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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계간 《불교문예》♧ 불교문예작가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명옥(무디따)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돌의 문서 / 이린아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
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복도 / 변선우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펴져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낸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여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 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 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크레바스에서 /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새살 / 조윤진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미륵을 묻다 /김형수
이천여 년 전의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해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그런 일이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도 한 천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이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들 한 천 년쯤 작정하고
나무를 묻었다는 매향(埋香)의 기록
아, 어느 어진 왕이 천 년 후를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묻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땅에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 년 후의 나무 씨를 뿌렸다는,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렸다
■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애 / 이윤순
설마에
속아 산 세월
어느 덧 팔십 여년
태워도
안타더라
끓여도 안 익더라
아파도
끊기지 않는 너 북망산은 끊어 줄까
세상에
질긴 끈이
천륜 말고 또 있을까
노구의
어께 위에
버거운 짐 덩이들
방하착(放下着)
할 수 없으니 착득거(着得去) 할 수 밖에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돋보기의 공식 / 우남정(우옥자)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 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볏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본다 찡그려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본다
눈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 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율가(栗家) / 이소회
갓 삶은 뜨끈한 밤을 큰 칼로 딱, 갈랐을 때
거기 내가 누워있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레가 처음 들어간 문, 언제나 처음은 쉽게 열리는
작은 씨방 작은 알 연한 꿈처럼 함께 자랐네
통통하니 쭈글거리며 게을러지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밥과 집을 닮아갔는지
참 잘 익은 삶
딸과 딸과 딸이 둘러 앉아 끝없이 밤을 파먹을 때마다
빈 껍질 쌓이고 허공이 차오르고 닫힌 문이 생겨났다
말랑한 생활은 솜털 막을 두르고 다시 단단한 문을 여미었다
강철 같은 가시는 좀도둑도 막아주었다
단단한 씨방 덜컹덜컹 뜨거워지는데
온 집을 두드려도 출구가 없네
달콤한 나의 집, 차오른 허공이 다시 밥으로 채워질 때, 혹은 연탄가스로 뭉실뭉실 채워질 때
죽음은 알밤처럼 완성된다
죽음은 원래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등대 / 유하문
지붕 낮은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는 작은 마을 앞 바다에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 넘보는 거센 파도 막아 줍니다. 근심 끝에 파수병 하나 하얀 총 들고 서 있습니다.
멀리 부레옥잠처럼 떠 있는 형제 섬들 너머로 아침나절 조업나간 배들이 돌아오고, 서녘 하늘 피조개 속살 같은 노을이 만선한 어부들 얼굴에 단풍으로 피어났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면 보초선 이등병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전우들을 위해 반딧불처럼 기별을 보내고, 육지에선 촛불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흘러 바다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서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매 끝 눈으로 가져가는 노모와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작은 촛불 켜고 착착착 잘도 돌아옵니다.
아침에야 걱정 거두고 잠이 든 등대 안쪽 부두엔 옆구리 맞대고 늘어선 배들이 잠시 낮잠을 잡니다. 수협 앞에서 파시가 펼쳐지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등 푸른 지갑을 엽니다. 돈 좀 챙긴 아버지들 소주 몇 잔 나누며 서울 간 자식 걱정에 한숨 자다가 또 바다로 나갑니다.
