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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비키 {Prepared by Grace, for Grace}’는 연중론을 지지하는 책인가? ⑦
<‘조엘 비키 {Prepared by Grace, for Grace}’는 연중론을 지지하는 책인가? ⑥>에서 저는 ‘조엘 비키 목사님 준비 은혜’와 ‘존 머레이 목사님 준비 은혜’ 공통(Sympathize)점을 밝힘으로써, 그 행간에서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은 칼 바르트 신학에 영향을 받은 게 없음’을 밝혔습니다. ㅡ물론, “순중론은 칼 바르트 신학 영향을 받았다.”고 우기셨던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은 지금 “존 머레이 목사도 연중론자다.” 우기고 싶어 하십니다. {영혼의 의사} 좌충우돌 논리 전개에 세뇌돼 좌충우돌 일관성이 없으신 것입니다. ㅡ 그러나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이 칼 바르트 신학에 영향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연중론의 교과서 {영혼의 의사} 좌충우돌 논리 전개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의사} 좌충우돌 논리 전개를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께서 깨닫지 못하고 계신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분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장 9절~13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그리스도), 자신들 왕을 대망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 만왕의 왕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죽인 민족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그분을 십자가에 죽인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이었지만 그분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식이 됐습니다.
1. (편의상) 하나님의 관점: 우리가 그분을 영접한 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절대 대권의 사역,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중생’, ‘하나님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중생’이 선행했던 까닭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개혁 신학은 “중생은 믿음(회심: 영접)에 선행한다.”는 진리를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2. (편의상) 인간의 관점: ‘조엘 비키 {은혜를 위해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에 적힌 말로서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분을 영접하는 그 순간은 중생의 순간, 하나님 자식으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절대 섞어서 생각해서는 안 됨에도 위 ‘1, 2’를 섞어서 생각해 버리면, ‘두 번의 순간 중생(하나님의 절대 대권 사역)’을 말하는 연중론, ‘원리로 하나님 자식으로 태어나는 1차 중생 → 신실하지 못한 영접(회심) → 참된 영접(회심) → 실제로 하나님 자식으로 태어나는 2차 완결(완전)중생’이라는 연중론이 태어납니다. 자신들 주장이 ‘왜 좌충우돌 자중지란 논리 전개를 하는 주장인지’조차 모르는 난독증에 휩싸인 분들, 한국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같은 분들이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중생은 믿음(회심)에 선행한다는 개혁 신학 주장은 그릇됐고, 믿음(회심)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개혁 신학자도 있다.”고 주장하는 연중론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회심)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개혁 신학자는, “우리들은 개혁파다.”고 주장하시는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만 빼 놓고, 단 한 분도 안 계십니다. 하다못해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이 “연중론자”로 우기시는 조엘 비키, 조엘 비키 목사님 중생론을 두고도 지계표 님께서 {양무리 마을}에 밝히셨습니다만, 조엘 비키 목사님조차도 “중생은 믿음(회심)에 선행한다.”고 하십니다.
다음은 {양무리 마을} ‘갭투유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의 관계: 바른 중생교리를 위해>’에 적힌 글입니다. ‘왜 좌충우돌 논리 전개를 하는 주장인지’조차 모르는 난독증에 휩싸인 글입니다. 위 ‘1’과 ‘2’를 섞어 버리는 좌충우돌 논리 전개에서 나온 글입니다. 즉, 갭투유 님 서술은 ‘중생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고 서술해 놓고, ‘회심’이 곧 ‘믿음과 회개’이건만 ‘회심을 통해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는 좌충우돌 자중지란 논리 전개에서 나온 서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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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적 동의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순전히 위에서부터 부어 주시는 신적 은혜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 어떻게 선물로 주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거듭남, 곧 중생을 통하여 주어진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회심을 통해 죄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다. 이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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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은 부활과도 같은 사건,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기신 사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영생=구원’입니다.
{양무리 마을} 연중론이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순간 중생 뒤 즉각 회심’의 경우로 보는 인물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 사도입니다. 그리고 ‘순간 중생 뒤 점진 회심 뒤 순간 중생’의 경우로 보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은 삭개오입니다.
