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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8 -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으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다!
우리 속담에 울던 아이가 호랑이가 온다고 해도 그치지 않다가.... “곶감” 소리에 그쳤다는
말이 있고, 또 아이가 뭘 잘못하거나 떼를 쓰면 “이비야!”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서양 속담에 "한니발이 바로 문앞에 있다 (Hannibal ad portas)" 라는게 있으니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는 말이며.... 에너미 앳 더 게이트 (The enemy at
the gate) 도 여기서 따온 말로 로마 여인들은 이 말로 우는 아이들을 달랬다고 합니다.
기원전 221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던 에스파니아에서 하밀카르의 뒤를 이은 사위이자 총독
하스드루발이 하인에게 살해되는데.... 그는 하밀카르의 아들로 후계자인 한니발의 후견인
이었는는데, 이때 26살로 총독에 오른 한니발은 1년간 에브로강 이남을 완전히 제패하기
위해 노력했으니 원주민의 용맹함은 갈리아인 보다 뛰어났으니 완전 제패는 불가능 했습니다.
그후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가 포함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
의 로마 본토를 공격한 것으로 유명하고..... 또한 전설적인 칸나이 전투에서 전무
후무한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끝내 로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으며 결국 로마의 장군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자마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하지만 패전했음에도 명장으로 칭송받으니 전쟁 결과와 별개로 뛰어난 지휘력과
전설적인 전과는 부정할수 없기 때문이니... 적국이었던 로마도 그를 명장
으로 칭송했으며 오늘날 조국인 카르타고, 포에니 전쟁, 그를 꺾은 스키피오는
몰라도 한니발과 알프스 원정은 아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명성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니발은 1차 포에니 전쟁 막바지에 시칠리아 전선에서 분전했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설욕을
위해 로마와 전쟁을 결심하지만, 카르타고는 해상무역을 위해 해외식민지를 보유하려는 해외파
와 당시 비옥한 아프리카 농장 경영만으로도 많은 수익을 올리는지라 전쟁을 피하자는 국내파
로 양분되었으니 한니발이 먼저 로마에 전쟁을 걸면 국내파 지원이 어려운 것을 알기에 고심합니다.
전쟁을 하고 싶었던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월남전쟁을 일으켰듯 한니발은 로마측이 전쟁을 걸어
오도록 계기를 만들기 위해, 기원전 219년에 마르세유 처럼 그리스인들이 세운 에스파냐 동쪽 항구,
로마와 동맹인 사군토를 공격하였는데 사군툼은 히스파니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로마의 동맹시
였으니 로마의 대외 정책은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여 동맹시를 늘리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사군툼이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니 원래 동맹관계를 소중히 하는 로마인데다가 중요한 동맹시인 사군툼
이 함락당하면 로마의 대외적 위신이 훼손될수 있었으니 이는 스페인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감퇴
하고 동맹시들이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 포강까지 국경선을 밀어올린지라
피아첸차와 크레모나에 방어요새 식민도시를 건설중이었으니 당장 군대를 파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로마군은 갈리아인들을 견제하느라 북이탈리아 지역에 묶여 있었으니 이를 읽은 한니발이 고의로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보는데, 원로원 의원 2명이 사군툼에 사절로 파견되어 한니발을 만나 항의합니다.
