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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B |
죽음 |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
생명의 끝남과 그 이후의 영원한 멸망 |
구원 |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것 |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
영생 |
회복된 관계에서의 교제 |
영원한 천국에서의 교제 |
믿음 |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 곧 영접하는 것 |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것 곧 의지하는 것 |
의 |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하심을 얻음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서 의롭다하심을 얻음 |
은혜 |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
이러한 구분만 파악되면 효력 있는 부르심과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파악하기는 쉽습니다. 성경 구절들도 자기 위치에 배치하면 됩니다. A는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한 것입니다. B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효력있는 부르심
A에서 구원은 성경에서 언제나 과거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가 아닌 상태를 전제하고 있는 경우에는 미래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신자의 상태를 전제로 한 문맥에서 이야기되는 구원은 관계 회복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당사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기에 가능합니다.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역사이기에 불가항력적입니다. 택함을 받은 당사자가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기 전 어느 시점에서든지 반드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영생은 회복된 관계 안에서의 교제를 뜻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존, 그분 앞에서 죄인인 자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대속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은 죄가 용서받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생명책입니다(시 69:28, 빌 4:3). 영적으로 갓난아이입니다. 사회에서 어떤 위치이든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새로운 출발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란 없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불신 상태에서의 복음 수용을 행위로 보진 않습니다.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가 있었다면 자기 의, 자기 자랑이 가능하지만 전혀 없습니다. 자랑하지 못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요 6:39~40, 엡 2:8~9, 딛 3:5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불러내시기 위하여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하게 했습니다. 바로 왕의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일입니다. 택한 백성을 부르시기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애굽에서 벗어나는 구원에 있어서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 3:16도 넓게는 여기에 해당됩니다. 영생이 회복된 관계에서의 교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에 주신 독생자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속해 있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
B에서 구원은 미래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 땅의 신자에게는 미래의 일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전 인격과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이 주인이고 신자는 종이기에 주인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 뒤따릅니다. 곧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양심이 아닌 선한 양심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역사의 내용은 다양합니다.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 설교나 가르침을 받아 깨우치는 것, 성도의 교제를 통한 깨달음, 자신에게 발생한 즐겁거나 어려운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메시지 등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느냐 아니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추구하느냐를 당사자가 결정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가 은혜이며 신자가 그 역사를 따르는 것은 순종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말하고 행하는 것도 순종입니다. 순종은 행위에 해당되는데, 은혜 곧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의 열매입니다. 의지함인 믿음 다르게 말하면 순종은 현재적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게 합니다. 의롭다하심은 영접함인 믿음으로 불변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평가하시며 순종하면 의롭다고 평가하십니다. 신자는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구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순종으로 가능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9)는 말씀과 같습니다. 곧 영원한 구원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믿음 곧 예수님을 의지함이 조건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분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순종이 조건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과 관련되어 성경 전체의 진술을 대표하는 구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이 말씀은 앞 구절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동사가 모두 현재형입니다. 현재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현재적으로 그분과 교제하며 현재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동시에 순종입니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바울 사도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역사가 서로 거스른다고 하였습니다. 신자인 당사자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며 삽니다. 성령의 역사를 선택하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이며 그 결과는 영생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선택하면 육체를 위한 삶이며 그 결과는 썩어진 것입니다(갈 6:8~9). 영생과 대조되는 것이기에 영원한 멸망임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집니다(출 32:32-33, 시 69:28, 계 3:5).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인 영생은 성령을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조건적입니다.
배치와 문맥의 문제
교회 역사에서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견인의 근거 구절들을 잘못 배치하여 혼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문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서 잘못된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잘못된 배치들
전자에 관한 구절을 후자에 배치한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가 다 믿는다는 말씀을 견인에 관한 구절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이 되고 그것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있었다면 그 작정을 따라 영생을 반드시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구절을 잘못 배치한 결과일 뿐입니다. 바로 왕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를 견인에 가져와서 신자에게 그러한 역사를 통하여 반드시 회개하도록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칼빈주의에서는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후자에 관한 구절을 전자에 배치한 잘못입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소욕이 서로 거스린다는 말씀을 효력있는 부르심에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부르시는 성령의 역사를 당사자가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알미니안주의에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이 가항력적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문맥 파악
배치가 잘못되지 않은 경우의 구절들은 앞뒤 구절의 내용들을 온전히 고려하지 못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을 성도의 견인의 근거 구절로 제시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 구절은 27절과 함께 읽어야 하며 그렇게 읽으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순종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고전 3:15과 고전 5:5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 문맥과 단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면 성도의 견인의 근거 구절이 아니라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 경우와 은혜에서 탈락하는 경우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불 가운데 받은 것 같은 구원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니라”(고전 3:15). 거듭난 신자라면 삶에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근거로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문자 자체는 그것을 지지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문맥은 고린도교회의 분파에 대한 교훈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그리스도파,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가 있었습니다. 그 분파는 그것을 말하는 말씀사역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역자들의 역할을 설명하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 3:7).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터 위에 집을 세우는 것이 말씀사역자의 역할입니다. 그들의 공적입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불로 평가하십니다. 분파는 그리스도의 한 몸 됨을 해치는 것이기에 그 공적은 불타게 됩니다. 