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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河 최 웅규 의 북한 방문기
이글은 북한을 방문 한 후 신학생들에게 쓴 글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는 나를 내세우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내 자랑 같은 말을 잘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지난해에 북한에 다녀온 사실을 알고 몇몇 학우들이 북한에 다녀온 얘기를 좀 해달라고 했으나 별도의 특별한 시간을 못 갖던 참에 이번에 우리학교 카페 홈페이지가 개설되어 내가 왜 북한에 갔었고 어떤 목적으로 갔는지? 그리고 나의 사명이 무엇이며 목표가 무엇인지 설명을 하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한 민족이며 한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의 뜻과는 달리 서방 세계들의 이해관계에 얽히어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가장 큰 차이는 사상인 ideology가 다른 점이 문제이다. 즉 공산주의 민주주의 두 가지 이데올로기 차이인 것이다.
나는 북한에 10년 전에 갔었고 이번에 간 것이 두 번째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한우를 조사하러 간 것이었고 이번에는 호주의 살아 있는 소를 년 간 100,000마리를 몰고 가서 도축을 하여 육가공 하는 시설을 준비하기 위해서 갔던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북한의 식량을 해결해주기 위한 사업 인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에 땅을 관리하고 정복하라고 인간에게 명령하시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땅에 대하여 많이 배워야한다. 땅에서 우리의 삶을 찾아야하며 땅에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고 이어나가야만 한다.
이민 1세로 호주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땅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 주어야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조국은 통일이라는 과제를 갖고 완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량 자급자족을 해야만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조국은 안타깝게도 스스로 식량을 자급자족하기에는 부족한 땅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식량하면 쌀이나 밀과 같은 곡물류만 식량이라고 염두에 두고 있다. 어느 누구도 소와 양과 같은 가축이 우리의 식량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다.
나는 1991년도에 호주에 이민을 온 이래 줄곧 한 가지 일에만 몰두를 했다. 나도 모르게 왜 일에 매달리며 시간과 자본과 정력을 쏟아 부었는지 모르겠다. 가족들과 멀리하면서 호주 전 지역을 해매 다니며 마치 탐험가와 같이 호주 구석구석 다니면서 조사하고 지역을 특성과 땅의 토양, 토질 등을 조사하면서 연구를 했다. 그런 세월이 10년이 지난 2003년도 6월경에 나는 호주 전 지역을 다니면서 조사 연구한 것도 이론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호주 농업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몸소 호주 농촌에서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 것을 해야만 한다는 결심을 하고 타스마니아에 작은 목장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을 했다. 7년 동안 나는 소를 키우면서 소를 팔고 사고파는 것을 배우고 경험을 했으며 유기농 농사를 지으면서 나의 농장을 3년 동안 아무런 비료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퇴비를 사용하여 유기농 농장 허가를 받았다.
나는 2011년도에 어느 정도 호주 농장의 운영과 관리법을 습득을 한 후 가족들이 있는 시드니로 돌아와 외롭고 고독한 농장 생활 7년을 청산하였던 것이다.
사실 홀로 생활하는 농장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가족들과 같이 지낸다는 것이 그립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하였다. 호주 이민생활 전부를 호주 땅을 배우는데 소비했으며 나의 인생 황금기인 나이 40에서 60이 되기까지 떠돌이 생활과 농촌의 촌부 생활을 자처하여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큰 딸과 3학년 작은 아들 둘은 그동안 벌써 의젓한 청년이 되어 결혼을 앞두고 있던 터라, 이제 부터라도 아버지 노릇을 해 보려고 한 것이 내가 목장에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 주된 목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시간을 내어 3년 동안 TAFE에 다니면서 빌더와 부동산 에이젠시 그리고 부동산 관리 면허를 취득했다. 나는 이민 오기 전에 20년 동안 한국에서 건축설계, 시공, 감독을 한 경험이 있어서 건축에 관련된 공부를 하는데 영어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큰 문제는 없었다.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않아 뒤늦게 책상에 않아 공부를 하는 것이 나로서는 즐거웠으나 영어로 강의를 듣고 시험을 보는 것이 조금은 어려웠었다.
