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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9:1-5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이 시의 구성은 세 부분입니다.
처음은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다음은 여러 재난들을 열거합니다.
그 다음은 참 감사로 기도합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자기가 겪은 환난을 성도들과 함께 탄식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전형적이고 예표적인 인물이기에 이 시의 적용은 분명히 확대됩니다.이 시에 표현된 모든 것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신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모든 성도들은 원수들에게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나 고통을 당할 때에는 보응하시는 권한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절은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입니다.
이 시의 서론인 이 말씀에서 다윗은 자기 마음의 순결함을 변호하기 위해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 이외에는 찾을 것도 바랄 것도 없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 으로 부름으로 모든 사면에서 공격을 받아 환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공포자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선포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 내용은 이런 해석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세상에서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불의하고 잔인한 증오심을 가진 자들과 맞서서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 속에는 상반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비방이 몰아닥칠 때 하나님만이 무죄함을 적절하고 정당하게 판단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은, ‘주여, 내가 악한 자들에게서 가장 악한 자로 여김을 받고 또 세상에서 비방을 당한다 할지라도 주께서는 나의 성품을 바르게 지켜 주실 것이요, 또 이를 인하여 나로 주를 찬송케 하실 것이니이다’ 입니다.
시편 109 편
이와 같은 해석은 곧이어 나오는 “잠잠하지 마옵소서” 라는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우리가 악인들의 중상모략에 짓눌릴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무죄함에 증인 되시는 하나님께 분명히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다윗은 자기가 독특한 해를 당한 것을 말함으로 자신의 인격을 통해 그리스도와 모든 교회의 몸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온갖 냉대를 당하게 될 때 완전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만 쉼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배웁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세상의 비방을 하찮게 여기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또 하나님은 자신의 처지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신 사실을 분명히 깨닫지 않고서는 아무도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없습니다.
2. 본문 2절은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입니다.
다윗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공의가 행해지는 것을 찾을 수 없으므로 더욱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게 되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또 다윗은 격렬하고도 맹렬하게 공격을 당할 뿐 아니라 궤사하고도 교만한 입이 자기를 향해 열려 있으며 거짓된 혀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다윗이 당한 고난의 진정한 상황을 몰랐던 자들은 이 말씀이 많은 비방을 짊어진 관계로 죄악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없었던 점을 핑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3. 본문 3절은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모든 사면에서부터 가장 악의에 넘치고 사나운 말로 부당한 공격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탄식합니다.
다윗은 아름다운 비유로 자기 원수들의 혀가 무서운 독으로 가득 차 있어 큰 군대의 공격을 당하는 것보다 그들의 공격을 견뎌내기가 힘들다는 것과 견디기 힘들수록 자기는 그들의 손에 이런 취급을 당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종류의 싸움은 하나님께서 매우 흔히 그의 자녀들에게 당하게 하시는 것으로 있기에 우리 모두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사단이 공개적으로 격렬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데 그는 본래 거짓의 아비이기 에 자기가 가진 놀라운 속임수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고한 비방을 퍼부어 그들이 사람들 중에 가장 버림받아야 할 자들인 것처럼 그들의 평판을 깎아 내립니다.
시편 109 편
다윗으로 예표되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환난에 뒤따르던 것이 매일 성도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골1:24).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고난을 당하셨기에 성도들을 부르사 자기의 고난에 동참하여 이것을 같이 나누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4. 본문 4-5절은 “(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5)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입니다.
1) 본문 4절 상반은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입니다.
시인은 이미 엄숙하게 대적들은 자기가 해를 끼침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극심한 격분으로 가장 화해하기 힘든 원수가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친구로 지낸 사실을 말해서 선언했던 사실을 확증합니다.
악을 행치 않는 것보다 원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사단이 자기 뜻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히도록 할 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잔인하게 핍박하는 것은 심히 부당한 일입니다.
시인이 “사랑”이라는 말에 자비의 행위를 덧붙인 것은 외적 은총의 행위를 통해서 그들이 선한 의지를 견지하도록 하는 것이 자기 목표였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2) 본문 4절 하반에서 5절은 “(4) 나는 기도할 뿐이라
(5)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은 다윗의 원수들이 다윗에게 맹렬히 공격해 오던 그 순간에 다윗이 원수들을 위해 드렸던 기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이 견해는 우리가 시편 35편 13절에서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해석은 다윗이 잔인하고 악의에 찬 방법으로 공격을 당했을 때 악을 악으로 갚는 것과 같은 합당치 못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여 자신만은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만족하게 여겼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또 사람이 이유 없이 능욕을 당한 그 순간에, 또 자기가 당한 모든 손해를 계산해서 그들에게 보응하려는 그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즉시 하나님의 심판에 자신을 호소하는 것은 매우 엄청나고 바람직한 미덕임에 틀림없습니다.
선한 자들과 친교를 나누며 살기를 목표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악한 자들과 접촉하여 자신이 입을 피해를 그 피해대로 갚으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경건한 신자들은 자신들이 이런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편 109 편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억제해서 원수들의 잔인함으로 원수를 갚고 싶은 생각이 들지라도 모든 부정하고 격한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다윗이 보여준 이 실예를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으로 우리의 원수를 정복하기 바란다면 다윗과 동일한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구절로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를 볼 수 있습니다(시69:12-13).
이 구절과 본문은 생략법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다윗이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해 주려는 것은, 자신은 모든 세상이 자기를 대적한 사실을 알고 있으나 자기 모든 근심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다윗과 모든 경건한 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신 것처럼 이 점에서 그들처럼 기도드리는 신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수치스럽고 참기 어려운 핍박을 보시고 곧 도움의 손길을 펴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시편 109 편
시109:6-11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다윗은 애매하게 그 원수들의 악한 훼방을 받았습니다.
