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몸’의 감각으로
봄 학기에 새로운 일을 꾸몄습니다. 대학에 합기도 강의를 연 것입니다. 무도 수련으로 관계성을 회복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 찬’ 목표로 시작했습니다. 지하에 있는 동아리연습실을 강의실로 바꾸고 매트도 사달라고 해 30명 가까운 학생에게 무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한테는 ‘잘한다’ ‘많이 늘었다’ ‘즐거우면 됐다’고 응원하지만, 속으론 ‘이번 강의는 망했군!’하는 마음이 듭니다. 학생의 실패가 아닌, 저의 실패.
가벼운 몸이 되어
제 욕심을 이런 것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을 다섯 살 꼬마로 만들기!’ 뭐 하나에 꽂히면 배고픔도 잊고 해 질 녘까지 거기에 쏙 빠져 노는 아이처럼, 시끄러운 세상일을 잠시 잊고 신나게 노는 다섯 살 대학생들!
그런데 수업 시간에 숨을 헐떡거리며 땀을 흘리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멈추지 말고 동작을 주고받으라고 해도 학생들은 몇 번 하다가는 멈추고 서로를 멀뚱히 쳐다볼 뿐입니다. 초보라 해도 무도를 할 때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무도인이 되어 무도인의 삶을 살듯이 동작을 익히는 데 집중해야 하는데 그저 무도인의 시늉만 하고 있더군요. 모든 몰입은 내적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걸 자극하고 북돋우지 못했습니다.
글쓰기를 읽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글 쓰는 사람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마치 자신의 유일한 직업이 작가인 것처럼 써야 합니다. 글에서 다루려는 소재가 보여주는 삶과 사건에 풍덩 빠져서 글감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말이 쉽지, 실제론 어렵습니다). 글쓰기가 좋은 점은 무엇이든 ‘다른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흰 도복으로 갈아입고 메트를 깔 필요도 없습니다. 글쓰는 사람의 몸은 어떤 것일까요.
‘글쓰는 사람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 젊은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말입니다. 책상 위에서 고부라져, 지리멸렬한 시간을 견디다 보면 글은 이리저리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단단해지고, 그러는 동안 딱딱하게 굳어버린 허리의 모양마저 튼튼한 고목처럼 멋져 보이는, 이 또한 노동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무거운 엉덩이를 가진 작가의 몸.
그런 가벼운 몸이 되었노라고 뻔뻔하게 스스로 속이고 나면, 그다음은 한층 더 뻔뻔하게 누군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력을 발휘할 차례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표현하는 유령 이미지처럼, 낯선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인 척 걸어봅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그 사람과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와는 좀 다릅니다. 단지 그의 머릿속을 논리적으로 짐작해내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 내가 가진 몸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는 지금 진짜로 그 사람이 됐다’고 자기 자신도 깜박 속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시야에서만 보이는 풍경
글을 쓰기 위해 다른 몸이 되는 일에 이토록 골몰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사람답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178센티미터의 시선으로는 휠체어 탄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성격이 벼락같이 급한데다 걸음도 빠른 저는 70대 노인이 힘겹게 내뱉는 말의 호흡을 번번이 잊어버립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회기역에서 경희대 앞까지 걸어가는 길을 말할 때, 제 몸을 그대로 유지한 채 글을 쓴다면 아마 이럴 겁니다.
① 이 동네는 오래 알고 지낸 침구처럼 정겹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점포가 들어서기 일쑤인 서울에서 이렇게 빛바랜 음식점이나 카페 간판이 있는 거리를 걸으면 위로가 된다. 서울에서는 ‘철수’당했다고 해도 좋을 법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탐앤탐스’나 ‘역전우동0410’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것이 반갑다. 그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견딘 노포와 노점상 간판, 그 사이에 불쑥 돋아난 새로운 가게들이 어우러져 혼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온갖 색깔과 글귀가 새겨진 ‘과잠’을 입은 학생들 사이를 걷다보면 시끄러운 음악 소리, 각종 외국어가 귓전에 사정없이 스쳐간다.
키가 커서 시야기 높은 편인데다 활자 중동인 저는 거리를 걸을 때 간판들에 어쩔 수 없이 눈이 갑니다. 이런 몸이라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것들입니다.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몸을 상상해 봅니다. 그 몸이 할 수 있는 말을 옮겨보겠습니다.
② 걸음이 자꾸만 느려진다. 뒤에서 바삐 걸어오던 학생들이 자꾸만 나를 앞질러 간다. 별수 없지. 여기저기 튀어나온 보도블록 앞에서 걸음이 자꾸 멈추는 탓이다. 이 동네에서는 땅만 보고 다녀야겠군. 길바닥에 양배추를 늘어놓은 노점상이 반가워 고개를 들어보니 붕어빵 가게다. 눈이 마주치자 활달해 보이는 중년 부부가 고개를 살짝 숙인다. 겨울이 아닐 때는 채소를 떼다 파는 모양이네. 야무져. 멀리 초록 신호등이 깜박인다. 다음 신호에나 건너면 다행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의 시야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습니다. 그 사람 특유의 움직임이 빚어내는 사소한 눈맞춤도 있겠지요. 그 사람의 심박수, 폐활량, 위장 상태, 걸음걸이가 만들어내는 문장의 길이가 있습니다. 그 몸이 되어보려는 노력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말들이 있습니다.
