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리’ 부근에서 떠돌던 내 시들 / 박남희
누구나 자신이 등단을 꿈꾸던 시절을 생각하면 비어 있던 가슴 한 쪽이 아릿해 옴을 느낄 것이다. 199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신평리에서」는 수도 없이 신춘문예에 낙방하고 와신상담하고 있던 그 당시 내 마음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지금 다시 이 시를 읽어도 그 시절 쓸쓸했던 내 마음의 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시는 내가 겪은 직접적인 체험이 바탕이 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양시의 물난리가 모티브가 되어 탄생한 작품이다.
1990년 9월 사나흘 동안 500밀리 가까이 내린 집중호우로 행주대교 남단 신평리 근처 한강 둑이 터지면서 강물이 밀려들어, 지금의 일산 신도시 벌판은 물론 구일산 일부와 능곡 전역이 물에 잠기고 내가 살던 원당 근처까지 강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 했었다. 당시에 한강 둑이 터진 신평리 일대는 물이 지붕까지 차서 소와 돼지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때의 물난리는 워낙 크게 이슈가 되어서 TV등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서 생생하게 중계가 되었지만, 그 후 그 곳에 살던 수재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서 신평리 일대는 그야말로 텅 빈 마을이 되어 버렸다.
「신평리에서」는 나 자신이 수재민이 된 심정으로 오래간만에 버려진 마을을 찾아 돌아보며 느끼는 소회를 그린 작품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수해를 겪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수해민이 되어 쓸쓸한 마음의 풍경을 시로 쓰게 된 것은, 약관의 나이(17세)에 시작한 시업이 별다른 결실도 없이 불혹을 넘기면서 생겨난 내 마음의 폐허를 들여다보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에 등장하는 “애초부터 객지로 떠돌던 바람이 어디 있을까요”라는 화자의 독백은 당시 ‘객지로 떠돌던 바람’같던 내 실존이 토해낸 뼈아픈 독백이었다.
그동안의 내 삶을 돌아보면 온통 ‘늦깎이’ 인생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교 입시에 낙방을 하고 재수를 했는데 또 낙방을 하고 검정고시를 통해서 고교 졸업자격을 겨우 얻은 후 군에 입대하여 화천 전방 철책선과 GP에서 혹독한 군 생활을 하고 제대를 한 후, 26살의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했으니 모든 면에서 남보다 뒤떨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던 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뒤떨어진 인생이 가져다 준 선물이 평생의 동반자가 된 시이다. 재수를 하고 검정고시를 하던 17세 무렵부터 일기장 뒤에 무엇이 시인 줄도 모르고 그냥 시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뜻밖에도 군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인 시작으로 이어져 군대 내 백일장에서 시가 1등으로 당선이 되고, 이런 경험이 제대 후에 국문과로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문과로 진학한 후 대학 2학년 때 교내 문학상을 수상하고 4학년에는 전국규모 숙대 범대학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조만간 등단도 하게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그 시간이 십년 이후로 늦춰지게 된 것은 공부에 몹시 목말랐던 내 학구열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원 진학은 논문이나 평론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시 쓰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원 석사만 마치고 다시 시 창작에 몰두하게 되고 1994년부터는 몇몇 잡지 최종심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대구에서 <시와 반시>(1992~)가 창간되고 1994년에 처음으로 신인상 공모를 했는데, 당시로서는 큰 금액인 100만원의 상금이 걸려 있어서 지금은 중견 시인이 되어 있는 유수한 젊은 시인들이 대부분 응모를 했었다. 나 역시 상금에 눈이 어두워 응모를 했는데 불행(?)하게도 차선으로 떨어져서 시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 때 내가 응모했던 작품이「곰팡이」인데, <시와 반시>측에서 당선작과 함께 본심에 오른 작품을 싣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는데 나는 불가피하게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등단도 못했는데 아까운 작품을 당선작 들러리로 세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시와 반시>에서는 그런 나의 행동이 괘씸했는지 내가 등단을 한 이후 현재까지 거의 신작시 청탁을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유명한 시인들이 되어있는 응모자들이 대부분 후보작 게재를 허락했는데, 바로 밑에서 떨어진 무명 응모자의 작품을 싣지 못하게 되었으니 잡지사로서는 몹시 불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차선으로 떨어진 작품을 등단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뜻 내어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 기억은 맨홀 뚜껑 속에 있었네
살찐 어둠을 뜯어 먹으며
점점 희미해져 가는 불빛을 찾아 헤매고 있었네
맨홀뚜껑 밖의 길들은
문명의 빛에 쉽게 눈부셔 하면서도
맨홀뚜껑 속의 길들을 끝내 밝혀주지 않았네
앞이 잘 안 보이는 내 기억은 수시로 덜컹거리며
맨홀뚜껑 위에 찍힌 햇살 모양의 발자국들을
흔들어대고 있었네
조급한 맨홀뚜껑 밖의 길들은 거리를 질주하는
숨 가쁜 시간들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네
내 기억 속에 신호등은 없었네
다만 끊임없이 흐르는 기억의 물줄기 속에
자잘한 삶의 찌꺼기들이 드문드문 섞여 흐를 뿐
내 유년의 판자집을 흔들어대던 바람도 가난도
이미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없었네
그러나 이미 귀먹고 눈 멀은 내 기억은
끝끝내 맨홀뚜껑 속에 있었네
아련한 그리움에 취해 냄새나는 제 살의 어둠을
뜯어 먹으며,
―「곰팡이」전문
지금 읽어보면 「곰팡이」의 정서는 「신평리에서」나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폐차장 근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당시 내 의식은 ‘어둠’이나 ‘가난’, ‘텅빔’, ‘버려짐’, ‘소외’같은 화두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곰팡이」에 등장하는 “거리를 질주하는 숨 가쁜 시간들”로 표현된 자동차 이미지는「폐차장 근처」에서 ‘무작정의 질주’를 접은 폐차 이미지로 계승되어서, 자연을 통해서 진정한 구원을 얻는 문명의 주제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등단 이전에 등단과 무관한 여러 문학상 공모전에 당선이 되거나 우수작으로 뽑혀서 많은 상금을 타기도 했는데, 막상 등단을 하려니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1994년 제1회 <시와 반시> 신인상 응모 차점 낙선을 시발점으로 몇몇 중앙잡지 최종심에서 아슬아슬하게 낙선하는 일을 겪다가 2년 후에 처음으로 등단을 하게 된 것이 경인일보 신춘문예였는데, 웬일인지 당선되고 1년 내내 기다려도 단 한 곳에서도 청탁이 오지 않았다. 아마 당시에는 지금처럼 문학잡지가 많지가 않아서 지방지 출신 신인에게까지 청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다음해에 중앙지에 다시 응모하게 되고 서울신문으로 재등단 절차를 밟게 된다.
돌이켜보면 혹독하기만 했던 등단 시절의 일들이 반면교사가 되어 조금은 물렁했던 내 시를 한층 단단하게 연단시켜 주었던 것 같다. 혹자는 내가 신춘문예에 연이어 당선된 일을 두고 신춘문예 병자 정도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등단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불운의 연속 끝에 얻어진 뜻밖의 행운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 경험은 어떤 시인을 평가할 때 등단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인의 작품성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평론가로서 계간 평 같은 시평을 쓸 때도 중앙지와 지방지 출신을 차별하지 않고 단지 작품성 위주로 텍스트를 선정한다. 공정성과 투명성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문단이 한 단계씩 발전해 나가는데 유용한 지렛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