주의 은혜를 힘입은 다윗은 그들을 사랑해도 그들은 그를 훼방하였습니다(1-5).
이 맹세적인 사실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로 그들을 저주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까닭 없이 남을 훼방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1. 본문 6절은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입니다.
1) 다윗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탄식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개인에게로 그 탄식을 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그들을 한 사람씩 개인별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악한 사람들 중에서 특별하게 한 사람을 들어 그 특징을 말함으로 가장 소문나 있는 그들의 범죄를 말한다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근거없이 여기 언급된 사람은 자기 반역과 폭동으로 다윗에게만 아니라 거룩한 제사장 모두에게 파멸을 가져오게 했던 도엑(Doeg)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가 이 시를 유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행1:20).
또 이 탄식은 시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과 특별한 친구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똑같은 가능성을 가지는데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이 시 속의 저주는 다윗이 이런 저주를 하거나 그들을 향한 자기의 바라는 것을 나타낼 때는 어떤 육체적인 무절제한 성격으로 동요를 받았거나 분별이 없는 열심만으로 한 것이 아니요, 또 개인 감정에 치우쳐 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 세 가지 문제는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사람은 가지고 있는 자아 평가의 분량에 비례해서 자신의 문제에 도취된 나머지 원수를 갚고자 무모하게 돌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사람이 자기에게만 치우치면 더욱 무절제하게 개인적 관심에만 집착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러한 개인적 관심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또 다른 종류의 죄악을 낳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수에게 앙갚음하는 행위가 정당하고 합법적일 수 없고 자기 간악한 성벽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앙갚음을 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롭고 공평하다고 핑계대지만 이것은 앙갚음하고자 하는 생각에 열중해 공의의 흔적은 지워버리고 마음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됩니다.
시편 109 편
2) 이기심과 육욕(肉慾) 의 악이 바로잡혔다 해도 또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도자인 주의 영을 따르기 위해 어리석은 욕망의 열심을 억제해야 합니다.
악한 열정을 가진 자가 다윗을 욕망의 사람으로 본다면 오해입니다.
그런 오해 자들은 주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눅9:55) 라는 대답을 듣기에 알맞습니다.
가장 사악한 목적을 위해 이 시편을 이용함으로 왜곡하는 수도승들 특히 프란시스파 수도사들은 얼마나 불경건한 무리들인가?
사람이 이웃에게 악감을 숨기고 있다면, 그는 악하고 비열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 이웃을 저주함으로 매일 이 시편을 되풀이할 것이라는 점은 상식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수도사들에게 미혹되어 자신과 자기의 독자를 이러한 말로 저주하면서 프랑스에 살고 있던 한 부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터무니없는 감정을 벗고 성령의 인도아래 기도한 다윗에게 돌아갑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며 살고, 한결 같이 믿는 자와 선한 자들을 넘어뜨리려 획책함으로 모든 속박을 벗어 버리려 하기에 그들은 절제도 정직도 없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악인으로서 저들을 제어하게 하는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또 그들은 음모와 배신을 수단으로 해서 한결 같이 선한 자들을 근절시키려고 목표를 삼고 있기에 하나님께 가장 공정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대적하여 일어나사 늘 그들의 대적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만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사 그들로 하여금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지나친 조급함을 갖지 않도록, 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은 우리를 죽도록 대적하던 자가 내일은 은혜로 우리의 친구가 되는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7절은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입니다.
저가 심판을 받으러 나올 때, 또 하나의 저주는 저가 긍휼이 없는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점과, 또 저가 사죄를 간청할지라도 여전히 그 심판이 가혹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저주는 단순히 그가 사람의 회초리를 통해서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문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지상의 판심에 의해 결정되는 판결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인데, 우리는 이 해석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시편 109 편
악인들의 사악함은 너무나 명확해서 정의의 집행을 모면할 방도가 없습니다.
또 그들의 용서를 위해 탄원한다 해도 그것은 무시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그를 재판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정죄 받은 범죄자로 부각시키며 그의 사악한 행위가 노출되고 알려졌기에 마땅히 정죄에 대한 수치를 지닌 자로 봅니다.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다고 보는 다른 해석에 대해 그들의 기도가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죄로 변하고 특별히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이 드린 모든 제사는 하나님의 혐오만 일으킬 따름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 결코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얼마나 많이 자신을 더럽혔으며 그들의 가증한 행위는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거슬렀으며 불쾌하게 하고 있는가.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이 말씀이 지상 심판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용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길게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3. 본문 8-11절은 “(8)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그의 년수를 단축시키자 - 칼빈)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9)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 하게 하시며” 입니다.
이 세상은 수고와 근심의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의 증거와 그 대가라고 압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심으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래 남아 있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서 우리는 불멸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것과 정반대로 사람의 생명의 덧없음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증표라고 소개됩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극심한 방법으로 끊으시사 이것을 통해 그들은 생명의 호흡을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광과 존귀함을 박탈하시고 그들을 권세와 권위의 자리에서 던져 버리시는 경우도 똑같은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악은 선한 자들에게나 악한 자들에게나 일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은 결코 혼합되거나 서로 섞일 수 없습니다.
선한 자들은 매우 명확하고 현저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이 유다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행1:20).
