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이별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어느 날 병휘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하는 병휘오빠가 밉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목소리만 들어도 그리워지는 건 너무 아픈 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우가 조금씩 현실에 적응하면서 안정을 찾아가는 동안 병휘오빠도 직장에서 안정을 찾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영우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난 일을 후회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아이부터 생기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도 않서고, 제대해서 좋은 직장 잡은 후에 차근차근 돈도 모아서 모든 것을 갖춘 후 보란 듯이 결혼식도 올리고 아기도 낳고 오손도손 살고 싶었어,,,” 매번 같은 말을 하지만, 병휘오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절절한 심정을 들을 때면 영우도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퇴색된 지나버린 이야기에 불과했다. 영우도 지난날 임신소식을 전했을 때 무심한 태도에 서운했었다며 그때의 심정을 흘리듯 말했다. 그러면서 모질게 이별을 고한 게 후회스럽고 미안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과거로 되돌리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 지금은 영우에게 또 다른 인연이 생겼기 때문에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을 빌어주는 사이로, 그러나 잊을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영우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확실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날 오후, 음악다방 뮤직박스 안에만 갇혀있던 훈이오빠가 답답했었는지, 아니면 영우가 보고 싶어서였는지, 바닷바람 쏘이러 나가자며 영우를 불렀다. 회사에 조퇴를 하고 나온 영우는 설레는 마음으로 훈이오빠를 만나러 갔다. 뺨에 와 닿는 초겨울의 찬바람이 차갑게 느껴져서 옷깃을 여미게 했으나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부평역 광장의 한가운데 서서 영우를 기다리고 있는 훈이오빠의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오빠! 추운데 바람이라도 막아주는 건물 옆에 있지 왜 이렇게 벌판에 서 있어” “영우 눈에 잘 보이게 하려고,,,” “여기가 뭐 그리 복잡하다고,,, 내가 오빠도 못 찾을까 봐? 오빠 여기 이렇게 서있으니까 쓸쓸해 보이잖아” “그렇게 보였어?” “그냥 조금,,, 오빠 오늘 다방일 안 해?” 오늘은 종규가 하기로 하고 나왔어. 영우가 보고 싶어서,,, “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 “그렇다니까” 두 사람은 달달한 애정표현을 하며 월미도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인천역에서 내린 두 사람은 월미도까지 걸어서 갔다. 해안가에는 지난여름 자랐던 갈대가 갈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고, 그 사이로 쓸쓸한 바람 한줄기가 갈대에 부딪혀 사르르 소리를 내며 이곳에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리곤 갈대밭을 벗어난 바람은 길을 재촉하듯 급히 사라졌다. 월미도 해안 길을 말없이 걷던 훈이가 영우의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말을 꺼냈다. “여기는 내가 첫사랑 여인과 마지막 데이트를 하고 이별을 통고받던 장소야” “오빠도 첫사랑이 있었구나, 그런데 왜 헤어졌어?” “내가 못나서 그랬지” “오빠가 어디가 못났데? 잘생기고 인기 좋은 DJ 하고 있고,,,” “그게 전부야, DJ는 인기가 있는 거는 맞는데 돈벌이가 별로야 미래도 보장이 없고 음악다방이 없어지면 우리는 마땅히 일 할 데가 없어. 우리 집이 넉넉하게 잘살았다면 다를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부모님 도움은 기대도 못해, 아마 그런 이유가 가장 컸던 거 같아, 여자네 집에서 워낙 반대가 심해서 결국 헤어지기로 한 거야” 순간 영우는 병휘오빠와의 이별을 떠올렸다. ‘병휘오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얼마나 자책을 하고 자신을 원망했을까,’ 영우는 병휘오빠가 입었을 상처가 컸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어른들은 남자의 직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우리 부모님만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그러면 지금 훈이오빠와 나는 또 어떻게 되는 걸까?’ 갑자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지금 심정은 영우하고 이렇게 데이트하고 음악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나도 행복해, 그런데 무슨 이별통보 하는 것처럼 들려, 오빠” 영우의 말에 대꾸도 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는 훈이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한줄기 바람이 훈이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깊이 넣고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훈이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쓸쓸해 보였다. 저 멀리 한 마리 갈매기가 외로이 날아가고 있었다. 영우는 훈이의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어쩌면 이별의 아픈 상처가 아직은 남아 있는 영우도 훈이의 심정을 충분히 알 것 같다. 이 순간 훈이에게서 병휘의 아픔이 덧 씌워져서 전달되었다. 영우는 훈이에게서 고개를 돌려 멀리 바다를 보았다. 