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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요한복음 4장 16-19절
4:16 λέγει αὐτῇ ὕπαγε φώνησον τὸν ἄνδρα σου καὶ ἐλθὲ ἐνθάδε
4:17 ἀπεκρίθη ἡ γυνὴ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οὐκ ἔχω ἄνδρα λέγει αὐτῇ ὁ Ἰησοῦς καλῶς εἶπας ὅτι ἄνδρα οὐκ ἔχω
4:18 πέντε γὰρ ἄνδρας ἔσχες καὶ νῦν ὃν ἔχεις οὐκ ἔστιν σου ἀνήρ τοῦτο ἀληθὲς εἴρηκας
4:19 λέγει αὐτῷ ἡ γυνή κύριε θεωρῶ ὅτι προφήτης εἶ σύ
* 묵상할 내용:
"사마리아 여자의 욕망을 은폐하는 요한복음"
-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여자
- 주님을 이용해 자기를 정당화하는 여자
- 주님을 점쟁이 취급하는 여자
주님은 요한복음 4:15에서 드러난 사마리아 여자의 잘못된 삶의 태도와 가치관에 대해 시급하게 바로 그 문제를 드러내며 삶의 바른 방향을 가르치셨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과 그의 공동체는 그것에 관한 주님의 절박함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의 마음과 고통과 분노를 인식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자신이 주님을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주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주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대화할 때 요한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결국 그 빈 시간과 공간을 사마리아 여자를 두둔하며 그 여자를 높이는 것으로 채웠다. 아무도 사마리아 여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주님의 마음과 말씀은 사마리아 여자의 자기변명에 매몰되어 버렸다.
이것과 관련해서 제자든 어느 누구도 초기 기독교든 지금의 기독교도 무슨 기관이나 단체도 아무런 검증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오히려 주님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점철된 잘못된 예수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왜곡된 예수를 마치 주님인 것처럼 이 책에 써넣었다. 그 결과 그것을 읽고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잘못 읽고 잘못 가르치고 잘못 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악이다. 몰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명백한 악이기 때문이다.
잘못 기록되어 있어도 제대로 읽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영혼의 불꽃과 같은 주님의 마음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주님을 이용하려던 욕망에서 벗어나 주님께 복종하며 진리를 향해 가려는 자들은 소위 성서라는 책에 왜곡되어 기록된 내용을 구분할 수 있다. 주님을 분노케 하는 왜곡된 주님의 마음과 말씀을 분리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 핑계를 댈 수 없다.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 없다. 소위 성서라는 책을 읽을 때에는 매 순간 왜곡되지 않은 주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주님을 대적하며 주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내용을 따를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생명을 다하고 영혼을 다해 구별하며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각자 그러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영원히
사마리아 여자의 이기적 욕망과 잘못된 삶의 가치관을 명백히 보시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가르치셨을 주님께서 더군다나 사마리아 여자의 욕망을 부추길만 한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굳이 더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러한 당연한 사실과는 정반대인 망상을 사실인 것처럼 계속 늘어놓고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앞에서 다루었다.(https://cafe.daum.net/chun-mo/UDzY/315)
그렇다면 주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 4:16)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잘못된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가진 여자에게 당시 사회 구조상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을 남편 또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들을 둘러싼 지역과 사회 문화가 가진 가치관 문제와도 분리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선 남편에 대한 가르침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명하신 “불러오라”라는 명령은 단순히 남편을 만나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자를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행하는 주님의 다급한 명령인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명령에 대해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4:17)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거짓이며 불복종이다. 요한복음 4:15에는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여’라고 칭한 것은 주님이 이용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요 4:14) 물론 이러한 구조는 있을 수 없는 구조라고 이미 앞에서 다루었다.(https://cafe.daum.net/chun-mo/UDzY/315)
아무튼 그렇게 주님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그녀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시면 그녀는 복종해야 했다. 그런데 물 한잔 달라는 주님의 요청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들이대며 거부했던 여자는(요 4:9 이하) 이번에도 주(κύριος: kúrios)라고 하면서도 그분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존재를 바르게 이끌기 위한 주님의 절박하며 다급한 명령을 여자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마리아 여자에 대해 소위 기독교인들은 주님께 불복종했다는 사실과 연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단지 여자가 고생했겠다고 편든다. 구약에서 약자라고 공식적으로 표현된 대상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객)이다.
신명기 14:29 :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6:14 :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신명기 24:19 :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물론 여기에는 레위인과 연결된 내용도 있지만, 이것과 관련해서는 다른 책에서 다룰 것이다. 아무튼 사마리아 여자는 율법에서 규정한 약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 관계와는 상관없이 모두 구약을 경전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사회법으로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그 법에 따라 약자에 포함되지 않는 사마리아 여자에 대하여 막연한 연민을 가지는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대화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녀는 약자가 아니다. 엄연히 유대법에 근거한 남편이 있었다. 만약 남편이 아닌데도 여러 명과 살았다면 그에 따른 중한 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사마리아 여자에 대해 동정하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은 한국에서 시집살이하고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살았던 여자들의 삶과 사마리아 여자의 삶을 동일시하면서 벌어진 오해일 뿐이다. 유대법에서 결혼은 엄격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결혼과 관련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이 죽은 형제의 아내에 대한 의무도 포함되어 있다.
