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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성씨의 뿌리공원-3
01.장흥위씨 02.동래정씨 03.아산장씨 04.함창김씨 05.청주이씨
06.한양조씨 07.은진송씨 08.신평이씨 09.신천강씨 10.전의이씨
11.영광김씨 12.청주곽씨 13.창녕성씨 14.죽산박씨 15.양주조씨
16.충주석씨 17.나주최씨 18.담양전씨 19.자료없음 20.면천복씨
21.광산탁씨 22.안강노씨 23.풍천임씨 24.초계주씨 25.해주최씨
26.남양홍씨 27.자료없음 28.해주은씨 29.경주배씨 30.충주지씨
31.평해구씨 32.평해구씨 33.진원박씨
[01]
위씨(魏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晉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唐)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인 위 경(魏 鏡)이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경(鏡)의 동래설(東來說)은 또 다른 설(說)이 있는데, 신라(新羅) 왕(王)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 왔다고도 한다.
경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侯)·아찬(阿 ) 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懷州 : 장흥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신라 말(新羅末)에 대각관 기중(大覺官侍中)을 역임한
위창주(魏菖珠)를 일 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02]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의 전신(前身)인 사로(斯盧:서라벌)의 6촌(六村) 가운데
취산 진지촌장(취山 珍支村長):본피부(本彼部) 지백호(智伯虎)의 원손(遠孫)으로 전하는
회문(繪文: 신라 때 안일호장을 지냄)을 원조(遠祖)로 알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그의 후손 지원(之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정착 세거(定着世居)해 온 거칠산군(居漆山郡:지금의 부산 동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하는 인물로는 지원(之遠)의 아들 문도(文道)가 고려에서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으며, 그의 묘(墓)가 부산(釜山)의 화지산(華池山)에 있는데 묘(墓)에 얽힌
재미난 전설이 지금껏 전해진다.
그가 죽어 아들이 지금의 묘터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자
그날 밤 도깨비들이 나타나 “대인(大人)이 들어올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하며
묘를 파헤쳐 버려 이튿날 이를 본 아들이 영문도 모른 체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모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묻고 파헤치는 실랑이가 몇 차례 계속되던 끝에 이를 이상히 여긴 아들이
해박한 마을 노인을 찾아가 기묘한 사실을 얘기하자, 노인은 그 자리는 임금이나 정승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금으로 관을 만들어 묻으면 되나 그럴 수는 없으니 관을
보릿짚으로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03]
우리나라 장씨(蔣氏)의 본관은 문헌에 아산, 청송, 김포 등 여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존(現存)하는 장씨는 아산 장씨로 단일화하고 있다.
아산장씨의 시조인 장 서(蔣 壻)는 중국 송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 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고려 예종 때 금나라가 송을 침입하자
상서(尙書)이 강(李 綱)과 함께 항전(抗戰), 적에게 한치라도 빼앗겨서는 안되며
끝까지 사수(死守)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議論)이 불합(不合)하여,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배를 타고
동으로 망명, 우리나라의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표착(漂着)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예종이 중국에 탐문(探問)한 바 후히 대접하라는 전달을 받았다.
예종은 서(壻)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아산군(牙山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서(壻)를 시조로 하고 아산을 관적으로 하여 누대에 걸쳐
세거하면서 세계를 이어왔다.
[04]
시조는 고령가야의 왕이며 그는 김수로왕과 함께 금합에서 나온 6명중의 한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합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으며 고령가야가 지금의 함창이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함창으로 하였다.
그 후의 후손들은 알 수가 없으며 후손인 김종제(덕원군)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그후 김세순(金世珣, 의산군)을 1세조로 하는 파와 김균(金勻, 검교소감어사)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 김선을 시조로 하는 계통도 있다.
[05]
시조 능희(能希)는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
(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그의 10세손 계감(季瑊)은 낭성군(琅城君)에 봉해지고, 13세손 애(薆)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으로 상당(上堂:청주 옛 지명)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능희(能希)의 아들 겸의(謙宜)도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문신의 관계로 종2품 벼슬)에 올랐으며, 증손 중강(仲降)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또한 중강(仲降)의 손자 공승(公升)이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刑部)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계장(桂長)도 평장사(平章事)를 지내는 등 모두 가문의 영예를
누리게 했다.
조선조에 와서도 가문이 번성하여 거이(居易)가 태조(太祖) 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태종(太宗) 때에는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기로소(耆老所: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실직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위해 마련한 경로당)에 들어갔다.
