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31 강
31. 만민의 기도하는 집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막11:15-21)”
가. 뿌리부터 말라 버린 성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땅 위에 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상황은 잎마저도 없는 나라였다. 분명히 다른 이스라엘을 보고 하는 말이다.
왜 잎만 있었는지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보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던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있다. 이 성전이 만일 하나님의 만족이 되지 못한다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다.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지어진 건물인데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나무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 둘러엎으시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다. 이 말씀 때문에 사람들은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사야 56장에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6-7)”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사람들을 들으시기 때문에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성전이 기도하라고 준 집이라는 뜻이 아니고, 나와 연합한 이방인, 나와 연합한 사람을 그 성전으로 불러다가 내가 거기서 응답을 할 것이기 때문에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그렇게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 성전 안에서는 여호와께서 응답하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성전 안에서는 지금 아무 응답이 없는 성전이다. 이방인이라도 내게 연합한 이방인이라면 내 성산에 기도하는 집으로 불러서 내가 거기서 번제를 받을 것이며, 내가 그 제사를 받아서 내가 그를 기쁘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음을 받지 않겠느냐 하는 것인데 지금 이 성전 안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 성전이 돈 바꾸고 기도하는 집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왜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성전 관리들이 이권을 도모하기 위해서 제물을 가지고 오면 일부러 불합격을 시킨다. 불합격 받은 사람들은 집에 가서 제물을 가져오면 또 불합격되기 때문에 거기서 사서 제물을 드리게 되었다.
돈 바꾸는 문제도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진 돈을 하나님의 성전에 드릴 수 없으니까 다른 돈으로 바꾼다. 공짜로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고 일부를 떼고 바꾸어 준다. 제물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됐다. 이것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마찬가지다.
성전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성전 안에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없는 성전, 그것은 바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다. 이스라엘 속에는 성전도 있고 율법도 있고 성경도 있고 선지자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있다.
그 모든 것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없으면 선지자도 잎이고, 성전도 잎이고, 율법도 잎이고, 모두가 잎이다. 그 잎들은 모두 열매를 위해 있는데 열매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선지자가 있는 것도 그리스도 때문에 있고, 율법이 있는 것도 그리스도 때문에 있고, 성전도 역시 그리스도 때문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전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 되기도 했다.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기록됐고, 성전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지어졌다. 결국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어진 것이다.
그런데 성전은 건재하지만 그리스도는 없고, 성경은 있지만 그리스도는 없는 모양이 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성경은 아주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중요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경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 모른다. 성경이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알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 연구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알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성경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본다면 성경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금강산을 구경하고 와서 금강산에 대해서 아무리 잘 써놓는다 하더라도 금강산만큼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 되었다. 처음에는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성경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이 된 것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성육신으로 오셨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이고, 예수는 성육신한 말씀이다.
성육신한 것과 기록된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기록된 성경을 보고 성육신한 예수를 만났을 때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고, 하나는 성육신한 말씀이다. 성육신한 말씀과 기록된 말씀이 같았더라면 사람들이 금방 예수를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를 버리고 말았다.
“이방인이라도 나와 연합된 이방인을 나의 성산으로 불러서,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의 제물을 받을 것이고 그들을 내가 기뻐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하나님과 연합된 이방인이라면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응답이 될 수 있다. 고자라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성 밖에서 보았던 그 무화과나무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성전이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다.”라고 되어 있다. 하룻밤 자고 나서 보니 뿌리가 말랐다. 시간상으로 본다면 엊저녁에 저주했는데 아침에 와 보니 뿌리가 말랐다는 것이다.
성전을 보고 난 다음에 보니 뿌리가 말랐다. 뿌리부터 말라 버린 그 성전을 보지 못한다면,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뿌리부터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는 뿌리부터 말라 버린 성전을 의미한다.
나. 참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성전이란 어떤 한 사람을 집으로 지어 놓은 것이다. 한 사람을 건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성전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한 사람, 하나님을 심장으로 삼고 있는 한 사람을 건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성전을 보면 맨 중심부에는 지성소가 있고, 그 다음에는 성소가 있고, 바깥에는 바깥마당이 있고, 뜰이 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모형이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의 모형이다.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다. 여기서 우리가 아담을 자세히 보면, 바로 이 아담이 뿌리부터 말라 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나무의 뿌리는 곧 생명이다. 성전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지성소다.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다. 아담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아담은 뿌리부터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이다. 원래부터 아담은 죽어 버린 사람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했다. 사람은 하나님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계3:1)”이다. 잎은 무성하지만 죽은 자이다.