시편 109 편
이유는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다윗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한다는 해석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히브리어 פקודה (페쿠다)는 일반적으로 ‘감독’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매우 적절히 유다의 사도 직분을 가리키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 해석에 있어서 때로는 아내, 영혼(사람에게 값진 보배가 되는) 또는 부(富)와 형통함을 가리킨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해석은 유대인 주석가들이 순전히 악의를 갖고 한 것으로 믿어도 좋습니다.
악의에 찬 영혼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야 이토록 명백하고도 분명한 의미를 가진 말씀의 의미를 왜곡시킬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 구절을 애매히 만들어 베드로의 인용이 부적절한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악한 자들은 성령께서 여기서 그들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운명을 전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알고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높은 평판을 누리고 있을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여기서 악인들이 지금은 높은 지위와 평판을 갖지만 그들이 떨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허영과 권세는 머지않아 빼앗기게 되리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매우 값있는 위로와 인내를 갖게 됩니다.
다음 두 구절에서는 그 저주가 아내와 자녀들에게까지 확대됩니다.
아내가 과부 되고 자녀들이 아버지 없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선지자가 앞서 말한 바 있는 인생의 우상성에 기인합니다.
“유리 구걸”하게 되는 것이나 살아 나아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부족하게 된다는 말씀은 그들의 죄의 막중함에 대한 증거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토록 극심하고 무거운 형벌로 그들의 평범한 반역을 벌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리대금하는 자” 의 결과로 오는 빈곤을 언급하는 경우 다윗은 그 자녀에게 닥친 빈곤을 말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지금 죽을 때 그의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하고 죽는 가난한 사람이나 인색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옳든, 옳지 않든 이것과는 관계없이 자녀들을 위해 재산을 쌓아놓았으나 그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에게서 취한 재물들을 하나님께 빼앗긴 사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9 편
시109:12-16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이 시편에 원수를 저주하는 말씀이 많습니다(6-15). 그 이유도 있습니다(16-).
신자가 어떻게 이런 저주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켐셀(Gemser)은 “이 시편의 저주는 시인의 개인적 분노를 말함이 아니고, 피압박자의 할 수 없는 처지를 변호함이다. 그 저주 선언의 목적은 의인이 필경 승리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1. 본문 12절은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홀할 자도 없게 하시며” 입니다.
히브리어의 관용법에 따르면 긍휼과 자비를 계속 보여주는 것은 인자스러운 행위를 한결 같이 계속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또 이 말이 연민 또는 해가 거듭함으로 분노가 가라앉을 때 비로소 생기는 동정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당한 환난이 그 사람을 향해 증오심을 갖고 있던 사람의 마음을 녹여 줄 때에도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후손에게 자비를 보여줄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해석은 13절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 자신과 악인들의 자녀를 함께 포함시킵니다.
다윗의 말은 ‘악인이 남보기에 그런 환난에서 번민으로 나날을 보내고 그 영향이 악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미치게 할지라도 그들에게 아무도 동정을 보이지 맙시다’ 입니다.
우리는 오래 계속되는 원수의 불행이 야만적인 근성을 가진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시키거나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모든 증오심이나 악한 감정을 잊어버리게 해주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본문에서 자기 원수와 그의 후손이 미움과 증오를 받게 되어 백성들이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을 지침 없이 바라보며 마치 쇠붙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그 광경을 매우 흥미 있게 보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점은 다윗이 어떤 개인적인 번민으로 과격한 자극을 받아 이러한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악한 자들에게 임할 형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9 편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의 마음이 굳어져 감정과 무자비한 잔인성에 치우쳐 악인들이 긍휼을 얻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 중에 하나로 간주합니다(신2:30).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갖고 있던 것과 똑같은 분량으로 자신이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본문 13-15절은 “(13)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 소서 (14)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입니다.
1) 이 말씀은 선지자가 조금 전에 하나님은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내리실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주제의 계속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한 개인이 아닌 사울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기에 그는 여기서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행위의 경우에는 항상 그 행위를 맨 처음 일으킨 몇몇 사람이 끼여 있어 다른 사람들의 주모자 노릇을 하기에 한 사람을 들어 말한 후 여러 사람을 말했다가 다시 동일한 사람을 말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더 자연스럽고 분명한 해석은 이 말씀이 그의 후손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후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많은 수를 의미하는 집합 명사로 단지 한 개인만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것보다 더 무서운 저주입니다.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몰락 한 집안이 후대에 다시 일어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여기서 악인들이 완전하게 파멸을 당함으로 다시는 예전 상태에 도달할 수 없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후대에” 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는 이런 뜻을 함축합니다.
2) 다윗이 악인의 집과 가문에 대해 말한 멸망은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로 심히 포괄적이기에 그는 저희의 저주가 완벽한 것이 되도록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라” 고 바랍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성경 교훈과 완전히 일치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에 근거해 천대(千代)에 이르도록 자신의 자비를 그들의 후손들을 향해 강력하게 확대시키시고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삼 사대에까지 형벌을 내리시기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죄가 없는 자들까지도 악인들 속에 포함시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에게서는 자신의 영의 은혜와 조명을 거두어 버리심으로서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멸망을 위한 진노의 그릇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롬9:21).
시편 109 편
인류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이토록 엄격하신 사상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한된 생각으로 하나님의 은밀하시고도 헤아릴 수 없는 심판을 헤아려 보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지엄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채찍을 삼아 우리는 자신을 경외심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채우는 방편을 삼도록 합시다.