위 ‘1, 2’ 개념을 섞은 연중론의 관점이 아닌 ‘2. (편의상) 인간의 관점’ 개념만으로 삭개오를 살펴봅시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한 때는 어느 때입니까? 삭개오가 기뻐하며 주님을 집안으로 영접하는 그 순간으로 봐야 합니까? 그렇다면, ‘왜 그 순간에 주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 집안에서 삭개오 회심 고백을 들으신 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 19: 9]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윤영상 목사님이 {양무리 마을}에서 언급하신 제 “독심술”에 따르면, 연중론자 분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가지고 “회심 고백 뒤 중생(구원)”으로 설명하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제 독심술입니까? 갭투유 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회심을 통하여 죄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글에서도 드러나는 바, “(구원의 신앙으로서) 이 믿음”은 “중생을 통해 주어진다.”는 전제가 있으니까, {양무리 마을} 연중론과 딱 맞아 떨어지는 해석이잖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위 ‘2’ 관점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혹은 예수님을 영접한 뒤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뒤에 중생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중생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은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제4권} 박태현 역 (서울: 부개사, 2011)’ 103쪽에서 옮겨오는 글입니다. “때가 되면”은 강조하려고 제가 굵은 글씨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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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이 자질들을 창조하고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확증하며 중생 가운데 주입된 생명이 죄와 부패와 죽음을 초월하게 한다. 영적 생명은 가장 시초부터 영원한 생명이며, 중생한 사람들 가운데 머무는 씨앗은 썩지 않는다. ···(중략)··· 왜냐하면 이 생명은 모든 자연적인 생명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또한 이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며, 처음부터 활동했고, 성령의 교제 가운데 지속되고 확증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범죄할 수 없고 죽을 수 없고, 살아 활동하고 자라나며, 때가 되면 믿음과 회개의 행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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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공생애 때 이스라엘 민족은 ‘헤르만 바빙크 {개혁 교의학}’과 ‘루이스 벌콥 {조직신학}’과 ‘안토니 후쿠마 {개혁주의 구원론}’에 적힌 용어로 말하자면 “언약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언약의 자손(자기 백성)들을 두고 ‘중생 뒤 점진 회심’, ‘언약의 자손들은 어릴 때 중생하고,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의식, 지적 능력이 자라난 뒤에, 즉 때가 되면 그 중생을 의식해 회심한다.’는 이른바 “가정假定 중생”을 말한다면, ‘삭개오, 사울(바울 사도), 디모데 같은 성경의 인물들은 어릴 때 중생했다.’고 봐야 합니다. 연중론 설명으로 하자면 ‘어릴 때 무의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해 구원(영생)을 받은자들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가정은 삭개오 경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주님의 말씀과 부딪히는 해석이 아닙니까? 또한 바울 사도 같은 경우 예수님을 핍박했던 과정은 성화의 과정으로 봐야 하겠습니까? “초기중생 시 성령의 원리 내주, 2차중생 시 성령의 실제 내주”를 주장하는 {양무리 마을} 연중론 설명에 따라 ‘어릴 때 무의식에 심어 주신 원리 구원,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원리 구원이 의식으로 표출된 회심은 실제 구원’으로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준비은혜로 중생하는 것은 아니다.”는 청교도 신학자들 ‘준비 은혜’ 개념과 이를 이어 받은 최근 개혁 신학 ‘준비 은혜’ 개념, 즉 ‘일반 소명’ 개념은 그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회심을 위한 ‘준비 은혜’ 개념입니까? 회심을 위한 ‘준비 은혜’ 개념이면 “준비 은혜로 회심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머리 아픕니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과 ‘루이스 벌콥 {조직신학}’과 ‘안토니 후쿠마 {개혁주의 구원론}’에 적힌 용어 “언약의 자손”은 요한복음 1장에 적힌 용어로는 “자기 백성”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남, 중생’을 설명하시면서 ‘언약의 자손(자기 백성)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빛이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셨으나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중생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 자손의 경우 어릴 때 무의식에 생명을 심기시는 (실제) 중생이 있고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이 자라는 과정을 따라 점차, 때가 되면 그 생명을 일으키시는 회심이 있다.’는, ‘중생 뒤 점진 회심’을 이야기하시는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콥,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중생론’과 ‘원리 중생 뒤 점진 회심 뒤 실제 중생’을 말하는 ‘연중론’은 그릇된 중생론인 것입니다. 이 두 중생론 앞에는 요한 사도의 설명, 요한 사도 중생론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 뒤 점진 회심’을 말하는 이 두 중생론은 계시 의존 사색을 따르지 않은 해석, 성경을 뛰어넘은 해석을 하는 중생론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께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갈릭 목사님께서 “헤르만 바빙크 {개혁 교의학} 중생론은 혼란스런 중생론입니다.” 하신 것입니다.
