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건천읍을 지나 청도로 넘어가는 단석산 자락에 발이 닿으면 진목정 성지가 있다. 이곳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허인백 야고보,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 세 순교자들이 박해를 피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바위굴(범굴)에 숨어 살았던 옛 신앙의 터전이며, 처형된 이들의 시신을 허인백의 아내 박조예가 옮겨 묻어 그들의 피로써 은총의 성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마치 그때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양등 베드로(?-1868년)는 울산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대재) 회장으로, 본성이 착하고 꿀 장사를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과 김종륜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했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 포졸들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꿀 장사를 다니던 그 역시 체포되어 경주 진영(경주 문화원 자리)에서 김종륜, 허인백 등과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언했다.
동료들과 함께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있던 울산으로 이송된 그는 거기서도 신앙을 증언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장인 울산 병영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갈 때에 즐거워하고 용약하며 “천당 복 바탕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윗옷을 벗어 몸을 가리고,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김종륜 루카(1819-1868년)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평생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화목하게 지냈던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언양 간월(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울산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던 그는 동정부부 순교자인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수기를 직접 필사하여 갖고 있기도 했다. 포졸들이 죽령 교우촌을 찾아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거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울산 장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허인백 야고보(1822-1868년)는 본래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25세에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고신극기하면서 인내롭고 겸손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를 두고 ‘신덕자’(信德者)라고 하였다. 사순시기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과 옷을 나눠주었고, 나그네를 기쁘게 대접하였으며 병든 이들을 힘써 도왔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언양 포교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맞았고 50여 일간 옥에 구금되었다. 경주에서 “천주학을 하느냐?”는 물음에, “합니다.” 하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이에 곤장 20도를 맞고 큰 칼을 쓴 채 여덟 달 동안 갇히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짚신을 삼아 연명하며 전교 사업에 쓰려고 푼푼히 돈을 모았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뒤 울산의 죽령 산중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을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밤에는 묵상하고 낮에는 책을 품고 산에 가서 나무그릇을 만들어 팔면서 살았다. 1868년에 경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갈 때에 집안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가면 영원이로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치명하신 바르바라의 일기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하였다. 이때 딸이 버선 한 벌을 주었으나 받지 않으면서, “내가 본디 세상에 적신(赤身)으로 태어났으니 적신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하였고, “너희들 봉교(奉敎)를 착실히 하여 후세에 만나자.”고 하였다.
경주에서 다른 신자들을 대라는 물음에, “본디 초동(樵童) 목수라 무식하여 남을 가르치지 못하고, 남에게 배우기만 하였으며, 설사 가르친 사람이 있을지라도 어찌 죽는 땅에 이르리오. 죽어도 혼자 죽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세 차례 형문을 받으면서 다리에서 뼈가 드러나고 피가 많이 흘렀다. 이때 포졸들이 돈을 달라고 하면서 노줄로 톱질하여 다리가 끊어지게 되었다. 그 몸으로 작은 칼을 쓰고 이틀 만에 80리나 되는 울산으로 갔고, 그곳 병영 장대에서 자기 손으로 머리털을 젖히고 윗옷을 벗은 뒤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순교하였다.
이렇듯 세 순교자는 19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울산 병영 장대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후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대 인근의 강둑 아래에 안장하였다. 박해가 끝난 후 1907년 세 순교자의 유해는 박조예의 확인을 거쳐 현장에서 발굴되었고, 유족들에 의해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32년 5월 말 순교자들의 유해는 월배동 감천리에 있는 교회 묘지로 옮겨졌고, 1962년 10월 25일 교회 묘지 산상에 있는 성모상 앞의 석함에 옮겨 안치되었다가, 1973년 10월 19일 대구시 동구 신천 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옮겨 안장되었다.
세 순교 복자가 묻혔던 도매산 아래에는 오래된 진목 공소가 있다. 이곳은 1858년 경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사제인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하던 때부터 교우촌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공소를 지나 약 700m 정도 산길을 따라 오르면 1932년까지 세 순교자가 안장되었던 묘소가 있다. 대구대교구는 경주 산내 본당에서 성지에 이르는 도보 순례길을 조성하고, 진목 공소와 순교자들의 묘 인근에 개인과 가족 위한 피정의 집을 세울 예정이다. 또한 세 순교자들의 묘지 위에 진목정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고자 2014년 5월 31일 기공식을 가졌다. 순교자 기념성당에는 세 순교자를 비롯해 신자들의 유해가 함께 안치되는 봉안당 ‘하늘원’도 함께 조성될 계획이다.
진목 공소에서 약 3.6km 떨어진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는 세 순교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다는 범굴이 있다. 내일 1리 마을을 지나 소태골 피정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범굴에 이르게 된다. 이제는 무너져 내려 그 원형을 가늠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세 순교자와 그 가족들은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며 살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동굴은 본래 호랑이가 살던 굴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서 생활한 지 며칠 후 큰 호랑이가 나타나 위협했을 때 허인백 야고보가 나서서 성호를 그은 뒤, “우리는 지나가는 길손인데 체면 불구하고 너희 집에 들어왔다. 매우 미안하지만 너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고 동정하는 뜻으로 너희 집을 다른 데로 정해 가 있으면 박해가 끝나는 대로 너희에게 돌려주겠다.” 하자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한다. 그리고 동굴 맞은편 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 위에서 밤중에 이따금 ‘어흥 어흥’ 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근처 다른 짐승들이 이들이 머무는 동굴에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신문, 2010년 9월 19일 우세민 기자와 경향잡지, 2009년 8월호, 여진천 신부님의 글을 중심으로 재편집(최종수정 2014년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