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황주(黃州) ·원주(原州) ·장연(長淵)의 3본이다. 이밖에도 가은(加恩:聞慶) ·전주(全州) 등 여러 본이 전하지만, 동일 연원의 분파로서 현재는 통용되지 않는다. 송 ·원대(宋元代)의 귀화 성씨로 알려져 있다. 황주 변씨의 시조 변려(邊呂)는 원래 중국 농서(隴西)지방에 살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와서 황해도 취성(取城:黃州)에 살았다고 한다. 원주변씨의 시조는 송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의 심양로천호(瀋陽路千戶)를 지낸 순(順)이다. 그는 여의 후손이라고 전하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순의 손자인 안열(安烈)이다. 그는 원나라의 병부상서로서,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를 본관으로 받았다. 안열은 고려에 들어온 뒤 홍건적을 격퇴하고 왜구를 무찔러 큰 공을 세웠으나,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태조 때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이(頤), 정종의 부마 상복(尙服), 태종의 부마 효순(孝順),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에 오른 수(脩) ·사겸(士謙), 선조 때 공조판서 ·포도대장을 지낸 협(協), 충신정문이 세워진 응정(應井), 이 밖에도 양걸(良傑) ·영청(永淸) ·흡(潝) ·헌(憲) 등이 있다. 황주변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된 이중(以中), 그의 아들로 학문에 이름난 경윤(慶胤), 숙종 때 지평(持平)을 지낸 휴(烋), 영조 때 학자 괄(佸)과 공조판서 ·돈령부판사를 지낸 치명(致明), 정조 때 호조 ·병조판서 ·돈령부판사를 역임한 득양(得讓) 등이 있다.
*우측의 묘와 좌측의 묘 모두 수맥유해파에 있는 상태이며 좌측의 묘보다 우측의 묘가
더 수맥유해파의 피해가 더 크다고 감정되어졌다.
장연변씨의 인물로는 세종 때 중추원부사를 지낸 처후(處厚),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사정(士貞) 등이 있다. 변씨는 조선시대 총 40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변씨 인구의 약 90 %는 원주 변씨가 차지한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3만 2927명으로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61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인구 5만 379명으로, 전국 인구구성비 0.1%, 순위는 274성 중 제63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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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가 담겨진 고유문(古由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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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변씨 부하공묘 역시 수맥이 교차되는 곳에 묘가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