[06]
한양조씨의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 용진현(德源府龍津縣)에 세거해온
사족의 후예로 고려조에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 후 후손들은 조선이 개국하자 한성(漢城)으로 이 거하여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고,
많은 명신과 훈신·유현을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그러나 한양 조씨는 지수(之壽)의 후손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인재의 계통과
총관을 지낸 휘의 계통으로 대별되어 서로 계대를 다르게 하며 보첩도
따로 만들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휘(暉)의 아들 양기(良琪)가 1281년(충렬왕 7)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일본정벌에 참가했고 21세 때 합단의 침입을 대파한 공으로 원나라
세조로부터 금포와 옥대를 하사받았다.
[07]
은진 송씨는 중국 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예로 전하며, 그의 7세손 송순공(宋舜恭)의 후손 자영(自榮)이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유익(惟翊)은 여산 송씨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아들 천익(天翊)이 은진 송씨의 연원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선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고려조에서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原)으로부터 세계를 잇게 되었다.
그후 대원의 증손 명의(明誼)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거쳐 사헌부 집단(司憲府執端)에 이르렀으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충남 대덕군 동면 신촌리에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다.
그의 아들 극기(克己)는 젊은 나이에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에 선발되어 개성에서
살았는데 단명하였다.
나이 스물 둘에 청상과부가 된 부인 고흥 류씨(高興柳氏:고흥백 류 준의 딸)의 부모들이
그녀의 뜻을 빼앗아 개가시키려 하자 부인은 죽음을 맹세하고
어린 외아들 유(愉)를 업고 송도에서 회덕까지 5백 여 리를 걸어서 내려왔다.
그러나 시부모는 기쁘게 받아주지 않고 "여자가 부모의 명을 듣지 않는 것은
삼종의 의가 아니다" 라고 나무라니, 그녀가 울면서 말하기를 "저의 삼종의 도는
지금 등 위의 아이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하며 3일동안 떠나지 않자 감동한 시부모는
딱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그 뒤 류씨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아들 유(愉)를 훌륭히 키웠으나 1446년(세종 28)
아들 유마저 세상을 등지자 거듭당하는 슬픔을 억제하며 손자 계사(繼祀)와 계중(繼中)을
훌륭하게 길러 은진 송씨의 가맥을 이었고, 1452년(문종 2) 82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로부터 문호가 열리게 된 은진 송씨는
특히 조선조에 와서 훌륭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시켜 명문으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08]
시조 인수(仁壽)는 고려에서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고 신평군(新平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일설에는 그가 백제(百濟)에서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역임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를 상고할 수 없다.
그후 후손들은 고려에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덕명(德明:문간공)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신평(新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덕명(德明)의 아들 환(桓)이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했으며, 그의 맏아들 임(稔)은 시중(侍中)을, 차남 비(秘)는 시랑(侍郞)을 지냈다.
[09]
시조 강후(康侯)는, 강성호소록(康聖湖所錄)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무왕의 아우 강숙봉(康叔封)의 둘째 아들이 함께 평양(平壤)에 와 백성의 교화에
공을 세워 강자(康字)로 사성(賜姓)하고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에 봉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위의 소록(所錄)은 제주현감(濟州縣監)을 지낸 강익보(康翊甫)가 가장(家藏)하여
왔던 보첩(譜牒)에 따른 것으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쓴 '평양지(平壤誌)'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己未譜'(1979)에는 시조를 강호경(康虎景)으로 하여 분파도(分派圖)를 만들고
그 13세손인 강지연(康之淵)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물론 앞서의 강후동래설(康侯東來說)을 전제로 한 계통도(系統圖)인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그 사이 여러 병화(兵火)를 거쳐 승첩(乘牒) 등이 없어져
강후(康侯) 이후는 계대(系代)를 확연히 밝힐 수 없었던 사정 때문이다.
[10]
시조(始祖)는 고려 개국공신인 도(棹)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초명(初名)이 치(齒)로 고려 태조(太祖)가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하러 남하(南下)하여 금강(錦江)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건너게 해 주었으므로 태조가 도(棹)라고 이름을
하사(下賜)하고, 통합삼한삼중대광대사익찬공신(統合三韓三重大匡大師翊贊功臣)으로
벼슬을 내리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해졌다.