하지만 한니발은 확실한 답을 주지 않고 오히려 신변보장이 어렵다고 말하자 로마 사절단은 카르타고
본국으로 향하는데 미리 한니발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으니.... 기원전 226년에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맺은 협정에는 에브ㅡ로강 북쪽을 침범하지 않겠다고는 했으나 사군툼은 그 남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로마의 위법 행위를 역으로 추궁했으니 당시 양국의 조약에 따르면 로마는 사군툼
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되었으니 에브로강을 경계로 양국의 세력권을 정한 뒤 이를 침범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며 게다가 과거 카르타고의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사군툼의
동맹을 인정한 일이 있었지만 이는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쳐 비준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로마 사절단은 전쟁이냐 사군툼 철수냐 양자택일을 강요하자 이런 로마의 태도는 카르타고 원로원의 분노
를 부채질했으니 "한니발을 말리지 않겠다. 전쟁을 선포하면 받아들이겠다." 강경하게 답변했는데,
로마의 사신 파비우스가 "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 라고 호령하자 카르타고 원로회 측에서
"그대가 주고싶은 것을 줘라" 라며 받아치자 파비우스가 "좋다, 전쟁을 주겠다" 라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국내파의 리더 한논은 불길한 예감을 품고는 로마의 명예를 손상시킬 기회가 생겼다고 기뻐
날뛰는 동포들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애썼으니 “성품이 격렬한 그 젊은이가 바르카스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이 이중으로 위험하다, 사군토를 공격하면 로마와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니 사군토에서 손을 떼게 해야한다” 하지만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는데,
프란시스코 도밍게스 마르케스 작, “사군툼의 마지막 날, 1869년” 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기원전 219년 사군툼(사군토)는 8개월간이나 수성하다가 함락되었는데 주민은 노예가 되었으며 전리품의
3분지 1은 병사에게 또 3분지 1은 카르타고 본국에 보내고 나머지 3분지 1은 한니발의 전쟁경비로
남겼으니 로마는 카르타고와 전쟁을 결의했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천하의 한니발이 능력이 없어 오래
걸렸다기보다는 로마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때가 무르익을 때 까지 일부러 성의 함락을 늦춘 것으로 봅니다.
로마가 먼저 선전포고를 한 이상 이제 카르타고군이 에브로강을 건너 북상하는 것은 협정 위반은
아니게 된 것이니 이걸 기다렸던 29살의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5월 스페인 남쪽 카르타헤나
에서 군대를 이끌고 사군툼을 지나 에브로강을 건너고 타라고나를 지나 피레네산맥을 넘는데....
당시 카르타고와 로마를 통털어 전쟁터가 어딘지 아는 사람은 오직 한니발 단 한 명 뿐이었습니다.
한니발이라는 이름에서 페니키아어로 한(hann)은 '은총(grace)' 이고, 바알(baal) 은 주인 혹은
군주라는 뜻으로 또한 바알 신을 뜻하니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바알이기도 한데, '한니발'
이란 '바알신의 은총' 이며 성(性)인 바르카는 “번개”라는 뜻이니 “바알의 번개” 인데,
페니키아어와 히브리어가 방언 정도 차이라 바알이란 말은 두 언어에서 비슷한 뜻으로 쓰입니다.
카르타고에서는 흔히 쓰던 이름으로 동명이인 한니발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한니발 바르카가 가장 유명한데
페니키아어 자체는 세월이 흐르며 잊혀졌지만 한니발 바르카 때문에 이후에도 한니발 이라는 이름을
따다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조카 중에 한니발리아누스 가 있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모두 적대하던 '바알의 은총' 이라는 뜻이라.... 그리스도교 문화권
에서는 해괴한 이름이며 이탈리아어에서는 H 가 묵음이 되어 안니발레 (Annibale)
라 하는데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 의 장군으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명
으로 꼽히며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했던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입니다.
한니발이 흑인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지만 카르타고인의 조상 격인 페니키아인
들은 현재 레바논 일대에 살았으니, 당시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일대의 아랍인
들은 외형적으로 남유럽 백인과 큰 차이가 없으니 인종으로는 백인으로 봅니다.
한니발은 BC 247년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에서 태어났으며 9살에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를 따라 스페인에서 생활했는데, 그러나 하밀카르는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히스파니아(에스파니아)에서 사망하자 하밀카르의 뒤를 이어 전우이자 한니발의 매형
이던 하스드루발이 히스파니아 사령관이 되었고 한니발은 그 휘하에서 군 경력을 쌓았습니다.
한니발의 맹세라는게 있으니....“When I come to age, I shall pursue the Romans with fire and
sword and enact again the doom of Troy. The Gods shall not stop my career, nor the
treaty that bars the sword, neither the lofty alps, nor the Tarpeian Rock.
I swear to this purpose by the divinity of our native god of war, and by the shade of Elissa.”
"제가 장성한 때에, 불과 칼을 들어 로마인들을 쫓아가 트로이의 운명을 다시 행하겠습니다.
