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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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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목사였다. 그의 어머니(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는 1857년에 그의 동생을 낳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 테오도루스라고 이름 지었다. 1864년 빈센트는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빈센트는 숙부가 운영하는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하여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당시 빈센트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1873년부터는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도 브뤼셀 지점 구필화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1873년 3월 빈센트는 헤이그를 떠나 구필화랑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영국에 머물렀으며 1875년부터는 파리지점에서 일하였다. 빈센트는 런던에서 부터 신비주의에 빠져 화랑일을 소홀히하였다. 빈센트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었으며 그는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하였다.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였던 빈센트는 파리를 떠나 영국 램스케이트로 건너갔다. 그는 매일 성경을 탐독하고 설교 활동을 하였으며 복음 전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빈센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였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6개월간 평신도로서 전도활동만을 허가하였다. 빈센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며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 교회로 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0년 실의에 빠진 빈센트는 그동안 계속 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센트는 미술공부를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드로잉에 관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빈센트는 라파르트라는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 배웠다. 이후 빈센트의 외사촌이자 헤이그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빈센트는 그동안 열광했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사인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곤했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그에게 그림을 지도하던 안톤 모베와도 절교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크리스틴이라는 매춘부 출신의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콜 중독에 매독 환자였다. 빈센트의 가족은 그가 크리스틴과 지내는 것을 우려하였고 동생 테오는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하였다. 빈센트는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였지만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되었다. 빈센트는 이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받게 되었다. 마침내 빈센트는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빈센트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장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빈센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빈센트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
[에피소드] 왜 정신병원에서 입원 했나요?
빈센트 반 고흐는 여러차례 간질 발작을 일으켰고요.
간질 발작이 점점 심해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고흐에 대해서는 우울증 역시 앓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둘 다 위대한 화가이기 때문에
고흐와 고갱 중 누가 더 위대한지는 말할수 없습니다.
마치 베토벤과 모차르트 중 누가 더 위대한 음악가인지 하는 질문과 비슷한 성격으로 보이네요.
두 화가 역시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요.
고흐는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승화한 그림으로 유명하고요...
해바라기나 우체부, 밤의 카페 풍경 등의 구체적인 것을 묘사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고갱은 원시성에 대한 탐구와 동경을 표현한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상징적인 그림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두 화가가 한 집에 같이 살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는데요.
[에피소드] 왜 정신병원에서 퇴원 했나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섰을 때 퇴원과 마찬가지로 입원할 때의 발작 등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입원을 하면서 이러한 과정을 수차례 되풀이 했었습니다.
이처럼 예술가의 아주 고단한 삶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바로 반 고흐 선생님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을 정신적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아래는 작품적 특징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냥 쭉 읽어보시면 자신도 반 고흐처럼 이란 생각에 어느 정도는 반 이해와 짐작이 되실 겁니다.
그림 1 : 고흐 - 자화상
오늘은 고흐에 대하여 집중조명하는 시간을 가져보려합니다.
TV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죠.
(솔직히 간단히는 아니었음..흐메..이 그림들 연대순으로 나열하느라 1시간걸림)
Vincent van Gogh(1853.3.30~1890.7.29) !
영혼의 화가, 태양의 화가, 천재 화가 등으로 불리웁니다.
고흐는 네덜란드 빈민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 났어요.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그가 태어나기 꼭 1년전에 태어난 형이 있었죠.
부모님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한 그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지요.
장남을 잃은 어머니는 그 슬픔을 차남(지금의 고흐)이 태어난 후에도
지우지 못하고 매일같이 죽은 큰 아들의 무덤을 찾았대요.
어머니의 애정이 부족함을 느낀 고흐의 맘 한구석에는 항상 슬픔과 울적함이 있었지요.
그림2 : 고흐 - 감자 먹는 사람들 - 1885년 4월
그림3 : 고흐 - 구두 한 켤레 - 1886년
이 구두는 고흐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예요
한짝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글픔을 버티는 모습"을,
한짝은 "고난극복 후에 맛보는 기쁨"을
보여주는 그림이죠.
그림2, 그림3에서 보듯
고흐는 일상생황에 담겨져있는 주제를 무엇보다 좋아했으며
이 구두를 그림으로써 광부, 농부,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는 그림의 주제가 참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가장 바람직한 소재는 성서적, 신화적 주제였고 그 다음으로 풍경과 정물이었고,
농부를 그린다는 것은 가장 천한 주제에 속했죠.