그후 그는 전의(全義) 이성산(李城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니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전의(全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그 후손 문의공(文義公) 언충(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 문장공(文莊公) 혼(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11]
영광김씨(靈光金氏)
시조 김심언(金審言)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설의 4세손이다.
그는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 때 상서내사시랑 평장사를 역임하고
오성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영광으로 하였으나 아들 김윤보, 손자 김극검
이후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없어져서 후손의 파조들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계 파
- 경 파 : 김정부
- 영광파 : 김연
- 장흥파 : 김태용
- 무장파 : 김효민
- 양사파 : 김광찬
- 강계파 : 김교경
- 용강파 : 김중보
- 용강서정파
[12]
시조 곽상(郭祥)은 신라 헌강왕조에 시중(侍中)이 되었고 문장(文章)에 능했으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다고 '甲寅譜'에 쓰여 있다.
그의 선계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고 또 그의 후계도 실전(失傳), 고려 현종15년
형부상서(刑部尙書), 이듬해 추성문리공신(推誠文理功臣)으로 상주국(上柱國)에 책훈되고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뒤 문성(文成)이라 시호(諡號)된 곽원(郭元)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본관을 청주(淸州)로 삼은 것은 그의 10세손 충헌공(忠憲公) 곽연준(郭延俊)이
충혜왕조에 광정대부(匡靖大夫) 판개성부윤(判開城府尹)·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라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世居)하게 된 것이 연유이다.
[13]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에서 호장(戶長) 중윤(中尹 : 태봉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한
문무의 관호)을 지낸 인보(仁輔)이다.
[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寶) ]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신라(新羅) 대관(大官) 저(貯)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 성씨약사(成氏略史) ]에는 시조(始祖) 인보(仁輔)가
고려 고종(高宗) 때 성씨(成氏)의 성(姓)을 창성(創姓)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경남(慶南) 창녕군(昌寧郡) 대지면(大地面) 모산리(牟山里) 맥산(麥山) 기슭에 자리한
그의 묘(墓)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시조(始祖) 인보(仁輔)는 창녕 지방(昌寧地方)에 호장(戶長)을 지냈는데,
어느해 정월 초 정조의 모임으로 송경(松京 : 개성)에 갔다가 그 곳에서 병몰(病歿)했다.
그때 문하시중(門下侍中 : 문하성의 종 1품 최고 벼슬)을 지내던 그의 아들 송국(松國)이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떠메고 울며 천리(千里)길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창녕(昌寧) 부근
현풍현(玄風縣 : 지금의 현풍)에 이르니 해가 기울었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새 많이 눈이 내렸으며 시신(屍身)은
현재의 묘(墓)자리에 옮겨져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 산이 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는데 묘자리 넓이 만큼은 눈이 녹아 있어
그 곳에 묻었다고 한다.
[14]
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아들 기오(奇悟)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태조(太祖)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죽산(竹山)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죽주백(竹州伯) 기오(奇悟)의 손자 충숙(忠淑)이
고려 현종(顯宗)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7세손 정유는 고려 예종과 인종대에 걸쳐 20여년 간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왕(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
태자좌빈객(太子左賓客)에 이르렀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육화(育和: 정유의
아들)의 아들로 기사(騎射)에 능했던 인석(仁碩)은 명종(明宗)초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북원(北原)에 은거(隱居)했다가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와 형부 원외랑을 지내고,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 경주(慶州)의
초적(草賊)을 토벌하는 데 공(功)을 세워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전법판서(典法判書) 휘(暉)의 아들 전지(全之)는 외교(外交)와 정치이론에 밝아
원(元)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충선왕(忠宣王)이 복위(復位)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진 후 1321년(충숙왕 8)때 공신(功臣)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한편 정당문학으로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진 문보(文珤)의
증손(曾孫) 원형(元亨)은 세종(世宗)과 세조(世祖)때의 명신(名臣)으로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며, 사체(事體)에 명달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외교(外交)의
일인자로 손꼽혔다.
[15]
양주 조씨(楊州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된 조 잠(趙 岑)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조선시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고려 때 사람인 군우(君祐)의 손자이며,
경질(景質)의 아들이라 전(傳)하고 있다. 후손들은 잠(岑)을 시조(始祖)로 하고
양주(楊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잠의 증손(曾孫) 계생(啓生)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에 올랐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렸다.
