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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과 서사 2 / 이종수
꽃과 나무가 예쁘고 미더운 것에는 다 까닭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구구절절 감동있는 이야기로 풀어내야만 사랑을 얻을 수 있다. 거짓말이더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여야 한다.
여기 옛 이야기 한 대목.
옛날에 어떤 할 일 없는 사람이 거짓말 내기를 했어. 무슨 내긴고 하니, 누구든지 거짓말 세 마디를 멋지게 잘 하는 사람을 사위 삼겠다고. 거짓말을 하되, 세 번 다 자기 입에서 거짓말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거였어. 그러니까, 아무리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도 이 사람이 ‘응, 그래. 그럴 법하구나.’ 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저러나 장가 못 간 노총각들이 색시 얻어 보겠다고 이 사람 집에 구름같이 몰려들었어. 저마다 있는 꾀 없는 꾀를 다 내어 능청스럽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지만 아무도 이기지를 못해. 세 마디 다 내놓기도 전에, ‘그래, 그래. 그건 거짓말도 아니다.’하고 내쫓아 버리니까 뭐 당할 사람이 없지.
하루는 이 집에 어떤 총각이 찾아왔어. 이 총각은 인물도 훤하고 허우대도 멀쩡해서 나무랄 데가 없는데, 집이 하도 가난해서 장가를 못 간 총각이야. 이 총각이 마당에 썩 들어서니까, 마침 이 집에서 벼를 베다가 마당질을 한다고 일꾼들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어. 그걸 보고는 이 총각이 배를 잡고 웃으면서 한다는 말이, “아이고, 우스워라. 아직도 이렇게 구식으로 마당질을 하는 집이 다 있네.” 하거든. 주인이 그 말을 들으니 은근히 화가 나지. 마당질을 하는데 무슨 놈의 구식이 있고 신식이 있느냐 말이야. 그래서, “그럼 신식으로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지. 그러니까 이 총각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아. “그게 말이지요. 우리 집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봄에 논둑을 쌓을 때 벼 키만큼 높이 쌓습니다. 그래 놓고 벼가 다 익으면 논에 물을 가득 대지요. 그러면 벼 밑동은 다 물에 잠기고 이삭만 물 위에 나올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날이 추워서 물이 꽁꽁 얼면 얼음판에 들어가서 도리깨로 이삭을 두들겨 패지요. 그러면 낟알이 아주 잘 떨어집니다.” 하고 숫제 정신 나간 소리를 하니, 주인이 “예끼, 젊은 사람이 무슨 거짓말을 그리 심하게 하나?” 하고 나무랐지.
이렇게 거짓말 한 마디 통과하고, 마침 먹던 새참을 보고 배를 잡고 웃으며 자기 네 집은 일년 열두달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소고기를 먹는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또 천연덕스럽게 자기네 집은 소를 기를 때부터 궤짝에 넣고 길러 사발만한 구멍으로 삐져나오는 살을 베어 먹으니 흔해빠진 게 소고기라고 한다. 그러니 주인은 어이가 없어, “자네는 입만 뻥긋하면 거짓말이군 그래.” 하고 두 마디째 거짓말을 인정하고 만다. 그러니 마지막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뒷산 돌부처 옆 배나무에 달린 배를 딸 때 돌부처 콧구멍을 쑤셔 재채기를 나게 해서 땄다는 말과 함께 주인집에서 스물다섯 접을 이천오백 냥에 외상(이자까지 붙여 삼천 냥)가져가서 받아야겠다는 거짓말에 꼼짝없이 걸려든 이야기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약점이나 처지를 이용해서 거들먹거리려는 사람을 은근슬쩍 놀려주려는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거짓말에도 이야기가 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소설에서만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에서도 이야기가 되어야만 한다. 거 말이 되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인천 앞바다에 싸이다가 떴어도 고뿌 없이는 못 마십니다아
약장수 아저씨들 웃는 소리로 아낙들 꾀송거리며
배고픈 육이오 고개 넘어가던 시절도 아니요,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아가씨는 백보지이-
부둣머리 피난민촌 기계충머리 애갱치들
쉐엑 쒜에엑 휘파람 갈기며
밤거리 훔치던 쌍팔년도 그 시절도 아닌
바로 엊그저께 일천구백구십년도 한여름
부평공단 반 바퀴쯤 돌아 한구석
동양전자라는 공장 조립 라인에
돌리고, 박고
돌리고, 박고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일 년 열두 달 그저
돌리고 박는 또박이
웬 여자애가 있었다
金자, 美자, 順자, 김미순이
오종종허니 고향집 싸리울 밑 채송화 닮은 이름인데
얘 좀 봐라
바다 건너 제품이 날라가더니
不자 불량검사에 미끄러져
따다닥 홍콩제 크레임이 걸려
이런 난리가 있나
가로 왈 세로 왈 돈싸장님
널뛰듯이 현장 바닥 한판 뒤집어엎고
과장님에 계장님은 이리 왈 저리 왈
덜렁이판으로 쥐를 잡고
반잔에 조장 고추장에 된장까지 나서서
가로세로 이리저리
메뚜기춤에 찍자 바람인데
어쩔거나 꼽배기 철야가 떨어진다
한사흘 꼽배기 철야가 영락없는데
이게 누구냐
웬 시퍼런 대낮에 된똥 떨어지는 소리냐
‘죽어도 살어도 철야는 못혀!
