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의 문학
황 정 환
우리 고향은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 는 그 길목인 와룡산과 구룡산의 전설과 설화가 무성한 고장으로 물로 씻어 내듯이 가난한 농촌이었던 사천(泗川)이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은 산골의 수재들이 과거에 낙방하자 귀향의 면목을 잃은 나머지 길을 잘못 들어 응시의 기회를 놓쳤다며 꾸며댄 것이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여하튼 숱한 전설과 설화 가운데에는 가슴에 와 닿는 교훈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천 년을 묵은 구렁이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려 하자 아홉 마리의 새끼용들이 울며 매달리자 어미용은 차마 떠나지를 못했다고 한다.
“다시 천 년을 기다려 너희들과 함께 승천을 하자구나”하고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화살 같은 천 년이 다시 흘렀다, 하지만 그때는 어미용은 이미 노쇠하여 그만 사천 벌에 드러누워 와룡산(臥龍山)이 되고 말았으며 아홉 마리 새끼들도 어미의 발취에 웅크려 구룡산(九龍山)이 되어 버렸다는 설화는 무엇인가 뭉클해짐을 느끼게 만든다.
향리의 효도와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의 사랑과 애향심을 기루는 향리의 교훈이 깃든 설화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밤에 손톱을 깎으면 부모를 일찍 여읜다는 속담도 어제와 오늘을 느끼게 만드는 향리의 교훈임이 되살아난다.
잡도 속에 노부모를 내다 버리는 오늘의 자식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나는 빈촌인 사천 벌의 공소집 막내로 태어났는데 공소집은 성당이 없는 시골의 신자들 집회소집이다.
주일이 되면 신자들이 모여들어 합동으로 미사봉헌이 불가능하니까 주일기도를 대송으로 올렸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글은 쓴다는 백면의 군청의 임시 서기가 끼어 있었다, 활달한 아줌마가 마구 지껄여댈뿐 청백한 임시서기는 통 말이 없었다.
어린 나는 장난으로 손가락으로 임시서기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으나 그는 나를 보고 눈만 껌벅껌벅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 소설가가 된 그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문단을 주름잡는 거장이 되어 있었으나 소문대로 아줌마는 그때의 그 아줌마가 아니었다, 나는 왠지 그가 배신자로 보였다.
구교도는 혼인할 때 혼인서약에 불가해소성을 하느님 앞에서 맹서를 했었는데도 여류문인이라는 새로운 부인과 함께 나타난 것을 보니 그는 이미 구교까지 버린 것 같았다.
중세의 이른바 종교혁명으로 불리던 <프로테스탄트>의 주역이던 <루터>는 학생시절 기차로 귀성 중 뇌성폭우를 만나 하느님에게 이 위기에서 저를 구해주시면 저를 바쳐 수도자가 되겠습니다하고 맹세를 했었는데 그는 서약대로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사사제가 되고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한다 대체로 서구사람들은 하느님과의 서약은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지키는 편이어서 나중 일들은 뒤로 미루고라도 우리주변처럼 함부로 하느님 앞에서의 서약을 쉽게 생각하지를 않는다고 전한다.
어떻든 철없던 나의 인성에는 종교의 극단적인 지향과 영원한 생명의 성취라는 이상(理想)이 인호처럼 박혀 지금까지도 그 기반을 벗어날 생각이란 꿈에도 못하고 나의 졸작들에는 작품마다에 내 안에 내재하는 신성(神性)과의 대화가 용해되어 있음을 스스로도 느낀다.
그런데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죄와 고뇌를 털어 버리면 속이 후련해지는 법이지만 죄와 고뇌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신성과의 디아골로서(단절)를 가져온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것으로 느껴져 왔었다. 지금도 서구사람들은 디아골로서를 마귀의 장난으로 알아듣는다.
고백의 성사(聖事)는 중세의 제정일치의 통치제도권의 필요성과 교회의 권위가 응고된 의식이라는 이견(異見)이 없지를 않지만 나는 떨쳐버릴 수 없는 마음과 믿음의 예속으로 고백의 성사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건재하는 교회의 의식과 하느님의 용서와 은사의 하나인 것으로 신앙의 필수사항인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 보수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인성(人性)은 5∼6세에 굳어버린다고 말하지만 그 이후에도 뇌리에 흡수되는 양의 강약은 있을지라도 계속 흡수되어 점진적으로 굳어져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의 가능성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젊을수록 인성이 굳어져가는 농도가 강한 것으로 여겨진다, 북한의 유아교육강화가 여기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그렇고, 어릴 적 공소였던 우리 집에서 만났던 백면의 문사와는 그것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또 하나는 전설의 무성함이다. 60년대 초에 내가 4년간 수산대학에 출강을 했었는데 대학본관에 들어서면 전면 가득히 바다그림 위에 교가가 쓰여져 있어 놀란다.
교가는 큼직한 글씨로 “용소(龍沼)의 정기를 이어받아…….”
로 시작되어 있었는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수대(水大)하면 그 용소의 정기(精氣)가 떠오른다.
용소는 상스러운 해룡(海龍)이 쉬던 갈대밭 이라 했다, 그리고 보니까 그 일대가 용연, 용소, 용호, 용당 등 용이 서식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명들이 깔려 있다.