신들께서는 저의 생애를 막지 않을 것이며, 칼을 금하는 조약도, 알프스의
높음도, 테르페이아의 바위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맹세합니다. 우리의 전쟁신의
신성에, 엘리사(디도)의 그림자에." 한니발의 맹세.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Punica》 1권
한니발이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로마를 멸망시킬 것을 신에 맹세했다는 것은 역사에도
기록된 꽤나 유명한 이야기니 한니발이 1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카르타고의 신인 바알-함몬의 신전에서 로마를 멸망시킬 것을 맹세
시켰다는 일화로 로마와 전쟁을 하는 데 일생을 바친 한니발과 잘 어울리는 일화입니다.
하지만 리비우스의 사료에서 서술된 그의 일생은 다르니 한니발은 아버지 하밀카르와 떨어져 카르타고
본토에서 생활했으며 아버지는 1차 포에니 전쟁과 히스파니아 식민 전쟁 때문에 히스파니아에
머물렀으며 한니발이 히스파니아로 향한것은 매형 하스드루발로부터 초청을 받은 이후였다고도 합니다.
서신은 카르타고 원로원에도 보내졌으니 이때 국내 영농파인 한노는 지역 사령관들이 자식들에게 군대를
세습한다며 파견에 반대했으니 한니발이 다른 젊은이들 처럼 카르타고에서 관료 경험을 먼저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노의 발언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고 다른 의원들은 남의
가정사에 대한 주제넘은 참견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한니발은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군 경험을 쌓게됩니다.
한니발은 매형 하스드루발이 살해되는 바람에 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제처럼 27세의 젊은 나이로
히스파니아(에스파냐) 주둔군의 사령관이 되었는데 용맹, 열정, 성실성을 갖춘데다 아버지
하밀카르와 빼닮았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으니 그의 지휘하에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했으며
무모할 정도로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고 또 위험이 닥치면 뛰어난 전략적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칠줄 몰랐고 지독한 더위나 혹심한 추위도 쉽게 견딜수 있었으며 음식을 탐하지
않았고 말 위에서든 지상에서든, 전사로서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으며 공격할 때는 항상 앞장섰고,
전장을 떠날 때는 가장 마지막이었으니 그의 미덕은 차고넘쳤는데 하지만 비인간적인 잔인성, 진실과
명예, 종교를 무시하고 서약의 신성성과 다른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것을 무시하는 태도가 결점이기도 합니다.
로마군단은 로마시민이니 그들은 35개 행정구에 속하는데 17세 부터 60세 까지 남자는 무산자를
제외하고는 자사에 따라 5계급으로 나뉘며 17세부터 45세까지는 현역 ‘유니오레스’ 이니
훗날 “주니어” 의 어원이고 46세부터는 예비역 ‘세니오레스“ 인데 노인 ”시니어“ 의 어원입니다.
자연 휴전기인 겨울에 로마 마르스광장에서 민회가 열려 1년 임기 집정관 2명을 선출한후 장교 선거
가 실시되니 4개군단에 24명인데 10명은 27세 이상 10년 이상 군무경험자이며 나머지 14명은
23세 이상, 5년 이상 군무 경험자여야 입후보 하고 표를 많이 얻은 순서대로 4명은 1군단,
3명은 2군단, 4명은 3군단, 3명은 4군단에 14명이 배속되고 나머지는 나일르 기준으로 새속합니다.
이후 35개 행정구는 추첨을 통해 다음해 이듬해 병력을 제공할 행정구를 뽑으니 4개 군단만 편성하는
해에는 8분의 7이상의 행정구에 속하는 사람들은 귀가조치하며 군무를 닫당할 행정구의 현역
해당자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소집되어 4개 행정구마다 4명씩 16명이 앞으로 나서는데....
1개 군단은 제1계급 출신인 기병 300명을 합쳐 4,500명이나 전투가 예상되는 해는 5천명으로 합니다.
로마군은 로마시민병이 4개군단에 기병 1,200명과 보병 20,800명 합쳐 22,000명이며 동맹국 병사는 기병
2천명에 보병 3만명으로 32,000 명이고 그 외 속주 시칠리아 방어를 위해 로마시민병 기병 400명에 보병
8,400명이니 로마 시민병 30,800명에 동맹국 32,000명 합쳐 62,800명이 상비군인 셈인데 로마 현역병
은 20만이고 동맹국 현역병은 60만이니 그럼 로마가 동맹국보다 거의 3배 가까이 상비군에 나선 것입니다.