신명기 25:5-10 :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이와 같은 내용은 룻기 4:1-11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이런 내용을 기준으로 따져보면 현재 남편이 있는 사마리아 여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오히려 주님의 요청을 거부하고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마리아 여자의 잘못에 대해 분노해야 할 상황이다. 혼전 동거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현대의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 사마리아 여자도 그런 상황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엄격한 사회법으로서의 율법의 지배를 받는 당시 사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생겨난 무지의 결과일 뿐이다.
오히려 한편으로 사마리아 여자가 남편에게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는 것이 고역이라서 다시는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요 4:15)는 말은 그 물로 가정을 돌보며 식사를 준비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여자는 부정적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메마른 지리적 특징을 가진 이스라엘 땅에서 우물이 있고 마실 물을 길을 수 있으며 그것으로 가정을 돌볼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해야 했다. 그랬다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에 대한 욕망이 그토록 절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여자의 불만과 평소의 생활 태도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주님의 목마름과 안타까움을 무시하면서도 이 여자에 대해 동정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망상일 뿐이다. 잘못된 자기연민과 그 여자와의 그릇된 동일시일 뿐이다. 그 여자가 주님께 불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불복종하는 여자가 주님에 대해 한다는 말은 상상을 초월한다. 주님께 “내가 보니 선지자(προφήτης: prophḗtēs)로소이다”라고 한다. 선지자(נאבי: nabi)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에게 임한(호 1:1 :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신의 계시를 그대로(암 2:1 :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כֹּה אָמַר יְהוָה: koh 'amar yhwh) 전달했던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은 선지자라는 단어가 미래를 예언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처럼 잘못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점쟁이일 뿐이다. 지금 사마리아 여자는 주님을 점쟁이 취급하고 있다. 예언자가 아니라 신의 대언자이며 신의 계시를 그대로 전달하는 존재였던 ‘나비(נאבי)’가 단순히 남편이 몇 명인지를 맞히는 존재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 여자는 선지자라는 단어를 들먹이면서 주님을 모욕하고 있다. 계시를 전달했던 소위 예언자, 대언자는 현재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신과의 관계가 파괴된 부분을 일깨우고 돌이켜 회개하도록 독려했으며 신의 과제와 명령을 그대로 전달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마리아 여자는 자기가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는 주님을 만나 뭐가 바뀌었다는 말인가? 그녀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무엇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녀의 잘못을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만약 그런 내용이 없다면 그것은 주님을 점쟁이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주님의 사역을 파괴하는 신성모독이라는 말이다. 요한과 그의 공동체는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만들면서 그러한 내용을 방조하고 조작해서 덧붙였으며 주님의 역할과 소중한 뜻을 파괴했던 것이다. 이렇듯 주님을 모욕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주님은 점쟁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맞추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이 무언가 알고 싶어 이용하는 존재일 수 없다. 신의 뜻에서 어긋난 것을 드러내고 잘못을 돌이키도록 하며 신의 뜻과 나라만을 위한 과제를 부여하는 것 이외에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 여자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주님께 물 한 잔도 드리지 않았다. 주님의 목은 여전히 타고 있다. 그 여자 때문에 목이 더 타신다. 그런데도 여자는 자기 욕망만 드러내고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면서 오히려 주님을 선지자라고 치켜세우며 평가하는 그럴듯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요한의 작품이다. 요한의 작품을 거르지 않고 소위 성서라는 책에 집어넣은 자들의 만행이 가져온 결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신의 뜻을 전달하는 책이라 믿으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전하며 따랐던 기독교와 그것에 속했으며 지금도 속해있는 모든 자의 무지와 악의 결과이다.
도대체 요한은 왜 사마리아 여자에 대하여 그렇듯 관대하게 높이고 있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괴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껏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사마리아 여자를 말하면서 그녀의 불복종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믿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에 대해 불복종하는 존재가 주님에게 인정받는 것처럼 높여지고 있는 지경이다. 주님이 여자의 말에 “옳도다”(요 4:17), “참되도다”(요 4:18)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더 이상 그것과 관련된 여자의 잘못된 삶과 가치관에 대한 질책이든 잘못을 교정하는 내용이 단 한 마디도 없다. 오히려 그것과 바로 이어지는 말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라는 여자의 평가이다. 그것도 ‘내가 보니’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 여자가 무엇이기에 무얼 본다는 말인가? 선악과를 보며 열광했던 여자와 다를 바 없다. 답답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야 정상이 아닌가? 어찌 요한과 기독교는 주님의 목마름과 명령을 무시하는 사마리아 여자를 끊임없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신이 금하신 선악과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