다음 두 글은 그러께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제가 올렸던 첫째 글과 둘째 글입니다. 손성은 목사님과 윤영상 목사님 답변(댓글)들을 모으면서 연중론의 논리와 연중론의 성경해석을 하나하나 무너뜨리기 시작한 둘째 글 댓글들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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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MDcs/2060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유효한 부르심]
새삶 2012-07-07. 08:27
(1)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그 모든 사람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 있게 부르시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에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해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그리고 효력 있게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오게 돼 있으므로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오는 것이다.
(2)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고 특별한 은혜로만 되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께서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되며 또한 이 부르심 가운데서 제공되며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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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조이 님, 니고데모의 ‘하나님 공경’도 ‘유효한 부르심’ 에 해당됩니까?
새삶 2012-07-07. 09:04
홀리조이 님, 홀리조이 님은 다음과 같은 댓글을 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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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joy 2012.07.07.07:25
그리고, 루디아의 하나님 공경을 제가 중생으로 본다는 식의 주장도 오해입니다. 왜 그렇게 오해하십니까? 연속적 중생론에서는 ‘중생’의 개념이 이중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한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웨신} [제10장 효과적인 부르심]을 고려한다면, 그 뒤 {웨신} [제11장 칭의]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웨신} [제14장] [제15장]에서 믿음과 회개를 설명하는 {웨신}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구조를 고려한다면, 루디아의 “하나님 공경”은 ‘효과적인 부르심’에 해당됩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이 있고 난 뒤에 “마음을 여시는 일”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웨신}의 구조입니다. 라마드 님은 지금 {웨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보마이’라는 단어를 저렇게 연구해 놓고도 그것을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오히려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자료로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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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신}은 ‘유효한(효력 있는) 부르심’을 서술할 때 “그들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서술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홀리조이 님,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루디아의 하나님 공경’이 홀리조이 님 주장대로 이런 ‘유효한 (효과 있는) 부르심’에 해당되면, ‘니고데모의 하나님 공경’, 빌립 집사에게 복음 전도를 받기 전 ‘에티오피아 내시의 하나님 공경’, 주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하나님 공경’도 ‘유효한 부르심’에 해당됩니까?
아니면, 그들 ‘하나님 공경’을 택자나 불택자에게도 복음을 접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편 부르심’ 과정으로 생각해야만 합니까?
바꿔 말하면, 니고데모가 주님께 ‘위로부터 탄생이라는 도리’를 들은 사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현장에서 바울이 ‘스데반 집사가 전하는 복음’을 들은 사건,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 복음’을 읽고 있었던 사건, 이런 사건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의 사건 ‘유효한(효력 있는) 부르심’에 해당하는 사건들로 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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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 글 <‘조엘 비키 {Prepared by Grace, for Grace}’는 연중론을 지지하는 책인가? ⑧>은 조엘 비키 목사님 {은혜를 위해 은혜로 준비되다.}에서 설명하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준비은혜에 대한 설명’을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과 로빈슨 크로소 윤영상 목사님이 어떻게 오독하셨는가?’를 밝히는 글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그러께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라마드 목사님을 도와 연중론의 논리와 연중론의 성경해석을 무너뜨린 뒤에 있었던 댓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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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나 12.07.11. 15:26
모두 고생하셨네요.
제 남편도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나무에 올라갔을 때 마음 상태를 거듭나지 않은 자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누구인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법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이런 마음을 일반 은혜로 보면 된다면서요.
