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답사기
박노욱 선생이 6년간 1719년의 순천부 양안 자료 분석연구를 거의 종료하면서 마지막으로 현장답사를 해보겠다고 하여 나는 3월 26일 27일 이틀간의 답사에 동행했다. 우리는 1719년 순천부 양안을 박노욱 선생이 연구 중 남은 넓은 벌판을 확인하고자 했고, 또 하나는 양안에 나오는 저수지로 현재도 남아 있는 곳을 답사하기로 했다. 이에는 순천대학교 명예교수이신 조원래 교수(아호 제석)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아 가능했다.
26일 첫날의 답사는 우리가 서울역에서 10시 45분 출발 KTX를 타고 순천에 12시 29분에 도착했다. 조교수님의 안내로 하늘천갈비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숙소를 정한 다음 대절한 택시로 주암면 행정리에 도착해 老巨樹를 관람했다. 이는 600년의 나이를 견디어 부러지고 허리가 휜 자욱이 역력했다. 제석 조원래 선생의 설명으로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길에 올랐다가 경상도 초계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된 후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급히 순천부로 달려올 때 거쳤던 바로 그 길목이었다 하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순천부는 이순신에게는 최대의 후원지역이었고, 많은 수군을 내어주었던 곳이었다. 순천부 사람들이 이순신을 따라가면 산다고 줄줄이 보따리를 지고 따르고 식량과 군수품을 아낌없이 지원해준 곳이었다. 이순신에게는 고향보다도 더 깊은 정을 주민과 나누었던 곳이다.
다음은 선암사 앞을 둘러보고 별량면 마산리 거차포로 갔다. 해안이기에 거차포, 화포라는 명칭이 붙여진 곳이다. 이곳은 낙안군수였던 임경업 장군이 가끔 말을 타고 올랐던 천마산 아래 위치한 바닷가였다. 당시 이곳은 순천부와 낙안군의 경계였으므로 장군이 순찰을 돌던 곳이었고, 백마를 타고 천마산에 올랐다 하여 “강남악부”에서는 거차포를 백마포라 불렀는데, 천마산은 원래 계룡산이라고도 칭한다고 한다. 그 앞 해안가는 조수가 빠져 갯벌이 멀리 보이고 아직 관람객이 드나들지 않았다. 오다가 도로 양쪽에 펼쳐진 별량면 넓은 들판(진목 마을 앞들)을 둘러보고 사진 촬영을 하였다. 엄청나게 넓은 평야였다. 가을 황금벼 나락이 머리를 숙이면 가위 장관이라고 하는 조 교수님의 설명이 상상되었다.
27일(수요일) 다음날 답사는 갈치(乫峙)저수지였다. 순천시 해룡면 복성리 매봉마을 노인회관 앞에 차를 멈췄다. 이 저수지를 안내하기 위해 조교수는 두세 번 와 보았다고 한다. 500미터 길은 농로로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날씨는 다행히 맑아 저수지에서 멀리 바라다 보니 마치 배가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오리 떼가 수영하는 모습이 마치 뗏목배처럼 보였다. 항공사진으로 이곳 자료를 조교수가 이미 보내주었다.(최상단 사진 참조) 그 입구 위로는 순천에서 전주로 나가는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고, 우리가 찾은 곳은 저수지의 최상류입구였다. 입구쪽에는 석축이 쌓여 있는데 이는 일제 시대 쌓았다고 한다. 아마도 고속도로의 고가도로를 세우면서 하단의 석축을 손본 것 같았다. 저수지에는 가물치, 붕어. 잉어가 팔짝거리고 있고, 앞에는 묵은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이 저수지는 갈치 저수지라고 하는데 현재 아래 부분은 광양시에 속해 있다고 하고, 일부는 순천시에 속한다고 하나 그 부분은 가보지 못했다. 아마 아래 수문은 두 곳에 있을 듯하다. 자연의 지형지세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겠지만 산세가 험하여 낚시꾼만이 찾는 곳이 되었고, 일반인의 관심에서 벗어난 듯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나와서 여수시 시전면 선소(船所)로 갔다. 선소라함은 전선소라고도 하는 곳으로서 전선을 건조하기도 하고 배를 안전한 곳에 정박해두는 곳이다. 선소는 순천도호부 휘하의 선소와 전라 좌수영의 선소가 각각 따로 있었는데, 지금 복원되어 있는 선소는 바로 순천도호부의 선소라고 한다. 진남관 앞에 위치했던 전라좌수영의 선소는 오래 전에 도시화해 버린 관계로 현재는 그 유적이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여기서 조 교수의 거북선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명량해전에 대한 이야기 중 징비록에 이순신이 일본 배 330척을 13척의 배로 격파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30척을 격파했다고 하는 난중일기의 자료를 신뢰하여야 한다고 했다. 거북선이 돌격선으로 활약을 했지만 일본군의 조총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점도 사실이었다고 한다. 이는 최전방에서 싸우는 돌격선에 탄 사람이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교수는 이를 “임진장초”의 역사자료를 분석 입증했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조선후기 전라좌수사가 율촌에서 너무 지나치게 징세해감으로 순천도호부사가 밤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렸다고 하며, 민간의 그 징세에 시달렸던 사실이 “강남악부”에 ‘율촌요’로 전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이틀간의 답사를 이처럼 꼼꼼히 할 수 있었던 것이 지방사 전문가인 조교수의 헌신적인 안내 덕택이었음에 거듭 거듭 감사를 표한다. 이 답사기를 쓰면서도 여러 차례 질정을 받았다.
