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1집 - 산울림 새노래 모음 (1977, SRB) | |
산울림 1집 - 산울림 새노래 모음 (1977, SRB)
Tracks
Side A 1. 아니 벌써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5:38 2.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6:19 3. 골목길 (작사:김창훈 작곡:김창훈) 4:11 4. 안타까운 마음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4:10 5. 그 얼굴 그 모습 (작사:김창훈 작곡:김창훈) 3:22
Side B 1. 불꽃놀이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4:01 2. 문 좀 열어줘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5:59 3. 소녀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4:14 4. 청자(아리랑)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7:42
프로듀서 : 방기남, 녹음담당 : 정용원 |
Credits
어느날의 일이었다.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한 젊은이가 들어섰다.
"사장님이시죠?" "예!" "이것 좀 들어봐 주세요."
젊은이가 바로 金昌完君…… 그러니까 "산울림"의 리이드 싱어였던 것이다. 나는 흔히 하듯 녹음기에 카세트를 꽂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놀랐다. 마치 AFKN의 한 뮤직프로에서나 나올듯한 다이나믹한 사운드,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리듬 터치, 그리고 또 너무도 개성적인 멜로디의 진행과 창법……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그만 매혹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그들의 음악에 넘치는 젊은 활력, 밝은 익살끼……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음악에서는 볼 수 없는 풍요한 생명력의 조각들이라고 느껴졌으며, 마치도 회색 하늘을 가르고 내보이는 한조각 푸른 하늘…… 한줄기 햇살과도 같은 산선한 매력이라고 느껴졌다.
물론 젊은 것만큼 노련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또 신선한 것만큼 완숙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젊음과 신선…… 그것은 바로 창작의 원천이며, 음악에 있어서는 흘러주는 생명의 약동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들 음악의 젊음과 신선한 감각, 그리고 약동하는 생명력의 리듬에 매혹되어 그들의 음악활동을 뒤밀어 주기로 작정했고, 여기서 이 음반은 시작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음악이 청중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결코 노련하지도, 완숙하지도 못하면서 던져주는 커다란 매력…… 이 매력의 근원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省音社 社長 |
Introduction
77년 12월 15일에 발매된 산울림의 데뷔앨범으로 록 앨범으로서는 거의 최초의 히트 앨범이라 할 만하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아니벌써`와 `문 좀 열어줘`, `불꽃놀이`, `안타까운 마음` 등의 곡들을 통하여 이들이 들려준 독특한 사운드, 생동감 넘치는 리듬, 신선한 멜로디 등은 당시로서는 하나의 문화충격이었다. 여기에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사용해 위트와 패러독스가 생동감 있게 표현된 노랫말 역시 우리 가요계의 발전에 커다란 시금석이 되었다.
Introduction 2
김창완이 친동생 김창훈, 김창익과 함께 만든 그룹 '산울림'은 실제로 직업적인 락그룹이 되기 위해 앨범을 만든 건 아니다. 1972년 경에 그가 집에 500원짜리 기타를 들고와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른 것이 음악의 시작이었다. 얼마 후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장만하자, 할 것이 없는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드럼 흉내를 내면서 그들의 음악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77 대학을 졸업(서울대 농대 잠사학과)하면서, 그동안 작곡을 하였던 약 150 여곡들이 아까워서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기분으로 그들은 한 장의 앨범을 내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을 허락했고, 녹음날 취직시험이 있던 그는 과감히 녹음을 하기로 결정하고 녹음한 것이 바로 '산울림'의 탄생이었다. rock이 그다지 대중화되지 못한 70년경에 '산울림'의 "아니벌써"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국내 가요계를 흔들어 놓았고, rock의 대중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집의 '산울림'은 다시 한번 앨범을 낼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집 "내마음의 주단을 깔고"이고, 이 앨범은 '산울림'을 국내가요계의 앞서가는 그룹으로 완전히 자리 굳히게 한다.
1979년 창훈과 창익의 군입대로 인한 공백기를 거쳐 1981년 7집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 무렵에는 "산할아버지" "개구쟁이"등 어린이를 위한 세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이 노래들은 지금도 각종 모임과 운동경기에서 단골로 불려지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1983년 산울림은 9집을 끝으로 해체했다. 두 동생은 사회인이 되었고 맏이인 그만이 산울림의 이름으로 3장의 음반을 내는 등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신인들을 모아 '꾸러기들'을 결성하여 최성수, 임지훈, 윤설하, 현희, 신정숙 등을 길러냈다. "꼬마야" "고등어" 등 히트곡도 냈다. 그의 음악은 20년이 흐른 지금도 산울림의 연장선상이다.