그러다 신학대학에서 학생 모집 광고가 교포 잡지에 난 것을 보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알아보다 어디를 다는 것이 좋을지 몰라 평소에 존경을 하던 평강교회 임 목사님께 상의를 하였더니 시드니 신학대학을 추천하여주어 2002년도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나의 이민 과거를 설명 하는 이유는 나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으며 오로지 내가 모를 뿐, 지금 가는 길도 하나님이 예비해 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산 것도 그렇고 내가 살아갈 것도 그렇다. 나의 어린 과거 시절을 잠시 얘기를 하자면 나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묵호(지금 동해시) 앞바다에서 자랐다. 그리고 나의 외갓집은 산을 두 새 개 넘어야 갈수 있는 옥계 남양리라는 두메산골이었다. 나는 1952년 6,25 전쟁 중에 태어나 잠시 외갓집에서 어머니와 같이 생활을 할 당시, 어머니가 빨래를 하러 냇가에 따라 갔을 때 따라가서 한 살 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어머니가 빨래를 하기위해 가져간 양잿물 깡통의 물을 마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즉시 식도가 끊기고 혀가 빠져나오는 위급한 상황을 맞이했다.
그 당시 두메산골에는 치료할 만한 병원이 없어서 강원도에 하나밖에 없는 도립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서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1년 이상을 치료받지 못하면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일본인 의사가 진단을 했다.
이런 저런 사연을 다 쓰다보면 본 글의 목적인 나의 북한 방문기가 너무 길어져서 간단하게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 고향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되살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여 부르는 강원도 말이다.
이제 다시 북한 방문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그동안 호주에서의 축산업에 대한 나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년 간 살은 소(LIVE STOCK) 100,000마리를 북한에 싫고 가서 도축을 하는 프로젝트이다. 이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계획이며 감히 엄두도 못내는 발상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성령님이 나로 하여금 이런 계획을 하게 만들었고 나는 즉시 2013년도 8월에 북한 방문 신청을 했다.
보통 북한 방문하기 위해서는 ‘조오련’ 이라는 호주 북조선 단체에 방문 목적을 작성하여 신청을 해야만 한다. 10년 전 북한에 갈 때는 북한 대사관이 켄바라에 있어서 대사관에 직접 신청을 하면 갈 수 있었지만 요즘은 북한 대사관이 철수를 하여 교포들 북조선 단체인 ‘조오련’을 통해서만이 갈 수가 있다. 나는 평소에 ‘조오련’ 회장을 잘 알고 지내는 터이라 쾌히 나의 북한 방문 신청을 받아주어 입국 허가서를 받았다.
내가 북한을 방문하는 목적은 호주 살은 소를 한번에 5,000애서 7,500마리를 싣고 가야 하므로 50,000톤급 배가 접안을 해야 하는 시설과 도축장 부지, 임시 계류장, 부대시설 등을 위한 환경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예산은 도축장 건설비용 5,000만 불 그리고 계류장, 등 부대시설에 약 5,000만 불 모두 합하여 1억불 예산이 소용되는 거대한 프로젝트 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계획은 호주 농업 그룹 대기업 회사에서 관심을 갖고 기획한 장기적인 사업이다.
나는 북한을 방문하는데 최소한 10,000불정도 소요되는 경비를 들여 2주간 체류할 계획으로 조사를 하러 간 것이다. 북한에 두 번째 가는 것이므로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중국 심양에 2013년9월21일 도착을 하여 심양에 있는 북한 영사관으로부터 사증을 받고 북조선 비행기인 고려 항공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을 했다.
