의 직계로만 나열해보겠습니다
선조님의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9세 은 ㅡ10세언 ㅡ11세 수생 ㅡ12세 지증 ㅡ13세맹무 ㅡ14세승종 ㅡ15세세훈 ㅡ16세 경일 ㅡ17세신발 ㅡ18세희안,
19세 진휘 ㅡ20세 이배 ㅡ21세 갑령 ㅡ22세 종인 ㅡ23세시욱 ㅡ24세 서기 ㅡ25세 사익 ㅡ26세종화 ㅡ27세채하
28세정윤 ㅡ29세 방일
고흥서 올려주신 수단 내용입니다
이런 순서로 방일님의 직계조상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단에 착오가 있는가요?
방일님
또한 방일님 이 제시한 24세진웅님부터23세만휘,22세필기,21세 성기 20세 영희까지 전혀 수단을 제시한 내용과 다름니다
저는족보를 가첩부터,상주보,무주보 고흥보,수원보,담양보등과 씨족원류라는 책에서도 흥양이씨 계보를 보았습니다,
특별하게 전자족보나 기존족보와는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처음이야기하신 휘길님의 아들들의 존함이 달라 깜짝 놀랐고요,두번째는 휘창석공 후손 내용이 달라 놀랐습니다,
뭐 특별하게 밝힐것이 있습니까?
본인의 문집 창석집 가문의 내력을 적은글에서 영원 영후님은 상주에 정착했으나 섹째 아들인 이영회는 고흥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창석집 권말 또는 부록 가계의 행장부분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흥사 본이나 여타 기록에서 우리 보천 종가의 실상과 문집 기록을 무시하고 조작했다는 증거일것입니다 지금보니 저도 의아합니다 왜 창석 할아버님이 분명히 이름을 기록한 영회라는 이름은 빠진건지 우리가 찾아야 할 부분일것입니다 ~~~~고흥에서 보낸 보냈다는 수단의 존재는 인정하겠습니다 하나 우리 문중의 족보는 왜 비교교차가 안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선대에서 올려 보냈겠지요 제가 고향을 떠난 이후 누군가가 올린것으로 생각됩니다 창석 할아버님의 문집에 등장하는 영원 영후 영회 영발 이란 분들은 어디로 가시고 대규 원규 문규등의 이름만 등재가 되었는것입니까? 그리고 19세조 자리에는 진휘라는 분이 등재되어 있는겁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보천 보천 종가의 실상과 문집기록을 무시하고 조작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어둡던 시절 보천 쪽에서는 눈 어두운 분이 무분별하게 상주쪽에서 배포한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거나 하여 문제가 발생한거라 여겨집니다~~~~
도대체가 저 역시 이제야 겨우 가문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 저것 들여다 보고 나름의 토대를 세워 가기는 하지만 이것이 용흥사 의 변 한번의 위변조 문제인지 아니면 그전에 실전 누락의 문제인지
그냥 창석집의 내용만 기준으로 삼아도 어느정도 객관적 자료를 남길수 있었을탠데 창석 할아버님의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고 공인된 국가기록을 가지고도 의문점을 가질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이 존재하다보니
이제 창석할아버님의 가첩말고 그이후의 기록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혼자 한 몸으로 어느분들을 대상으로 누구에게 이러한 잘못을 논하고 근원부터 돌아가서 창석집을 기준으로
다시한번 족보를 정밀분석하고 새로 짜야한다고 말해야 할지~~~~보천파 비전 족보에 기록된 이희열 할아버지는 이제 겨우 발걸음을 떼었는데도 이러하니 방향도 모르겠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답답할 뿐입니다
가첩에 등재된 영회공은 어디로 가고 엉뚱한 이름들만 가득하며 영회 할아버지의 아들인 비전 보천파 족보에 향토사 읍지에 기록된 희열 할아버님은 어디로 가고 이성지라는 분이 들어 있으며~~~~누가 속시원히 말씀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머리가 터져버리기 일보직전 입니다 하지만 중요한건 어찌되었든 나와 내 고조부까지의 기록이 실제한다는 것이고 위선에서 혼선이 온건 진휘라는 가짜 라인을 만들어 고흥의 창석 할아버님의 자손들을 억지로 방계로 밀어 넣은 결과가 아니냐고 의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흥양읍지 인물조 성씨조에 보면 창석의 후손들이 보천에 세거하고 있다는 기록과 함께 그가계의 핵심인물로 영희 할아버님과 희열 할아버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창석집의 창석 할아버님의 유고와 일치하지요 우리 대동회 족보와 여타 족보에는 왜 이분들의 이름이 없습니까?~~~~잘 아실만한 분께서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장 확실하게 우리가문의 가첩과 족보를 위변조한 이종린과 그에 동조하거나 묵인한 정황이 명확한 분들을 제가 심정적으로 논죄하지 않을수 있었겠습니까?