그것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상태에서 말씀사역자들이 멸망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분파를 이끄는 말씀사역자가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불 가운데 받는 것과 같은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을 말씀한 이유는 그들이 분파의 잘못을 인식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뜻과 달리 분파가 지속되면서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분파를 넘어서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같이 한 교회를 이룰 수 없다며 나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어지는 내용이 그 답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7상)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 가능한데, 이 문맥에서는 분파를 넘어선 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값으로 세우신 한 몸을 사람이 임의로 찢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경우까지 나아가면 그 사람은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것과 같지 않고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3장 15절은 17절까지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15절의 상태에서는 불 가운데서 받는 것과 같이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더 나아가면 17절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15절은 신자라면 반드시 불 가운데서와 같이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이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그 상태에서 돌이키지 않고 더 나빠지면 멸망이 뒤따릅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음행을 한 자에 대한 기술입니다. 문맥에 의하면 그를 출교하라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져서 결국 온 덩어리를 누룩으로 오염시키게 되기에 내어 쫓으라(고전 5:13)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에서는 그가 광야에서 생활하게 되고 그 곤고함을 깨닫고서는 결국 돌이키게 되어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진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한 존재의 몸은 멸하지만 그의 영은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거듭난 자임은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 곧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고전 1:2)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신과 영은 한 인격의 각기 다른 부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몸을 뜻하는 단어는 소마입니다. 본문은 사륵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륵스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분의 뜻을 어긴 존재를 가리킵니다. 한 존재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고린도교회의 음행한 이는 그 행위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뜻을 어긴 자입니다. 그 전 존재를 하나님께서 멸하시는 것입니다. 멸한다는 것이 영원한 사망임은 명백합니다. 영은 고린도교회를 가리킵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말씀(고전 6:17)을 통해 확인됩니다. 즉 본문은 음행한 자를 출교시킴으로 고린도교회가 거룩을 유지하고 그것이 음행한 자는 멸하고 고린도교회는 주 예수의 날에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음행한 자의 몸은 멸하고 그의 영은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출교의 성경적 의의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신자를 그 몸의 지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신자의 총합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면 교회는 로봇에 해당됩니다. 잘못입니다. 교회에 신자가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몸이 있고 지체가 있습니다. 출교는 몸에서 지체를 끊어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신자가 팔이라고 생각하면 출교는 몸에서 팔을 끊어 내는 것입니다. 몸에서 끊어진 팔은 죽음입니다.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몸 사이에 이루어지는 생명의 교제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기록 시점의 관점에서 보면 그 팔은 결코 몸에 다시 붙일 수가 없습니다. “육신은 멸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광야 생활을 통한 돌이킴과 그것을 통하여 그가 (영원한) 구원을 얻음은 본문의 가르침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은 거듭난 자의 결정적인 범죄로 인해 그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술입니다. 그의 범죄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은 것입니다. 거듭남의 믿음 곧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함인 믿음이 있었지만 그분을 의지함인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 곧 믿음을 저버림인 그 범죄는 돌이킬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거듭난 자라면 그 범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이키게 하신다는 칼빈주의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범죄로 인해 신자의 상태는 변할 수 있지만 자녀라는 신분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탄의 종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 거듭난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견인하신다는 주장도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에 대해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워 성경의 진술을 거부하지 말고 성경의 진술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여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마 1:21). 그 시점에서 자기 백성이란 유대인들이입니다. 포로 후 회복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과 포로 후 회복 언약의 관계에 있는 유대인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로마의 포로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죽음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건지시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 방편은 포로 후 회복 언약을 완전하게 하시는 완전하게 된 새 언약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완전하게 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 언약 아래에서 이집트에 포로 되어 있던 이들이 출애굽을 통하여 가나안 언약으로 나아가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예수님께 주신 자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완전하게 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출애굽과 홍해 건넘 이후에 “백성이 야웨를 경외하며 야웨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다”(출 14:31)는 진술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지막 날이란 그 시점에서 유대인들과 맺었던 언약에 있어서 마지막을 가리킵니다. 포로 후 회복 언약의 마지막 시점입니다. 그 언약은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완전하게 된 새 언약으로 대체됩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포로 후 회복 언약은 공적으로 파기될 것입니다. 마지막 곧 끝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일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를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언약 관계에서 범죄하여 죽었던 이들 가운데서 살리시고자 하신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는 이미 예언된 바이기도 합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단 12:1). 미가엘은 독생자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존재 방식입니다. 환난은 다니엘의 민족 곧 유대인들이 겪게 될 최악의 어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언약을 끝장내시는 것인데, 로마를 통한 예루살렘 함락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상황에서 책에 기록된 모든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완전하게 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상)는 바울 사도의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요 17:3).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서로 교제하는 것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중심인 이전 언약과는 달리 완전하게 된 율법이 중심에 있는 복음 안에서 삼위의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 은혜 안으로 부르시고자 하신 모든 유대인들은 옛 언약이 공적으로 파기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이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형성된 산 자였습니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관계가 단절된 상태 곧 죽음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셔서 하나님과 새 언약관계가 형성된됩니.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을 앞두신 시점에서 사도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맡기신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뿐 아니라 확장이 이루어집니다. 땅 끝입니다. 땅 끝은 바다와 접경 지역입니다. 바다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바다는 이방인들에 대한 상징어입니다. 복음이 유대인들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도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시작으로 바울 사도가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져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집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라는 말씀은 그 성취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그분과 언약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죽은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과 새 언약관계가 맺어지는 유대인들은 다시 살리신 것이고 이방인들은 처음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그 사람의 생애 가운데 한 번은 반드시 부르심을 따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행 16:14하).
예수님의 말씀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이루어지는 육체의 부활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신자에게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30, 살전 4:14). 신자에게 육체의 부활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자다가 깨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입니다(살전 4:16).
잘못된 신학적 토대들
우주의 모든 것 예를 들면 돌 하나가 어떤 곳에 어떤 모양으로 있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칼뱅의 예정론과 민족적 선택- 다르게는 일반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 다르게는 특별한 선택-이 있다는 칼뱅의 이중선택사상은 무조건적 견인의 신학적 토대들입니다.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과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동시적입니다. 실질적인 대상이 개인적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 이중선택사상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가요?