평양 비행장은 10년 전과 별로 변하지는 않았지만 전보다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것이 다른 편이었다. 나는 다른 동행자 없이 혼자 평양에 도착을 하여 짐 가방을 들고 걸어서 공항 밖을 나와서 두리번 거리다보니 나를 마중하기위해 나온 안내원이 반가이 맞이했다. 안내원은 자기소개를 하면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나를 태우고 북조선에서는 누구나 제일먼저 들리는 곳이 김일성 동상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헌화를 하고 숙소로 안내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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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착한 날이 토요일이라 쉬는 날이므로 별다른 일정 없이 하루를 지냈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에는 주일날이므로 북조선 교회를 가겠다고 하여 준비를 시켰다. 주일날 오전에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11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봉수 교회를 출발을 했다.
조그련 위원장(가운데) 강영철 목사 부위원장 리영철 목사(왼쪽)
10년 전에는 칠골 교회에 갔었는데 이번에는 봉수교회로 안내원이 안내해 주었다. 때마침 세계 교회 협의회 (WCC) 사무총장이 부산 집회에 참석을 하기위해 한국에 오는 길에 평양에 잠시 들리어 새로 임명된 조그련 강영철 위원장과 같이 봉수교회 예배를 참석하고 평양 신학원을 방문 했다.
나는 월요일을 맞이하여 이제 부터 내가 온 목적인 북한의 식량 해결을 위한 육가공 시설 건설에 대한 사전 답사 및 조사, 설명 등을 하려고 마음을 정리 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5시에 기상하여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고 난후 1시간이상 걸으면서 오늘 할 일들을 정리하곤 한다. 평야에서도 마찬 가지로 일찍 일어나서 평양 시내 호텔에서 대동강가로 그리고 시내를 가로질러 병원, 학교, 관공서 등을 거쳐 숙소로 들어 와서 아침 식사를 했다. 약간 쌀쌀한 날씨이지만 일찍 일어나서 자신들이 맡은 구역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눈에 띠었으며, 한복을 곱게 입은 여자 대학생, 양복과 넥타이를 한 직장인들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나도 끼어서 걸었다.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냥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나를 그들과 같은 핏줄을 갖고 태어난 동족임을 느끼게 했다.
북한에서는 청소차가 다니면서 시내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주택, 상가 등에 사는 주민들이 자신의 앞거리와 도로 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것이 의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북한 거리에는 쓰레기 하나 보기가 힘들다.
내가 북한에 방문한 실질적인 목적은, 사실 북한의 심각하게 부족한 식량을 쇠고기 부산물로써 보충해주려고 하는 것이 나의 본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한 마리의 소를 도축하여 정육 가공을 하면 40%만이 상품가치가 있는 쇠고기이고 나머지는 부산물이다. 부산물하면 내장, 간 , 심장, 콩팥 등 기관과 소뼈, 소머리 등을 호주에서는 동물 사료로 값을 쳐주지 않는다. 그중에 가죽만이 유일하게 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호주에서 나 같은 목장주인이 소를 도축을 하기 위해서는 마리당 소가죽을 포함한 부산물을 다주고도 A$250~350불 정도를 더 주어야 육가공이 된다. 그런데 내가 계획한 사업내용을 볼 것 같으면, 북한에서 육가공을 하게 되면 인건비 대신에 무료로 소를 도축하고 정육한 나머지 부산물 모두를 북한에 주는 것이다.
현제 호주에서는 1년에 70만 마리의 생우(LIVE STOCK)를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동기는 2012년도에 호주에서 제일 많은 수의 생우를 수출하던 인도네시아의 수출 길이 막힌 것이다. 그런 이유는 호주 ABC 방송국에서 밀착 취재한 프로그램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의 추적 60분과 같은 프로그램으로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주소가 수출된, 인도네시아 현지 재래식 도축장에서 호주소를 무자비하게 도살하는 장면을 몰래 촬영하여 방영 한 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급기야 에는 국회에까지 이문제가 이슈가 되어 호주국회에서 인도네시아 생우 수출 금지 법안을 상정하여 통과 시킨 것이다. 이 법안 주요 요지는 동물 학대에 대한 해당이다.