'산울림'의 78년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첫 공연은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는 소동을 벌였고, 관객들이 던진 꽃으로 무대가 뒤덮이는 소동을 벌이는 등 많이 화제를 낳았다.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음악정신에 젊은이들의 열광이 따랐다. 77년생 아이는 '산울림동이'로 불렸을 정도이니 인기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83년 활동을 중단한 이후 14년만에 본격 활동을 선언하고 나섰다. 삼형제 록그룹 '산울림'의 복귀는 신선함과 충격 이상이다. 산울림은 90년대의 록 평론가들에 의해 신중현과 들국화와 더불어 한국록 역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문제적 데뷔 앨범'으로 평가받는 산울림 1집이래 '산울림'이란 이름으로 작년까지 13집이 출반 되었다. 네 개의 동요앨범, 두개의 독집도 그의 앨범목록에 올라 있으며 그의 음악은 어떤 장르에 있더라도, 상투적인 문법을 거부하는 창의성으로 빛난다.
'산울림' 음악의 전반적인 관심은 '인생'이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2집부터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좀더 깊은 주제에 관해 젊은이들이 관심을 보이게 되면서 산울림 음악을 좋아아하게 되었다. 우리말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해서, 노랫말도 참신함을 지니려고 노력했다.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사용해 위트와 파라독스가 생동감 있게 표현된 노랫말은 우리 가요계의 발전에 커다란 시금석이 되었던 사건이다. 특히 산울림의 앨범 자켓은, 자켓의 1/4이 조금 넘는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왼쪽 중간에 있고, 그 오른쪽에는 '산울림'이라는 특이한 글씨체로 그들의 그룹명을 적어 놓았는데, 12장의 정규앨범들이 나오면서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만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 가수의 사진을 앨범 자켓에 싣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앨범 자켓에서도 그들은 앞서 가고 있었다..... |
산울림 - 산울림 1집 (서라벌레코드,1977) - 박은석 | 2007/09/06
산울림 1집 - 산울림 새노래 모음 : 아니 벌써 / 불꽃놀이 / 문 좀 열아줘 (1977)
SRB (SR-0090) | 1977-12-15
Disc 1 - 1. 아니 벌써, 2.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3. 골목길, 4. 안타까운 마음, 5. 그 얼굴 그 모습 / Disc 2, 6. 불꽃놀이, 7. 문 좀 열어줘, 8. 소녀, 9. 청자(아리랑)
※ 가슴네트워크, 경향신문 공동기획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 (가슴에서는 매주 월요일/목요일, 경향신문에서는 매주 목요일 1~100위 음반리뷰를 순차적으로 올립니다. 총50주 동안 연재할 예정이고, 32명의 필자가 참여합니다. *별점은 해당 필자의 의견이 아니라 가슴에서 일률적으로 매긴 평점입니다.)
[대중음악 100대 명반]5위 산울림 ‘산울림 1집’
산울림의 데뷔앨범을 섹스 피스톨스의 그것과 연관시키는 평자들은 흔히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곤 한다. 두 앨범이 같은 해에 발매되었으며, 아마추어리즘을 바탕으로 주류 음악계를 뒤흔들어놓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같은 외적 조건의 유사성만으로는 이 앨범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측면을 왜곡시킬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요컨대 이 앨범은, 정치적 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 미학적 이론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산울림의 음악은 이데올로기 따위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아예 무관심하다. 특히, 이 데뷔작은 무엇보다 즐거움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록 앨범이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몇 년 전의 인터뷰에서 김창완은 자신의 작품들 가운데 동요앨범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서 함양이라는 음악의 원초적 기능에만 충실한 것이 동요다. 거기에는 전복적 사고나 이념적 가치와 같은 ‘불순물’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산울림의 데뷔 앨범은 록음악이 동요의 단순한 직선성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이다.
예술가적 자의식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와 순진한 열정이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을 만들어낸 극히 보기 드문 사례였던 것이다. 수록곡들이 앨범을 제작하기 수년 전에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는 사실은 그 증거 가운데 하나다. 그들의 벼락 같은 등장이 대마초 파동으로 쑥대밭이 된 음악계의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는 시대적 조건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이 앨범은, 굳이 서양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60년대 초반 미국의 개러지 록과 함께 논의되어야 마땅하다. 비틀스의 정제된 록 사운드가 세상을 뒤덮기 직전,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연주된 로큰롤의 거친 순박함이 그것이다. 그 분방한 자유로움 속에서 혁신이 탄생한 것이 우연이었던 것처럼, 이 앨범이 가져온 파격 또한 의식적으로 연출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동시대 가요의 통속적 감상주의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선율로 이루어진 곡들이 상당수임에도 이 앨범이 그들과 완전히 다르게 들리는 이유도 거기 있다. 보다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2집이 정형화의 대가를 치른 반면, 이 앨범의 발랄한 도발은 기존의 무엇에도 빚진 게 없는 만큼 완전히 신선했고 여전히 신선하다.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에서 탈피한 노랫말(김창완은 1982년의 8집에 이르러서야 산울림의 노래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고 말했다), 동요를 반주하는 듯 또박거리는 오르간과 심하게 일그러진 퍼즈 톤 기타의 극적인 사운드 대비, 묵묵하게 전진하는 드럼과 굽이치며 꿈틀대는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그루브까지 이 앨범의 내용물은 그 전과 후를 통틀어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독자적이다. 그래서, 당대의 히트곡으로 자리매김했던 ‘아니 벌써’도 그렇지만, ‘문 좀 열어줘’의 인트로와 노랫말은 오늘 발표된 신곡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공시성의 생생함으로 다가온다. 민요를 모티브로 한 가장 창조적인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청자(아리랑)’, 변형된 론도양식의 리프가 시종일관하는 기이한 사랑노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등도 그 못지않다.
