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념과 개척정신으로 성공한 새마을
경북 대구시 북구 노원3가 지도자 김 성 기
성공내용
노원 3가동은 대구 중심가로부터 서쪽에 위치한 변두리 지역이며 제3공업단지가 위치한 신흥공업지역으로서 여러 곳에서 모인 이질적인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기심과 배타성이 강하여 협동심이 결여 된 도시지역으로 새마을사업이 뒤떨어진 마을이었으나,
김 성기 새마을지도자의 투철한 신념과 개척정신을 바탕으로 꾸준히 이끌어온 결과 전체 주민이 협동단결하게 되었으며, 마을환경은 일신 되었고 질서운동을 솔선 실천하며 근검절약을 생활화하는 도시새마을운동의 모범 지역으로 변모된 희망찬 시범 새마을이 되었다.
또한 김 지도자는 기능올림픽 3관왕으로 뜻있는 기능올림픽 수상자들과 함께 농촌 기능봉사단을 조직하고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약 3억 원어치의 고장 난 농기구 및 각종 가전제품을 수리하여 줌으로서 간접적인 농촌 새마을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마을현황
가 구 : 4,223 세대
인 구 : 25,056명(남 10,832명, 여 14,224명)
이웃과 내일이 없었던 변두리마을
대구시 북구 노원3가동은 대구시의 중심가로부터 서북쪽에 위치한 변두리지역이며 공장지대로, 전국각처에서 모인 주민으로 구성되어 이웃과의 대화나 인보의 정이 없는 이기심과 배타성이 강한 마을이었다.
마을안 하수구가 정비되지 못하여 오물과 폐수가 흘러넘치고 마을안길은 포장도 되지 않은 채 자갈과 먼지가 날리며 여름이면 파리와 모기떼가 들끓는 등 환경이 불결한 마을이었다.
김 성기 새마을지도자는 이러한 낙후된 마을을 개발해 보고자 하는 굳은 신념과 개척정신으로 밤낮없이 새마을운동에 정열을 불살라 마을 주민의 총화단결을 이룩하고 마을환경을 개선하여 살기 좋은 마을로 변모시켰으며 주민전체가 협동하여 전국 제1의 마을금고를 운영하는 모범새마을이 되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긴 뜨거운 영광
모범마을을 이룩한 지도자의 지난 역경을 돌이켜 보면 경남 합천군 청덕면 소례리라는 낙동강이 굽이도는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춘궁기의 굶주림을 숙명으로 알고 쑥 죽, 보리죽으로 연명하는 찢어지도록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나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향학열에 힘입어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도시락도 제대로 지참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운동화 한 켤레 신어 보지도 못하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녀야 했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산에서 나무를 해다 장터에 팔아가며 중학교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이었기에 고등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내고 낮이면 산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배워야겠다는 신념으로 밤이면 마을어른을 찾아가 한문을 배우며 고등학교 진학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브라함 링컨의 전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시골에 있으면 당장은 집에는 약간의 도움은 되지만 공부도 계속할 수도 없으며 더욱 큰 보람과 장래를 위해서는 배움의 길을 찾아 큰 도시로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마을에서 25km나 멀리 떨어진 이방마을까지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대구에 첫발을 디딘 것이 그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다.
아무도 반겨 맞아 줄 사람 없는 대구에서 불안과 초조 속에서 찹쌀떡 장사를 시작한 것이 고달픈 고학의 첫출발이 되었다.
처음으로 “찹쌀떡”하는 소리가 그의 목에서 터져 나올 때의 고통과 이것만이 살길이며 배움의 길이라 생각하고 모든 것을 참고 내일의 설계를 그려보며 떡판을 메고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면서 한푼 두푼 학비를 모았다.
추운 겨울밤 달성공원 앞에서 “찹쌀떡”하고 외치는 소리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떡판을 빼앗기기도 했고 불량청년들에게 떡판채로 털리기도 했다.
역 대합실, 남의 집 처마 밑 등을 전전하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노력한 결과 이듬해 경북지방의 명문인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찹쌀떡 장사와 가정교사를 하며 고학으로 학업을 계속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 1955년 전국 중 고등학교 미술실기대회에서 특상을 수상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다른 사람이 좋은 종이에 좋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때 신문지에 값싼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을 원망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의 결정으로 1970년 국가기능올림픽에서 미술 도장부분 금메달을 수상했고, 71년과 72년에도 연속 금메달을 수상하여 기능올림픽 3관왕의 영광을 획득하였다.