이렇게 갑자기 호주 생우 수출길이 막히어 호주 목축업체들은 큰 손해를 보았으며 대규모 목장들이 부도가 나고 문을 닫는 사태까지 이르렀었다. ‘소’ 라는 것은 동물이고 갑자기 자라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야만 상품가치가 있는 500KG 이상이 된다. 인도네시아에 주로 수출되는 소들은 노턴 테리토리의 대규모 방목목장들이다. 보통 한 목장에 100,000마리 이상이고 면적은 수억만 평이다. 내가 가본 목장 중에 하나는 경비행기로 돌아야만 목장관리가 되는 곳이었다.
호주 정부에서는 갑작스러운 법안으로 손해를 본 목장 주 들에게 최소한의 보상을 해주었지만 워낙 손실 금액이 커서 감당이 안 되었다. 그러다보니 인도네시아 말고 다른 국가를 찾다가 나를 만난 것이다. 내가 한국에 생우를 갖고 갈 테니 나에게 판매권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북한에 도축장을 건설하여 육가공 시키어 호주 브랜드 쇠고기로 소련, 중국, 일본 등지에 수출을 하는 가나안 프로젝트를 세웠다.
이런 결과는 호주에서 북한으로 운송하는 운송비가 호주에서 육가공하는 비용보다 적게 소요되므로 매우 획기적인 방안이라고 호주 육가공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북한에 이렇게 일 년에 10만 마리의 소를 데려가서 도축을 하면 최소한 180만 명의 식량이 되는 효과를 볼 수 가있다. 나는 이런 북한의 육가공 시설을 3군데 시행할 계획을 갖고 제일 먼저 시범적으로 시작할 곳을 선택하기 위해 조사차 간 것이다.
나는 북조선 당국 측에서 대상후보지를 정해준 곳과 여건들을 조사 했으며 관계자들과 만나 실질적인 회의를 했다. 내가 요구한 조건은 생우 전용 운반선이 입항하여 접안 할 수 있는 여건과 주변 부대시설을 위한 50만평의 면적이 확보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북한 어떤 누구도 관여 하지 못하는 치외 법권지역으로 정해지어야 해외 자금을 안전하게 투자 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사실 이 사업을 하기위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이 수없이 많다. 제일 큰 걸림돌이 미국인 것이다. 미국은 이미 북한에 금융제제를 가하여 북한과는 국제 입출금이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북한 내에서 국제적인 신용카드조차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1억불이라는 국제 금융을 일으켜 사용해야 하는데 미국이 허락할 리가 없다. 그러나 호주회사가 앞장서서 북한의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인도적인 차원에 호소하여 국제 여론을 일으킨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상 좀 더 상세하게 표현하고 글로 쓰지 못한 점 양해바라며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시어 하나님 뜻 가운데 이루어질 것을 나는 믿고 있다.
통일을 앞두고 있는 이때에 호주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깊이생각해 보고 행동하므로 우리를 호주로 보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와 같이 하나님을 더욱 알기위해 힘써 노력하는 시드니 신학대학 학우들에게 나의 북한 방문기를 바칩니다.
다음 기회에 좀 더 진행된 내용을 갖고, 2부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運河 최 웅규
왼쪽으로부터 조그련 부회장, 회장 강영철 목사 본인 최웅규
평양 봉수교회 예배를 마치고 권사님들과
대동강가에서 소를 키우는 장면
대동강 대동교 아래에서 산책
평양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첫댓글 사진이 안 올라왔네요.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글을 올려주신 최웅규선생님을 직접 뵐수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해외에 계시는 재외동포들도 조국을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계심에 존경을보냅니다.국내에 있는 저희들도 저희가 할수 있는 역량껏 조국을위해 일할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다지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최선생님께서 계획하시는 그 선한 사업이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더욱 창대히 성공할수있도록기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진행되어가는 대로 다음 2편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모쪼록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고 서울에 오실때 다시 한번 뵙겠습니다.화이팅입니다. 한 민족 한 나라임을 잊지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