집정관은 2개 군단을 지휘하는데 600명 기병은 30명씩 20개 분대로 나뉘니 제1계급 출신이고 경무장 보병
벨리테스는 제4계급이나 제5계급에 속하는데 2,400명이니 전위나 유격대로 쓰이며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은 상류층과 중산층으로 제1,제2, 제3계급 출신이며 제4계급중에도 일부 중무장 하기도 합니다.
3열횡대 중무장 보병은 최전선 첫번째줄에 배치되는 “하스탈리”는 전투경험이 적은 젊은이로 2,400 명이며
두번째 줄에는 “프린키페스” 로 최전선이 돌파당해도 굳게 버텨 붕괴를 저지하는데 나이는 30대로
2,400명이며 세번째 줄은 40대로 “트리알리” 이니 체력은 떨어지지만 전투에는 베테랑으로 1,200명입니다.
저 3개중대는 각각 20개 소대씩으로 나뉘니 하스탈리와 프린키페스는 120명이며 트리알리는
60명으로 백인대(켄투리아)이고 백인대장은 켄투리오라 불리니 쇄원 자체 투표로 선출
하며 2개군단의 백인대장은 모두 60명으로 이중에 득표수가 많은 순서대로 12명은
민회에서 뽑힌 중대장 12명에 기병대장 1명과 동맹국 지휘관들과 함께 작전회의에 참가합니다.
로마는 선전포고후 전쟁태세에 돌입했으니 신속히 정예 군단을 시칠리아와 프랑스 남부로 이동시켰으며
동시에 히스파니아 남부에 있는 부족들과 한니발의 예상 이동경로에 있는 갈리아 부족에 협력을 요청
했지만 공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사군툼의 함락이 로마에 대한 불신을 낳았기 때문이니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로마 사절단을 쫓아냈고 갈리아 부족들은 북침해 오는 로마를 불신해 더욱 비협조적이었습니다.
한니발은 9만 이상의 카르타고 정예 병력중 절반을 로마 원정을 위해 징발했으니 보병 5만, 기병 9천,
코끼리 37마리등 대병력이었으니 피레네 산맥을 넘자 소식은 로마에 알려졌고 즉시 두 집정관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2개 군단은 갈리아로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2개 군단은 시칠리아로 보냅니다.
당시 한니발의 총병력은 보병 9만명에 기병 1만 2천명과 꼬끼리 58마리인데 카르타고 본국 수비
를 위해 보병 2만을 보냈고 에스파냐를 수비하기 위해 둘째 동생 "하스드루발" 에게 보병 1만
2천과 기병 3천명에 꼬끼리 21마리를 남겼으며 막내동생 마고는 원정군에 데려가는데 기병은
아프리카 누미디아인이고 보병은 아프리카 리비아인과 에스파냐인이 2대 1 정도 비율이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를 이기자면 1차 포에니전쟁때 시칠리아에서 싸우다 진 것을 교훈삼아 이탈리아
로 쳐들어가서 "로마연합 도시들" 이 로마에서 이탈시켜 로마의 몸집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인데 바다를 건너자니 이미 사르데냐섬과 코르시카섬이 로마가 차지하고 있고
제해권까지 로마 해군이 쥐고 있었던지라 불가능하니 알프스를 넘는 길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니발 전투에 대해 아는 것은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대왕처럼 그리스어 교사인
실레노스를 기록자로 대동했으며 로마도 원로원 의원 파비우스 픽토르가 전쟁에 대해 기록
했는데 두 사람의 저술 자체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한니발이 46세때 태어난 그리스인
폴리비오스와 200년 뒤에 살았던 리비우스가 저 기록들을 모아 역사서를 편찬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218년 5월 카르타헤나를 떠난 한니발의 대군이 에브로강을 넘자 로마의 동맹도시인
타라고나와 엠포리아이는 갈리아(프랑스)의 로마 속주 마르실리아(마르세유)에 전했고,
곧 로마에 전해지니 한니발의 목표가 에스파냐 전역을 점령하는데 있다고 보고 또
카르타고 본국의 군대가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해서 포강 유역으로 보내려던 두
집정관을 에스파니아와 시칠리아로 보낸후 추가로 2개군단을 편성 이탈리아 방어에 임합니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2개 군단은 로마 시민병은 보병 8천명에 기병 600명이고 동맹국 병사는
보병 14,000명에 기병 1,600명이니 합치면 24,200명이고 시칠리아로 파병된 셈프로니우스 2개
군단은 로마 시민병은 보병 8천명에 기병 600명이고 동맹국 병사는 보병 16,000명에 기병 1,800
명으로 26,400명에 달했는데 평시 1개 군단 보병은 4,000명이지만 전시는 5,000명으로 늘어납니다.
