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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 천박한 초등학문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천박한 초등학문을 율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구절에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천박한 초등학문을 이방 절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기를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두가지 견해는 모두 일리가 있다. 과연 어떤 견해가 맞을까? 우선 첫번째 견해를 살펴보자. 바울은 율법이 천박한 초등학문이므로 율법에 종노릇하지 말라고 책망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라고 한 말은 무엇인가? 또한 율법은 영적이지만 자신이 육신적이라며 탄식하기도 했다(롬7:14). 만약 한쪽에서는 거룩하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천박하다고 말했다면 분명 바울은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천박한 초등학문을 율법이라고 말하는 순간 바울은 정신 질환자가 되며 성경은 믿을 수 없는 글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천박한 초등학문은 율법일리가 없다. 물론 율법은 세상의 기초이다. 그러나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말할수 없다. 그렇다면 두번째 견해를 살펴보자. 만약 이방절기가 천박한 초등학문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가 모두 이방 절기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어린 신앙에 대해 믿음을 만나기 까지 율법아래에 있다고 설명했었다. 그리고 4장 후반에는 이삭과 이스마엘을 예로들어 설명하고있다. 그러므로 어렸을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이삭과 이스마엘 같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설명하는 거라 할 수있다. 천박한 초등학문이 이방절기라면 앞뒤 문맥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첫번째 의견처럼 율법도 아니고 두번째 의견처럼 이방절기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유대인이 어린 신앙일 때 그 아래에서 종노릇하지만 율법도 아니고 이방절기도 아닐까? 또는 율법이고 이방절기일까?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롬7:12,14)
2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에 종노릇한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은 헬라어로 τοῖς (호) 히브리어로 מי(미)이며 이것은 대명사로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물이나 어떤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종노릇할 수도 있고 무언가에 종노릇 할 수도 있다. 예슈아께서 종이되는 부분에 대해 샤밧을 들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슈아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에 대해 불법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이 인자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을 아무렇게나 지키거나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안식일은 우리를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지 종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안식일의 종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을 창조하셨는데 만약 그날을 지키기가 엄청 힘들고 복잡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면 어떠한가? 그렇다면 안식일을 누리지 못하고 안식일 때문에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복을 누리는 당사자들로서 누려야 할 날이 오히려 우리를 억압하고 고통을 주어 마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처럼 되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율법에 추가한 수많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은 사람을 종으로 삼고 교리에 종이 되게 한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12:7,8)
그렇다면 왜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에게 어린 신앙일 때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아직 믿음을 만나지 못해 율법의 행위만 있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모태신앙으로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아직 예슈아를 체험하지 못해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보고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율법을 지키지만 진정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종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이길 힘도 없다. 그러므로 믿음없는 율법의 행위는 사람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 되어 유업을 받을 수 없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