에스겔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18:20). 이 말씀에서 에스겔이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자랑하면서 자기가 부당한 형벌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백성들의 불평은 근거가 없는 것임을 반증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로부터 자녀에 이르기까지 계속 보응하신다고 할지라도 저희는 모두 똑같은 죄를 범한 자들인고로 변명이나 불평을 할 여지가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자녀들과 열조들 모두에게서 그의 영을 거두시고 사단이 그들을 주장하게 하실 때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가 “그들의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라고 바라면서도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서 도말되지 않고 단지 ‘땅에서만 끊어지고 망하기를’ 바라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관습에 맞추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영적인 형벌에 대한 성격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가 아직 충만하고 완전한 단계에 도달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의도는 하나님의 보응을 이렇게 보여줌으로서 온 세상이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묵묵히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3. 본문 16절은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이제 자기 원수들, 즉 잔인함으로 목말라 만족을 누릴 줄을 모르고 격렬해져 더 강퍅해 환난 당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되 죽은 개를 공략하는 것만도 못하게 여기는 자들에게 이토록 무시무시하고도 비참한 환난이 임하기를 바라는 그 좋은 이유를 밝힙니다.
철학자들도 도움 받지 못하고 비참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무자비한 행동을 가하는 것을 보면 이를 다만 비겁하고 천박한 것으로밖에 여기지를 않습니다.
질투란 서로 동등한 자들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선지자는 자기 원수들의 악행이 자기가 가난하고 궁핍한 중에 있을 때에 감당하기가 어려운 핍박이었다고 말합니다.
시편 109 편
“마음이 상한 자” 라는 표현은 더 강조된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에 부풀어 있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이기에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능하신 자의 불쾌함을 유발시킵니다.
반면에 천하고 마음에 상심한 자를 멸시한 것은 지독한 잔인함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림자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족 모르는 잔인함이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라는 구절로 지적됩니다.
이 말씀은 이 무죄하고 처참한 사람이 고통당한 것을 본 그 사람에게도 그 고통이 긍휼한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여 일반적인 사람의 책임을 도외시함으로서 야만적인 성향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는 한편의 그토록 완악한 교만과 다른 한편의 하나님의 엄하시고 변경할 수 없는 심판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자기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말하므로 이 저주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하늘 보좌에서 내리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한편으로는 불의한 자들에게 원수 갚는다는 말을 통해서 우리가 같은 피조물들을 해치려고 하는 강퍅한 마음을 억제시키고 굴복시킴과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를 통해 우리의 슬픔을 완화시켜 주고 누그러뜨려 줌으로서 악한 자들이 우리에게 가하고 있는 곤욕들을 인내로 견딜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악인들은 얼마동안 형벌을 받지 않은 채 자기들의 욕망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협은 하나님이 환난 당한 자를 변호해 주시는 방패가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신실한 자들은 스스로 온유하게 처신하여 자기들의 겸손과 영적 회개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스스로는 택함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분할 수 없으므로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의무가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도록 간구해야 하며, 각 사람의 복을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이 순전하고 평안하다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끊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109 편
시109:17-20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본문은 그 행악자들이 그렇게 저주를 받게 되어진 원인에 관한 말씀입니다(16-20).
그 원인은 그 행악자들이 남들을 그렇게 핍박하고 저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악을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 법입니다.
특별히 그 받는 보응이 성경상으로 그 행악자들의 행한 일에 비례(比例) 될 때에,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인 사실을 드러냅니다.
1. 본문 17-19절은 “(17)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 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18) 또 저주하기를 옷입듯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19) 저주가 그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입니다.
1) 다윗은 여전히 자기 대적들의 죄를 열거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판단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원수들을 엄격히 취급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나아갈 때마다 인정할 양심의 증거로 확증을 얻은 다윗은 여기서 자신과 원수들 사이의 문제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저주와 복을 나타내는 말들이 과거 시제로 ‘저주가 저에게 임하고,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이지만 이 말씀은 소망 또는 바람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원수들에게서 받았던 것과 똑같은 그 무엇에라도 견줄 수 없는 곤욕이 그들에게도 닥치기를 계속해서 바라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자비의 행위에는 낯선 자가 되고 악을 행하는 데에는 기쁨을 누리던 자가 모든 종류의 재난을 당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주’ 가 ‘저주(cursing)와 악담(imprecation)' 을 의미한다고 보고, 이 사람은 저주를 발하는 자였기에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불행과 저주가 있었으며 이것이 그의 입술로 나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좀 더 포괄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싶습니다.
즉 그 원수는 손해를 입히고 욕을 하는 방법으로 모든 자비의 흔적들을 짓밟고 없애 버릴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예기치 못하는 자들과 선한 자들에게 자기가 입힌 환난을 기쁘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09 편
2) 주석가 중에 18,19절을 과거형으로 “저가 저주하기를 옷입듯하더니”로 번역합니다.
이 번역은 ‘그 원수가 값진 옷을 입듯,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자였다.’
또 ‘저가 옷을 입듯이 저주로 덧입고 있는 자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또 ‘고질적인 질병처럼 저주가 그 뼈의 골수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해석은 더욱 간단한데, 즉 ‘저주가 저주로 외투처럼 자신을 뒤집어 쓰고 허리띠처럼 자신의 허리를 동이며 뼈속에까지 침투하게 하는 악한 자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을 받아 여기서 말하는 것을 무모하게 따라 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시인이 여기서 개인적인 관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요, 그가 말하고 있는 대상은 평범한 성격을 지닌 자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다윗은 성도의 지체 속에 속하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비의 계명을 간과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 모든 지상적(地上的)인 생각 그 이상으로 끌어올려 그에게서 모든 원한을 떨쳐 버리게 하시고 또 난폭한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 주셨기에 거룩한 평온과 영적인 지혜를 가지고 버림받은 자들을 분쇄하여 멸망으로 쫓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저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여 실제로는 자기의 하나님을 향해 적대 행위를 노출시킴으로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의 내용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취하고 싶은 해석은, 즉 저가 남을 해롭게 하는 것과 잘못을 저지르는데 몰두해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의롭고 자비로운 행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주의해야 할 점은 모든 악인들의 음모들은 분명히 그들의 머리위로 다시 떨어지리라는 것과 그들이 더욱 격렬하게 다른 사람들을 향해 노를 발할 때에는 세시아스(Cecias)라고 불리는 바람이 불어와 그에게 구름을 몰아치듯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기를 열심히 바라고 있는 불행이 자기들 위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본문 20절은 “이는 대적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입니다.