스키피오는 피사로 가서 60척 5단층 갤리선을 타고 에스파냐로 갔고 셈프로니우스는 3단층
및 5단층 갤리선 60척과 12척 수송선에 타고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서 출항해
시칠리아로 갔으니 스키피오가 에스파냐에서 한니발을 저지하면 그는 바다를 건너
카르타고 본국을 습격할 생각이었으니 한니발이 2만을 카르타고에 보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도중에 마르세유에 도착한후 갈리아에 첩자를 풀어 피레네산맥을 넘었다는
한니발의 북상경로를 파악하려 했지만 한니발은 해안지대가 아니라 갈리아 내부로 이동하여
추적을 피했는데, 알프스를 넘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로마 원로원에서는...... "코끼리 끌고 잘도
산 타겠다" 와 "야만인들이 반갑게 맞이하겠는데" 라는둥 말도 안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5만 9천으로 피레네산맥을 넘고 갈리아(프랑스) 내륙을 횡단해 4만 6천이
알프스 산맥 행군을 감행하는데 고립된 적진에서 대병력을 이끌고 험준한 산맥을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으니 알프스는 험준한데다가 초겨울이라 추위도 심했고 더욱이 알프스 산맥의
원주민들도 카르타고군을 적대했으니 한니발은 비우호적 부족들과도 일일이 싸워나가야 했습니다.
마르세유의 로마군 추적을 피해 내륙으로 들어간 한니발의 5만 대군은 어떤 부족은 돈으로 매수
하고 다른 부족과는 싸우면서 론강에 도착해서는 마르세유 상류 150km 지점에 모래톱 덕분
에 물살이 약해진 발랑스에서 뗏목을 엮어서 도강하는데 맞은편에 갈리아인들이 적개심
을 보내자 기병대를 40km 상류에서 도강시켜 갈리아인 마을을 불지르는 것으로 쫓아버립니다.
이제 뗏목으로 론강을 도하하는데 말과 꼬끼리를 태워야 하는지라 강 상류와 하류에
말뚝을 박아 울타리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만든다음 밧줄도 몇가닥이나
양쪽 나무에 고정을 시켰지만 공포에 질린 꼬끼리는 뗏몪에서 떨어져 강 속으로
사라졌으니 피레네 산맥을 넘을을 때 5만 9천명은 도하후 4만 6천명으로 줄어듭니다!
갈리아족을 물리치고 론강을 건넜는데, 이때 하류로 파견한 500명의 기병대는 한니발의
흔적을 수색하던 로마 기마병과 마주쳤으니 로마군은 300기중 140기를 잃고
카르타고는 200기를 잃었는데 이로써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움직임을
파악했으니 도하지점에 도착했으나 사흘전에 떠난뒤라 보병으로는 추격할수 없었습니다.
한니발은 북동쪽 그르노블로 향했으니 알프스를 넘는 것은 명확해졌는데 그의 2만 군대는 한니발은 동료
셈프로니우스에게 맡기고 예정대로 에스파니아로 가서 적의 본거지를 점령할 것인지 망설이니... 하지만
셈프로니우스는 시칠리아에 있으니 북이탈리아에 돌아오자면 엄청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절충 합니다.
동생 그네우스 코르넬리우스에게 병력 전부를 주어 에스파냐로 보내니 마르세유에서 엠포리아이로 가면
피레네산맥을 넘지 않고도 에스파냐로 들어갈수 있으며 자신은 직속 장교들만 데리고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이탈리아 방위를 위해 편성해둔 2개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온 한니발군과 싸우기로
하니 원로원은 저 부대를 피사로 보내는 한편 시칠리아의 셈프로니우스를 급히 북상하도록 합니다.