산울림의 데뷔앨범은 구도자적 이미지와 혁명적 메시지로 포장된 록 음악 신화를 해체해버렸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점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그건 결코 아이러니가 아니다. 오늘의 록 음악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그 모순적 논리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은석|음악평론가〉2007년 09월 06일 |
[대중음악 100대 명반]산울림, 김창완·창훈·창익 삼형제 구성
1977년 록밴드의 음악으로 창작, 연주 면에서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산울림은 가히 ‘한국 록의 시작’으로 불릴 만하다. 그리고 이는 신중현이 ‘한국 록의 대부’라기보다는 ‘한국음악 창작자의 역사에서 시작’으로 불리는 것이 타당함을 생각한다면, 또한 실질적으로 산울림의 록 음악부터 음악 마니아들의 현재적인 감성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상기한다면 산울림을 진정한 ‘한국 록의 시작’으로 불러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김창완(기타·보컬), 김창훈(베이스·보컬), 김창익(드럼) 삼형제로 구성된 이들은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불꽃놀이’ ‘문 좀 열어줘’ 등이 수록된 ‘한국 록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77)을 발표했다. 이후 불과 5개월 뒤 ‘어느 날 피었네’ ‘이 기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안개 속에 핀 꽃’ 등 창작적으로 가장 훌륭했던 2집(78)을 발표하는 기염을 토한다. 역시 같은 해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이 담긴 3집을 발표하며 초기 산울림의 대미를 장식한다. 김창훈과 김창익의 군입대로 4~6집은 김창완 솔로 체제로 활동하였고, 이 시기의 대표곡으로는 ‘오솔길’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빨간 풍선’ 등이 있다.
81년에는 김창훈과 김창익이 복귀한 7집을 발표했다. 고풍스러운 오르간과 퍼지톤 기타가 빠지는 등 사운드의 기조가 초기와 완전히 달라지면서 느낌은 깔끔해졌지만 초기의 거칠면서 원초적인 에너지는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가지마오’ ‘독백’ ‘청춘’ 등이 히트했고, ‘먼 나라 이야기’라는 명곡이 실렸다. 이후 ‘새야 날아’ ‘내게 사랑은 너무 써’ ‘회상’이 수록된 8집(82),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멀어져간 여자’ ‘더, 더, 더’가 수록된 김창완이 가장 좋아한다는 9집(83), ‘숨길 수 없네’ ‘너의 의미’가 수록된 10집(84)까지는 같은 선상의 작품들이다. 그리고 10집은 사실상 산울림의 마지막이었고 이들의 공식적인 활동은 중단되었다.
이후 김창완 혼자 참여한 11집(86), 12집(91)이 발표되었고, 97년에는 삼형제가 잠시 모여서 13집 ‘무지개’를 발표했다. 99년에는 시나위, 자우림, 윤도현 밴드, 블랙신드롬, 델리 스파이스, 문차일드 등이 참여한 트리뷰트 앨범 ‘산울림 Tribute Album 77 99 22’가 발매되었다.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2007년 09월 06일 |
산울림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내 맘대로 한국 대중음악 싱글 200선
음악을 듣다보면 '어, 이런 음악이 어떻게 그 시절에 나올 수 있었지?'하는 의문이 들때가 가끔 있다. 뭐, 이런 기분 좋은 당혹감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 시절에도 이런 음악이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일까?'하는 낭패감으로 바뀌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우리 대중음악 역사에서 저런 뮤지션을 꼽는다면 하나는 들국화, 다른 하나는 산울림이 되겠다. 서태지? 서태지는 글쎄, 그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 간 느낌이라기 보다는 그때까지 잘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을 했다는 느낌이랄까. 뒤집어 얘기하면 그들의 스타일이 다른 뮤지션에 의해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고, 또 그들의 음악이 완성도 측면에서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것이고 후자는 내 개인적인 평가다. 사회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에 비해 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미미한 것이 아니었나 하고 난 생각하게 된다. -비슷한 포맷의 댄스 그룹의 범람이라는 네거티브한 영향력까지를 포함한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음악계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할 것이다. 물론 이건 그들이 욕먹을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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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이 30년전에 발표한 1집에 실린 이 음악을 들어보자. 지금의 1급 모던락 뮤지션들의 음악에 비추어봐도 전혀 뒤지지 않는 참신함과 '모던함'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시의 한국 대중들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독특한 악곡 구성과 당시에는 치를 떨었을 법한 성의없는 보컬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고음'에 열광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이전에 없었던 독특한 詩情의 노랫말은 동시대인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
하지만 한국 대중음악계는 물론이고 동시대의 영미 팝과도 다른 길을 갔으나 언젠가는 그 어디에서건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위대한 밴드 '산울림'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를 157번째 리스트에 올린다.
-지금은 이들의 정규 앨범을 구할 수가 없다. 얼마전 세 장짜리 베스트가 발매됐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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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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