또박이 신세도 고달픈데 밤귀신 행세요?‘
애인인지 서방인지 약속 하나 걸어놓고
입방아잔으로 반장놈 걸어놓고
돌아서서 퉤-
어허 이게 누구냐
그 애
별명이라고 생겨놓은 것이 디스코라
해만 기울면 궁둥이가 들썩들썩
안절부절로 팔다리가 흔들흔들
일에 쩔어 파김치 국물로 썩어가다가도
춤노래만 나오면 벌떡 팽그르르
어느 틈에 물기가 돌고 쌩기 돌아 차차차
남자 꼬랑지 한나 물고
디스코로 몸을 풀어보는데
손가락으로 허공찌르기
한 발씩 교대로 땅헤엄치기
쭉쭉 뻗는 다리로 바람턱을 차고
궁둥이로 신나게 냄비돌리기
에헤라 드럼아 때려라 이놈의 세상
쳐라 쌍년의 팔자
돌아라 미쳐 돌아라 조명을 타고
돌아라 미쳐 돌아라 조명을 타고
허리를 꼬아 돌리는데 비단뱀이 공중을 오르는 듯
머리채를 휘두르니 파도를 타고 물보라 퍼지는 듯
이리 만고강산 아리랑판으로 놀아제끼는데
남자 후리는 재미가 없다면 헛놀음이라
한번 대짜로 후려보는데
이게 웬 눈먼 송사리냐
제놈 놀만한 산개골창 둠벙으로 아는지
한번 보더니 이리 졸졸졸
신발끈이 썩은 새끼줄이 되도록 저리 돌돌돌
따라댕기다 툭 차이고는 밤새워 편지질
하냥 그립다는 말씀 재가 되도록 기다리겠다는 말씀
편지질 사이사이 동네 전화를 붙들고
만나고 싶다고 통사정
막판에 이 골목 저 골목 막아놓고
지지리궁상으로 왼갖 제 자랑 까는 놈
왈 순정파라는 것 훌쩍 비켜 넘어가는데
저게 웬 심신이 사돈에 팔촌이냐
옷 입는 가다꾸는 압구정동에서 놀던 솜씨요
돈 쓰는 흉내는 싸장님 외아들이 틀림없구나
공단바닥을 주름잡아 보는데 어언 한판 잘 놀고 나니
어허 이게 무슨 세월이냐 남자놈 처량한 개털일세
애탈끌탕 애써 모아 전세방 한 칸 장만터니
한번 놀음 끝에 월세방 보증금도 꿔대야 할 판이라
그놈 잘생긴 얼굴에 똥꽃이 피었는데
미순이년 하는 꼴 봐라
콧물 한번 쓰윽 훔치고 나서
에라 죽어라 톡 차버린다
그년 독하기가
개도 안 물어갈 삼 년 묵은 월경빤스로다
퉤-
박영근, <김미순傳> 부분
판소리 한 대목을 듣는 듯 구성지다. 공장노동자로 살았던 김미순이 논다니에서 공장 쁘락치로 노동탄압의 앞잡이가 되었다 다시 진정한 노동자로 거듭 나는 장시 <김미순전>은 서정시의 어법과 서사를 잘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구한 삶을 살았던 김미순이라는 공장노동자 이야기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야기이다.
