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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27 불쌍히 여기사
누가복음 7장 11절-17절
갈릴리 바닷가의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남쪽으로 하룻길쯤 가면 골짜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나인 성이 자리 잡고 있고 오늘 말씀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성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처녀 때는 한 인물 했겠지요.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달콤하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행복에 젖어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복 끝, 불행시작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극심한 가난과 혹독한 고독을 이겨낼 생각을 하니 하염없이 눈물만 흐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습니다. 바로 어린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아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훌륭하게 키워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 속에서 아들은 잘 자라 이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건강하게 자라던 아들이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과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억장이 무너지는 그 현실은 하늘을 원망한다고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무리 슬프고 억울하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의 시신을 내어다 묻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청년의 시신을 매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 기구한 운명의 여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 성의 많은 사람들도 그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바로 그때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과 함께 나인 성을 향하여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은 그 성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극적인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과 함께 나인 성을 향하여 들어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는 죽음의 사신인 사탄이 이끄는 죽음이 행렬이 성문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두 행렬이 마주칩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만남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만남이라기보다 이제 대결이 펼쳐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2절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성경은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에게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때만 유독 시선이 과부에게 머물렀습니까? 4복음서를 유심히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보셨다”는 말씀이 40여회 나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어디였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이고, 예수님께서 늘 함께 하셨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일이 무엇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창녀, 세리 그 밖의 죄인들, 그리고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 삶에 찌들어 지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시고, 고치시고, 손 내밀어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먼저 주목하셨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잔뜩 진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고통당하는 우리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주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어떻게 생각을 하셨습니까?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4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긍휼히 여기사, 가엽게 보시고”등의 표현이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우리들을 유난히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커다란 슬픔에 지쳐 있는 과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인생의 고통을 안고 씨름하는 사람들에게 민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언제나 바라보시고, 언제나 귀 기울이시고, 그리고 그 사랑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덮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떤 아픔이던지 동참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당하는 아픔을 당신이 친히 그대로 느끼십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슬플까?’ ‘이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 이 여인은 얼마나 두려울까?’ ‘이 여인은 얼마나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까?’ 예수님은 이 과부의 괴로움과 아픔과 슬픔에 자기 마음을 송두리째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정말 불쌍한 존재입니다. 내가 잘나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큰일을 행하시기 전에는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셨습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이십니다. 주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문제 해결과 놀라운 역사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과부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말처럼 어쩔 수 없어서 하는 형식적인 말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반말로 “울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슬픔에 몸을 가눌 수 없는 과부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단호하게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드시 이 슬픔을, 그리고 죽음을 책임지시겠다는 강력한 예수님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지는 창조주의 의지, 생명의 주관자의 의지,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분의 강력한 의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말씀만으로 끝나는 의지가 아니고, 열심히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울지 말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죽음 앞으로 가까이 오셨습니다. 즉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입니다. 그리고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더욱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인자한 귀로써 귀 기울이시고 난 후 그냥 가만히 보고, 듣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출애굽기 3장 7절부터 1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 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무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렇게 적극적이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고통 중에 가까이 오셔서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문제와 슬픔과 고통에 친히 손을 대시는 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자 관을 매고 가던 사람들이 그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은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탄과 사망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탄과 사망에게도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명령을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님은 사탄과 사망에게 명령하셨고, 사탄과 사망은 그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었던 청년은 다시 살아났고, 뿐만 아니라, 일어나서 앉아서 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분의 명령을 아니 들을 사람이 없고, 아니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슬픔에 잠겨 넋을 놓고 울고 있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하신 우리 주님께서 과부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슬픔의 근본을 해결해 주심으로 그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인 성 과부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고통 당하는 우리들을 위로하시는 두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께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긍휼이 많으신 주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때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합당한 은혜를 준비해 놓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생각에 나인 성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과 슬픔에 잠겨 있는 과부의 아들 장례 행렬과 만난 것은 우연입니까? 아니면 필연입니까?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예수님께서 슬픔에 잠겨 있는 과부를 의도적으로 찾아 가신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운명적인 만남을 하신 것입니까?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어떤 사람이던 예수님과 만났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우연히 그리고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이미 과부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그 시간을 맞추어 그들을 만나시러 가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주님의 눈에 뜨이기만 하면, 그리고 그분께 간절히 간구하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때를 따라서 채우시고 위로해 주시는 손길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울고 있는 우리들을 주목하시고, 우리들의 눈물을 소중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위로하십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고, 정확한 때에, 필요한 은혜를 허락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시며, 한숨을 거두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구약 성경에 보면 또 하나의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나오미’라는 여성입니다. 이분의 이름인 ‘나오미’의 뜻은 ‘희락’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라는 여인은 그 이름의 뜻같이 희락이 넘치는 인생을 살았습니까? 안타깝게도 실제 그녀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였습니다.
그녀는 흉년을 만나 좀 더 잘살아 보려고 남편과 함께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두 아들은 모압의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나오미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민간지 10년이 지난 후부터 엄청나게 꼬이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남편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타국에서 과부가 되고만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불과 얼마지 않아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차례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집안의 세 남자들은 다 죽고, 세 여자들은 똑같이 과부가 된 것입니다. 거기다 더 미칠 지경인 것은 사람들이 “저주 받은 집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누가 생각해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할 만큼 나오미는 희락이라는 이름의 뜻은커녕 복도 지질이 없는 여인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불행으로 몰아붙이는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큰 그림으로 이해하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행으로 끝을 맺게 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오미는 자부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나서 재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은 바로 오벳입니다. 그리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이새는 누구를 낳았습니까? 바로 다윗 왕을 낳은 것입니다. 인내를 갖고 나오미의 이야기를 읽지 않으면 정말 지질이도 복이 없는 여인이라고 혀를 차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면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복이 없는 여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왕통이 이 두 과부를 통해 이어지고, 그 혈통에서 결국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나오미와 룻에게 그런 끔찍한 비극이 없었다면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결코 그 가족 가운데서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겪었던 슬픔은 실로 힘들고 어려웠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슬픔 속에서 다윗 왕의 혈통을 조성하셨고,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의 길을 닦고 계셨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더 확실하게 말씀 드리자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모든 것’에는 ‘우리의 슬픔’도, ‘우리의 기쁨’도, ‘적국의 왕’도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합력하여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는 ‘모든 것’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는 사람들 중에 고생하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신앙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인생을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던지, 아니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은혜 중 한 가지를 우리에게 주시던지, 아니면 이 두 가지 은혜를 한꺼번에 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이 어렵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더구나 크리스천들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잊어버리는 분도 아니시고, 능력이 없는 분도 아니시며, 열심히 없는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눈물로 끝나게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의 내 인생이 보잘것없이 느껴지실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주님의 의지하며 인생을 영위하는 자는 반드시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을 것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금 눈물로 나날을 지내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그 모습을 빠뜨리지 않고,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슬픔에 잠겨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며, 우리의 눈물이 기쁨으로, 우리의 슬픔이 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