칼뱅의 예정론의 잘못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미리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미리 아시지만(시 139:2) 예정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분의 전지하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며 아침밥을 몇 시에 얼마의 시간에 먹되 반찬에 몇 번의 젓가락질을 하는지를 미리 정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미리 정하여야만 그분의 우주 경영이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소욕이 서로 거스릅니다. 만약 예정이 있었다면 성령은 예정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당연히 육체의 소욕으로 거스를 수 없어야만 예정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스를 수 있으며 거스릅니다.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칼뱅식의 예정론과 성경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어떤 사람을 선택하신 것까지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예정론을 말하고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신비라고 말하며 넘기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언제나 그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칼뱅의 이중선택사상의 잘못
칼뱅은 선택에 관한 구약의 진술(신 7:6~8)은 민족적 선택, 신약의 진술(엡 1:4~5)은 개인적 선택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각각은 내용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전자의 ‘너희’는 하나님에 의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전체이며 후자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 전체입니다. 각각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개인들의 총합입니다. 전자는 구약적인 진술이었고 후자는 신약적인 진술이었을 뿐입니다. 성경의 ‘남은 자’는 언약의 시대가 바뀌면서 이전 언약에 속하였다가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전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 언약의 백성 중에서 일부이지만 새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언약의 백성 전부입니다. ‘남은 자’가 새 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은 견인의 시작점인 효력 있는 부르심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 사상은 견인의 근거로 삼는 것은 배치를 잘못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게 그 부르심은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교회를 구성하는 한 신자 한 신자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질적인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게 있어서 이중선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의 울타리 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있습니다. 구도자의 상태인 경우와 마귀가 교회를 해치기 위하여 심은 사람이 그에 해당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너희’ 곧 교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너희 곧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롬 1:6). 고린도교회는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고전 1:2). 이처럼 성경에서의 각 지역교회는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교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견인에 대한 가르침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만 관계된 것입니다. 칼뱅의 이중선택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한 결과이며 그것은 성경의 구원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과 구원의 상관관계
원치 않는 잘못
일반적으로 믿음을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각각은 맞는 설명이지만 합치면 혼선이 생깁니다. 영접하더라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의지하지 않더라도 영접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접은 성령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역사의 결과이며 의지는 당사자의 선택의 결과로서 가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합치고는 영접이 진실하다면 의지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의지하지 않았다면 영접이 진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영접은 행위와 무관하다고 하고서는 이제 행위를 영접이 진실하냐 진실하지 않냐를 결정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설명입니다. 그리고 각 구절에서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정확하게 구분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각각은 맞는 말이지만 합치니 원치 않는 잘못이 생겨났습니다.
전인적인 믿음
성경에서 믿음은 인식의 차원만이 아닙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주님이시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지만 행함이 뒤따르지 않았다고 평하면 될까요? 우리는 그렇게 하지만 성경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았다고 평하십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정탐꾼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고 모세를 돌로 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A의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들의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정복에 대한 말씀을 신뢰하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B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의미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A의 믿음으로 관계 회복의 구원을 얻고(엡 2:8~9) B의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습니다(벧전 1:5).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옳습니다. 다만 어떤 의미를 담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와는 달리 후자의 경우에도 행함 곧 순종을 배제한 것이라면 틀린 말이 됩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과 행함 곧 순종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에 구원은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빌 2:12). 거룩한 행실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히 12: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성화장에 진술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두 종류의 죄
요한 사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언급했습니다(요일 5:16). 모든 죄의 값이 사망이기에 모든 죄는 사망에 이릅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란 돌이킴으로 회복의 기회가 있는 죄입니다. 돌이킴은 먼저 하나님께 진심으로 그 죄를 자백하고 다음으로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십니다(요일 1: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용서된 죄가 현재 시점에서 효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러한 기회가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멸망하게 되는 죄입니다. 그 경우에는 그 범죄자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교(히 6:4~6),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거부하는 죄 곧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요일 4:3), 아버지의 아내를 육체적으로 취하는 것과 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고전 5:5)가 그에 해당됩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라도 하더라도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역시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그 경우입니다(마 25:1-13). 그들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불을 밝힌 등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여분의 기름이 없었습니다. 기름이 성령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함께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그분의 조명 아래 있었는데, 성령을 위하여 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같은 경우입니다(마 25:24-30). 달란트는 하나님 나라의 일 곧 사명입니다. 사명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다는 것은 사명을 저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저버린 삶의 결국은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병들며 갇히고 나그네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삶에서 영접하지 않는 것도 한 경우입니다(마 25:41-46). 인자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거듭난 신자들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멸하십니다(고전 3:17). ‘누구든지’에 신자가 포함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윤리적인 범죄 가운데 그 삶을 지속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고전 6:9~11).
모든 죄는 그 값이 사망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신자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 편에서 반드시 돌이키게 하시는 역사란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죄를 자백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소욕에서 당사자가 선택하는 원리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따르도록 하시는 역사 곧 반드시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게 하시는 역사는 없습니다. 택한 자를 부르시는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책임지시지만 그 이후의 삶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가 전부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 역사는 육체의 소욕으로 거스를 수 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하는데(고후 6:1), 그 말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도 육체의 소욕을 따르므로 거스를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있는 죄의 자백과 돌이킴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한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고수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택한 자는 믿음을 저버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는 주장도 옳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옳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자는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선택한 것이고 후자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선택한 것입니다. 양면이 있는데 그중에 한 면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잘못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육상 경주와 같은 상관관계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견인에서의 구원에 있어서 상관관계는 육상 경주와 같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출발선상에 서게 된 것입니다. 후자는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 안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출발선상에는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전자의 구원에 후자의 구원 곧 영원한 구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미’입니다. 그렇지만 결승 테이프를 끊는 것은 경주를 중도에 포기하거나 다른 길로 가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때에 가능합니다. ‘아직’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결승선을 통과하지 않으면 결승 테이프를 끊는 영광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의 신자에게 영원한 구원은 ‘이미’와 ‘아직’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계와 똑같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한 편 강도와 같은 경우는 예외입니다. 영접함인 믿음과 동시에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 내포되어 있는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일반 경주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서 곧 등수가 아니라 통과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다른 레인의 선수가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라는 점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결승선을 통과하도록 하는 동역자입니다. 심판이 그 경주의 과정에 함께 하며 돕는다는 사실입니다. 파울을 범하는지 만을 살피는 일반 경주의 심판과는 달리 하나님은 경주자와 함께 뛰며 완주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빌 2:13).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를 따르면 월계관을 씁니다. 반면에 자기 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거스르면 월계관과 무관하게 됩니다.
