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의 전성기 : 유스티아누스 황제
6세기에는 매년 5월 11일의 수도 탄생 기념 축제가 제국의 중요한 기념일로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했다”라는 의식이 정착했다. 이때의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서 동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융성기를 맞이하여, 콘스탄티노플은 크리스트교 세계 최대의 대도시이자 세계적으로도 최대급의 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시민들에게는 로마처럼 빵이 무료로 지급되었고, 경마장에서는 전차 경주가 자주 열려 시민들은 열광하였다. 고대 로마의 ‘빵과 서커스’가 전혀 다른 도시에서 이 시대에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482년 경 다르다니아 타우레시움(오늘날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비길라티나는 유능한 장군이자 황실 친뤼대장이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되는 유스티누스의 여동생이었다. 유스티누스는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 자신을 돕게 했고 훗날 양자로 삼았다.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죽자 유스티누스는 다음 황제로 지명되었는데 이때 유스티니아누스의 도움을 받았다. 삼촌이 황제가 된 이후에도 무지한 삼촌을 도와 많은 행정 사무를 맡아 처리했고 나중에는 노쇠한 황제를 대신하여 사실상 제국을 통치했다. 527년 4월, 유스티누스는 조카를 공동황제로 임명했고 한달 후 서거하자 단독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되기 전에 그는 테오도라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일설에 의하면 스트립 댄서 또는 창녀였다고 한다. 당시 제국법에는 귀족은 평민과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 신분의 유스티니아누스는 미천한 신분인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인 외삼촌에게 부탁하여 귀족신분도 하급계층과 결혼을 허가하는 법안을 제출하게 했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라는 일단 황후가 되자 제국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편견을 갖고 보던 귀족들도 황후의 훌륭한 행동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라 황후는 평생 남편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큰 힘이 되었다.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거의 제위를 빼앗길 뻔 한 위기에 몰렸다. 당시 인기가 있었던 전차 경주팀을 응원하던 청색당과 녹색당의 폭동이 반란으로 확대되어 군중들이 황궁에까지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였는데, 테오도라 황후는 황제에게 "황제는 황제답게 떳떳하게 죽어야 합니다."라고 격려하여,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벨리사리우스 등의 장군들을 불러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