새삶 님, 그리고 라마드 님 글을 내 블로그로 스크랩해 갈게요.^^
┗ 조한나 12.07.11. 15:26
근데 왜 새삶 님 같은 분이 준회원으로 있나요? 사역자 같으신데 등업해 주시면 안 되나요?
┗ holyjoy 12.07.11. 16:08
회심한 것을 본다면, 그 일반 은혜처럼 보였던 것이 삭개오에게는 일반 은혜로 그친 것이 아니고 특별은혜의 시작, 곧 효과적인 부르심의 시작이 이미 있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곡식과 가라지의 시작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차이가 나나요? 추수 때에는 차이가 분명하지요. 하지만, 추수 때에 뒤를 돌아보면, 그 차이는 아예 씨앗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셈이지요.
왜 이런 구분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안경돗수가 너무 뚜껍거나 얇아서요?
┗ 조한나 12.07.11. 1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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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용의 가부를 떠나서 ................ 위의 글만 보더라도 , 단어를 추출해보면
<<결정타, 날림, 축포, 좌충우돌 논리, 우기고, 난독증, 독심술>. 이런 단어들이 그러게 기분좋은 단어는 아니지요.
글을 볼 때마다, 눈쌀이 찌뿌러 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로서.......상대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단어들이 그렇게 본은 안됩니다.
제발 좀 온유한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서로 용납하면서....고운말 사용하기 운동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요.
“기분이 상하셨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요.” → 하나로 님도 ‘병 주고 약 주기’, 혹은 ‘약 주고 병 주기’ 식입니까? 상대가 기분이 상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애초부터 이런 글 쓰지 않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로 00:12
내용의 가부를 떠나서 ................ 위의 글만 보더라도 , 단어를 추출해보면
<<결정타, 날림, 축포, 좌충우돌 논리, 우기고, 난독증, 독심술>. 이런 단어들이 그러게 기분좋은 단어는 아니지요.
글을 볼 때마다, 눈쌀이 찌뿌러 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로서.......상대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단어들이 그렇게 본은 안됩니다.
제발 좀 온유한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서로 용납하면서....고운말 사용하기 운동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요.
그리스도인의 덕을 내세워 이간질하는 이단 지방교회 식 전법을 확인하기 위해 복사해 붙이기 해 둡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로서.......상대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단어들이 그렇게 본은 안됩니다. 제발 좀 온유한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서로 용납하면서....고운말 사용하기 운동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 제가 이 권면을 받아들일 너그러운 인물로 생각하고 쓰셨다면 그리 기분나쁘지 않은 권면입니다.
그러함에도, 이단 지방교회 식 전법에서 나온 의도가 아니시라면, 이 권면을 {양무리 마을}에도 그대로 쓰시기를 바랍니다. 홀리조이 님도 이 권면을 받아들이실 너그러운 인물로 생각하신다면 홀리조이 님에게도 이 권면 그대로 권면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로 님은 홀리조이 님을 존경하시고 홀리조이 님은 하나로 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홀리조이 님은 하나로 님 권면을 받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권면은 {양무리 마을}에만 하셔야만 했습니다. 저는 이단 지방교회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어서 하나로 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단 지방교회 식 전법, 저를 {개혁주의 마을} 형제 분들과 ‘이간질’하려는 전법에서 나온 의도가 아니셨다면, 최소한 {개혁주의 마을}에 이 권면을 하기 전에 {양무리 마을}에 먼저 하셔야만 했습니다.
제가 올린 글에 대한 내용은 없고, 조롱과 비판만이 있군요.
늘~ 이런식의 어법밖에 못하십니까? 할말은 많치만 덕스럽지 못하니 이정도로 하지요. 다른 분들은 글들을 보시고 생각을 하실겁니다. 지나치면 과한 법입니다. 부디, 자중하시길.
“제가 올린 글에 대한 내용은 없고, 조롱과 비판만이 있군요.” → 이 어찌 {양무리 마을} 여호와의 증인과 닮으셨는지요?
1) 스스로 준비하는 것과 준비되는것의 차이점을 잘 이해해 보시기를
2)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사역입니다.
이러한 진리적인 내용에 대해서만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