상급의 의의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고 행위로 상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상급은 영원한 구원에 덧붙여지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영원한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경주를 완주한 것에 대해 월계관을 수여하시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따른 삶 곧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삶을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셔서 신자의 의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월계관은 영원한 구원에 더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경의 면류관이 월계관에 해당됩니다. 면류관의 종류들은 그 강조점의 차이로 인한 것입니다.
행위구원론?
칼빈주의에서는 구원과 행위를 연관시킬 때에 정죄하는 방편으로 행위구원론이라는 말을 합니다.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구들을 무작위로 견인에도 적용시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는 옳지만 견인에서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견인과 관련하여 순종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성구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앞에서 언급한 구절만 해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않고 단편적으로 읽으면 언제나 문제를 일으킵니다. 내가 읽고 싶은 부분만 읽거나 내가 읽고 싶은 방식으로 읽지 않아야 합니다. 영원한 구원과 순종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순종이 믿음과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행위구원론이라는 정죄를 서슴지 않는 것은 무지일 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성화장의 내용 곧 거룩한 행실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진술을 스스로 부인하는 자체 모순이기도 합니다.
선행구원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입니다.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은 선행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영원한)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 모두를 합하면 선행구원론이 됩니다. 선행구원론은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한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교부들이 거리낌 없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여 교회의 전통으로 삼았던 이유입니다. 선행구원론은 견인에 있어서 믿음구원론과 동의어입니다. 교부들은 사도 바울보다 예수님께 더 높은 권위를 두었기에 선행구원론을 제창하였습니다. 그런데 고행을 통한 구원인 양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당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악행의 빌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잘못은 선행구원론이 아니라 그것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때에 선행구원론까지 폐기처분하였습니다. 더러워진 목욕물만 버려야 하는데 아기까지 버린 것과 같습니다. 로마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태도는 지양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 중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잘 분별하여 그른 것을 배척하여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은 오직 은혜로 가능합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구원이나 이 땅의 삶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이나 모두 은혜입니다. 영원한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동전의 양면인 순종이 강조되지만 그것 또한 은혜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맺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행위라고 하면 무조건 은혜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가르침과 배치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입니다. 행위는 순종과 불순종으로 구분됩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선행되어 맺은 열매가 순종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만이 아니라 순종으로 구원도 은혜로 구원에 해당됩니다.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과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은 동의어라고 하니 뒤따르는 질문입니다. 답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고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에 한해서 무엇이든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정 궁금하면 하나님께 물어 답을 들으시면 됩니다.
그러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서 어떤 선이 제시되고 그 선을 넘어서면 자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바울 사도가 경계한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그 선이 항상 내 앞에 있으면 그 선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기준이 제시되지 않음은 지속적으로 더 성숙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것은 피곤한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그 인격이 풍성해지고 삶이 부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더 온전히 맺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더 힘있게 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견인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를 정립하는 데에 한 단어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기에 각각 구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경의 진술에 어떤 모호함이나 모순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행위를 거부하며 믿음만을 강조하는 로마서와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도 함께 강조하는 야고보서가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행위와 행함은 같은 헬라어입니다.
로마서의 행위와 믿음
로마서의 행위란 율법 준수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이 아니라 주님으로 받아들임입니다. 새 언약의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한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성령의 (율)법을 준수하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 준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곧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르게는 성령의 (율)법 준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행위와 믿음
야고보서의 믿음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서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것만으로 끝이 아닙니다. 행함 곧 순종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현재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길입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라는 관점에서는 영접함인 믿음에서 머물러 있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모순에서 벗어나기
믿음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고 행함은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이라고 읽으면 무조건 모순이 생깁니다. 로마서는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고 야고보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곧 로마서는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데 반해 야고보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로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됩니다. 모순입니다.
그렇지만 믿음과 행함의 의미를 구분하면 모순이 없습니다. 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믿음은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후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행위와 야고보서의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는 율법 준수 곧 불순종입니다. 후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준수 곧 순종입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곧 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행함은 내용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읽지 않으면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든지 모순이 발생합니다.
성경적 타락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사람 간에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그 이후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람 간에도 참된 사랑에서 멀어졌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으로 서로 고통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피조세계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따라 자원을 이용하여 피조물들이 황폐해집니다.
양심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도 아닙니다.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일들로 인해 도덕에 대한 의식이 있습니다. 이성도 작용합니다. 이성의 작용을 통해 인간적으로 볼 때에 유익한 여러 결과들이 도출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하나님 형상의 완전한 상실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진술합니다. 전적 부패입니다.
부분적 부패라는 주장은 본문을 잘못 읽은 결과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사람을 근거로 제시하면 그렇게 됩니다. 선한 양심이 주어진 상태에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된 모습을 부분적 부패라고 읽는 것입니다. 잘못입니다.
성경적 선택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자들을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그 당사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롬 8:29, 벧전 1:2)고 말씀합니다. 예지 예정입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단어는 아담과 하와와 동침한다고 할 때에 동침하다를 가리킵니다. 인격적인 연합과 일치입니다.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사자가 믿을 것을 미리 아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지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당사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조건도 없었기에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조건적 선택은 예지 예정을 잘못 풀이한 결과입니다.
성경적 속죄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믿는 자에게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믿는 자’보다는 넓은 개념입니다. ‘믿는 자’는 택함을 받은 자이고 세상은 그보다 넓은 개념입니다. 독생자는 세상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에는 탄생만이 아니라 피 흘리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우리는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대신한 불의한 자는 택함 받은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택함 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불의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너무나도 명백하게 택함 받은 자들인 우리를 넘어서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딤전 2:6)고 말씀하였습니다.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피 흘리셨다면 불가능한 진술입니다. 위하여 피 흘리심은 없는데 성부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원하신다면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피조물의 회복과 만물의 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토대로 가능한 진술입니다. 예수님이 택함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시고 피조물과 만물을 위해서 피 흘리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진술입니다. 예수님께서 위하여 피 흘리지 않았는데 신자가 피조물의 회복을 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신자의 모든 삶의 토대입니다.
