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혼하 그리고 요동
심양에 강을 건너며 강 이름을 '포'로 읽은 것은 浦자와 ‘흐리다.’란 의미의 浑(혼) 자를 혼돈 한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그 동네가 배가 정박하는 포구라서 그리 부쳐준 이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강 이름은 유명한 '혼하'라 불리는 강이다. 중국 사람들은 훈이라 발음을 한다. 혼하는 푸순과 심양을 지나 요양시를 끼고 흐르는 태자하와 합류하여 하류에서 대요하가 된다. 대요하는 요동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태자하의 발원지는 남으로 본계현 양호구 초모정자산이고 북으로 평정산향 홍안구로, 이 두 갈래가 합쳐 요양시를 거쳐 흐른다. 총 길이는 464㎞에 이른다. 백암성은 바로 이 태자하를 굽어보는 요지인 등탑현 서대요향 관둔촌에 있다.
즉 심양(瀋陽)은 요동(遼東)의 중심부로 서쪽에는 요하(遼河), 남쪽에는 태자하(太子河)가 흐르고, 혼하(渾河)는 심양을 가로지른다. 세 강의 이름은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랴오허, 타이쯔허, 훈허라고 부른다. 혼하는 아리강(阿利江), 헌우락수라고도 했다. ‘아리’는 한자어가 아니다. 북방 민족의 말을 가차(假借)한 것이다. 한강의 다른 이름이 아리수다. 이름이 똑같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거미줄처럼 얽힌 큰 강을 낀 그 땅은 얼마나 비옥할까. 그곳이 바로 우리의 역사 무대였던 요동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성경잡지(盛京雜識)에서 이렇게 썼다. “심양은 원래 우리나라 땅이다.” “요동 벌판이 잠잠해지면 천하의 풍진(風塵)이 가라앉고, 요동 벌판이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군마가 움직인다.” 당 태종 이세민,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부를 정도로 빼어난 인물인데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해 도망치다 발착수(渤錯水)에 이르서 진창의 뻘을 만났다. 1만명의 군사가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고 설인귀 등에 업혀 겨우 사지를 벗어났다. 쌍코피 터진 것이다. 얼마나 고구려의 위세가 드셌는지를 바로 느낄 수 있다. 그곳이 심양에서 가깝다.
북릉공원에서 만난 태종 홍타이지는 심양을 근거로 만주팔기를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했었다. 명과 일전인 ‘송행의 싸움’(松杏之戰)이 벌어진 송산이라는 곳이 이 또한 심양과 멀지 않다. 심양은 지금 선양이라고 부른다. 남·북한의 총영사관이 있으며, 동북3성을 담당하는 중국군 선양군구가 있다.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지린성을 둘러보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간 지 9일 만에 곳을 또 찾았다. 그의 북방 행차는 왜 그렇게 잦을까. 혹여 “요동 벌판이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군마가 움직인다”는 것을 그도 알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요즘 이 혼하때문 사학계가 시끄럽다. 수년 째 계속되는 논쟁이 수그러들지 모른다. 글 하나가 이렇게 큰 여파를 미칠지는 아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한나라가 요동의 옛 국경 요새를 수복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연에 소속시켰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패수가 과연 어디인가 하는 것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만큼 역사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다.
강단사학이 패수를 보는 시각은 대체로 ‘이병도의 청천강 패수설’과 ‘노태돈의 압록강 패수설’, 그리고 ‘혼하(渾河) 패수설’로 정리될 수 있다. 이 가운데 혼하 패수설은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강단사학의 이론으로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요수(遼水: 요하)의 동쪽에 흐르는 혼하를 패수로 보는 시각이다. 결국 요수(요하)를 기준으로 그 동쪽(요동)과 한반도를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으로 인식하는 시각이다.
혼하 패수설은 강단사학계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을 가장 서쪽으로 요동까지 넓게 확대해서 보는 시각으로, 기존의 한반도 패수설에 비교하면 한결 진일보한 시각이다. 하지만 민족사학계에서는 혼하 패수설도 결국 강단사학 이론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 논리가 한사군 한반도설과 대동강 낙랑설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재야사학 혹은 민족사학계는 패수의 위치를 오늘날 요수 서쪽의 대릉하(大凌河)나, 북경 동쪽에 있는 난하(灤河)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물론 민족사학자 가운데 대릉하나 난하 보다 더 아래쪽(서남쪽) 지역을 패수로 보는 이도 있다(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 이 주제에 대해 격론을 벌이는 대표적인 사람들을 꼽자면 김종서 박사(한국과 세계의 한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 박준형 박사(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이후석 박사(숭실대), 심백강 박사(민족문화연구원)을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결론부터 말하면 김종서 박사는 패수의 위치를 난하로 지목했고, 박준형 박사는 혼하 패수설을 주장한다. 이후석 박사는 고고학적 증거를 근거로 패수가 오늘날 요하 이동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비정하고 심백강 박사는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수성진) 일대가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기 때문에 이 일대에서 패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사마천의 말에 그토록 열변을 토하고 집중들을 하는 걸까. 그가 바로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서기 전 109년부터 108년까지 1년간 벌어진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었고, 한나라 태사(사관)들의 우두머리인 태사령으로서 한나라와 조선과의 전쟁의 발발, 전쟁의 진행, 전쟁처리 등을 모두 지켜보고 ‘조선열전(朝鮮列傳)’을 통해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패수는 한나라 육군과 조선의 수비군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인 강이다. 때문에 사마천이 패수에 대하여 남긴 기록은 아주 정확할 것이다.