론강을 건넌 뒤에도 알프스 산맥의 갈리아족들이 한니발을 공격했으니 그들은 수백명을 동원해 좁은 길을
막고, 산을 오르는 카르타고군에 바위와 통나무를 굴려댔으니 갈리아족을 맞아 카르타고군은 끊임없이
격파했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한니발이 어느길로 넘었는지 6가지 노선을 제시합니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피콜로산베르나르도 고개를 넘었다 말하며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
는 조금 남쪽 몬지네브로 고개를 넘었다고 주장햇ㄴ느데 훗날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은
리비우스의 설을 지지했으니 폴리비오스는 알프스를 넘은후 부쪽에서 토리노를 공격
했다는 것이고 리비우스는 수사 골짜기를 따라 서쪽에서 토리노로 쳐들어갔다고 주장합니다.
적대감을 보이는 산악부족들에게 한니발은 우린 단지 산만 넘어갈뿐 당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적은 로마라면서 금품을 주어 알프스기슭의 부족을 회유했지만 산중에 사는
부족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니 놀래기 위해 30마리 꼬끼리떼를 앞세우고 전진하는데
후위는 기병에게 맡겼는데 절벽에서 바위를 굴리거나 매복해 활을 쏘면 한니발은 최선두로
달려가곤 했는데 눈발이 흩날리니 낯서 기후에 꼬끼리들이 날뛰기 시작해 절벽으로 떨어집니다.
험난한 산악행군으로 로마군과 만나기도 전부터 엄청난 고생을 했으니 천막을 칠 곳이 없어 둘둘 매고 자야
했으니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으면서 무려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는데, 보병 3만 8천은 2만으로,
기병 8천기는 6천기로 줄어 있었으며 밧줄로 묶어 끌어올리는 등 온갖 고생을 해가면서 끌고 온 전투
코끼리 37마리도 대거 폐사했으니 소수의 코끼리로는 제대로 된 전술적 운용을 하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한니발! 하면 코끼리 이미지로 유명해진 장군이지만 실제로 한니발이 코끼리를 로마군 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패배했던 자마 전투뿐이고 한니발이 아프리카에서
끌고온 코끼리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상당수 죽어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을 때는
몇 마리가 남지 않았으니 최초의 회전인 트레비아 전투에서 전열을 완전히 이탈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수루스'라는 이름이 붙은 한니발의 승용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들보다 훨씬 체격도 크고 힘도
셌는데, 학자들은 인도 코끼리로 추정하니.... 수루스는 수컷이었고 주인을 닮아 애꾸눈에
한쪽 상아가 없었다는데 저 수루스는 트레비아 전투 이후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코끼리였다고 합니다.
알프스에서 바위로 길이 막히자 식초로 녹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불로 달군 다음 찬 식초
를 부어 쪼갰다는 말이 오역되어서 전해진 것이라고 하며 당시 병사들이 식수 대신
식초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는 하지만, 바위가 식초에 녹는 경우는 무척 드무니
식초를 부어서 바위의 강도를 약화시킨 후에 바위를 부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한니발은 전술만이 아니라 전략에 대해서도 탁월하니 적과 자신의 전력차를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결단도 주저하지 않았으니 이번 알프스 산맥 행군도
과감한 판단으로 실행한 것인데 이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본토를 기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니 우회기동으로 로마의 핵심부에 들어갑니다.
반면 알프스를 넘어 로마 중심부를 친다는 전략이 그렇게 특출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는데 주변부
를 피해 중심부를 직접 타격한다는 발상은 흔했으니 고대 그리스 부터 살펴봐도 아테네를 안 치고
트라키아를 먼저 친 브라시다스, 시칠리아의 카르타고군을 격멸하는 대신 아프리카 본토 상륙
을 감행한 참주 아가스토클레스 등이 있고 켈트족들이 여러번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했습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공격한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는 시각도 있으니 보급의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이니
한니발의 계획은 자신이 이탈리아를 유린하는 사이 카르타고가 로마 외곽을 점령하면서 자신에게 해상
보급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카르타고는 로마의 해군을 뚫고 한니발에게 보급을 할 역량이 없었습니다.