보편적 속죄는 보편적 구원과는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 곧 모든 사람이 구원 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보편적 속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제한적 속죄는 본문을 잘못 읽은 결과입니다. 속죄의 효력을 진술하는 구절들을 속죄의 범위로 확장한 결과입니다.
이제까지의 진술을 정리하면 전적 부패, 무조건적인 선택, 보편적 속죄, 불가항력적인 효력 있는 부르심, 조건적 견인입니다.
나가면서
몇몇의 논리들의 문제
양자에서 각각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제기하는 몇몇의 논리들은 위의 성경적 진술을 허무는 주장이 되진 못합니다. 성경의 진술에 입각하여 설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이 땅의 아버지도 자기 자식을 버리지 않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자신의 자녀를 버리지 않는다고 논리를 펼칩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식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출 21:15, 16). 율법은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 있기에 만약 앞의 논리가 옳다면 율법에 그러한 내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상호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논리에 나오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에 좋다고 여겨져서 만든 신 곧 우상일 뿐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에 있어서 구원의 원리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 원리가 변한다면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 아니라 변하는 분이십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이 서로 다른 분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억울할 뿐입니다. 이는 성경의 진술과 다릅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방편으로 삼으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복음을 그 방편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변화는 있습니다만 구원의 원리에 대한 변화는 없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율법이 하나님과 그 백성의 교제 방편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므로 복을 누리고 지키지 않음으로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멸망합니다. 새 언약에서는 복음이 하나님과 그 백성의 교제 방편입니다. 복음을 따르므로 복을 누리고 따르지 않으므로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멸망합니다. 옛 언약에서는 순종하지 않으므로 멸망하는 경우가 있지만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그런 경우가 없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끈질긴 거부
칼빈주의에서는 성경의 진술과 다른 견인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그 은혜로 자녀를 삼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영원한 구원을 반드시 이루심이 신실하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수긍이 됩니다만 옳지 않습니다.
신실하심이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증거하신 바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 증거의 내용은 명백합니다. 순종하면 복이 뒤따르고 불순종하면 징계와 심판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에만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신약의 복음에서도 동일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멸망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옵니다. 신약 시대에는 복음에 불순종하여 동일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좁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바른 고백은 한 부분만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면을 다함께 보고 주어진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신실하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세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지속적으로 바른 것으로 들음으로 인해 잘못된 것을 잘못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세뇌입니다. 이제는 세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잘못된 신실하심에 대한 이해에 사로잡혀서 성경적인 견인론을 끈질기게 거부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영접함 곧 믿음이 진실하지만 의지함 곧 믿음에 있어서 “믿지 않는다”는 평가를 듣는 상태라면 영원한 멸망을 받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신자 중에서 이런 경우가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상급에만 문제가 있지 영원한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영접함이 진실하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과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주장을 함께 들으면 이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전자를 취하게 됩니다. 사실 두 주장은 자체로 모순이기도 합니다. 만약 성경적인 견인을 듣고 배웠다면 자신의 상태를 바르게 인식하고 돌이킬 수도 있었습니다. 영원한 불 못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인데,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이 부분에서 목사는 심각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그 책임을 물을 지 어찌 알겠습니까? 한 지체라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교훈
구약 성경에는 거짓 선지자가 나옵니다. 아마도 선지학교에서 구약 성경에 대한 선조들의 이해를 배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마음대로 살라고 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대의 랍비나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참 선지자는 그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참 선지자의 편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거짓 선지자의 편에 섰습니다. 참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무조건적 견인을 주장하는 오늘날의 목사들과 내용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들 사이에서 조건적 견인을 말하면 그 생각을 말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글로 옮기지도 못하게 합니다. 쫓아냅니다. 매장입니다. 참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미워하시며 멸하셨음을 생각할 때에 어찌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룩한 삶과의 상관관계
신자(교회)는 거룩하여야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의를 즐거워하며 불의를 미워하는 것, 무궁하신 인자하심 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구원론은 신자(교회)가 거룩하여지는데 중요한 토대입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과 부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 적지 않은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영원한 구원이 의지함인 믿음 곧 순종을 조건으로 결정된다는 것과 영접함인 믿음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구원론이 현재 삶에서 신자답게 사는 것 또는 교회다워지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원론이 성경적으로 정립되면 온전한 신자(교회)가 되는 데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예를 들어 성경적인 구원론이 정립되면 교회의 선거에서 돈 봉투를 돌리는 악행이 발생할 여지는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되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 선거는 아간의 범죄와도 같은 짓(다음카페, 개혁과 진보, 자유게시판 326번)이며 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의식이 강하면 그러한 악행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는데 어찌 그러한 악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원리와 동떨어진 인간적인 생각으로 전횡을 일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파괴하는 행위도 그렇습니다. 어떤 내용으로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교단을 별도로 세우는 일도 그것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장로교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 많은 교파들은 그런 면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구원론에 의하면 그 결국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일 수 있기에 강력한 경각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 하며 항상 깨어 있는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초대교회도 성경적인 구원론의 토대 위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원론이 성경적으로 정립되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인 구원론이 성령의 역사에 해당되는데 육체의 소욕으로 거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나타났던 여러 범죄들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성경적인 구원론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우리의 생각으로 변경시키면 그만큼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 신자다운 인격과 삶에서 멀어집니다. 오늘날의 교회 현실이 그 반증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지혜를 따른다면 하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닫힌 성경 열기
상세한 내용은 <닫힌 성경 열기 – 구원론을 중심으로>(박창진, 등과빛 출판사)에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선생 곧 말씀사역자의 말 곧 설교와 공적인 가르침과 관련하여 실수 곧 잘못된 전파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는데, 그 근거가 설교와 공적인 가르침이 옳으냐 그르냐입니다(약 3:1-2). 이제까지의 구원론을 생각하면 거의 모든 말씀사역자가 어떤 부분에서는 잘못된 내용을 설교하고 가르쳤다고 보아야 합니다. 심판이라고 해서 그 내용이 멸망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받게 되는 책망일 수 있습니다만 경각심을 가져야 함은 분명합니다. 책 한 권을 읽고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정말 남는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하늘유통(031-947-7777)을 통하여 구입할 수 있습니다.