성전에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없으므로, 모두 돈을 바꾸고 비둘기를 파는 문제가 생겼다. 사람 속에 만일 하나님이 없으면 똑같은 일이 생기게 된다.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리고 만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빠져 버리면 돈 바꾸고 비둘기를 파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전혀 없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뿌리부터 마른 성전이고, 아담도 뿌리부터 마른 사람이다. 성전이 강도의 굴혈인 것처럼 아담도 강도의 소굴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할 때 “이방인이라도 나와 연합된 이방인을 나의 성산으로 불러서,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의 제물을 받을 것이고 그들을 내가 기뻐할 것이라.”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이 강도의 소굴이기 때문에 성전도 역시 그러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그러면 교회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주님께서 옛 성전을 청소해 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계획하신 것을 보게 된다. 새로운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낡은 성전이 되고 말았다. 거기서는 더 이상 열매가 열릴 수 없게 되었다.
뿌리부터 말랐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뿌리부터 말라버렸구나, 참 이스라엘이 다시 와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참 이스라엘, 그것이 바로 교회다. 오늘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이다. 하나님의 몸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다.
교회는 옛날처럼 돌로 지을 수 없고, 아담으로도 지을 수 없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로만 지을 수 있다. 이렇게도 지어보고 저렇게도 지어보고 여러 가지로 지어봤는데 다 안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으로 교회를 세우기 원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 자신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다.
이것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사람들은 교회라는 것을 잘못 생각하기 쉽다. 교회라는 것, 그런 것은 없다. 주님 자신이 아닌 것은 교회일 수 없기 때문에, 교회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만들자.’ 해서 교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교회를 건축하자.’ 그런다고 해서 교회가 건축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만으로 교회가 건축되어진다. 그리스도는 결국 교회를 이루게 된다. 그 생명 자체가 교회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다 팔이 두 개이고 발이 두 개이다. 다 똑같이 생겼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머리의 구조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 생명이 근본적으로 그렇게 생겼다. 만일 우리 생명이 다르게 생겼더라면 우리 손은 세 개일 수도 있고, 우리 발이 세 개일 수도 있다. 그런데 모두 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 그 생명이 자라나면 몸이 된다.
그리스도가 교회가 되는 것이지, 교회를 절대로 만들 수 없다. 가장 좋은 교회를 만든다 해도 안 된다. 가장 좋은 교회, 이런 모순도 없애고 저런 모순도 없애고, 모든 모순을 다 없애 버린 어떤 교회를 만들자고 해도 안 된다. 생명은 그렇게 만들 수 없다. 그 생명이 그 몸을 만들어 낸다.
주님 자신으로밖에는 교회가 될 수 없다. 주님 자신의 증가, 주님 자신의 확장, 그것만이 교회의 증가이고, 교회의 확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짓는 데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자라면 저절로 교회가 된다. 그러나 자라지 않으면 교회가 되지 않는다. 이제 하나님 자신은 모든 옛날 것을 다 폐하게 되었다. 성전도 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성전으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면 교회가 될 수 없으므로 주님은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자라게 하고 그리스도가 증가되기를 원하고 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 집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일은 어떤 다른 기구로는 안 된다. 성전을 지어놓아도 안 되고, 율법을 지켜봐도 안 되고, 별것을 해봐도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서 우리 안에서 자라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교역자들을 만나보면 관심이 모두 교회를 어떻게 하면 부흥케 할 것인가에 있다. 교회를 부흥케 하는 무슨 비결만 있다면 모두 다 배우려고 생각하고 있다. ‘교회가 어떻게 하면 부흥하는가?’ 이 생각을 하고 있다. 나도 예전에 목회할 때 그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케 하나?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잘되나? 어떻게 하면 교회에 열심이 생기나?’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를 만들까 생각하고, 실천한 결과가 오늘의 교회들이다.
그러나 교회는 만들 수가 없다.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다. 그리스도 자신이 곧 교회이고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가 바로 교회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폐하는 대신에 교회를 세운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성전을 폐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교회를 잘 지어놓아도 거기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증가한다면 교회가 증가하게 될 것이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풍성하다면 교회가 풍성해질 것이다.