행위의 이득이나 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해 주시라는 말입니다.
시편 109 편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즉각적으로 나오는 보응을 지적함으로서 자기는 온 인류에게서 모든 도움을 다 빼앗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구원해 주실 것이며 그의 종이 당한 해를 보응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무모하고 분별없이 자기 원수들에게 저주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있는 체하면서도 무모하게 절제와 온유의 한계를 넘어선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명석한 믿음의 눈으로 보고 건전한 마음으로 열심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경건을 함양시키고 하나님의 손에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날이 임박해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다윗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세상이 자기에게 웃어 주거나 찌푸리는데 따라 자기의 갈 길을 정하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가장 잘 변하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괴로움을 당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상이 우리를 버린다 해도 이 거룩한 사람을 본받아 우리 머리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거기서 우리의 보호자와 구원해 주실 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곧 자신의 뜻을 성취시킬 자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모든 땅에 속한 도움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에 회의를 품지 말고 우리가 평안한 마음으로 묵묵히 따라갈 수 있는 결정을 하나님이 만족하게 나타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 109 편
시109:21-27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본문에서부터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해 주시기를 청원합니다(21-31).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여 주실 근거를 몇 가지 진술합니다.
(1) 먼저 다윗은 “주의 이름” 때문에 구원해 주시기를 청원합니다(21절 상반).
다윗은 자기 자신에게는 구원받을 공로가 전연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세우셨으니, 그 사실이 무실(無實)하여지지 않아야
하나님의 이름이 빛날 것이었습니다.
(2) 다음에 다윗은 “주의 인자” 때문에 구원해 주시기를 청원합니다(21절 하반-27). 마침내 다윗은 자기의 불쌍한 처지를 진술하므로 하나님의 인자를 쳐다봅니다.
1. 본문 21-22절은 “(21) 주 여호와여(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 칼빈)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22)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입 니다.
원수들을 향해 불평과 저주를 퍼붓는 행동에서 시인은 기도드리는 데로 나갑니다.
자기 보호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한 후 스스로 기도할 기회를 취합니다
이 경우는 마치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해주는 경건한 사고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했던 예배에 대해서도 그것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그 행위를 자랑하거나 또는 그 자신의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과 자비에 자신의 모든 신뢰를 바쳤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죄악을 드러내려고 그가 의식한 성실성을 원수들과 대조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어떤 보상을 받기를 열망하지 않는데 우리는 이 점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발적인 선택에 기인하고 있고, 또 자기의 안전이 거기에 달려 있다고 아는 고귀한 법칙을 그가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미덕과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길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다윗은 분명히 이러한 자랑을 가장 많이 해야 할 사람입니다.
더구나 다윗은 그리스도와 온 교회의 대표자가 아닌가, 여기서부터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지 않으면 연기처럼 공허하게 사라져 버리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09 편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실로 특별한 것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성부의 진노를 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존했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의 본을 받아 우리들도 동일한 근원을 향하도록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가장 의로운 자가, 많은 죄를 범한 관계로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채무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성품으로 자신의 은혜가 우리 안에 비취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하나님을 우리의 채무자로 여기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어떤 보상을 받을 만한 어떤 선천적인 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짧고 덧없는 생명을 유지해 나갈 때, 하나님이 그의 인자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면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말 할 때 우리의 선행에 신뢰를 둘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 생명이 이 땅에서 잠시 연장됨을 통해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인자하심과 자유하심을 나타내신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단의 횡포에서 건지사 그의 식구로 택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나의 죄악을 씻으시며 그의 성령으로 나를 거듭나게 하시며 나를 그의 아들과 하나 되게 하시며 나를 하늘의 생명에 인도해 주시기에 하나님이 나를 관대히 대해 주시는가를 느낄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찬송할 만한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은총을 입기 위해 자기가 당한 가난과 슬픔을 말하는 다윗의 행위는 얼마나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가?
사람이 겸손해져서 자기의 교만과 반역하고자 하는 생각을 굴복시키지 않고서는 외면적인 환난이 아무런 효험이 될 수 없기에 시인은 자기 마음이 자신 속에서 상처를 입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의 탄식과 한숨을 토하며 환난가운데서 순수한 마음을 강퍅하게 먹지 않는 겸손의 영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에게도 의사가 되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본문 23절은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가오며”입니다
이 두 비유는 매우 적절합니다.
첫 비유는 102편 12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시편 109 편
환난 당한 자와 거의 생명이 없는 자를 석양의 그림자에 비유한 것은 적절합니다.
동이 틀 무렵 또는 한낮의 태양이 밝게 빛날 때에는 그림자가 매우 짧아서 거의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가 질 무렵에는 그림자가 우리보다 앞서서 지나온 모든 순간들을 스쳐 나아갑니다.
둘째 비유는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무상한 성격을 지적해 줍니다.