‘오직 전통으로’의 문제
문제는 잘못된 설교와 가르침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별로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따르는 전통 속에서 그 전통을 따르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치열한 고민과 연구가 없이 그냥 해오던 대로 하면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오직 성경으로’이라고 하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오직 전통으로’입니다. 전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바른 성경 연구를 통하여 재점검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랍비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동일시하면서 진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기독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로만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 중심이라면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에게 잘못 가르쳐왔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만 기꺼이 그렇게 말하고 바로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나 중심이면 그냥 무시하고 이전과 똑같이 반복할 것입니다. 전통에서 잘못된 부분- 모든 전통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님-을 바로잡기보다는 답습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진정한 개혁주의가 요구됩니다.
무언의 정죄
고려신학대학원을 함께 입학한 한 동역자를 만났습니다. 저의 사정을 알고서는 “지금 목사님은 고신의 목사님들에게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장로교의 구원론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그분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 있겠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눈을 크게 뜨고 기독교 전체로 시야를 넓혀 봅시다. 구원론에 있어서 장로교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감리교 목사님들에게 “당신들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로교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감리교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장로교 목사님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 다른 구원론을 따르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무언으로 말하는 격입니다.
왜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여야 합니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한 말씀에 기초한 한 구원론이 가능한데 말입니다. 그렇게 구원론이 성경적으로 정립되면 상대방을 향해 무언의 정죄를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지금의 상태를 고수하려고만 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한 최종 심판은 불 못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은 것으로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인해 그 죄에 벗어난 사람입니다.
신자의 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자기 생각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치하는 경우에는 표면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표면적으로도 문제를 나타냅니다. 양자 모두 자기 생각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다고 생각하기에 바뀌지 않습니다. 잘못되었다는 의식이 있더라도 잘 바뀌지 않는데, 옳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바뀌지 않습니다. 신자는 이 부분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 성경의 가르침과 성경적인 원리에 민감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전 인격과 삶을 되돌아보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모두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르는 것은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사는 것에 해당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성도들의 바른 태도
성도들도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주장을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고서는 그냥 따랐던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구원론을 듣는 것은 권리이면서 의무입니다. 교리는 신학자나 목회자에게 전적으로 맡기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한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역사하시기에 진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이 글이라도 교회의 말씀사역자에게 전하여 생각할 기회를 가지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글 내용을 평가해 달라고 하면 읽을 것입니다. 성경적인 구원론을 깨닫도록 하는 섬김이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처신
참고로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이 옳다고 생각될 것인데, 곧장 설교나 가르침에 접목시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장로님과 성도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님들과 함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공유하고 안수집사님과 권사님들과도 함께 책을 읽고 공유한 이후에 그 내용을 전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이 글이라도 공유하여야 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전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시찰회원들과 함께 읽고 노회에 안건으로 상정하여 교단적으로 바른 구원론이 정립되도록 한다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된다면 시찰회에서 소속 목회자들이 함께 이 글이나 책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한 후에 교회와 교단으로 나아가는 방향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꼭 그렇게 하여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글에 동의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찰회 전체적으로 동의가 이루어지면 실천으로 옮길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신학교를 통하여 한 구원론을 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기독교가 사탄의 회당?
신천지에서는 개신교 특히 장로교를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며 개신교 목사를 사탄의 목자라고 합니다. 20~30년 개신교인들으로 살던 분들이 수용하고 신천지인이 됩니다. 제시된 근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근거가 정반대의 내용으로 구성된 개신교의 두 구원론입니다. 인간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두 구원론이 있을 수 없기에 현실은 인간의 생각을 집어넣어 변질시킨 것이며 그것이 사탄의 회당인 증거라고 합니다. 그 말을 수용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천지인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였다고 사탄의 회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성경 해석이라는 면에서는 신천지가 훨씬 심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입니다. 말씀사역자는 그들을 바르게 지키며 양육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전통만을 붙잡고 있다가 그 양들을 이리에게 먹이로 내어주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목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양들을 지키는 것은 그 양들을 맡은 목사의 책임입니다.
<신천지의 과대망상>(박창진, 진리와 생명사)은 좋은 자료입니다. 신천지의 주장을 모두 듣고 성경적인 부분과 비성경적인 부분을 함께 다루었습니다. 신천지에 관한 다른 글과 완전히 차별화된 것입니다. 신천지에 빠지는 대부분의 신자는 성경적인 부분을 먼저 듣고 마음을 주어 비성경적인 부분을 듣더라도 잘못되었다고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신천지 전문가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기에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부분만을 부각시킵니다. 거부감을 가지는 데에는 유익하지만 모르고서 신천지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경우에는 거의 효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미리 알고 있었다면 모르고서 신천지 교육장에 참여하거나 개인적인 성경 공부를 하게 되더라도 신천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책은 하늘유통(031-947-7777)을 통하여 구입할 수 있습니다.
끊어야 할 악순환
신천지에서는 견인에 대해 조건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천지에 빠졌다가 그곳에서 나오도록 하는 사역의 하나로 개종 교육이 있는데, 견인에 대해 칼빈주의의 입장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한 내용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구 중심으로 가르칩니다. 옳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잘못된 생각을 주입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을 받을 때에는 받아들이지만 후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계속적으로 갈등을 겪습니다. 아무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악순환입니다. 시험을 마치고 쉬고 있는 고3 아들에게 이 글을 읽고 어떻게 생각되는지를 물었습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 부분에 대해 추가 설명을 하였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전통을 따르는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악순환입니다. 이런 악순환은 이제 끊어야 합니다.
성경적 구원론 정립의 의의
구원론이 성경적으로 정립되면 교회가 말씀의 터 위에 바르고 굳건하게 세워지는 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지는 중요한 토대를 쌓게 될 것입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제로 세워주신 지체들을 미혹하여 빼앗아가는 빌미를 없애고 지체들을 지키는 데에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말씀사역자라면 당연히 감당하여야 할 일 곧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며 신자를 신자답게 세우는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최소한 잘못된 삶을 살면서도 잘못된 구원론에 입각하여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가 영원한 불 못에 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세계 기독교계를 생각할 때에도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사역입니다. 구원론이나 칭의론에 관한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고 거룩한 교회를 향한 전진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시작하면 곧 이루어질 것입니다. 얼마든지.