훈이의 가늠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머니 깊이 손을 넣고 있던 훈이가 무언가 꺼내 영우에게 주었다. “내가 틈틈이 불렀던 노래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이야 조용할 때 들어” “오빠 노래녹음도 했구나” 손때 묻은 테잎을 핸드백에 넣으며 훈이의 팔짱을 끼고 말없이 걸었다. 동병상련의 심정을 애써 지우려는 모습으로,,, 요사이 회사일이 바빠졌다. 철강을 다루는 회사여서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부상자가 발생하면 먼저 회사 내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큰 사고 일 때는 병원으로 후송시킨다. 사내에 간호조무사 경험이 있는 여직원이 있어서 응급처치를 도맡아서 했었는데, 그 여직원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그 일을 영우가 하게 되었다. 영우는 별다른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었다. 갑자기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화상을 입기도 하고 피가 철철 흐르는 부상자가 생기면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처음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었는데,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은 익숙해졌다. 다행인 것은 여고시절 교련시간에 배웠던 골절환자에게 부목대고 붕대감기, 상처에 약 바르고 치료하기, 환자 옮기기, 심폐소생술, 이런 실습교육이 이곳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때는 왜 이런 걸 배워야 하나 하고 불만이었는데 여기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작은 부상 정도는 현장에도 구급약 상자가 있기 때문에 동료들끼리 스스로 알아서 처치를 하기도 했지만, 큰 부상자가 발생할 경우에는 영우가 병원까지 동행해서 입원수속하고 가족에게 알려주고 서류처리까지 해야 했다. 요즘에 영우가 응급처치 업무를 맡으면서 그전에는 없던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생겨났다. 현장직원들이 아주 미미한 부상이 생겨도 거의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총무과 영우에게 찾아오는 거다. 영우가 어이없어서 아까징끼 약 한 방울을 성의 없이 뚝 떨어뜨려 주면서 이제 됐으니까 가서 일 하세요, 그러면 안 된다고 더 치료를 해달라고 떼를 쓴다. 젊은 남자일수록 심하게 떼를 쓰는데, 이대로 가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다 낳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린단다. 덕분에 다른 여직원들은 커피 타는 일이 더 늘었다. 간혹 짓궂은 남자들은 커피도 영우가 타줘야 마신덴다. 커피를 타온 여직원은 기분이 상하기 마련인데, 그것도 좀 지나자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게 본인이 마셔버린다. 영우가 회사일도 바쁘고, 일 마치면 피곤하기도 하고, 집에 부모님께도 죄송한 마음에 한동안 부평의 거리를 찾지 않고 회사에서 퇴근을 하면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훈이오빠를 못 보는 동안에도 영우의 마음속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훈이오빠 생각만 하면 마음은 늘 즐겁고 행복했다. 훈이오빠의 기타 치는 모습과 뮤직박스 안에서의 감미로운 멘트를 떠올리다 보면 하루하루가 영화처럼 빠르게 흘렀다. 그렇게 바쁜 일과를 소화하며 지내기를 한참 만에 훈이오빠가 일하는 진선미 음악다방을 찾았다. 불현 듯 훈이오빠를 만나야 될 것 같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이오빠가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무슨 변화가 있었나?’ ‘어디가 아파서 출근을 못했나?’ ‘중간에 전화라도 한번 해볼걸 그랬나?’ ‘집 전화번호를 알려 줬어야 했는데,,,!’ 온갖 잡다한 걱정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영우가 집 전화번호를 못 알려 준 것이 후회스럽다. 그녀는 훈이오빠를 보고 싶으면 언제나 다방을 찾으면 됐었고. 사는 집도 알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냈던 거였다. 급하게 종규를 찾았다. “훈이오빠가 왜 안 보여?” 종규의 대답은 영우를 놀라게 했다. “왜, 이제야 나타난거야, 훈이는 몇 일전에 떠났는데, 조금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걸,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더 보고 떠나려고 애타게 기다리다 연락할 길이 없어서 그냥 갔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종규에게 전해들은 내용은 집안에 큰 변고가 생겨서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말과 아무도 찾지 말라는 내용뿐이다. 지난번 훈이오빠와 월미도를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훈이오빠는 사랑했던 사람하고 마지막 데이트를 하고 이별을 했던 장소가 월미도였다고 했다.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진 속설이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덕수궁 돌담길하고 월미도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것이 그거다. 영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설마 자신이 그 이별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그때까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없이 떠나버린 훈이오빠는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고 답답함과 기다림의 시련은 영우의 몫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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