메뚜기들이 언제나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다윗은 끊임없는 핍박으로 생명의 평안을 누리지 못했고 쉴 곳도 없었다고 탄식합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사냥군들이 사방에 덫을 놓고 있어 새처럼 날아다니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말과 비슷합니다(시11:1).
다윗은 쉴곳을 찾을 수 없고 사람들 중에도 거할 수 없던 자신의 고독함을 탄식합니다
다윗은 온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 주기에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무기력한 자리에서 우리를 세우신다고 놀랄 필요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타인들을 말하면서 저희가 거할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4:11).
이 말씀은 많든 적든 간에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 적용될 것입니다.
3. 본문 24-25절은 “(24)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25) 나는 또 저희의 훼방거리라 저희가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삶의 필요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절제로 자신을 쇠약케 했는데, 다윗은 기도 뿐 아니라 극도로 절제를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이 다윗의 슬픔과 비애를 당하고 있는 사람이 식욕을 잃어버리듯 먹고 마시는 흥미를 다윗이 잃어버린 것을 나타낸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 자체도 짐이 됩니다.
혹 이 말씀을 다윗이 원수들의 분노를 피해 들짐승들의 동굴에 있으면서 굶주리고 목말라 하던 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부족했던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제한적인 해석을 택하는 자가 있다면,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말씀은 다윗이 죽음에 직면하여 모든 식욕을 잃어버림으로서 극도로 괴로움을 당한 것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이 해석은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라고 한 하반절과도 일치합니다.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fatness’ 라는 말을 진수성찬으로 이해하며 이 말씀은 혀끝을 기쁘게 해주는 음식을 모두 빼앗긴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시편 109 편
보다 더 자연스러운 해석은 다윗이 슬픔과 금식으로 쇠약해져서 본래의 윤기마저도 쇠진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7절에서 다윗이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슬픈 입장에 이르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선포했던 저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견뎌낸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프고 쓰라린 일입니다.
율법은 율법 멸시자들을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신28:37)합니다. 다윗은 이런 종류의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은 또 자기가 정죄를 받은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잔인한 조롱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것을 담당해 주시기 위해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슬픔을 도와 주시지 않기에 악한 자들은 우리를 환난으로 짓누를 수 있는 것으로 보일 때는 오만하고 교만하게 우리를 대함과 동시에 우리의 믿음과 경건을 비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4. 본문 26-27절은 “(2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
(27)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입니다
선지자는 그의 기도를 반복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단의 속임수와 음모의 공격을 받을수록 우리는 더욱 열심히 애를 쓰며 더욱 담대히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 은혜 나타내심을 지연하시거나 악한 자들이 우리를 비방함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갖가지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신 분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공격을 견뎌내기 위해 다윗이 긍휼과 인자하심에 따라 자기 백성들에게 필요한 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피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은 구원이 자기에게 미치기를 간구하되 일반적인 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독특하고 특별하신 방법으로 나타나서 자기 원수들이 무안을 당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끔 그의 종들을 은밀히 구해 주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그의 손을 펼치사 악인들이 눈을 가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종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시편 109 편
다윗은 원수들이 자신들을 높여 하나님을 대적하듯 그는 자기의 원수들이 굴복하게 되고 자신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뽐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소망을 성취시킴에서 다윗은 전쟁에서 스스로 영웅적 명성을 떨치기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여 어떤 육체도 하나님 앞에 영광 얻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원수들로부터 구원 받는 것과 다윗의 환난을 동시에 가리킵니다.
다윗의 소망은 자신의 구원을 주로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은 운명이나 모든 인간적인 구원의 수단과 정반대가 되므로 하나님만이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자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만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구원받기를 고대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 자는 백 명 중에 한 사람도 있을까 말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훨씬 더 뛰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자라면 누구든지 더욱 조심해서 자기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밝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준다면 이는 가장 불합리할 것입니다.
시편 109 편
시109:28-31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을 저주해도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 주시면, 다윗을 구원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28, 29).
다윗은 하나님이 원수들에게서 구원해 주실 때 감사하며 찬송하겠다고 합니다(30, 31) 신자가 구원받는 목적은 자기 기쁨이 아니고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것입니다.
1. 본문 28-29절은 “(28)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29) 나의 대적으로 욕을 옷 입듯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하소서” 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주석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망 또는 바라는 것을 표현한다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희를 저주하고 나를 축복하소서, 저희가 일어날 때에 수치로 옷입게 하소서’(칼빈). 또 다른 사람들은 직설법 미래형으로 보고 “저희는 저주하여도 .....” 로 봅니다.
우리는 이 해석에 선뜻 동의합니다. 혹 이 구절을 직설법으로 간주하고 시인 편에서 자기 원수들의 저주를 참고 극복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하는 자가 있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해석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도로 보는 자들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께 간구를 드려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으므로 이제는 자기 원수들의 저주가 자기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주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방법을 통해 자기 원수들이 혀의 독과 칼의 세력을 가지고 자기에게 공격해 온다 해도 이런 원수들의 위협을 자기가 얼마나 사소하며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보여준 예를 통해 우리 원수들의 모든 계교를 깨뜨릴 수 있는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삼아 용기를 가지고 원수들의 원한과 사악함과 오만함과 세력과 분노를 막아 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나타날 때는 사실상 우리의 마음속에서 세상의 위협을 당한다는 두려움을 몰아내버릴 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자기 원수들의 음모와 공격을 담대하게 무시해 버리며 그들은 전쟁 도중이라 해도 하나님의 복을 방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믿음으로 승리의 환호성을 외칩니다.
