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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불성관
생사 걸고 정진하니 어떻게 시간 지나는지 몰라
당대 강백들의 회상에서 교학을 연찬한 후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던 스님.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몸이 상한 후에는 오직 참선과 사경(寫經) 수행으로 사문을 길을 걸었던 스님. 바로 무불성관(無佛性觀, 1907~1984)스님이다. 입적 후 <불교신문>에는 “학문과 덕행(德行)이 뛰어났던 숨은 도인(道人)”이라면서 “청렴으로 80평생을 일관했고, 법화경 사경(寫經) 솜씨가 뛰어났던 고덕(高德)”이라고 소개되었다.
“생사 걸고 정진하니 어떻게 시간 지나는지 몰라”
평생 근검절약한 청렴결백 수행자
‘법화경’ 사경 보시하며 施恩 갚아
○… 무불스님. 없을 무(無)에 부처 불(佛)이 법명이다. ‘부처님이 없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무불이란 법명의 진면목은 스님의 속성(俗姓)을 염두에 두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스님의 속성은 남씨(南氏). 속성과 법명을 이어 부르면 ‘나무불(南無佛)’이 된다. 나무불.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평생 불법(佛法)에서 어긋나지 않고 살았던 스님의 면모를 생생하게 드러낸 법명이다.
○… 스님이 출가해 수행하던 일제강점기는 물자가 부족했던 시기였다. 초 한 자루가 귀했다. 당대의 강백들에게 교학을 배운 무불스님은 단 1초의 시간도 귀했다. 어른들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배우려면 촌각을 다투어야만 했다.
<사진> 노년의 무불스님 모습. 사진제공=지허스님
당시 산사(山寺)에는 전기불은 당연히 들어오지 않았고, 법당에서 사용하고 남은 초에 불을 켜서 어둠을 밝혀야 했다. 그나마 촛불을 켜고 마음껏 공부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부를 단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낮에는 울력도 해야 하기에 공부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생각해낸 것이 달빛과 별빛이었다. 특히 휘영청 달이 밝은 보름은 공부하기에 너무 좋은 날이었다. 대중이 모두 잠든 후에 요사채 마루에 앉아 보름달을 벗 삼아 경전을 볼 때는 밤을 훌쩍 넘겨 새벽을 맞이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교학을 익힌 까닭으로 훗날 스님은 동학사와 유점사의 강사로 후학을 지도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 일제 당국에 의해 유점사 강원이 문을 닫은 후 스님은 정처 없는 만행 길에 올랐다. 유점사 강사 시절 독립운동을 하다가 숨어 든 학생을 숨겨준 것이 발각되어 여러 차례 왜경에 붙들려 곤욕을 치른 스님은 요시찰 인물이었다. 때문에 전국을 유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대전역을 지날 때의 일이다. 불러 세우는 왜경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이보시오. 거기 서라니까.” 왜경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대전역의 역전 파출소로 연행된 스님은 왜경에게 모진 봉변을 당했다. 척추를 다칠 정도로 몸이 상했다. 이후 스님은 경전을 옮겨 적는 수행인 사경(寫經)에 매진했다고 한다.
○… 1945년 8.15 해방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치악산의 어느 절. 한 젊은 수좌가 정성스럽게 절을 하고 있었다. 간절하게 절을 하는 모습에 말을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노스님이 “이봐 젊은 수좌! 이제 그만 절하고 내려와”라고 소리 쳤지만 수좌는 오직 절을 하는데 몰두했다고 한다.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 낮이 다 기울어서야 절을 마쳤다. 젊은 수좌가 무불스님으로, 훗날 “생(生)과 사(死)를 걸고 절을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몰랐다”고 그날을 회고했다.
○… 부처님께 귀의해 살았던 무불스님. 스님의 생활도 그러했다. 한없이 인자한 사람을 나타내는 세속 용어인 ‘부처님 반 토막’이란 표현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관련된 일화가 하나 전해온다. 공양시간이었다. 공양을 담당한 제자가 밥을 해 왔는데 물을 많이 넣어 질었다. 송구스러운 제자가 공양 상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스님, 밥이 질지요.” 무불스님이 답했다. “아니, 괜찮다. 먹을 만하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이번에는 물이 모자랐다. 면목이 없는 제자가 상을 올리며 말했다. “스님, 밥이 되지요.”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이 무불스님이 답했다. “아니, 괜찮다. 먹을 만하구나.” 스님은 모두 잠들면 몰래 일어나 상좌들의 양말을 손수 기워 주는 등 속정 깊은 어른이었다.
