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를 해야 한다고는 하는데 그렇다면 하라고만 했지 어떻게 하는지 만약 그 방법을 모른다면 회개를 하라고 하는 그 외침이 부질없는 외침과도 같을 것입니다. 세상에 회계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저는 언어유희를 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회개도 회개학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의도는 세상에도 어떤 길이 있으면 그 길을 가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길이 있다고 해서 가기만 한다고 그 길을 잘 가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단순히 회개하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걸 뉘우치라고 하는 것 그게 일차적인 회개의 의미라고 알고 있습니다. 액면적인 뜻은 맞지만 이면에 있는 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부님들께서 하시는 신학적인 뜻의 의미로 흔히 돌아선다, 방향을 돌린다, 등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저는 아무리 신학적인 뜻이 어떻다고 해도 그게 단순히 그 뜻만을 강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탁상공론처럼 소모적인 낭비만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뜬구름은 아니지만 뜬구름 같은 공자왈 맹자왈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현실적인 이야기가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입니다.
저는 군에서 통신병을 했습니다. 통신 작전 장교는 전자에 관한 학문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실제 현장에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병이 더 잘 대처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통신 작전 장교가 더 지식도 많고 더 잘 해야 하는데 아무런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사병이 더 잘 한다는 건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해석을 해야 할까요? 이건 지식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이론과 실제는 현실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계학을 요즘 다시 틈틈이 공부를 합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가령 어떤 회계학 문제를 풀 때 보면 회계학에서 원론적으로 하는 정석대로 풀이를 해야 하는데 정석대로 하면 국내 회계학 관련 모든 시험에서는 시간이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편법은 아니지만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신기한 풀이법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엔 이게 너무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맨 처음부터 이렇게 그냥 해서 실무에서도 회개처리를 하면 될 텐데 왜 구닥다리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냐고 누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가 신앙에 적용해보면 배울 점이 있습니다.
방금과 같은 방법으로 만약 회계학이라는 학문을 배운다면 그냥 임시방편적인 방법으로 어떤 현상만 제거할 수는 있는데 근원적인 문제 해결 능력은 배양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 어떤 회계 시험에 합격해 그 분야에 가면 원래 이론과 실무도 실제 다른데 그나마 이론만이라도 착실하게 정석대로 해결하는 능력을 함양한 사람은 실제 실무에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그걸 가르치게 되면 정석대로 배운 사람은 그걸 이해하는 습득능력이 있어서 금방 배울 수 있습니다.
근데 어떻게 편법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단편적인 답 찾기 식으로 회계를 배운 사람은 실무에서 실무적인 방법을 배워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게 보통 보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재정과 기업 경영주체에서 사용하는 회계 말고 신앙에서 사용하는 말인 회개도 이와 똑같다고 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해서 회개를 하고 싶어도 자기 자신은 회개라고 생각해 했다고는 하는데 그게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처럼 난감한 상황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론적인 내용만 저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지만 실제 세상학문인 회계가 실무에서 사용하는 방법처럼 이 회개도 실무적인 요소는 어제와 오늘 독서가 그 길잡이 역할을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점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쩌면 신부님들께서 어제와 오늘 복음을 강론하실 때 복음도 복음이지만 복음의 해설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독서의 내용에 대해 깊은 강론 준비를 하셔서 신자에게 그 의미를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다시 재해석해 영적으로 유익한 강론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성을 대한민국의 모든 사제분들이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 봤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게 전제되지 않는다면 몰라서도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없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이런 것을 한번 제안해보고자 합니다. 전례력에 따라 시기도 시기이지만 늘 하는 그런 원론적인 생각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저는 새로운 방향의 회개를 한번 제안해보고 싶습니다. 회개를 무거운 의미로 다가가기보다는 일상에서 아주 소박한 회개를 하는 걸 일상화하는 게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간과 장소의 한계를 탈피해 이렇게 하는 게 영적인 건강 측면에서도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묵은 때를 제거하는 것보다 평소에 묵은 때가 되지 않기 하기 위해 자주 가벼운 세탁을 하는 것처럼 회개도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 건강한 영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제요건이 있습니다. 세심증처럼은 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신앙인이라면 이 정도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 지점까지의 양심인 마지노선만큼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는 최소한의 마음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결단만 있다면 우리는 무거운 주제로 다가오는 회개가 마치 가벼운 소일거리처럼 일상 속에서 어떤 부담 없이도 건강한 영혼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부연설명 : 묵은 때 이야기에 대한 것입니다. 흰 메리야쓰 런닝 같은 속옷도 보면 예를 들면 매일 매일 세탁을 하는 경우와 며칠씩 만에 세탁을 하는 경우를 보면 처음엔 별 차이가 나지 않지만 나중에 시간이 계속 누적되고 경과되면 매일 매일 세탁한 런닝과 비교를 해보면 확실한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 세탁 주기나 갈아 입는 주기를 마치 회개를 하는 횟수처럼 생각을 해보면 그것도 재미 있는 묵상이 될 것입니다. 신선한 묵상이 될 것입니다.
깨끗하게 세탁을 했다고 해서 입기는 입어도 그래도 처음 입을 때 이왕이면 아주 깨끗한 백색 런닝을 입는다면 약간 누렇게 변색된 런닝을 입을 때랑 기분에서도 조금은 찝찝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해를 묵은 때 씻는 것처럼 씻어낸다면 나중에는 그게 마치 죄는 씻겨나가도 아주 깨끗한 속옷처럼 되지 않고 약간 누런 변색된 감이 있는 속옷처럼 우리의 영혼도 그럴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것도 보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아무리 좋은 표백제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는 표백처리가 잘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그냥 간단하게 표현을 해서 제가 좀 이해의 편의를 돕고자 부연설명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