시편 109 편
이 승리는 하반절에서 더욱 인상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저희는 일어날 때 수치를 당해도’ 라는 말씀을 볼 때 다윗이 말하려는 것은 자기 원수들의 제어할 수 없는 격렬함이 아직 굴복 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손이 자기 위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한 그들의 사나움을 다 견딜 수 있음이 분명히 밝혀집니다.
다윗은 활기차게 세상 모든 교만과 맞서 자신을 지켜 나감과 자신의 본을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 원수들의 강퍅함이 자기들보다 유익한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이고 순간적인 파멸로 자기들을 위협할 때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해 줍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기에 다윗은 장래 모든 슬픔에서 구원받게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눈물을 기쁨으로 변하도록 정해주신 그 적절한 때, 즉 충만한 때가 이를 때까지 우리의 시련들을 인내로 온유하게 견뎌야 함을 배웁시다.
다음 구절에서도 다윗은 계속 동일한 기쁨의 지류를 말합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오만해 있는 것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그는 믿음의 눈으로 사물의 현 상태를 초월해서 보았기에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계교를 헛되게 하실 것과 그들의 모든 계획을 경멸하시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2. 본문 30-31절은 “(30)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찬송하며 - 칼빈)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
(31)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 이로다” 입니다.
1) 이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 원수들을 저주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거룩한 용기를 가지고 원수들을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줍니다. 그 이유는 이미 자기 소망의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릴 준비를 갖추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한 것처럼 불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자기를 두둔하여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자기가 감사를 드리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알게 하려는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다윗은 ‘우리는 혼자 있을 때나 아무도 우리를 보아 주지 않을 때에 우리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인자하심을 묵상할 뿐이 아니라 규정된 찬송의 제사를 드릴 때에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힘입고 있는지를 말하리라. 이러한 의도에 어울리게 다윗은 위대한 사람의 “무리 중에서” 또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라고 말합니다.
רבים(라빔) 이란 말은 이 두 경우 모두 번역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위대한 사람’ 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봅니다.
시편 109 편
다윗은 고상하고 고귀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회중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장차 자기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애매한 상황에서만 아니라 많은 백성들의 무리와 다스리는 자들과 고귀한 지위에 있는 자들 중에서도 깨닫게 될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릴 때 입술로 말하기 앞서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열심 없이 냉담한 찬송만 한다면 이는 마음과 입술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윗이 혀에 관해 언급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는 마음을 다 드리지 않고 찬송 한다는 것이 다만 귀를 헛되게 하고 하찮은 일에 열중케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영혼의 깊은 바닥에서 마음으로 느끼는 감사를 열렬한 찬송으로 부릅니다.
다윗이 보여준 동기에서 성도들은 피차에 덕을 세우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탈취해 버리는 것이 됩니다.
2) 한편 다윗은 또 감사를 덧붙입니다.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다윗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사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실 때도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에게서 적절한 때 필요한 도움을 받을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분명히 다윗이 당한 가난과 환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과 인자를 거두어 가셨거나 숨기셨던 것인 만큼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으로 여길 만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환난과 곤고함을 당하는 도중에 이렇게 멀어져 있는 광경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결코 자기에게 도움 주시기를 그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영혼을(생명을 - 칼빈) 판단하려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라고 말함으로서 자기가 당한 모든 시련의 모습을 더욱 강력한 빛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들의 위대한 막강함을 교만하게 여기면서 다윗의 본래대로 되는 데는 소망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왕이나 방백들과 같은 엄청난 원수들과 맞섬에 있어서 그들은 마치 죽은 개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믿기로는 다윗은 이 구절에서 자기 원수들이 잔인하게 괴로움을 주는 것과 아울러 자기가 비방과 중상모략으로 부당하게 모략하고 있음을 탄식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다윗은 실제로는 권위를 가지고 교만하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거짓으로 자기들이 심판자와 공의를 집행하는 것을 원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자들의 악감과 사악함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럴듯한 구실로 자기들의 죄를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110:1-3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1)
오늘은 전체의 대강과 표지 설명에 이어서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으로 마치겠습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통치의 영원성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의 영속성을 공포합니다.
1. 먼저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누구도 대적 못 할 권능과 통치권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대적들을 정복하시는 것과 또 그 대적들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시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 합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먼 곳까지 넓히실 것을 덧붙여 말씀합니다.
3. 그 다음에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엄숙한 맹세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 직분에 앉으시도록 명함을 받아서 왕의 직분을 누리시는 영광과 함께 대제사장 직분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실 것을 말씀 합니다.
4.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제사장 직은 새로운 질서를 이루게 되고 그 때까지 잠정적 이었던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은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은 영원할 것을 말씀 합니다.
5. 이렇게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바 대로 삼위 일체 우리의 그리스도를 “왕 같은 제사장” 이라고 말씀할 때마다 바로 이런 분으로 말씀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시며 하나님 자신의 계시 방식이기도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는 방식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실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고급한 형식과 내용이 됩니다.
1. 이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 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서술하는 이 시편은 친히 그리스도의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서술에 나타난 증거를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근거가 필요치가 않습니다.