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신 그리스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은 손으로 지을 수 없고, 사람 자체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기도하는 집이다. 하나님과 연합된 집이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이 되어서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다. 우리가 손으로 지은 집에는 하나님이 계실 수가 없다. 오직 예수 자신이 바로 성전이었다. 그분 자신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었다. 옛날에는 손으로 집을 지었지만 이제는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닌 참 성전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소망은 참 성전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어떻게 하면 옛 성전을 다시 회복할까? 어떻게 하면 솔로몬의 아름다웠던 그 성전을 어떻게 회복할까?’ 그것이 꿈이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소망은 자기들의 성전이 있던 자리를 되찾아서 성전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못 봤기 때문이다. 기도가 되고 있는 그 몸을 못 봤기 때문이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다. 제물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제물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봤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소망은 돌로 지은 옛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다. 기도 자체인 그리스도가 소망이다. 제물 자체인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자들을 이 성전 안으로 데리고 갔다. 돌로 지은 성전은 뿌리부터 말라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참 성전이신 자기 자신을 보여주기 원하신다. 우리는 이제 참 성전을 보았기 때문에 손으로 성전을 지을 수 없게 됐다. 이제는 생명의 성전밖에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자신 안에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고, 우리 자신 안에서 제물이 될 것이고, 우리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될 것이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예배할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영과 진리는 곧 아들 자신이다. 아들만이 아버지께 예배가 된다. 어떤 방법으로 예배를 아무리 잘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 예배가 되지 않는다.
옛날에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예배를 할까’ 그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예배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천주교에 가면 미사를 드린다. 교회에 가면 예배를 드린다. 그것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들만이 아버지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었을 때는 아들을 모형으로 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그러나 이제 아들이 나온 이상 하나님께서 아들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기뻐하실 수가 없게 되었다. 아들밖에는 아버지께 예배가 될 수 없다.
무화과나무는 뿌리부터 말랐다. 우리는 그것이 이미 완전히 말라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완전히 죽은 것이고 완전히 없어진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새 성전을 볼 수 있고 영원한 성전을 볼 수 있다. 아담이 죽은 것을 완전히 봐야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된다. 완전히 죽어 버렸다면 미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그 소망밖에 없다.
애굽으로 돌아갈 소망이 완전히 끊어지면 죽으나 사나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 애굽으로 돌아갈 소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마음속에서 갈등이 생긴다. 애굽으로 갈까 가나안으로 갈까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완전히 끊어지고 갈 수 없게 되면 어차피 죽으나 사나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전쟁을 할 때 뒤에서 헌병들이 총을 쏘고 독려를 하고 있으면 뒤로 가도 죽고 앞으로 가도 죽는데, 어차피 전쟁에서 싸우다 죽어야 전사가 되지, 도망치다 죽으면 탈영병이 된다. 그러니까 앞으로밖에 갈 수 없어 전쟁을 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확실히 보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무화과나무를 보고 있을 필요가 없고, 되든지 안 되든지 살아 있는 것밖에는 볼 수 없다. 그것밖에는 우리의 소망이 없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쉽다. 이상한 것은 미련이 있을 때는 안 되었는데, 미련이 없을 때는 아주 쉽고 간단하다.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그는 아주 간단하다.
이스라엘은 뿌리부터 완전히 말라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 성전은 다시 지어질 수 없게 되었다. 그 터에 다시 성전을 짓는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실 수 없다. 살아 있는 성전이 나왔기 때문이다.
산 성전을 놓고 죽은 성전에 가서 경배를 드릴 사람이 누가 있으며, 산 성전을 두고 죽은 성전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하나님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밖에는 참 성전이 없다. 무화과나무는 이미 뿌리부터 말라 버리고 말았다.
주님이 행하신 일은 너무나 이상하고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이 행하신 일을 봐야만 된다. 그것이 즐거운 일이다. 우리는 억지로 무엇을 할 수 없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지 하고 해봐도 안 된다. 저렇게 했으면 좋겠지 하고 해봐도 안 된다.
주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 즐겁게 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너무 이상하다. 우리가 그 지혜를 다 측량할 수 없고 그 넓이와 깊이를 다 헤아려 알 수 없다. 우리는 잠잠하게 있을 수밖에 없고, 겸허할 수밖에 없고, 고요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늘 이렇게 기쁨을 주신 것을 찬양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