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김여울기자] 올 시즌 가장 늦게까지 그라운드에 서 있던 그들이었다. 덕분에 10개 구단 중 가장 늦게 담당팀의 2017시즌을 돌아보게 됐다.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해도 부족할 것 같은 시즌이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시즌이기도 하다.
‘단군 신화’에서 인내의 결실을 보는 쪽은 곰이다. 그러나 사상 첫 ‘단군 매치’의 결과는 달랐다.
100일을 넘어 175일을 버틴 호랑이는 마지막까지 무섭게 추격해온 곰을 따돌리고 정규시즌 최종전날 승자가 됐다.
김기태 감독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이 날, KIA 타이거즈 선수들은 정규시즌 우승이라는 고지에 도달한 이들이라고 하기에는 담담했다. 오히려 비장하기까지 했던 승자들이었다.
곁을 잠깐 내주기는 했지만 4월 12일 이후 한 번도 정상에서 내려온 적이 없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뜨거웠던 전반기와 달리 지쳐버린 선수들과 마음이 급했던 벤치는 힘겨운 후반기를 보냈다.
가슴을 졸이며 지내왔던 우승팀 선수들이었다. 선수들 사이에는 “전반기 성적과 후반기 성적이 바뀌었다면 더 박수받는 1위였을 것이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나왔다. “이렇게 (1위를) 내주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며 이를 악물고 치렀던 kt 위즈와의 시즌 마지막 3연전이었다.
144번째 경기를 마친 뒤에야 정규시즌 우승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탓에, 기쁨보다는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해야 진정한 챔피언이 되는 현실을 알고 있기에 1위팀 선수들은 말을 아꼈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우승을 바라던 이범호도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까지 하고 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생애 첫 우승 소감을 다음으로 미루기도 했다.
많은 이의 예상대로 그리고 KIA의 우려대로 한국시리즈 파트너는 두산 베어스가 됐다.
두산은 올 시즌 KIA가 유일하게 상대전적에서 열세를 기록한 팀이자 3년 연속 우승을 노리는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두산다운 폭발력도 도전을 받는 KIA에는 부담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치른 한국시리즈 1차전은 패배였다. 연달아 챔피언스필드 담장을 넘긴 화력과 이미 우승의 맛을 본 상대의 힘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KIA에서 우승을 경험한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V10’을 만들었던 양현종, 나지완, 안치홍에게는 이미 8년 전의 오랜 기억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규시즌 내내 그랬듯이 흔들렸지만 넘어지지 않은 챔피언이었다.
위기의 순간을 넘고 넘은 KIA는 175일의 1위 질주와 함께 V11의 주인공이 됐다. /광주일보 김진수기자
양현종이 ‘미친 선수’가 됐다.
“공이 너무 좋았다. 못 치겠더라”며 상대 사령탑의 감탄사를 끌어낸 2차전 양현종의 공도 공이지만, 3루 덕아웃과 관중석을 향한 양현종의 손짓이 시리즈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0-0으로 맞선 8회초 까다로운 타자 오재원을 좌익수 플라이로 돌려세우고 이닝을 끝낸 양현종은 손가락으로 관중석을 가리킨 뒤 팔을 크게 벌리고 힘차게 들어 올렸다.
어려운 경기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양현종의 몸짓에 관중석은 떠나갈 것 같았다. 고독한 싸움이 되지 않도록 팬들은 혼신을 다해 응원을 했고, 동료들은 8회말 ‘0의 침묵’을 깼다. 간절했던 김주찬과 상대를 홀린 최형우의 발이 만들었던 점수는 이날의 유일한 득점이자 한국시리즈 우승팀을 바꾼 결승점이 됐다.
“두산 선수들과 팬들에게 죄송하지만 우리 팀이 힘이 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고 설명했던 양현종은 2017시즌 프로야구가 종료됐음을 알리는 순간에도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것도 그라운드 가장 높은 곳에서.
5차전에 다시 등판한 양현종은 1점 차 1사 만루라는 숨 막힌 장면에서도 주인공이 됐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깜짝 등판과 깜짝 세이브로 양현종은 가을 주인공이 됐고, 한국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내준 적 없던 팀은 11전 11승 ‘불패 신화’를 이었다.
2차전 그리고 5차전은 2017 한국시리즈의 결정적인 승부였다. KIA가 2차전을 내줬다면 박수를 보내야 하는 자리에 섰을지도 모른다. 5차전의 패배는 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7-0이 됐을 때 많은 이들은 끝을 생각했다. 미디어석의 기자들도 어느 때보다 여유 있게 승자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정규시즌 우승처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175일의 시간을 그랬듯이 호랑이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 같았던 그들. 끝내 이겼다.