...
고흐는 화가공동체를 꾸리는 것을 진심으로 갈망했어요
예술가를 꿈꾸는 동료들이 함께 생활을 하면서 작업을 하고..
때로는 예술을 논하고 하는...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아를이라는 가서 몇명의 화가를 불렀지요..
하지만 고흐의 설득에 응답해주는 사람은
오직 고갱 한 명뿐이었죠.
고흐는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멋진 그림을 그렸어요.
이시기에 그린 작품 중에는 오늘날 인기있는 알려진 것이 아주 많아요.
(그림4~그림8)
고흐는 신부 같은 맘으로 고갱을 기다리며 그가 거처할 방에 걸기
위해서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게 됩니다.
노란색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고흐는 술꾼이었어요. 당시 유행던 압생트를 매일매일 마셨고
이 술의 부작용으로 황시증이 생기게 됩니다.
시립병원의 레이 의사가 고흐에게 음주를 나무라자
고흐는 이런 말을 했어요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오 ...... 올 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서는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오."
찬란한 노란 색을 얻기 위해 여름내내 취해있었다는 것이예요..
고갱은 10월 23일 , 아를에 도착하게 되고.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를 보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림 4 :고흐 - (꽃병에 꽂힌 열네송이) 해바라기 - 1888년 8월
그림 5 :고흐 -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 - 1888년 8월
고흐가 아주 좋아했던 사람이예요.
그림 6 :고흐 -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 1888년 9월
이 그림과 관련된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편지
"... 짙푸른 하늘 여기저기에는
코발트 원색의 푸른색보다 더더욱 푸른 구름과
더욱 밝은 은하의 창백함을 닮은 푸른 구름이 떠 있었다.
그 창공 기숙이 별이 여기저기에서 빛났다.
녹색, 황색, 백색, 장미색, ....
파리에서는 본적이 없을 정도로 보석과 같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바다는 실로 깊은 군청색이었다."
그림 7 :고흐 - 밤의 까페 테라스 - 1888년 9월
그림 8 : 고흐 - 노란집 - 1888년 9월
고흐는 고갱을 맞이하기 위해 집을 하나 얻고 그 벽을 노란색으로 칠한답니다.
하지만 얼마안가서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앙금이 생기게 된답니다.
아를에는 반고흐가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몇몇 동네분들이 있었지요..
그 중 한명이 드 라가르 까페 주인인 지누부인이었는데
고흐와 고갱은 지누부인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어요.
그녀는 손님이없는 오전시간을 택해 모델서는 것에 응하게 되는데
이때 고흐는 방안에서 책을 몇권들고와서 부인 곁에 놓게 됩니다.
고갱은 매우 못마땅했어요.
술집여주인 그리는데 옆에 누더기책은 왜 갖다놓는가 싶었죠.
고흐는 아랑곳하지 않고 45분만에 그림을 완성합니다.(바로 아래그림)
그림 10 :고갱 - 아를의 밤의 카페(지누부인) - 1888년 11월
하지만 고갱은 같은 모델을 놓고 그린 그림이지만.(그림9와 그림10을 비교해보세요.)
고갱은 실존하는 현물을 무시하고 그림을 완성합니다.
지누부인의 앉은 탁자위에는 책이 아닌 압생트술병과 술잔이 놓여있으며
당구대 뒤에 손님들로는 고흐가 좋아 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대한 경멸을 나타내는 거죠.
그림5에서 보았던 조셉 롤링도 뒤에 앉아 있네요.
그녀의 표정도 스케치와는 다르게 유화로 옮겨질때는 더욱 냉소적인 미소로 바뀌에 됩니다.
물론 고흐도 고갱의 어느정도 의도를 눈치채게 됩니다.
고흐는 참았어요. 화가공동체의 꿈 실현을 위해.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계기는 아래 그림에서였죠.
그림 11 : 고갱 -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 1888
고갱은 이 그림을 그린 후 자신과 고흐의 우정을 기념하는 작품이라했어요.
과연 그럴까요?
자. 꽃잎은 다 떨어져가고 해바라기는 커다란 눈처럼 보이죠.
반 고흐는은 반쯤 감겨 멍한표정이며 해바라기가 눈을 더 크게 뜨고 있죠.
들고있는 붓은 마치 바늘을 들고 있는 것 같고..