즉, 한니발은 자국과 적국의 국력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것이니. 카르타고
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한니발의 이탈리아 공격은 뒤가 없고 실패가 예정된 작전이 되었으니
이는 아무리 한니발이 잘 싸우고.... 이탈리아에서 오래 버텨도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니발의 '본토 기습 전략' 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한 비판도 많으니 한니발의 '기습'은 실패
했기 때문이니 과거 켈트족의 예가 있는지라 로마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통과할 수 있음
을 감안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의 진격을 알아챘으며 결과적으로 한니발은 어떻게든
로마 본토에 진입해내기는 했지만...... 이는 그가 추구한 기습 효과 덕분은 아니었습니다.
한니발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 해상을 통한 이탈리아 상륙은 로마의 해군력 때문에 불가능했고,
전장을 이베리아 반도에 한정짓거나 그곳에서 서서히 진출해나가는건 보급문제는 해결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카르타고를 월등히 압도하는 로마의 동원력을 고갈시키는게 불가능하며 이 경우 전쟁은
소모전으로 흘러가게 되고, 이변이 없는한 자원이 많은 로마쪽이 승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다고 전쟁을 안한다는 선택지 또한 고를수 없었으니 한니발 개인의 원한을 떠나서, 로마는
지속적인 팽창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이를 방치하면 힘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기 때문
이니 따라서 한니발 입장에서는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는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폴리비우스는 BC 225년 로마에 복무 중이던 70만명 이상의 보병과 7만명 이상의 기병을 언급
하면서 "한니발이 장차 공격해야하는 병력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고 말했으니
한니발 역시 로마의 병력이 카르타고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
했지만 공격을 강행한 것은 여섯배나 일곱배가 되는 로마의 군사력의 뿌리를 절단하려면
로마의 동맹 체제와 이탈리아 연방을 분쇄해야 잠재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 한니발은 북 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이 이미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그들이 자신과
합류할 것을 기대했으며,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을 분석해서 굳이 로마연합에 묶여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상당수의 동맹국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으며 그리고 로마가 칸나이
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하자 실제로 남부 이탈리아의 동맹국들은 로마 연합을 탈퇴했습니다.
한니발의 목적은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함으로써, 로마와 주변 동맹국들 사이의 정치적 유대를 깨뜨려
로마의 권력을 붕괴시키려는 것이었으니 로마가 엄청난 군사적 우위를 갖게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정치적 장치 덕분이기 때문이니 한니발이 피해야 할 상황은 알프스 하산 직후에 지친 상태에서
로마군에게 기습당하는 것이지, 로마에게 알프스 입산 자체를 들키지 않을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마실리아 (마르세유) 에 상륙했다가,
너무늦게 도착했다는걸 알고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올걸 대비해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두개
군단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되돌아왔지만 한니발이 북 이탈리아의 평지
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는걸 막지 못했으니.... 중요한건 은폐여부가 아니라 산맥을 넘는 속도였습니다.
"내가 길을 찾아내거나 직접 길을 만들겠다.“ 알프스산에는 길이 없다고 보고하는 휘하 장군들에게 그가
했다는 말인데 그 외에도 "불굴의 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니발은 등정 9일만에 정상에 올랐고, 산정에서 비로소 평지를 만나자 병사들을 모아놓고 “ 저곳이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에 들어가기만 하면 로마 성문 앞에 선 ㄱ서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내리막길
뿐이니 항ㄴ두번 전투만 치르면 우리는 이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수 있다” 병사들의 표정에
쌓이고 쌓인 피로와 불만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으니 훗날 나폴레옹도 비슷한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틀간 군사들을 휴식시킨뒤 하산을 시작했지만 하산이 훨씬 더 어려운 산행이라....
산속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어 살을 찌르는 추위의 고통은 화살에 맞은것 같았으며
온종일 내린 눈이 아침이면 얼음으로 변해 있었으니 선두의 병사들이 길에서
얼음을 모조리 제거할 때 까지 나머지 병사들은 추위에 떨며 마냥 기다려야 했습니다.