[16]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始祖) 석 린(石 )은 1174년(고려 명종 4)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 (上將軍)에
오르고 동서북면 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석 린(石 )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충주(忠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으며, 6세손 양선(良善)은 부인최씨(崔氏)가
이태조(李太祖)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고, 양선의 아들 천을 (天乙)은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후 슬하에 아들
수명(壽明)과 여명(汝明)을 두어 이들이 충주 석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천을의 맏아들 수명(壽明)은 조선조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으며,그의 아우 여명(汝明)은 고려 말에 성균관(成均館) 의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3등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내렸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에 전심하니 태종이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태천 군수(泰川郡守)를 지낸 관(瓘 : 한성 판윤 수명의 아들)과 증좌찬성(贈左贊成)
여명(汝明)의 아들 문수(文守 : 자헌대부로 예조 참판을 역임)·
문현(文賢 : 이천 현감을 역임)·문성(文成 : 직제학을 역임)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한편 직제학(直提學) 문성(文成)의 맏아들로 세조(世祖) 때 판서(判書)를 지낸
인정(仁正)은 예원군(蘂原君)에 봉해지고, 차남 의정(義正)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여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역임한 예정(禮正)·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을 지낸
지정(智正)·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신정(信正)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의정의 아들 사진(斯珍)은 단종(端宗)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의령(宜寧) 석천동(石川洞) 으로 내려갔다.
[17]
나주 최씨(羅州崔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첫째 계통은 탐진 최씨(耽津崔氏) 계파(系派)의 중조(中祖)로 조선 세종(世宗) 때
진의부위(進義副尉)에 올랐던 최정원(崔井元)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청양파(靑陽派)이며,
다른 한 계통은 조선 명종(明宗) 때 진사(進士)였던 최 택(崔 澤)을 시조로 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최논금(崔論金)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보령파(保寧派)이다.
[18]
담양 전씨의 시조 전득시(田得時)는 고려 때 누대에 걸쳐 담양에 토착세거해 온
고을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1155년(의종 9) 현량(賢良)으로 천거되고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낸 후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득시(得時)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담양(潭陽)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6세까지 독자로 내려오다가 희경(希慶)의 아들 3형제 대(代)에서
맏아들 녹생(祿生)은 양은공파(惹隱公派), 둘째 귀생(貴生)은 뇌은공파(牢隱公派),
세째 조생(祖生)은 경은공파(耕隱公派)로 갈리었다.
그 후 녹생이 고려 말의 명현(名賢)으로서 공민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평리(門下評理)등을 지내고 문신이면서도 무예에 뛰어나 「문무전재(文武全材)」란
칭호을 받았으며, 성품이 강직하였다. 고려 말에 삼사 좌윤(三司左尹)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한 그의 아우 귀생(貴生)과 참지정사를 역임한 조생(祖生)은
모두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3형제가 함게 명성을 날렸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귀생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며 누차 벼슬할 것을 권유받자 절해고도(絶海孤島)로 자취를 감추었고,
조생은 깊은 산속에 숨어서 절개를 지킴으로서 〈두문동 72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올랐다'
[19]
정확한 세계를 알수가 없어 자료가 준비되면 올리겠다.
[20]
면천 복씨(沔川卜氏)의 시조(始祖) 복지겸(卜智謙)은 고려창업(高麗創業)의
주역(主役)으로 본래는태봉국(泰封國)의 마군장수(馬軍將帥)로 있다가 궁 예(弓 裔)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신숭겸(申崇謙:평산 신씨의 시조)·배현경(裵玄慶:경주 배씨의 시조)·홍 유(洪 儒) 등과
함께 왕 건(王 建)을 추대(推戴)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 후 장군 환선길(桓宣吉)과 임춘길(林春吉) 등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이를
평정(平定)시켰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혜성부원군( 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복지겸(卜智謙)을 시조로 받을고 본관(本貫)을
면천(沔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조에 10여 명의 평장사(平章事)와
관면잠영(冠冕簪영)이 끊이지 않아 거족(巨族)으로 일컬어졌다.
[21]
탁씨(卓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광산(光山)을 비롯하여
광주(廣州) · 남양(南陽) · 안산(安山) · 양근(陽根) · 가평(加平) · 용인(龍仁)등
32본까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고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광산(鑛山) 단본(單本)으로
알려저 있다.
광산탁씨(光山卓氏)의 시조(始祖) 탁지엽(卓之葉)은 고려(高麗) 선종(宣宗)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뒤에 태사(太師)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문성(文成)이란 시호(諡號)를 제수(除授)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고려조(高麗祖)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켰다.
