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부터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24장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이전의 예언이었습니다. 25~32장은 주변 민족과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었습니다. 33~48장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의 예언입니다.
33장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명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7절을 보겠습니다.
6 그러나 만일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다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파수꾼에게 묻겠다.
7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개역개정본과 새번역에 파수꾼이라고 되어 있는 말이, 공동번역에는 보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초의 임무는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아군에게 알려 파멸을 막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런 역할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파수꾼이 나팔을 불어도 백성들이 듣지 않을 것인데, 그래도 파수꾼은 나팔을 불어야 한답니다.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도 백성이 듣지 않으면, 그 대가를 백성들이 받아야 하지만, 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들이 화를 당하게 된다면, 그 책임을 파수꾼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고독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백성들은 본능적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원합니다. 화가 미칠 것이니 대비하라는 말은 듣기 싫어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병원에 가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이빨이 썩어도 단 것만 찾는 것처럼, 듣기 싫은 말을 거부하고,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싶어합니다. 이럴 때 예언자들은 자신과 싸우며, 편한 길, 쉬운 길을 가고픈 자신의 본능과 싸워야 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것이 예언자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 등장한 예언자 중에 행복한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언자의 사명을 이어받았다는 설교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중에 자신을 파수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지구마을이 환경문제로 위기에 처해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사회가 양극화되고, 부동산 폭등으로 젊은이들이 영끌족이 되어 고통을 받아도,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파수꾼의 역할은 내다버리고 복을 파는 장사꾼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한 결 같이 예루살렘의 회복을 말했듯이, 회복과 평화도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고와 책망 이후에, 백성들의 반성과 회개를 전제로 한 회복이고 평화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에게서는 그 균형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예수 믿고 천국 가자는 현실도피적인 신앙이 한국 교회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구약의 가르침도 아닐뿐더러, 신약의 가르침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파수꾼의 역할을 충실히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