“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드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하겠다”던 김기태 감독은 이번에도 자신의 공약을 지키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고향팀 타이거즈의 왕조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김기태 감독은 우리나라 최초의 좌타자 홈런왕이라는 화려한 이력과 실력에도 단 한 번도 우승이 어떤 것이지 느껴보지 못했다. 그리고 김기태 감독은 2017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아낸 사람이 됐다.
“2년 연속 우승을 했던 두산과 1위 경쟁을 했다. 우리에게는 일종의 시험 무대였고, 중요한 시험과 도전을 잘 마쳤다. 나를 빛낼 기회라고 생각한다. 팬들도 정말 대단할 것이다”며 한국시리즈를 기다렸던 버나디나는 정말 빛나는 선수가 됐다. 팬들도 정말 대단했다.
2017시즌 우승에 함께 한 10번 타자들
“다 끝나고 이야기하겠다”던 최다 만루 홈런 기록보유자인 이범호는 가장 극적이었던 만루홈런을 터트리면서 우승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너무 좋다”를 연발한 이범호는 “이 맛에 야구를 하는 것 같다. 밸런스가 좋지 않아 마지막까지 넘어가라고 빌었다. 시리즈 내내 못해서 한 번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2009년 한국시리즈 영상만 틀면 나오는) 지완이가 부러웠다. 일부러 더 크게 뛰었다. 우승 확정되고 뛰어나가는 데 햄스트링이 사라졌다”는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다.
단호하게 “울지 않았다”고 말한 ‘캡틴’ 김주찬도 지독했던 슬럼프의 올 시즌을 함께 버틴 친구 이범호 앞에서는 눈물을 보였다.
타이거즈의 9번째 우승이 만들어졌던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3세이브를 올렸던 임창용은 ‘맏형’으로 다시 타이거즈 우승 현장에 섰다. 그 사이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최고령 한국시리즈 출전 기록을 갈아치운 그는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게 나도 믿기지 않는다. 1년 1년 매 경기 집중해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며 “나를 계기로 많은 선수가 내 나이가 되도록 기량을 유지하며 야구를 할 수 있기 바란다. 사람들이 나이를 놓고 많이 의심했을 것이다. 내가 좋은 사례가 되고 싶다. 후배들이 내 사례를 바탕으로 그 뒤를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후배들이 길이 되고 싶다”던 그는 후배들의 우승 헹가래를 받고 나서는 “후배들 덕분에 이렇게 한국시리즈를 하고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영광이다”며 후배들에게 공을 돌렸다.
일일이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 모여 우승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빼놓아서는 안 될 ‘10번 타자’가 있다.
인구 147만의 도시 광주에서 기록된 100만 관중. 치열했던 예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관중석에서 감동적인 응원을 보냈다. 특히 ‘오른쪽 왼쪽’이라는 구호에 맞춰 이뤄진 안치홍 타석의 클래퍼 응원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안치홍에게 감동을 준 팬들의 응원 /김여울기자
안치홍은 “뒤늦게 응원 영상을 봤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내가 열심히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며 우승을 위해 함께 뛰어준 ‘10번 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물론 안치홍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잊을 수 없는 극적인 2017시즌이었다. 하지만 진짜 왕조 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2009년 우승의 기억은 짧았고, 암흑기는 길었다.
‘우승 포수’가 된 김민식은 일반적인 모습과 다른 우승 세러모니를 했다. 기쁨에 취해 미트와 우승공을 던져버린 그는 마운드로 달려 올라가 투수의 품에 안겼다.
우승공을 던져버릴 정도로 극적이었고 감격스러웠던 우승이었고, 오랜만의 우승이라 김민식도 구단 관계자들도 우승공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다행히 김민식을 지켜보고 있던 불펜 포수 이동건이 우승공을 챙겨 놓으면서 해프닝으로 끝난 우승 순간이었다.
극적이었던 2017시즌의 마지막 순간 /광주일보 김진수기자
어색했던 우승 현장이 익숙해질 수 있도록 다시 달려야 하는 그들이다. 벤치는 우승의 길목에서 마주했던 위기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진정한 강팀이 되기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고, 선수들은 우승 순간을 생각하며 다시 그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고 경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단은 명암이 엇갈렸던 이들을 한데 어우르는 진짜 ‘동행’을 하며, 우승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운영의 묘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2017시즌 그라운드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타이거즈라는 이름으로 그라운드와 관중석을 지켰던 당신의 또 다른 이름, 챔피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