왼쪽이 박교수, 오른쪽이 조원래 교수
순천답사기
박노욱 선생이 6년간 1719년의 순천부 양안 자료 분석연구를 거의 종료하면서 마지막으로 현장답사를 해보겠다고 하여 나는 3월 26일 27일 이틀간의 답사에 동행했다. 우리는 1719년 순천부 양안을 박노욱 선생이 연구 중 남은 넓은 벌판을 확인하고자 했고, 또 하나는 양안에 나오는 저수지로 현재도 남아 있는 곳을 답사하기로 했다. 이에는 순천대학교 명예교수이신 조원래 교수(아호 제석)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아 가능했다.
26일 첫날의 답사는 우리가 서울역에서 10시 45분 출발 KTX를 타고 순천에 12시 29분에 도착했다. 조 교수님의 안내로 하늘천갈비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숙소를 정한 다음 대절한 택시로 주암면 행정리에 도착해 를 관람했다. 이는 600년의 나이를 견디어 부러지고 허리가 휜 자욱이 역력했다. 제석 조원래 선생의 설명으로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길에 올랐다가 경상도 초계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된 후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급히 순천부로 달려갈 때 거쳤던 바로 그 길목이었다 하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선암사 앞을 둘러보고 별량면 마산리 거차포로 갔다. 이곳은 낙안군수였던 임경업 장군이 가끔 말을 타고 올랐던 천마산 아래 위치한 바닷가였다. 당시 이곳은 순천부와 낙안군의 경계였으므로 장군이 순찰을 돌던 곳이었고, 백마를 타고 천마산에 올랐다 하여 “강남악부”에서는 거차포를 백마포라 불렀는데, 천마산은 원래 계룡산이라고도 칭한다고 한다. 그 앞 해안가는 조수가 빠져 갯벌이 멀리 보이고 아직 관람객이 드나들지 않았다. 오다가 도로 양쪽에 펼쳐진 별량면 넓은 들판(진목 마을 앞들)을 둘러보고 사진 촬영을 하였다. 엄청나게 넓은 평야였다. 가을 황금벼 나락이 머리를 숙이면 가위 장관이라고 하는 조 교수님의 설명이 상상되었다.
27일(수요일) 다음날 답사는 '갈치' 저수지였다. 순천시 해룡면 복성리 매봉마을 노인회관 앞에 차를 멈췄다. 이 저수지를 안내하기 위해 조 교수는 두세 번 와 보았다고 한다. 500미터 길은 농로로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날씨는 다행히 맑아 저수지에서 멀리 바라다 보니 마치 배가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오리 떼가 수영하는 모습이 마치 뗏목배처럼 보였다. 항공사진으로 이곳 자료를 조 교수가 이미 보내주었는대 그 입구 위로는 순천에서 전주로 나가는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고, 우리가 찾은 곳은 저수지의 최상류입구였다. 입구쪽에는 석축이 쌓여 있는데 이는 일제 시대 쌓았다고 하는데 아마 고속도로의 고가도로를 세우면서 석축을 손본 것 같았다. 저수지에는 가물치, 붕어. 잉어가 팔짝거리고 있고, 앞에는 묵은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이 저수지는 갈치 저수지라고 하는데 현재 아래 부분은 광양시에 속해 있다고 하고, 일부는 순천시에 속한다고 하나 그 부분은 가보지 못했다. 아마 아래 수문은 두 곳에 있을 듯하다. 자연의 지형지세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겠지만 산세가 험하여 낚시꾼만이 찾는 곳이 되었고, 일반인의 관심에서 벗어난 듯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나와서 여수시 시전면 선소로 갔다. 선소라함은 전선소라고도 하는 곳으로서 전선을 건조하기도 하고 배를 안전한 곳에 정박해두는 곳이다. 선소는 순천도호부 휘하의 선소와 전라 좌수영의 선소가 각각 따로 있었는데, 지금 복원되어 있는 선소는 바로 순천도호부의 선소라고 한다. 진남관 앞에 위치했던 전라좌수영의 선소는 오래 전에 도시화해 버린 관계로 현재는 그 유적이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여기서 조 교수의 거북선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명량해전에 대한 이야기 중 "징비록"에 이순신이 일본 배 330척을 13척의 배로 격파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30척을 격파했다고 하는 "난중일기"의 자료를 신뢰하여야 한다고 했다. 거북선이 돌격선으로 활약을 했지만 일본군의 조총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점도 사실이었다고 한다. 이는 최전방에서 싸우는 돌격선에 탄 사람이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 교수는 이를 “임진장초”의 역사자료를 분석 입증했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조선후기 전라좌수사가 율촌에서 너무 지나치게 징세해감으로 순천도호부사가 밤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렸다고 하며, 민간의 그 징세에 시달렸던 사실이 “강남악부”에 ‘율촌요’로 전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이틀간의 답사를 이처럼 꼼꼼히 할 수 있었던 것이 임진왜란사 연구와 지방사 전문가인 조 교수의 헌신적인 안내 덕택이었음에 거듭 거듭 감사를 표한다. 이 답사기를 쓰면서도 여러 차례 질정을 받았다.
첫댓글 해룡면 갈치 저수지는 300년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 없이 역사 속에 남아 있다. 인간이 개발한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순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번창하고 있는 지방도시이다. 습지공원, 정원공원 등 볼거리가 많은 도시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도호부 관아의 모습이 일제 시대 모두 제거되고 오직 이웃의 낙안읍성이 남아 있다. 순천은 우리의 희망이 보이는 곳이다.
먼 거리 답사 여행을 하셨군요.
무엇보다 건강하셔서 원거리 뜻있는 여행을 하신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자상한 일정과 임진왜란사 연구 분야까지 소개해 주셔서
간접 답사 여행을 한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윤선생!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