악천고투! 15일이 걸려 산을 내려와 마침내 북이탈리아 토리노에 도착했으니 카타르헤나
를 떠난지 4개월만으로 ,겨울 알프스 가 얼마나 험하고 모질었던지 군대는 4만
6천에서 보병 2만명에 기병 6천명이니 "40% 인 2만명은 겨울 알프스에 희생" 됐습니다!
피레네이후 무려 3만 3천이 죽은 것인데, 북이탈리아 갈리아 부족들은 알프스의 갈리아 부족들과
달리 한니발을 환영했으니.... 이들은 로마의 정복에 맞서 싸우고 있는 부족들이었기 때문 입니다.
로마는 북진해 피아첸차와 크레모나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피아첸차는 동쪽으로 250km 나
떨어진 곳이니, 알프스의 이쪽이라는 뜻으로 치살피나라고 부르는 토리노와 밀라노등 북이탈리아
는 수백년동안 갈리아인(켈트인)들이 살았으니 기원전 390년에 로마를 점령해 약탈한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고 이때는 로마가 루비콘강을 넘어 포강까지 북진할 때라 침략에 시달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니발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으니 한니발의 병력은 3만명도 안되는지라
동맹을 맺을만큼 강한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라... 몇몇 부족은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지만 토리노가 응하지 않자 한니발은 바로 공격해 하룻만에 마을을 함락시킵니다.
한니발은 갈리아인을 끌어들일려면 로마군을 격파해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필요를 절감하고는 동쪽으로
진출하니.... 곧 집정관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나섰는데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음을 뒤늦게 알고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북이탈리아 피사로 귀환해 북진해 온 것입니다.
로마원로원 의원 픽토르에 따르면 이때 로마시는 25만, 로마연합은 50만의 병력을 동원할수 있다고
기록했는데 패배한 민족을 동화시키는 로마인지라 토인비는 로마연합을 “정치건축의 걸작”
이라고 평했으니 패배해 사라진줄 알았던 에트루리아는 5만의 보병과 4천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으며... 로마와 수십년간 지겹도록 싸운 삼니움족은 7만 보병과 7천 기병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2만 6천 한니발군에 대해 피사에서 2개군단을 인수해 북쪽 피아첸차에 도착한 코르넬리우스는
병력이 적은데다가 이미 11월 겨울철이라 처음에는 시칠리아에서 북상하는 셈프로니우스
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기병과 소수의 경무장 보병만 데리고 전선을 시찰하러
포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원으로 이탈리아 최고 쌀 생산지인 티치노 (파비아) 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한니발도 기병을 데리고는 지형 정찰을 나왔다가 그만 카르타고와 로마 두 기병대
가 마주쳤으니, 로마 집정관이 가는 곳에는 12개의 권표를 든 12명이 호위하는데
이걸 본 한니발은 집정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공격을 개시하니 로마 경무장
보병은 첫 화살을 쏜후 카르타고 기마대의 집단 돌격에 겁을 집어먹고 흩어져 버렸습니다.
BC 218년 티키누스강 티치노(파비아) 에서 코르넬리우의 4천 로마 기병대는 더 많은 카르타고
기병대와 접전했는데 이는 로마 정규군과 한니발군의 첫번째 싸움이었으니,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을 좌우에 배치하고 중앙은 카르타고와 에스파냐 기병을 직접 이끌었으니
누미디아 기병은 로마측으로 참전한 갈리아 기병대를 격파하고 곧장 로마 본대로 육박합니다.
로마기병대는 적에게 포위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치려 하자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집중 공격을 당해 포위되어 중상을 입엇는데 그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하며 보병중에 600명은 포로가 되었는데..... 저 17살
젊은이는 16년 후에 로마군을 이끌고 카르타고 본국 자마에서 한니발과 싸우는 그 스키피오 입니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승리하자 갈리아인들은 의심을 거두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으니 이후 갈리아족
에서 원활한 협조를 받을수 있었으며 스키피오는 패전하고 중상을 입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라
진영에 틀어박혀 치료에 전념해야 했으니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무력화되었음을 확인하자 점령과
약탈활동을 급격히 늘리자 북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세력은 급격히 팽창하고 로마세력은 위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