다른 몸이 되어보려는 상상력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른 동물, 다른 종, 심지어 사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화한 문장을 쓰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몸을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앞코가 터진 구두가 있다고 합시다(저는 발가락이 울퉁불퉁해서 앞코가 자주 터집니다). 만약 그의 몸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않고 의인화한 문장을 쓴다면, 이런 문장을 쓸 것 같습니다.
③ 나의 주인은 늘 걸음이 빠르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잠깐 멈춰 쉬는 법이 없다. 앞코가 터진 줄도 모르고 온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니더니, 이제야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원망스러운 눈빛이 우습다.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다른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인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신발에도 눈이 있다면 어디쯤 달렸다고 해야 할까요? 살짝 들린 앞코에. 아니면 발등에? 그도 아니면 뒤꿈치에? 터진 앞코는 몸의 어느 부위일까요? 튀어나온 이마? 눈? 어디든 터졌으니, 아팠을까요? 통각을 느끼는 몸이기는 할까요? 신발도 귀가 있을까요? 제가 하는 말을 들을 수나 있을까요? 아무 말 없는 신발에 끊임없이 묻고, 신발이 됐다고 상상하며 답하고, 이로워도 슬퍼도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기를 하염없이 반복하며 그의 몸으로 할법한 말을 찾아내야 합니다.
④ 날 때부터 코 하나는 유난히 잘생겼다 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틈에서 단연 돋보이던 코였다. 덕분에 쉽게 눈에 띄었고, 가장 먼저 팔렸다. 아무리 콧대가 높다 한들 살다보면 금방 닳아버리는 거라고, 몸에서 가장 쉽게 피로해지는 게 코라고, 그런 말은 날렵한 코를 못 가진 것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시작한 첫날부터 코가 납작해지고서야 깨달았다. 사는 것은, 콧대가 꺾이는 일의 연속이다. 무안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스팔트 바닥에 애꿎은 신발코를 문지르는 습관이 있는 주인과 함께라면 더더욱, 우뚝 솟았던 콧대는 금세 닳고 닳아.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갈수록 납작해지더니 급기야 터지는 날도 있었다. 터진 코를 얼기설기 꿰매고 자리로 돌아올 때쯤엔 차라리 은퇴를 선언하고 싶었다. 이런 것도 코라고 계속 이렇게 달고 살아야 하나?
두 번째로 코가 터져보니, 차라리 숨쉬기가 편하다 싶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게 속이다 다 시원하다. 미련은 없다. “어! 신발 왜 이래?” 그걸 이제 알았냐. 무심한 주인의 코를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휘두를 팔이 있어야지. 애처롭게 그를 올려다보며 비는 수밖에. 가다가 넘어져라!
터진 신발의 몸으로도 감각할 수 있다면, 그 감각을 언어로 옮겨오려는 상상을 게을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리 낯선 존재라도 이해하려 끝없이 애쓰게 되고,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쓸 수 있는 글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 더 해볼까요? 저는 읽지도 않을 책과 잡동사니를 잔뜩 넣은 가방을 메고 다닙니다. 무거운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때, ‘가방 주인의 피로와 삶의 무게’와 ‘중력’ 중 무엇이 더 가방의 처지를 잘 말해줄지를 저울질하는 건 글쓰기를 더 확장할 수 있는 길입니다. 아래 예문을 마저 볼까요.
⑤ 몸은 해산달이 가까워진 것처럼 갈수록 무거워졌고 나는 종종 휘청거리고 쏟아질 듯 이리저리 기울면서 내 안에 든 것을 꺼내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가 배가 찢어질 것 같아.
⑥ 그 무렵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자꾸만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나는 자꾸 바닥으로 쏟아질 듯 기울면서 왜 나만 유독 더 힘이 드는지, 다른 가방들은 이 이상한 힘에 어떻게 저항하는지 연신 기웃거리고 휘청거렸다.
의인화한 글을 쓸 때 유치해지지 않으려면 그 대상만의 세계관을 만들어주고 그 세계관 안에서 문장이 뽑혀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짐이 잔뜩 든 가방을 임신부에 비유하는 건, 가방 밖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가깝습니다. 외려 가방 입장에서는 두 번째 글처럼 안보다는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짐을 많이 넣는다기보다는 ‘이상하게 중력이 크게 작용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더 가방답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어쩌면 삶의 무게를 은유하기에 더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유독 중력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자주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방’의 이야기로, 그리하여 ‘왜 삶은 나에게만 더 무거운 것 같은지, 나는 왜 자꾸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지’ 물으며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렇게 고민하는 것의 본질은 나와 전혀 다른 상대를 이해할 때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어서, ‘아, 내가 아는 그거! 그 느낌!’으로 바로 가지 않고, 빙 돌아서 ‘너의 세계에서는 이렇겠다’라고 상상력을 가동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다른 몸 되기
이걸 어찌 ‘다른 것에 빗댄다’는 뜻의 ‘비유’라는 말로 담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몸 되기’라고 부르는 게 더 맞는 말 같습니다. 저는 글을 쓸 때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존재의 오묘함은 다른 몸이 되어볼수록,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깊고도 흥미로운 삶을 자신의 내부에서 창조해보고픈 욕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김진해, 『쓰는 몸으로 살기』, 한겨레출판,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