○… 한 없이 인자했던 스님이지만 제자들에게 늘 강조한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은(施恩)이 무서운 줄 알라”는 것이었다. 시주은혜의 고마움을 모르면 수행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이란 가르침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신도 집을 방문하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신도 집을 찾은 사실이 알려지면 혼쭐이 났다고 한다. 스님 당신도 남에게 신세지는 일을 죽도록 싫어했다. 신세를 진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갚아야 마음이 편했다. 말년에 <법화경(法華經)>을 사경해서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알게 모르게 지은 신세를 갚기 위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 스님은 발우공양으로 대중공양을 했다. 대중의 숫자가 많고 적거나,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대중이 모여 공양을 하도록 했다. 수행의 기본이 대중 생활에 있음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무불스님은 평소 “어린 사람도 대중공양을 통해 절집 규범과 살림을 배워 놓아야 나중에 어른이 되서라도 살림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대중공양에 나오지 않으면 눈물이 쏙 나오도록 꾸중을 들어야 했다. 또한 스님은 청렴결백한 생을 보냈다. 연말이면 상좌들을 앉혀 놓고 “너는 올해 얼마를 썼다. 내년에는 근검절약하거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삼보정재는 대중의 공통재산이니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 교학과 참선에도 밝은 스님이었지만 사경 정진 또한 스님의 중요한 수행이었다. 무불스님의 <법화경> 사경은 유명해 전국 각지에서 봉행된 법화산림(法華山林)에서 법문을 하기도 했다. 스님은 사경 하는 까닭에 대해 “일생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살며 부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부처님 경전을 사경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년에는 <금강경>을 금니사경(金泥寫經)해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 삼보사찰과 부산 범어사에 무주상 보시했다. 스님의 평생 소장품은 부산시립박물관과 범어사에 기증하는 등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사진> 무불스님이 정진했던 금강산 유점사의 능인보전에 모셔져 있던 53불. 사진제공=현종스님.
■ 행장 ■
동학사 월암스님 은사로 출가
초월 · 한영 스님 회상서 공부
1907년 9월 20일 지금의 서울시 중구 오장동 23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남영철(南永哲) 선생, 모친은 최씨(崔氏). 속명은 남점룡(南點龍).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한학(漢學)을 공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4세 되던 해. 출가동기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월암(月庵)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사문이 되었다. 동학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불가의 진리를 익히고 사미계를 받았다. 비구계는 1931년 8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스님을 계사로 수지했다.
동학사 백초월(白初月)스님 문하에서 사집과를 마친 것이 1931년 1월이었다. 이후 금강산으로 주석처를 옮겨 설호(雪湖)스님에게 사교과를 수료한 때는 1936년 1월이다. 이어 1938년 1월 경성의 개운사에서 박한영(朴漢永)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마쳤다.
<사진> 20대 중반에 금강산에서 정진하던 시절의 무불스님. 사진제공=지허스님
당대 강백들의 지도를 받은 무불스님은 계룡산 동학사(1940년9월~1943년2월)와 금강산 유점사(1943년2월~1944년1월)에서 강사(講師, 지금의 강주에 해당) 소임을 보며 후학을 가르쳤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라며 침략전쟁에 혈안이 된 일본 제국주의는 젊은이들을 강제동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 전역의 강원을 폐쇄했다.
이때 유점사도 강제 폐문(閉門)이 되어 스님은 강사직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스님은 걸망 하나에 의지한 채 전국을 주유(周遊)했다. 이 과정에서 왜경(倭警)에게 붙잡혀 봉변을 당한 후 몸이 심하게 상했다. 척추를 다친 스님은 이후 사경(寫經)과 참선(參禪)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정진했다.
금강산에서 정진할 무렵 대륜(大輪)스님을 법은사로 모신 스님은 1951년 부산 동래 금정선원장과 1957년 동래포교당 주지를 지냈다. 1970년 부산 연화사를 창건했고, 1973년 동래 금용암 주지로 포교 일선에서 수행 정진했다.
스님은 1984년 2월 약간의 병환을 보이다, 같은 달 11일(음력)에 원적에 들었다. 법납 64세, 세수 80세. 영결식은 부산 금용암에서, 다비식은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엄수됐다. 스님은 입적을 예감하고 “부처님의 은혜와 시주 은혜를 다 갚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라면서 “사리를 절대 거두지 말라”고 당부했다. 제자로는 종학스님(부산 불광사)과 지허스님(김해 황룡사) 등이 있다.
■ 광덕스님과의 인연 ■
무불스님은 광덕(光德)스님과 각별한 사이였다. 부산 금용암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광덕스님은 당신이 직접 작성한 추도사를 낭독하며 무불스님의 행적을 기렸다. 추도사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지금 여기 모여 고개 숙인 불자들과 천하 대중들은 스님의 뜨거운 서원력, 지중하신 정진법문으로서 스님과 함께 하고, 이 교단 이 조국을 두호하며 빛내 갈 것을 굳게 마음 새깁니다.”
광덕스님은 무불스님의 행적에 대해서도 손수 글을 남겼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며 전국을 주유한 무불스님의 행장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스님께서는 몸을 법의(法衣)에 잠기시면서 그 광휘(光輝)는 겨레와 조국의 번영을 끊임없이 비추셨습니다. 왜경에게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낙인을 찍히시고 함경도 오지를 드나들고 동만주 지역을 샅샅이 순석(巡錫)하시며 나라 잃은 동포의 아픔을 달래시고 그 가슴에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