마음 아직 지지 않았네
구석진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새파란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는
1950년대 생 채송화
본적은 느티나무 두 그루
마주보며 늙어가는 내 고향마을
오빠 학비 보탠다고
코피 터지게 야근한다던 가발공장 미자
미싱을 돌리다 팔이 잘린 춘자
식모살이 가서는 이내
애 엄마가 되었다는 말순이
영등포라든가 동두천이라든가
눈물로 떠돌던 명자는
흑인 남자 손에 끌려 미국으로 갔다는데
이따금 비명을 질러대는 매미 소리에
거북이처럼 납작 업드려
고개를 내밀 줄 모르는 고향 마을
어디에서 핀들 꽃이 아니랴
쩡쩡한 꽃으로 늙어가고 있겠지
1950년대 생 채송화
선연한 꽃
내 마음 아직 지지 않았네
권희돈, <채송화 1>
김미순은 그 시대 가난한 식구들을 먹여 살렸던 명자, 미자, 말순이와 자매 사이다. 그녀들을 바라보며 살았던, 다달이 부쳐주는 돈으로 대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던 지금은 중년이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삶을 지탱하던 이야기인 것이다.
서정도 이렇듯 이야기가 될 만한 것과 만나야 빛이 난다. 요즘 시인들은 새로운 서정으로 옷을 입히고 있다. 끊임없이 이야기의 껍질을 까고 또 까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시도하는 것이다.
팬티를 뒤집어 입고 출근한 날
너는 왜 자꾸 웃는 거니
공장장이 한 말이다
귤처럼 노란 웃음을 까서 뒤집으면 하얗게 들킬 것 같아
오늘은 애인이 없는 게 참 다행이고
너는 왜 자꾸 웃는 거니
공장장은 그렇게 말하지만 예쁜 팬티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나는 팬티 같은 건 수북하게 쌓아놓고 오늘은 꽃무늬 내일은 표범무늬 어제는 나비를 거느리고 다녔다 결심을 유보하느라 계속해서 뻗어나가고 있는 넝쿨식물처럼
내가 딴생각에 빠지면
손목이 가느다란 것들은 믿을 수가 없어 공장장은 중얼거린다
나에겐 아직 애인이 없고
공장장과 함께 밥을 먹는다
팬티 속을 만지면 울어본 적 없는 울음 설명할 수 없는 오후
번지듯 피어나는 꽃잎을 물고 나비는 날아가버리고
그걸 알아봐준다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웃지 않고 어떻게 마주 앉을 수 있는 걸까
애인은 어떤 식으로 생기는 걸까
임승유, <계속 웃어라>
애인 없이 공장장과 마주앉아 밥을 먹는 나는 누구일까? ‘팬티 속을 만지면 울어본 적 없는 울음 설명할 수 없는 오후’를 어떻게 말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웃지 않고 어떻게 마주 앉을 수 있는 걸까//애인은 어떤 식으로 생기는 걸까’ 하는 고민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난해하지만 제목처럼 웃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삶일까? 꼭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또 다른 고민 속에서, 자신의 삶 속에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거처하는 호스 슈 빌리지 아파트에는
종교학을 가르치는 인도인과
비파를 연주하는 중국인 그리고
시를 쓰는 한국인이 함께 살고 있는데요
세 나라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아시아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서로 고픈 배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동상이몽을 확인하게 됩니다
대저 밥이란 무엇일까요
인도 사람은 인도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손가락밥이라 말합니다
중국 사람은 중국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젓가락밥이라 말합니다
일본 사람은 일본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마시는 밥이라 말합니다
미국 사람은 미국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칼자루밥이라 말합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식으로 밥을 듭니다
더러는 그것을 상다리밥이라 말합니다
손가락밥이든 젓가락밥이든
마시는 밥이든 칼자루밥이든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랴 싶으면서도
이를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밥 먹는 모습이 바로 그 나라 자본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손가락밥 위에 젓가락밥이 있습니다
젓가락밥 위에 마시는 밥이 있습니다
마시는 밥 위에 칼자루밥이 있습니다
밥이 함께 나누는 힘이 되지 못할 때
들어삼키는 힘으로 둔갑하고 맙니다
이것이 밥상의 비밀입니다