첫댓글 15분 정도이면 성경적인 구원론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400여년 이상 싸워 온 내용인데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탁월한 능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계속적으로 내용을 더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15분이 아니라 6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정도의 양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관계를 설명할 때 문자적으로 읽으면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든지 모순이 발생합니다. 믿음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고 행함은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이라고 읽으면 무조건 모순이 생깁니다. 로마서는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고 야고보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곧 로마서는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데 반해 야고보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로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됩니다. 모순입니다.
말씀사역자라면 시찰회원들과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서 노회에 안건으로 상정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노회원들이 함께 읽게 되면 더 좋고요. 그렇게 총회에 안건으로 상정되고 신학교를 통하여 연구하게 되어 교단적으로 바른 구원론이 확립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단들이 개신교를 비난하는 빌미가 사라지고 우리 지체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의 주장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유익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 말씀, 한 구원론이 정립되면 말씀의 터 위에 굳건하게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간략하지만 잘 정리해 주셨군요
그런데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비교에서
로마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서 얻는 의
ㅡ 믿음의 시작, 바른 관계의 회복으로 인한.
야고보서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삶의 의
ㅡ 곧 새계명으로 율법을 이루어 나가는 새생활의 내용이 아닐까요?
잘 기술하시다가 그 부분에서 약간 오타가 난 것은 아닌지...
아무튼 저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
로마서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해서 얻는 의는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별도로 기록할 필요가 없이요.
로마교회에게 그것은 이미 당연한 것이었으니까요.
로마서에서의 의는 율법 준수와 대비되는 것입니다.
여기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지요.
로마서에서 지켜야 할 것으로 제시된 성령의 (율)법도 마찬가지지요.
새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율법 준수가 아니라 성령의 (율)법 준수가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로마서의 내용입니다.
성령의 (율)법 준수가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믿음이지요.
ㅎㅎ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
전제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에는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기록하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생활이지요. 곧 율법의 속박하에 내 의지로 율법을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삶이 전환되어야 진정한 승리가 보장된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롬 6장과 8장 사이에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죽고 율법에서 해방되었음에도 거듭
실패하고 좌절하는 바울 사도의 탄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얻는 의가 전제되어 있다는 표현은 조금 무리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지를 바울은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 구주로 영접한 믿음의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 삶의 주인이 되시지요?
따라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생활의 요구가 당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야말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보다 결코 앞설 수 없는 내용이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올린 글이었습니다!
제가 님의 글을 읽으면서 위의 도표에 의에 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싶어 적었습니다.
신자라면 A에서의 의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B에서의 의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됩니다.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방편으로 율법 준수를 제시하였고 로마교회가 옳다고 생각하여 따르는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그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 로마서입니다.
새 언약의 교회는 옛 언약의 율법 준수가 아니라 성령의 (율)법 준수를 통하여 B에서의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는 A, B 모두에 해당.
저는 위 a, b를 참 잘 정리해 주셨다고 봅니다.
다만 b를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싶습니다. 또한
" 성령의 법 준수가 새 언약의 법이 주어진 삶의 원리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로마서의 내용"이라는데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의롭다고 인정하실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요즘 한국교회를 보십시오.
결국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아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조차
의로운 생활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님의 이끄심_견인_이 없이는
거룩한 삶이란 여전히 그림의 떡입니다.
성령의 법 준수가 자신의 힘과 노력의 산물로 생각하시지 않으시면 되겠지요. 성령님의 이끄심-견인-의 결과 곧 열매라고 생각하시면 문제가 없지요. 성령의 법 준수가 거룩한 삶이며 그것은 선행된 하나님의 역사 곧 우리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은혜이지요. B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입니다. 은혜이면서 우리의 의가 됩니다. 우리의 의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버리시면 수긍하시기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선행된 은혜의 열매인데,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라고도 보신다는 것으로요.
그리고 성령의 법 준수에 있어서 어느 정도이어야 의롭다함을 받느냐에 대해서는 전 모릅니다. 성경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성경의 진술을 따라 신자가 되면 이전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또는 지속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 만약 현재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곧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평하신다는 것, 그래서 자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현재의 우리의 삶이 현재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필자의 글을 아주 존중합니다.
단순히 신학적논리와 머리에서 나온 글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좋은 의미에서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옛사람과 새사람 겉사람과 속사람
이 네 부류를 정리하신 글이 있는지요
있으면 알려 주시고 없으면 한번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제 글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히시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답니다. 앞으로도 다른 생각이 있으시면 적극적으로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저도 연구를 하게 되고 제 생각을 더 명료하게 하는 기회가 되니 감사할 일이지요. 좋은 의미에서 말씀해 주셨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전혀 부담을 갖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위의 댓글에 적은 바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신자가 될 때에 주어지는 의로만 보는 것 그래서 로마서의 믿음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야고보서와의 모순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의 믿음도 영접하는 것인데, 그것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로마서는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믿음에 전자는 행함을 덧붙이고 후자는 그것은 결코 안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답을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애초 저의 질문에서 조금 복잡해진 것같습니다.
만약 제 글이라면, 이렇게 교열하겠습니다.
" 로마서의 행위란 율법준수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과 동시에 그를 주인으로 받아 들임입니다. ....
야고보서의 믿음이란, 예수를 주인으로 맞아 들인 신자의 삶의 내용입니다. 행함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 들여서..."
"로마서의 믿음과... 전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 들이는 것이고, 후자는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불과 세 문장만 바꾸었습니다.
글이 보다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제가 아직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까?
믿음과 순종이 동전의 양면과 같듯,
저의 글과는 완전히 다르네요. 믿음과 행위. 믿음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문맥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믿음은 B와 관련되고 야고보서의 믿음은 A와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믿음이 B와 관련된다는 것이 님의 입장이고요. 야고보서의 행함은 그 믿음과 동전의 양면인 행함이라는 것이네요. 그렇다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바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맞아들인 신자의 삶의 내용만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서 나타나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했다는 것이 되는데요.