[22]
안강 노씨(安康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여섯째 아들 노 곤 (盧 坤)이
고려조에 입사(入仕)하여 나라에 공(功)을 세우고 안강백(安康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곤(坤)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안강(安康)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고 소목을 밝힐 문헌(文獻)이 없어 안강백(安康伯)
곤(坤)의 후손으로 조선조(朝鮮朝)에서 첨정(僉正)을 역임한 종선(從善)과 목사(牧使)를
지낸 희선(禧善)을 각각 일세조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종선(從善)의 아들 소종(紹宗)과 계종(繼宗) 형제가
사직(司直)을 역임했고, 교수(敎授) 희식(希軾)의 손자 경임(景任)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역임한 후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한편 부장(部將) 희철(希轍)의 아들 보세(輔世)는 동래 부사(東來府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상건(尙健)은 부정(副正)을 역임하여, 현감(縣監)을 지낸 경엽(慶燁),
부사(府使) 협(協)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23]
시조 임온(任溫)은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으로 그의 6세손 임주(任澍)가
1275년(고려 충렬왕 1년)에 충렬왕의 왕비이며 원나라의 황녀인 제국공주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화하여 경상도 추동 안찰사를 거쳐 어사대부, 감문위 대장군을
지내고 풍천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풍천 임씨는 임주의 아들대에서 충숙왕 때
삼사판사 임자송(子松)과 민부전서 임자순(子順)의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
임주의 묘소는 풍천 전석산 아래에 있으며, 음력 9월 13일에 향사한다.
[24]
초계주씨의 시조 주 황(周 璜)은 주나라 왕손의 후예로서 당조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907년(신라 효공왕 11) 오계의 난을 만나자 동래하여 교남 초계부에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초계(草溪)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황의 아들 흥인(興寅)이 통일신라의 효공왕 때 집사성대사(執事省大舍)에 올랐으며
시중(侍中)을 거쳐 아간(阿干)에 이르러, 고려 목종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손자
빈(斌)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25]
시조 최온(崔溫)은 널리 알려진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의 아버지로 해주 대령군
수양산밑에서 오래동안 살았다고 하며 그곳의 별칭이 고죽군이어서
고죽최씨라고도 한다.
시조 최온은 일찌기 해주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으며
문장으로도 명성이 높았고, 뒤에 판사부사(判吏部事)를 지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해주에서 이루어졌고 또 여러 대에 걸쳐 해주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여 대를 계승하고 있다.
[26]
서로 조상을 달리하는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을 일컫는 성씨.
우리나라 2백 49개나 되는 성씨 가운데 그런 성씨는 오직 남양 홍씨 뿐이다.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걸쳐 근 1천여 년 융성을 누리며 우리나라 10대 문벌의
하나로도 꼽혔던 남양 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의 전혀 다른 두 계보가 있다.
<당홍>은 멀리 고구려(高句麗)시절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
<토홍>은 고려 고종조(高宗朝)의 김오위(金吾衛) 별장 홍선행(洪先幸)의 자손으로
각각 일컬어 온다.
당홍·토홍이라는 속칭도 바로 이같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정작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백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동성동본 두 집안의 관계는 역사의 미궁에 돌아가 있다.
[27]
내가 촬영 했어도 뭔지 모르겠네. ㅋㅋㅋ
[28]
시조 및 본관의 유래 : 행주(幸州)는 경기도(京畿道) 고양(高陽)의 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계백현을 신라에서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蜂)이라 하였고,
고려 초(高麗初)에 행주(幸州)로 개칭하여 성종(成宗) 때는 고봉(高峰)·덕양(德陽) 등으로
불리우다가 1413년(태종 13) 고양군(高陽郡)이 되었다.
은씨(殷氏)는 중국 당(唐)나라 출신으로 신라(新羅)의 주청(奏請)에 의해
850년(신라 문성왕 12) 8학사 중 한 사람인 은홍열(殷洪悅)이 동래(東來)하여 뿌리를
내린 것이 시초이다.
행주 은씨(幸州殷氏)의 시조(始祖) 은홍열(殷洪悅)은 신라왕조에서 벼슬이
태자태사(太子太師)·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고 덕양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행주(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은씨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寶)」에 태인(泰仁)·명곡(椧谷)·행주(幸州) 등 9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본관(本貫)은 행주 은씨(幸州殷氏) 단본(單本)으로 알려진다.