우리들이 겁내는 포도청이
젓가락힘이냐 마시는 힘이냐 칼자루힘이냐……
이 삼자 대질의 묘미를 즐기다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밥을 다만 나누는 힘이다, 상다리밥은 마주앉는 밥이라, 지렛대를 지르고 나서
문득 우리나라 보리밥을 생각했습니다
겸상 합상 평상 위에 차린 보리밥
보리밥 고봉 속에 섞여 있는 단순한 땀방울과
보리밥 고봉 속에 스며 있는 간절한 희망사항과
보리밥 고봉 속에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민초들의 뜨겁디뜨거운 정,
여기에 아시아의 혼을 섞고 싶었습니다
고정희, <밥과 자본주의-아시아의 밥상문화>
제목만 보면 여느 논문 제목 같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써낸 데에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대저 밥이란 무엇일까? 밥을 얻기 위한 방식이 자본주의란 이름으로 서로에게 군림하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삼자 대질이 비빔밥처럼 잘 버무려져 있는 까닭이다.
‘집중’과 ‘깊이’가 느껴져야만 좋은 시라고 한다. 자신의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철학자 강신주), 응시와 집중만이 사물에 대한, 사람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구체적인 이야기로 버무려져 나온다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흉내 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영위하고 그것을 표현하라”는 것이다.
이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강신주/동녘)에 든 <달나라의 장난>을 보면 알 수 있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눈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 듯이
노는 아이들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언젠가는 쓰러지기에 오직 돌 때에만 팽이라는 사실, 채찍질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 고민을 떠나 고뇌의 흔적이 느껴지는 시에는 ‘집중’과 ‘응시’를 통한 ‘깊이’가 저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혼불 문학관을 둘러보고 아아, 중얼중얼, 17년 세월 한 작품 쓰는데 바치고 죽은 최명희 삶을 아리게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 마을길을 내려오는데 시커먼 개 한 마리 다가오며 짖는다. 웡웡. 이런 개새끼가 사람한테 덤비네, 손을 치켜들었더니 피하는 척 하다가 내가 돌아서려 하자 다시 달려든다. 솟은 이빨이 하,얗,다. 어어어 이것 봐라. 겁을 먹고 엉거주춤 뒷걸음질 치는 나를 보고 개가 짓는다. 웡웡 야 이 개새끼야 너는 겨우 지나가는 개한테 시비나 걸면서 혼불 문학관 다녀간다고 폼 잡냐, 웡웡.
김성장, <개새끼>
짧은 시에도 이렇듯 상반된 개와 인간이 교차한다. 개를 통해 내 모습이 보이는 것임을, 하얀 이빨을 통해 드러낸 적의 속에서 ‘혼불’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 것이다. 혼불문학관 이야기가 다 들어있을 수밖에 없다.
라이터를 살 때마다
어딘가에 두고 온 내가 생각났다
나는 화요일마다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터는 기억을 감쪽같이 감아버리고
에스컬레이터의 내면에는 서랍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목요일의 술자리에서 속삭였지
싱고늄 종아리가 하얗게 얼고 있는 걸
본적이 있냐고
누군가를 부둥켜안고 싶은 적이 없었냐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사건은 일어나고
그때마다 발생하는 기분들
그 기분들을 다 써먹지도 못했는데
누군가는 결정적으로 신문을 장식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심과 함께
서랍 속으로 사라졌다
탁자의 단순한 힘에 기대어
나는 사라진 라이터들과 한통속이다
당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주머니에 넣어 간 그 기분이 필요하고
당신의 얼굴을 돌려 세우려면
양손의 의지보다 확실한
몇 분 전의 느낌들이 필요한데
입술이 끌어 모으는 결심은 너무 늦거나 빨라
화요일의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마다
칸칸마다 서랍을 열고
잘 있었니?
안부를 물어야 할 것 같고
임승유, <라이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삶에는 연대기적인 고민과 그 고민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