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지萬福寺址 / 사적
- 전북 남원시 왕정동
고려 문종(1046~1083) 때 세원진 만복사, 절터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리 신뢰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처음 세웠을 때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봉안한 이층 법당과 오층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중기까지 번창한 만복사는 정유재란(1597년) 때 불이 탔다. 왜국이 저지른 만행으로.
만복사는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 그 안에 실린 소설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다.
1980년 대 발굴조사를 하였다.
(인터넷 찾아보기, 여러 내용을 정리함)
계획을 가지고 찾은 곳은 아니다. 2023년 7월 5일, 담양군 사찰을 돌고 집으로 가는 길, 남원시 지날 때 이정표를 봤다.
오후 여섯 시가 지난 시각이다. 이 절터와 마원향토박물관을 함께 본다면 알찰 수 있다.
남원지역 전통사찰 탐방 때 다시 와야할 곳이다.
석인상
당간지주 남쪽으로 4m 떨어진 곳에 두 점이 있었다. 도로에 묻혔던 한 점을 발굴, 현재 이곳으로 옮겼다.
사각형, 세 면은 조각하고 한 면은 평평하게 다듬고 구멍이 아래 위로 하나씩있다.
받침돌에 구멍을 내서 꼽은 형태로 전체 높이 5.5m, 머리에서 발끝까지 3.7m.
무엇에 쓰려고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얼굴도 장승과 비슷하지만 금강역사 같기도 하다.
상반신은 벗어고 아래는 옷을 입고 있다. 한 면에 난 구멍, 두 점으로 봐서 당간지주와 같은 용도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만복사지 당간지주(보물)
고려시대 만든 것으로 꾸밈없이 거칠게 다듬어 육중하면서 소박한 맛을 준다.
흙에 묻힌 받침을 같이 생각하면 전체 높이는 5m쯤.
만복사지 석등대석
만복사지 석조 대좌(보물)
불상을 올려 놓았던 육각형의 받침돌. 높이 1.4m. 윗면에 구멍이 있고 지금은 유리로 덮어 놓았다.
불상은 어디로 갔을까?
석탑 부재, 지붕돌이다. 오층석탑 말고도 또 다른 석탑이 있었다는 것일까?
만복사지 오층석탑(보물)
고려초기 작품,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이며 단순하다. 1968년 탑을 수리할 때 1층 몸돌에서 사리함을 발견하였다.
몸돌, 몸돌 받침돌, 지붕돌 등 따로 만들어 쌓았다. 하층이나 상층 기단부가 약해 보인다.전체 균형감은 없어 보인다.
만복사지 석조 여래입상(보물)
만복사를 지을 때 만든 불상이다. 손과 발은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손과 발이 없고 자리만 보인다.
입상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고 받침은 팔각형과 둥근 연화무늬 대이다.
뒷면엔 약사여래(?) 선각이 분명히 그려져 있다. 이런 석불을 보기 어렵다.
김시습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엔 다섯 편이 실려 있다. 첫 편이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다.
*저포 :[민속] 백제 때에 있었다는 놀이의 하나.
주사위 같은 것을 나무로 만들어 던져서 승부를 겨루는 것으로, 윷놀이와 비슷하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