정두님 대사헌공의 묘소를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임린란 와중에 대사헌공이 돌아가시자 상주측과 흥양보천파 측이 서로 모시려 다투었던 그중요한 어른의 유택을 사진으로나마 보니 ~~~흥양보천파측은 우리가 뿌리이고 타향에 둘수없으니 모셔가겠다는 것이고~~~상주측은 우리가 모신 세월이 얼마인데 하고 다투었습니다 1660년대 전후해서 1800년대까지도 그러한 논쟁은 이어졌던것으로 >>>하여 잠정적으로 합의 되기를 뿌리는 흥양으로 하고 꽃은 상주로 한다하고 그대로 대사헌공의 묘는 상주에 남았던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이 한번에 뒤바뀐 사건이 바로 상주용흥사 갑장사의 변이고 그와중에 그 이후에 가첩과 족보는 마음대로 주물러져 발행이 된것이고 사실과 위조된 내용이 마구 혼재되어 그결과로 최근 전자족보마저도 정확하지 않게 되것입니다 마침내는 상주분들에게는 판본이 완전히 뇌리에 새겨지고 보천 사람들도 엇갈리는 상황이 된것입니다 이것의 문제를 제가 제기하고자 하는것이고요~~~아무튼 사진으로 나마 대사헌공 할아버지의 유택을 뵐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5년도 대사헌공 시제 모습입니다.
시제일정은 대사헌공(음력 10월2일) , 창석할아버지(10월5일)입니다.
방일님
저희파도 읍지와 전남도지에 선조님들의 존함과 벼슬이 있으나 다 맞지는 않습니다
그이유는 데부분 각집안에서 제출한 목록을 그대로 올려 발행하기 때문에 다는 아니지만 실제와 다른 내용이 기록 될수도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천만 다행인것은 창석 할아버님의 가첩 원본이 그대로 남아 국가자료로 남았다는것 ~~~~그떄 용흥사의 변때 좀더 눈밝은자가 있어 이러한 부분까지 세세히 찾아가며 다 고쳐놨더라면 아찔합니다 ~~~그리고 선조 수정실록이나 흥양읍지 창석 할아버님이 직접 만드신 상산지라는 상주 읍지가 남아서 진실을 전해 준다는것 ~~~심지어 돌아가신후 나를 본향인 흥양에 묻으라는 유언 내용까지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는것입니다 ~~그리고 그유언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후손들의 이름까지 조작하며 반대로 행동한 고약한 인사들이 있고 그로인해 오늘날 후손들이 엉뚱한 족보를 들고 헤매고 있거나 ~~~방향을 몰라 헤매고 있다는거죠 ~~~제대로 조상의 뜻을 행적을 알지도 못하면서 유지를 어떻게 이어나가겠으며 무얼 지킬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원철님 이점 역시 참고하여 더 추밀히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더 객관적으로 자료를 볼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방일님께서 중언부언 계속글을 올리시니 할수없이 몇자 올립니다
1,이원철종친께서 제시하신귀하의 계보와 논거는 인정하시는지?
2,창석문집의 가문의내력에 관한글이뭔지?
행장과 기타관 련되는글을 복사해서 올려주시면 알수 있을지 모르는데 올려줄수있을지?
또한 귀하가 가지고있는 자료를의심은 해보셨는지?
3,조작운운하는데 귀하가 가지고계신 기록이 조작되었는지 검토해 보셨는지?
검토되지않은 불확실한자료를 공공장소에. 발표해서 남의 조상을 비방한 법적인 책임은 질수있는지?
4,용현사변. 운운하는데. 내용과 글을올릴수 있는지?
5,이종린이 귀하의 친구입니까?귀하가 우리 일가라면 방조이신데 휘자를 마음데로 올리고 확실한검정도 거치지 않은사실을위변조되었다고하는지?
6,대사헌공은경주부윤으로계실때인 1436년에 돌아가셔서. 낙동으로 모셨고
청백리공 은1483년에돌아가셔서낙동으로 모셨는데
1592년의임진 란과 1598년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100년이 지난뒤에상주와 흥양이서로. 모셔갈라고 했다는게. 말이 됩니까?
또 목사공 휘자 수자생자하신 어른의 산소는1960년에 흥양 으로 이장했는데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합니까?
일부러 말썽을 피우기위해서 글을 올리는건지 진실을 알기위해 올리는건지 모르겠는데 너무 심합니다
대종회는 이런사태를 수수방관 해서는 안됩니다
대종회의 중요한 역활을 놓치시는겁니다
적극적으로 이일에 관여해서 정리를 해줘야합니다
도저히 저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첨언합니다
논점을 흐리는 질문들입니다 1~3번까지의 답 주장의 근거는 선조실록과 흥양읍지 창석 할아버님의 친필 창석집입니다 그중에 고흥에서 올린 수단 내용은 고흥에 있는 친척중 누가 올린것인지 모르지만 그러한 수단의 내용을 올린것을 인정하였습니다
4~5번에 대한 답은 용흥사의 변에 대한 이야기는 별첨 자료에 그과정을 대략이나마 이야기 하였습니다 회장님께서 제글을 자세히 읽으셨다면 충분히 파악을 하셨을 탠데요 가문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이견이 일어나거나 기록을 대조해 가면서 여러가지 오류도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제시한 자료중에 불확실한 자료를 제시해주시기바랍니다 내가 잘못된 증거와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그릇된 주장을 하는것이라면 그것이 왜 그릇된 주장인지 설명해 주시고 그 근거는 이렇다 하시면 타당한 논거와 증거라면 제가 사과하고 물러나면 되는것이고요 용흥사의 변에 대해서는 흥양이씨의 정통의 회복과 수호를 기뻐하며 라는 글에 별첨한 자료에 그상황이 쓰여있습니다
법적 책임까지 운운하시니 황당하기도 하고 겁도 납니다만 감당해야 한다면 어떡하겠습니까? 제가 감당해야지요
이제 이곳에서의 댓글 논쟁은 여기에서 끝내었으면 합니다 이제 이곳에서의 논쟁은 마무리 하고 제가 새로 올린글들 자세히 읽어주시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청하며 다시 한번 머리숙입니다 분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