뒤의 벽 풍경화의 소실점이 반 고흐 위에 있어서 고림이 사람을 억누르는 형상이죠.
고흐와 고갱은 사이가 더욱 벌어지게 되었고.
급기야 고흐가 고갱에게 술잔을 던지는 일도 있게 됩니다.
바로 다음날 고갱은 자신이 떠나겠음을 내비치고
겨우 겨우 고갱을 달래보았지만
사이는 좋아지지 않았죠.
여기서 고갱의 수기중 한 구절을 잠깐 보면
"...발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면도칼을 든 고흐가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내가 노려보니 그는 행동을 멈추고 달아났다."
달아난 고흐는 자기 귀를 자르게 됩니다.
고갱이 떠난다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는 동시에
"화가 공동체의 꿈"이 좌절되는데 대한 안타까움이죠.
그림 12 : 고흐 - 붉은 포도밭 - 1888
이 그림은 고흐의 수많은 작품중 유일하게 팔린 그림이예요. (400프랑)
고흐가 자른 귀에 붕대를 하고 있는 자화상은 두점이 있답니다. (그림 13, 그림 14)
그림 13 : 고흐 -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 - 1889년 1월
그림 14 : 고흐 -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 1889년 1월
그림 15 :고흐 - 뒤집힌 게 - 1889년 1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뒤집힌 게의 모습입니다.
고흐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듯. ㅜㅜ
그림 16 :고흐 - 별이 빛나는 밤 - 1889년 6월
고흐는 휘트먼의 시를 좋아했어요.
그 중의 한 구절을 보면
"초승달 어린이가 제 뱃속에 자기 보름달 어미를 데리고 간다"
그림의 달을 잘 보세요
달 부분(초승달)과 전체(보름달)이 동시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자세히 보면(큰 그림으로) 어지럽다는 사람이 있을정도로 소용돌이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고흐의 눈에 실제로 그런식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어요.
당시 고흐는 오랫동안
현기증, 발작을 일으켜왔으니까요.
...
요양원에 입원하고 다음날부터 고흐는 실편백나무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게 되죠.
실편백나무가 죽음을 상장한다는 것은 당시 보편적 상식이었죠
여기서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부분
"나는 해바라기 연작을 그린 것처럼 실편백나무 주제 연작을 그리려 한다.
왜냐면 아직 내가 보고 느낀 것 같은 실편백나무를 그린 화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의 오베리스크처럼 아름답다"
그림 17 : 고흐 - 실편백나무가 있는 밀밭 - 1889년 9월
...
고흐는 말년에 오베르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요
거기에는 가셰박사라는 아마추어화가이자 전문의가 있었기에 그를 잘 이해해주었어요.(처음에만)
그림 18 : 고흐 - 오베르의 교회 - 1890년 6월
이 그림에 대한 평론도 상당히 많은데
한 전문가의 평을 인용하자면
입구가 보이지 않는 교회 뒷면을 그린것은 조직화된 종교에 대한 반감을 뜻하고.
왼쪽으로 걷는 여인은 과거의 그가 사랑한 여인들의 상징.
오른쪽 길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상징한다고 해요.
그림 19 :고흐 - 가셰박사의 초상 1890년 6월
그림 20 :고흐 - 철로 옆을 지나가는 마차 - 1890년 6월
이 그림을 그린 한 달 후
놀랍게도 그의 시신은 길을 지나 묘지로 가게 되었답니다.
아마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나 봐요.
그림 21 :고흐 - 구름낀 하늘아래 오베르의 밀밭 - 1890년 7월
이 그림 역시 그가 묻힌 공동묘지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라 해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요..
그림 22 :고흐 - 까마귀떼 나는 밀밭 - 1890년 7월
이 그림에 대해 미술 평론가 고바야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측에서 온 길은 중앙에서 줄로 갈라지는데
가운데의 밝은 길은 동생 테오 부부가 걸어갈 미래
좌측으로 사라지는 길은 고흐를 나타내며
지평선 중앙의 구름을 보면
중앙에는 두개의 구름이 합쳐져있는데 이것은 테오부부
이 구름에서 떨어져 나가는 또 하나의 구름은 반 고흐를 의미하며
이는 절망적인 결의를 상징한다.
...
결국 고흐는 권총자살을 시도 하며 37세라는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10년 작품활동에서 1만 6000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생전에 팔린 것은 한점뿐 (그림12)
그가 죽고도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나서야 그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