위문편지처럼 마지막 여객선이 부두로 들어오면 도시로 가는 마분지 박스마다 바글바글 병아리 사랑이 실립니다. 수협 뒤 여관 창에 불빛이 들어오고 홀로 된 숙모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에 잠을 잡니다. 등대 너머 하얀 부표들 밑으로 김이 자라고 미역이 자라고 전복이 자랍니다.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말 먼 곳 /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위질은 이렇게 / 이인애
엄마의 엄지와 약지는
사이에서 놀고 있는 손가락들을
움직이게 하는 두 가닥의 힘이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낮은 간판 아래 무릎을 꿇는다
빠져나갈 구멍만 있으면, 하며 집을 나와
미장원 열쇠구멍이나 찾는 엄마
날이 마모된 커트용 가위가
정수리에서 밀려나온 머리카락을 씹는다
언젠가부터 밥알도 질기다던 아버지처럼
잘근잘근 이로 뭉갠 머리카락을 토한다
중심에서 멀어진 것들은 잘라내야 한다는 생각
아버지가 다니던 석재공장에서도
돌가루처럼 번져갔던 걸까
남편의 까맣고 윤기 나는 직장을 두 동강 내는
엄마의 가위질을 탓하는 점쟁이
눈 뒤집힌 말들, 미용실 바닥에 쌓인다
가위질 하는 두 손가락 사이에서 졸고 있는
검지나 중지보다도 가늘어진 아버지를
자를 때가 왔다는 통보가 왔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다 오던 날
엄마는 가위가 돌아간다고 했다
손가락이 자꾸만 구멍에서 빠진다고
아버지가 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줬다고
■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첫차 / 심상숙
환한 덧니가 영정을 물고 있다
부음은 여태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곳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혜화동 대학병원 장례식장 한 밤의 보일러 굉음이 블랙홀이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눈발, 국밥 말아먹듯 휩쓸려간다
눈 덮인 교복과 찹쌀떡 모판을 방 윗목에 세워 두고
모나미 볼펜과 파카 만년필 좌판 그리고 문구 캐비닛
끝내 가보지 못한 장학생 대학 합격증을 끌어안고,
영정 속 덧니는, 네모 속으로 문상객이 내어 준 사각의 추억을 끌어 들인다
종로에서, 덕수궁에서 우리 한 번 마주 친 적 있을까
흰 국화꽃 대궁 끝에 떨어질 듯 매달린 저 눈빛
아직도 인연이 남았는지 팽팽하다
단단한 잇몸 뚫고 좋은 내색이듯 빛나는 뻐드렁 덧니, 누군들 함부로 웃지 못한다 알 굵은 사과나 날 고구마를 통 째로 베어 물어 아귀 귀신 달래듯 자리를 내어 줄 뿐이다
막차 전철도 끊어져 눈 쌓이는 저녁
총알택시 대신
대학병원 아무 집 영정 앞 뜨신 바닥에 덧니로,
얹혔다가 꼭두새벽 일어서는 자리
■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롤러코스트 / 이온정
놀이 공원엔 비명이 꽃핍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걸까요
믿음은 힘이 세고
구심력과 원심력에 매달려
아찔한 생을 소진하고 있는 걸까요?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없는 이 놀이는 무섭습니다
현기증을 다독이며 회전하는
공중의 수를 서서히 줄이기로 합니다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돌리던
저녁의 둘레를 줄이면
둥근 공포는 야광으로 빛날까요
노랗게 질릴수록 안전 운행을 믿지만
믿어서 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힘이 센 믿음에서 이탈하고 싶지만
굴곡의 운행은 중도하차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존재의 끈을 놓지 않고
기어이 튕겨나간 방식으로 지킨 일생이라면
저렇게 즐거워도 됩니다
멀미를 추스르며
현란한 굴레를 휘돌리던 바퀴들의 공중
즐겁던 아비규환이 조용합니다
어떤 절정도 저렇게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놀이기구 밑엔 비명들이 즐비하고
비명은 즐거움과 고통의 두 가지 방식입니다
구심력으로 밀고 원심력으로 배신당하는
이 아찔한 일생의 놀이를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우려 합니다
이온정 : 강원 정선 출생. 5·18 문학상 신인상 수상. 전태일 문학상 수상.
■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박은영 : 1977년 전남 강진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밀풀 / 고은희
1.
밀풀에서 꽃이 폭폭 끓는다. 부풀어 오른 밀풀은 겨울과 여름에 유용하다. 문살에 밀풀을
바르고 창호지를 바르고 무성한 숨을 바른다. 덩달아 지붕 위로 하얗고 얇은 첫눈이 내린다
귓불이 떨어져나간 단풍잎 몇 개가 붓살이 쓸고 간 거친 자리에 폴짝 내려앉는다. 겨울 문
턱에서 말이 달리고 창호지 마르는 소리가 소복소복 들린다. 그러니까 문풍지는 밀풀이 모
른척한 날개, 열렸다 닫히는 문이 구수한 밀풀냄새를 풍기며 날아다닌다.
2.
김치는 꽃이다. 사이사이 익어가는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한 여름 열무김치를 들여다보면
온갖 색이 다 들어 있다. 푹 절인 열무에 홍고추를 썰어 넣고 푸른 실파를 뭉텅뭉텅, 마지막
에 흰 밀풀을 넣어 섞어 피는 꽃.
밀풀이 돌아다니는 동안, 풋내라는 밑줄에 문풍지가 달려 나온다. 꽃이 피려고 사각사각
감칠맛이 날 때,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 동지섣달 한겨울을 불러낸다. 밍밍한 국물에서 팽팽
한 문풍지 맛이 나게 하는 것, 밀풀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다
3.
살짝만 뜨거워져도 엉겨 붙는 밀풀의 힘,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배 아픈 때가 있다. 잘 풀
어줘야 잘 붙는 힘, 풀죽은 열무가 밀풀을 만나 아삭아삭 기운을 차리듯 김치도 한겨울 문
도 밀풀의 요기로 견딘다.
창호지 문에 구멍하나 뚫린 듯
열무김치국물은 앙큼한 맛이다
고은희 : 1967년 전남 무안 출생. 현 방송작가(KBS'6시 내고향' 등).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