[29]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초의 6부촌장 중의 한 분인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沱)이다.
그는 다른 5부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총재태사(冢宰太師)에 오른 분이다.
유리왕9년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을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씨(裵氏)로 사성(賜姓)하게 되면서
그는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화(史話)는 오래된 것이어서, 그뒤의 계대(系代)가 불확실해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배씨(裵氏)는 태사공(太師公) 지타(祗沱)에 뿌리를 두면서도 후손들이 번창해짐에 따라 세거지 이름과
조상의 작호(爵號)를 연유삼아 여러 본으로 분관(分貫)되었다.
경주본(慶州本)을 중심으로 분성(盆城), 성산(星山), 달성(達城), 흥해(興海)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 경주처사공파(慶州處士公派), 성산복야공파(星山僕射公派) · 화순진사공파(和順進士公派) ·
함흥교서공파(咸興校書公派) · 협계합문사인파(俠溪閤門舍人파) 등으로 나뉘어 계세(繼世)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배씨종보(裵氏宗報) 제5호에 보면 배씨의 도시조(都始祖)가 지타공(祗沱公)이고
그가 한지부(漢祗部, 慶州 栢栗寺 부근) 출신이므로, 모든 배씨(裵氏)는 경주(慶州)로 통일,
관향을 쓰는 게 옳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30]
시조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경의 6세손인 지종해(池宗海)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충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또 본래는 충주 지씨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 어씨로 성을 하사 받은 어중익(魚重翼)도 충주 지씨 6세이다.
'충주지씨대동보'는 시조 지경의 아들에 지해관(海貫, 찬성사), 지도관(道貫, 평장사) 형제가 있고,
지해관의 아들에 지윤(胤, 안렴사), 지영(瀛, 부원수) 형제가 있으며,
지영의 아들에 지득상(得尙, 평장사), 지응상(應尙, 찬성사)이 있어 지득상의 손자가 지종해(평장사)이고
지응상의 손자가 지중익, 즉 어중익(평장사)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31]
시조 구대림(丘大林)은 원래 당나라 사람으로 663년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 하다가 평해 월송정 근처에 도착해 살았으며, 구대림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고구려때 벼슬이 좌복야상서에 이르렀다.
그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가 고려 공민왕때 민부전서를 지낸 구선혁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평해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 경북 울진군 기성면에 있다.
[참고]
구대림이 같이 우리나라에 온것은 663년(중국 당나라)에 일본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하나 황씨의 기록은 황락과 구대림이 같이 서기 28년(중국 후한)에 월남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한다.
[32]
교하 노씨(交河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둘째 아들 오(塢)가 신라 말에
아버지를 따라 동래(東來)하여 교하백(交河伯)에 봉해졌으므로 시적(始籍)을 하게 되었다.
교하노씨세보(交河盧氏世譜)에 의하면 오(塢)의 후손 강필(康弼)이 신라 말에
기계(杞 溪)에 세거(世居)하면서 학문(學問)이 현달(顯達)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관향을 장산(章山)으로 이관(移貫)하였다가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功)을
세우고 통합삼한개국공신(統合三韓開國功臣)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랐으며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져서 교하(交河)로 복관(復貫)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교하로 삼고, 강필(康弼)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人財)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기초를 다졌다. 가문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2세손 안맹(安孟)이
동서면 병마사(東西面兵馬使)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영순(永醇)은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후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이부 상서(吏部尙書) 영수의 아들 척은 경녕옹주(慶寧翁主 : 평양공 현의 딸)와 혼인하고
충목왕(忠穆王) 때 좌정승(左政丞)으로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에 봉해졌다.
[33]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후손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전(傳)하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42세손으로 알려진 박진문(朴進文)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진원박씨대동보(珍原朴氏大同譜)에 의하면 시조 진문(進文)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고,
그의 현손(玄孫) 첨(瞻)은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純沖論道同德佐命功臣)臣)·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춘추관사(春秋館事) 등을 역임한 후 익양백(益陽伯: 지금의 경북 영천)에 봉해졌다.
8세손 희중(熙中: 첨의 현손, 구례감무 온의 아들)이 조선 태종(太宗)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지제교(知製敎)와
기주관(記注官)을 거쳐 회례사(回禮使)로 일본(日本)에 다녀왔으며,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를 축조하는 데
공(功)을 세워 백성들이 제방 위에 비(碑)를 세워 은혜의 뜻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