자랑스러운 기술을 산간벽지에 봉사
금메달 수상의 영광은 그의 어머님께 돌리고 지금의 그를 키워준 조국과 민족 앞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생각하던 지도자는 산간벽지를 찾아가 각종 고장 난 농기구 및 가전제품을 고쳐주는 농촌봉사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국제기능올림픽의 각 부분 수상자들을 찾아가 협조를 구하고 동조를 받아 200여 회원을 모아 봉사단을 창단하고 본격적인 농촌봉사활동을 전개하도록 계획을 수립하여 매월 첫째 주일과 셋째 주일을 이용하여 각 반별로 경상북도 내 산간오지 마을을 순회하면서 경운기, 양수기, 발동기, 탈곡기 등 고장 난 농기구 5,044대의 수리와 TV, 라디오 등 각종 가전제품 905대, 시계 630개, 재봉틀 212대 등 각종 고장제품을 고쳐주는 한편 문패 1,680개를 제작하여 달아주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처음에는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봉사단원들도 고장 나 밀쳐 두었던 물건들을 고쳐 주었을 때 기뻐하는 농민들의 밝은 모습과 새마을사업으로 매일매일 달라져가는 농촌의 새 모습을 보고, 대할 때 스스로가 보람을 느끼고 더욱 열심히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특히 지난 77년과 78년 봄은 유례없는 한발이 계속되었다. 그때 기계조립공, 동력배선공, 용접공들이 경북도의 한해 우심지역인 경산군, 고령군, 달성군, 청도군, 영천군 등 5개 지역에서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고장 난 양수기 175대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쳐 주어 한해극복에 크게 기여하여 식량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지난 3년간 그들이 봉사한 수리비를 금액으로 환산해 보면 약 3억 원이 넘는 거액이 되지만 봉사단원들은 이것으로 만족을 느끼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더 많은 봉사를 할 것을 다짐하면서 그들 자신의 내일의 설계를 알차게 세우고 있다.
반상회를 통하여 대화의 창을
마을일을 협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민들이 이웃을 알고 서로 만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변두리 공장지역이며 각처에서 모인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웃과 마을의 벽을 헐고 대화의 창을 열어 이웃을 사랑하고 마을일을 함께 의논하고 인보 협동하는 풍토조성으로 도시새마을의 시범마을로 육성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김 성기 지도자는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 미술관에서 나오는 나무 조각과 아크릴을 활용하여 관내 문패 없는 집 600여 가구에 문패를 달아주면서 반상회에 나와 줄 것을 권유한 결과 기대했던 이상으로 많은 주민이 반상회에 참석하니 서로의 이웃을 알게 되고 주민들의 좋은 의견도 종합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마을의 숙원사업인 안길포장사업과 하수구설치공사를 계획하여 주민들의 결의에 따라 1976년 이른 봄 공사를 착공하여 공사기간 내 685m의 안길 포장과 연장 10km의 하수구설치를 거뜬히 완공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하면 된다.”는 생각이 전체주민들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달라진 주민들의 정신에 힘입어 마을금고육성사업을 결의하고 전 주민이 참여하여 76년 당시 전국 제1위의 마을금고를 육성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질서운동을 위하여 내 집 앞 내가 쓸기와 휴지, 꽁초 안 버리기, 내 점포 앞 청소하기가 생활화 되었고 분수에 맞는 근검생활의 기풍이 조성되었으며 매월 2회 이상 소독기로 집집마다 소독을 실시하여 보건 위생에도 관심을 두고 있는 한편, 마을의 향토예군 한 사람이 숙환으로 대구동산기독병원에서 운명하였으나 가정이 너무 가난하여 시체인수비가 없어 장례마저 치루지 못하고 있는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이웃일이 곧 나의 일이다.”하며 그 이웃을 돕기 위하여 주민들은 성금모우기에 나서서 현금 24만3천원을 모금하여 시체를 인수, 장례를 치르게 해 주기도 하였다.
못다 한 효도를 조국에
그간 새마을사업에 열중하다보니 가정생활에는 충실하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 부인으로부터 가정생활에 충실하게 살 것인지 그만 둘 것인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는 사연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친정으로 가고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부인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집안일도 잘 처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올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 그는 부인을 설득하여, 다음 농촌 봉사활동을 출발할 때는 부인도 함께 데리고 가 고장 난 농기구를 가지고 안타까워하는 노인과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봉사단원들의 성실한 모습을 지켜본 그의 부인도 그 뒤부터는 스스로 농촌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의 부인도 마을안길 청소, 불우한 이웃돕기 등 새마을운동에 솔선하는 훌륭한 새마을역군이 되어 그를 도와주었으므로 그는 더욱 열심히 마을을 위하고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1977년 4월 봉사단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에 열중하고 잇을 때 “모친위독”이라는 전보가 왔으나 지도자로서의 사명감과 단원들의 사기를 위하여 출발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봉사활동 일정을 끝내고 급히 고향으로 갔을 때는 벌써 그의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유명을 달리한 후였다.
효도를 다하지 못한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고 “어머님을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어릴 때의 그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그는 어머님을 여의고 만 것이다.
그는 어머님께 다하지 못한 효도를 새마을사업과 농촌봉사활동에 바칠 것을 그의 어머님 무덤 앞에서 굳게 약속하고 더욱더 마을과 주민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활동을 계속한 보람으로 1977년 12월 27일 대통령 각하로부터 제5회 유신의 기수 상을 수상했다.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던 과거를 되새기며 80년대에 조국이 더욱 많이 필요로 하는 기능공양성과 밝고 알차고 번영된 내일을 위하여 그는 마을주민과 함께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