지금도 대학의 실험실에는 신선대에서 번득이며 바위틈으로 기어오르던 6∼7미터 길이의 산 갈치를 해변 사람들이 잡아 온 것을 <알코올>통에 넣어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갯가 사람들의 설화로는 천년을 묵은 구렁이가 용이 못되면 이무기가 되고 바다뱀과 갈치가 해룡이 못되면 이무기나 산 갈치가 되어 뭍으로 기어오른다고 했다.
놀랄만한 것은 내가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수산대학에 들렸더니 현관 벽면 가득히 부산수대와 꼭 같은 “용소의 정기를 이어 받아……”로 시작되는 교가가 붙어 있어 놀랐다.
그들의 굽일 줄 모르는 야망과 건학정신과 언젠가는 반듯이 다시 돌아 갈 것이라는 집념이 두렵기까지 했다. 여행자들이 말하는 일본인들은 어디를 가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라는 노래를 아주 좋아 할 뿐 아니라 대개가 우리말로까지 노래를 부르더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돌아오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지을 수 없는 집념일까 알 수없는 것이 그들의 바람인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여하튼 그들이 즐겨 쓰던 선언적이거나 시각적인 구호와 목표와 표식 등은 인성에 강한 흡인력을 지니는 것 같다.
그런데 당시의 수대는 소규모여서 교수들도 40명 안팎이 엇고 학생 수도 적었다, 현관 옆 조그마한 향파 선생의 길목 방에 자주들 모였다.
향파 선생은 우리문단의 거목이지만 소탈하고 개방적이어서 길목 방은 늘 비어두셨다, 그리고 한가한 하오에는 박구병 교수와 김인태 교수 등과 자주 어울려 바닷가 갈대밭을 빠져나가 남천 간이 해수욕장가의 초가횟집에 둘려 앉았는데 어떤 이야기들이었을까. 지금은 모두 잊어버렸지만 문학이 어떠니 철학이 어떠니하고 기염을 토했던 것 같다.
수필집<파도의 속삭임>, <성소>, 소설집 <깊은 함정> 등은 이 무렵을 소재로 삼은 작품집들이 엇다.
그런데 지금은 부산이 약진을 거듭하는 국제적인 해양무역도시로 발전해 가는 과정으로 국제적인 것만 아니라 국내적인 편견이 거세다. 문학의 불모지대 운운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역항치고는 부산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그 어느 항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수려한 경관으로 둘러 싸여있다.
열다섯 곳 이상의 대(臺)와 수많은 골짝으로(谷)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몰운대, 태종대, 신선대, 자성대, 강선대, 시랑대, 오랑대, 상선대, 하선대, 오륜대, 해운대, 황학대를 비롯해서 범내골, 장대골, 못골, 범바위골 등 무수한 골이 산재해 있는 아름다운 해양도시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 싸여있는 부산이 문학의 불모지대로 뒤질 까닭이 없다.
문학은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배태되는 인간과 자연의 참됨을 찾아내려는 과정이라고들 말한다.
나는 소설집 <절영도>와 수필집 <황령산>과 소설집 <마지막 시련> 등을 썼고 <잊어버린 오랑대>도 썼는데 모두가 수려한 부산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한 창작활동들이었다.
첫댓글 석엽 선생님의 수필은 아주 재미 난다.소설적 요소가 담겨서라 여긴다.
수필 <내 고향의 문학>에 매우 흥미로운 문단 일화가 많이 언급돼 있다. 석엽 선생이 어릴 적 공소에서 미사 중에 군청 임시서기 옆구리를 꾹꾹 찔렀는데.그는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는가?
석엽 선생에게 직접 물어 보는 것은 너무 싱겁다.또한 알으켜 줄 것 같지도 않다.그 소설가는 천주교 열성신자였던 첫부인을 내치고 여류소설가와 재혼했기에 안 좋게 볼 뿐더러 그의 실명이 밝혀지면 고인이지만 뜻하지 않은 구설수에 말릴 수 있어서인데....이럴수록 더 알고 싶은 게 사람의 속성이다
문단사를 좀 아는 사람이면 제꺽 알아 맞추고 하아! 그랬었나? 할 터이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으면 글을 한 번 더 읽어 보기를 권한다.
혹시 다솔사에서 창작활동을 많이 하시던 '등*불'의 작가 그분이신가요? 갸우뚱~~`
역시 카페지기답습니다.관심을 가져 주셔서 무척 유쾌합니다.石葉선생이 올해 여든 다섯 살 자셨는데 惡童시절 이야기로, 이 글에 나오는 소설가는 장가 들었고,<글 쓴다는 군청 서기>라 했으니 1932~1935 년의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소설가의 자세한 경력을 인터넷에서 찾아지는 대로 정확한 연대를 밝혀 놓겠습니다.
석엽 선생은 부산수산대학 교수와 성모여고 교장직을 맡느라 소설 쓰는 데는 열을 쏟지 못했지 않나 싶다.눈 감고 기도하는 분의 콧털을 뽑거나 옆구리를 치는 등 어릴 적 장난질의 상대가 한국의 최고작가가 되었으나 헤어진 후 전혀 만나지 않았으니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