앞 뒤가 전혀 다르지 않는데, 왜 앞만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뒤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로마서의 믿음과...~" 로마서의 믿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후자는 ~"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로마서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라는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요?
롬과 약 역시 상호 보완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순서상으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원자로 받아 들임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 주인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것은 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와 신자가 또 목회자들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까?
늘 옳은 소리만 하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항상 옳은 사람인 양 착각하고 삽니다( 마 23" 3).
이런 삶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기에, 바른 성경적 이해와 영적 분별력을 위한 논의 차원에서
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로마서의 중심을, 저는 6, 7, 8장으로봅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엄청난 차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렇지만 성경의 관점에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 주인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만약 주인의 다스림을 받고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니까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생각하시면 아주 쉽지요. 성경에서의 표현법을 따라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시각으로 생각하니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뒤의 믿음을 단순히 인식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임으로 이해하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게 되지요. 전 존재 곧 생각과 말과 행동 전부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순종과 동전의 양면이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인식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순종과 동전의 양면이 될 수가 없지요. 님이 진술한 바와 같이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8.07 20:04
바울 사도의 그 진술은 신자로서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A에서의 믿음은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말하지만 로마서에서는 그 믿음은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신자에게 권면하는 것이니까요. 신자라면 거듭난 사람입니다. 양심이 아니라 선한 양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성령님도 선물로 받았고요. 그렇지만 육체의 소욕도 있습니다. 속사람이란 거듭나서 선한 양심을 소유한 존재로서의 신자, 하나님의 법이란 성령님께서 주관하시는 법, 한 다른 법이란 육체의 소욕 곧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자기 생각과 욕심과 의지대로 살려는 상태의 내면, 죄의 법이란 신자를 죄로 이끄는 힘.
선한 양심을 소유하게 된 존재로서의 신자가 성령님께서 주관하시는 법을 즐거워하되 지체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자기 생각과 욕심과 의지대로 살려는 상태의 내면이 성령님께서 주관하시는 법과 싸워 신자 안의 죄의 법 곧 신자를 죄로 이끄는 힘으로 사로잡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이해에 무슨 문제나 부족함이 있는가요?
여기에서 자아에 대한 성경적이해가 필요합니다
먼저 롬 6" 1~11과 갈2" 20에 대한 구체적인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에서 영혼의 폭포수를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자도와 훈련을 거론하기 전에, 팬인가 제자인가부터 읽어야 합니다.
영적성장과 하나됨을 추구하는 신앙인은 영적성장 깊이 체험하기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가 바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얕은 물가에서 노니는 수준에서 벗어나
영의 깊은 물 속에 잠겨야 할 싯점입니다.
그런데도 한기총이 나서고 오늘은 부천시 기독교 총연합회까지 나서서
이미 ceo가 되어 버린 한사람의 구명을 위한 서명에 나서야 합니까?
과연 현 싯점에서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바로 알고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설교가 또 다른 하나님의 예언이라고 믿고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이여!
지금 이시각에도 참된 말씀의 기갈과
바른 목자를 찾아 헤매는 성도들의 방황과 탄식이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아십니까?
철저한 회개와 진정한 회복은
나로부터!
그것이 참된 의와 믿음이요 변화된 새생활과 행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평안을 기도 드리면서...
16" 46에 대한 답 글입니다.
저는 애초부터 a,b를 약과 롬에 연결해서 읽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학적인 많은 문제가 도출되어 무척 복잡해질 듯합니다.
각설하고 님께서는 무엇이 성령의 법이며 어떻게 준수하고 언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혹시 우리가 서로 논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이곳의 회원이나 주변 분들의 의견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단순하고 쉬운데요. 그렇게 읽어야 모순이 발생하지도 않고요.
성령의 법이란 새 언약 시대에 주어진 삶의 원리 전부입니다. 산상수훈, 로마서12장 이후의 나오는 삶에 대한 교훈 등등.
내 안의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역사를 행하시는데, 항상, 그때에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따름으로 준수하게 되지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롭다함을 받는 길이고요.
내가 육체의 소욕을 좇으면 불의한 것이지요. 자백하고 돌이키면 의롭다 함을 받고요.
다시 답을 주신 내용 중에서
처음에는 a를 야고보서로
나중에는 a를 로마서로 말씀하시는 것같습니다.
그리고 롬 7" 23~24의 이해가 피상적이면 전혀 자신의 문제를
알 수없습니다. 그야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고 맙니다.
언젠가 원하시면 제가 정리한 롬 원고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의 믿음은 B에 해당되고요.
야고보서의 믿음은 A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일관되게 그렇게 적었습니다.
원고를 보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차례로 글을 올리셔도 좋겠네요.
다른 분들도 보고 생각할 수 있게요.
네 보잘 것 없으나 제가 묵상한 롬 원고를 조금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은 신자(신분의 변화)가
믿음과 부합한 순종의 생활(삶의 변화)을 이루어 가는
새사람의 새생활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당위)과
주인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현실) 사이에서
너무 큰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의 법을 준수하고 살아가는 일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은 은혜로 그저 누리는 구원의 복이지만,
의로운 생활을 이루어 가는 성화의 과정은 무임승차가 아니잖습니까?
어쩌면 롬과 약 사이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다보니 관심이
커졌나 봅니다.
제가 컴퓨터를 안하기 때문에 좀 답답하실 때가 있더라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님을 연단하시는 그 과정에 있는 수 많은 복이
글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제 눈에는 보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셔서( 약 1" 2~4) 귀하게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님의 글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겠습니다.
말씀의 교제가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아니까요.
<십일조는 다른 복음이다> 책의 부록인 '쉽고 명쾌한 한 구원론'을 요약한 글이네요^^
책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읽었고 대부분의 내용에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구원을 설명하기에 참으로 유용한 자료입니다. 잘 소화하여서 좋은 자료로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