# 갈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3 너무 열심히 지키지 말아야 하나?
율법이지만 이방절기가 무엇일까? 우선 율법은 천박한 초등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 율법을 지키는 방법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은 맞는데 너무 열심히 지키면 안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힘을다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지키라는 여호와의 말씀과 상반되므로 잘못된 해석이다 (신6:5,6). 예슈아께서는 생명을 다해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마22:37-40). 그러므로 열심히 지키지 말고 대충 지키라는 그런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율법을 지키는 방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가? 지키는 방법에는 충분히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으로 규례를 추가할 수 있다. 물론 추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종이 아닌 자신의 종으로 삼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규례를 지키느라 정작 하나님께서 추구하기 원하시는 본질을 놓치게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둠은 언제나 사람이 불순종하게 만들어 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다 보니 율법이 없는 자는 그냥 두어도 망하지만 율법이 있는 자들은 율법을 왜곡시켜 지키지 못하게 속이므로 심판받게 만든다(롬2:12).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6: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4 삼가 지키다의 의미
어떻게 사람의 가르침으로 율법을 천박하게 지키게 만들까? 여기서 '날(샤밧)과 달(월삭)과 절기와 해(안식년)을 삼가 지킨다’고 책망하고 있다. ‘삼가다’는 헬라어로 παρατηρεῖσθε(파라테레오) '자세히 관찰하다, 지켜보다, 조사하다' 등의 뜻이다. 만약 자세히 관찰하여 여호와의 날들을 지키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율법을 삼가 지키라고 신명기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신4:8,9). 그리고 샤밧과 안식년에 대해 이른 모든 일도 삼가 지키라고 말씀하셨다(출23:13).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삼가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테레오'가 쓰인 다른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막3: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눅6:7)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눅14:1)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을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눅20:20)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행9:24) 출애굽기에 사용된 '삼가 지키다'의 단어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지키고 보호하고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여 세심히 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삼가 지키다'는 반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즉 고발하기 위해 책잡기 위해 죽이려고 엿보고 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폐하려고 책잡으려고 죽이려고 엿보고 주시하는 자세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우리는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다른 말씀에서는 주로 책잡으려고 죽이려고 '엿보다'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출23:13)
'삼가다'가 쓰인 말씀을 조금 더 연구해보자.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시는지 주시했다고 말하고 있다(막3:2). 말씀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예슈아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회복시키시는 일을 하셨다. 이것은 안식일의 정신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쉬게 하는 것은 소생하고 다시 힘을 얻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또한 안식일은 안식의 나라를 상징하므로 아픈 것이나 상한 것이 없는 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도 하며 안식일의 진정한 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예슈아께서 안식일에 일했다고 오해하여 불법했다고 비난했다. 이런 이유로 안식일에 예슈아께서 병자를 고치시는지 아닌지 주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가르침이나 전통을 기준으로 율법을 판단하는 자들에게 바로 이 단어 '파라테레오'를 사용한 것이다. 즉 의인을 모함하기 위해 염탐하는 것이 '파라테레오'이다.
그렇다면 과연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번역한 이 글은 어떠한가? 여기에 율법이나 의인을 모함하기 위해 염탐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있는가? 분명 바울의 의도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전통으로 지키는 모습을 담아서 부정적인 단어 '파라테레오'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글에서의 '삼가 지키다'의 뜻은 부정적인 뜻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당신의 율법을 삼가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똑같은 단어로 번역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여호와께서 자신의 말씀을 번복한 것처럼 되었고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해석하는 우를 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부정적인 뜻을 번역에 담아낼 수 있을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전통으로 폐하고 있으니'라고 번역하면 오해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했기 때문이다(막7:8,9). 또한 폐하는 것은 지키는 것과 반대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이들이 다시 사람에게 종된다는 의미도 내포하게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신4:8,9)
# 갈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5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렵다
예슈아께서 거절하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항상 율법을 폐하는 전통이었다. 그래서 장로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다고 책망하신 것이다(막7:8,9). 예슈아께서는 결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마5:17). 또한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예슈아께서 오신 이유는 율법 아래있는 자들이 진정한 믿음을 만나 유업을 얻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더이상 사람의 종도 아니고 죄의 종도 아니며 오직 자유자의 아들로서 살아있는 행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은 다시 율법 아래서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는 외식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려 하고있다. 그래서 다시 계명을 폐하는 전통을 따르려는 모습을 보며 바울이 책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면서 다시 사람의 종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즉 예슈아의 삶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슈아를 죽이려던 자들의 삶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의인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자들이 다시 죄인의 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보며 이 모든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고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유자가 되기 위해 싸워왔던 고난들, 감내했던 비난의 눈빛들, 정죄의 말들이 다시 과거의 전통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했을 때 그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않으시고 의롭다 하신다. 그러나 반대로 의롭게 살다가 죄를 짓는다면 과거에 의로움을 하나도 기억지 않으신다(겔18:24). 그러므로 우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빌2:12). 기억하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종된 자, 죄에 종된 자는 결코 유업을 얻을 수 없다(갈4:7). 만약 종된 자가 유업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예슈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7:8,9)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겔18:24)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깃발 재작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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