그 사마천이 “한나라가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패수는 요동의 옛 요새와 바로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서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가 패수(浿水)를 건넜다”라고 하였으니 패수는 요동의 요새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압록강이나 청천강 하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이 아니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는 강이다. 따라서 압록강이나 청천강은 패수가 될 수 없다. 또 《수경》에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패수가 기록된 《설문해자》 《수경》 《한서》의 기록은 청천강(혹은 압록강)이 패수라고 주장해온 ‘고조선·한사군 재 한반도설’ 논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청천강이나 압록강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동남쪽으로 흐르는 구간도 없고, 동쪽으로 흐르는 구간도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은 패수였고, 조선과 경계를 마주한 한나라의 군은 요동군이었다. 거기에 고조선의 유물중 대표할만한 비파형동검이나 고인돌이 출토 되는 곳이 이상하게 난하를 경계로 해서 달라진다. 이러한 모든 기록과 지리적 위치 등을 세밀하게 고증하여 재야 사학자들은 이를 충족시키는 패수는 난하나 난하 서쪽의 강으로 보고 있다. 그러고보면 우리 어릴 적 고조선을 한반도로 국한 시켜 생각할 때 보다는 장족의 발전이 있다. 점점 더 중국 본토로 깊숙이 내려가고 있다.
아무튼 고조선의 중심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한사군의 위치 부터 고구려 영역등등 그 비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10년 후 북경에 아주 가까이 요동성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정설화 될 수도 있고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태원(현 중국의 산서성)까지 진격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데 그것이 당연하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게 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인 요사에 나오는 문서인 ‘동경도’편에서는 요양은 원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여기서 조선은 고조선을 말한다. 우리 교과서에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요사에서는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 놓은 것이다. 한사군은 만주에 있었으며 요양은 고구려 수도 평양이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거란은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속국으로 살다가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그런 만큼 그들의 지리지는 정확하다고 할 수 밖에는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재미난 자료를 보았다. 평양에서 발견된 요동성총 벽화를 근거로 위치 고증을 하기위해 요동의 위성사진과 지도를 참조했는데 그럴듯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유물도 뒷받침을 한다. 20세기 전반에 요동시 중심부와 그 부분에서 전국시대~한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고 요양시 주변에서 전국시대 화폐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요양시 구성구(舊城區) 북부에서 고구려 시기의 유물이 상당히 발견되었다고 하며, 1992년에는 심양시 중심로를 개설하다가 세과사소학교(稅課司小學校) 동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석실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사군과 고구려가 겹치는 게 그럴 듯 하고 수상하다. 아무튼 심양이나 요동은 우리에게 예사롭지 않다. 나는 그 동네 땅속에는 고구려 유물이 가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암은 심양에 들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심양은 옛 우리 땅이다. 몇 리를 더 가니 멀리서 불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양에 가까워진 것이다. 대개 성이 멀리 있을 때는 탑이 짧게, 가까워지면 길게 보이는 법이다. 혼하는 아리강(阿利江) 혹은 소료수(小遼水)라고도 하는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사하(沙河)와 합쳐져 심양성의 동남부를 휘돌고 나가 태자하(太子河)를 만나고, 서쪽으로 흘러 요하(遼河)와 합쳐져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혼하를 건너 몇 리쯤 가니 높지 않은 토성이 있다. 토성 밖에는 옻칠한 것처럼 새까만 소 수백 마리가 있다. 이랑이 백 개쯤 되는 큰 연못에는 한창 연꽃이 피어 있고, 거위와 오리가 수없이 헤엄치고 있다. 못가에 양떼가 물을 마시다가 사람들을 보고 머리를 쫑긋 세운다.(열하일기 성경잡지 7월 10일)>
지금도 양고기가 흔하더니 연암도 양떼를 심양에서 보았던 모양이다. 며칠 전 내몽고 지역(네이멍이라고 부른다.)에 비가 안 오고 열기가 더해져 메뚜기가 기성을 부리고 있으며 그 바람에 그 지역의 목축산업에 크나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느낌이 닿는 이야기다. 이곳 목초지는 대단한 땅덩어리인데 펄벅의 대지 소설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러하다면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지금의 혼하는 심양 도심의 남쪽을 흐르고 있으며 북쪽은 고층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연암 박지원이 혼하를 건너기 전에 보았던 불탑은 심양성 남쪽의 남탑(南塔, 광자사 탑)이었을 텐데, 오늘날은 혼하에 이르러 심양 시가지 쪽을 바라보면 고층건물에 가려 어림도 없다. 요양과 심양의 거리는 약 80㎞이다. 그 중간에 십리하란 곳이 있는데 사신일행들이 심양에 들어가기 전에 묵은 곳이다. 연암은 이 길에서 처음으로 한족 여자를 보았다고 기록해 놓았는데, 인물은 만주족 여자보다 못하다고 평했다. 심양에 거의 다 와서 비로소 한족여인을 처음 봤다는 나는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다음은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