시편 110 편
설령 본 시편의 저작인에게서 권위를 찾을 수 없고, 또 이 시편의 권위를 사도들의 증언에서 전혀 들을 수 없다 해도 이 시 자체가 다른 여하한 해석도 용납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2:42-45절에서 주님은 이 부분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 앞에 아무 논박도 못하고, 즉시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질문에 답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만일 이 시가 일부 유대인들에 의해 달리 해석되었었더라면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이러한 다른 해석 방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로 부터 그들에게 던져진 질문으로 봉착 했던 난관을 피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이 시에 대한 메시아적 해석은 사도들의 증거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1장 13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우월한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여호와께서 천사들에게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34, 35절에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같은 귀절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사실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우리는 고전15:25, 히7:17, 엡1:20절 등의 말씀도 같은 뜻으로 참조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모든 반대를 초월하여 메시아의 신성과 그 분께서 누릴 제사장 직분 및 그분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이렇게 이 시의 해석은 성경 자체, 곧 많은 부분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에서는 그 본래 의미를 잃어 버리거나 복잡해서 혼동할 여지나 축소될 여지가 추호도 없습니다.
또 이 시편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강한 내적 증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몇 랍비들은 이 시편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완고한 민족인 유대인들과 이 시의 바른 해석과 적용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해도 유대인들이 보기에 도저히 저항할 여지가 없는 논조로 여기 말한 진실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지 결코 다윗이나 다른 인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다윗이라는 인물 안에서 그 모습이 예표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 왕국을 널리 확장시키실 왕이요, 동시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어 영원토록 이 직분을 계속하실 이가 다윗이나 그의 후손들 중에 어떤 사람이라는 주장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습니다.
시편 110 편
옛 시대, 곧 그 당시로서는 레위 지파로부터 제사장 직분이 지닌 특별한 영광을 빼앗지 않고서는 새롭고 비상한 제사장의 권위는 결코 수립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제사장 직분을 가진 이를 가리켜 말한 영원성은 결코 사람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현재 생명의 짧고도 불확실한 과정이 끝나게 될 때에 곧 이 영광도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여러 사람을 간략하게 비유한 것으로 여겨도 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통치권을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의 은혜로우신 통치 하에 거하는 그의 친 백성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오늘은 먼저 본문의 총체적 설명을 간단히 듣겠습니다.
1) 우리는 주의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 입니다.
우리는 주의 은택과 주의 사랑을 입은 자들 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이 세상의 군왕들과 그 위대성이나 성직자들이나 고급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부터 돌려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지극히 큰 왕이요 제사장이며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에게만 향합니다.
이렇게 하는 일은 아주 합당한 일이요, 지극히 필연적인 일입니다.
① 옛 시대의 신성한 자들 즉 왕들과 제사장들 및 선지자들이 행하는 습관이었습니다.
② 그리스도 이전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③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에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은 그러하였습니다.
④ 우리가 어려운 시대에 살기에 지금 이 날에 그것이 우리로부터 요구됩니다.
그 이유는 그런 눈을 가지며 그런 길에 서며 그런 길을 가는 중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늘 보좌로 부터 나오는 바 하나님의 크신 위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첫 부분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책을 나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이 시편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세 직책들을 통하여, 특별히 그의 통합된 왕직을 통하여 행하실 여러 가지 역사들을 표현합니다.
우리 중 많은 자들이 기꺼이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우리의 선지자로 생각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중재하기 위한 우리의 제사장으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지시하는 그의 왕직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에 가장 좋게 보이는 거기에 영원토록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왕직은 여기서 우리에게 세 가지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1)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해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라는 말씀이 그런 방식으로 있습니다.
시편 110 편
(2) 그의 원수와 관계해서는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라는 말씀이 같은 방식으로 있습니다.
그의 원수들은 그렇게 많지 않고 그렇게 그를 대적하여 멸시적이지 않지만, 그가 그들 중에서 다스릴 것 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왕직의 매우 찬양할 수 있는 부분 입니다.
그 원수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한 한 왕국을 갖기를 원할 것 입니다.
(3) 그의 왕직의 영광이 있는 세 번째는 그 분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종들, 곧 그의 온 교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한 백성이라, 하나님이 그 위에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는 백성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자발적인 백성이요, 거룩성을 그들의 가장 건실함과 값진 아름다움으로 생각하는 백성 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놀라웁게도 힘이 있는 백성으로 있습니다.
그 분을 계시된 그대로 믿으면 청년 입니다.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과 같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겉사람은 후폐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사실이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으로 노인된 자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노인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백성은 계속 증가되어 갈 것입니다.
그 분만이 주관하시는 거룩한 방식으로만 그렇게 될 것입니다.
(4) 실제로 우리가 주안에서 이런 내용들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경이로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 삼위 일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용 입니다.
시편 기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주의 백성”인데 이 백성의 특성들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이요, 그들은 자발적으로 헌신된 백성이라는 것이요, 기적적으로 권능을 입은 백성이라는 것이요, 또한 때로는 눈에 보이게, 때로는 은밀하신 그 분만의 방식으로 증가될 백성이 될 것이다 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 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알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은 자발성, 거룩성, 은혜의 권능과 은혜로 말미암은 증식이다’ 라고 선언됩니다.
시편 110 편
시110:1-3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2)
오늘은 본문을 한 구절씩 칼빈의 주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본문 1절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입니다.
1) 본문 1절 상반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입니다.
여기 나오는 첫 구절 말씀은 성 삼위 일체 하나님 자신과 관련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어느 정도는 다윗 개인에게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불법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고, 사악한 계교를 써서 왕위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변덕스러운 투표에 의해 왕위를 얻은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에 의해서 위임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이 땅의 모든 임금들에게 적용됩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세워진 것이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13:1)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본문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이 왕국은 아주 특별한 왕국 입니다.
그러기에 이 나라와 다른 모든 나라들을 구분하려는 것이 다윗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임금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신 것은 사실이나 다윗처럼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다윗과 같이 그리스도의 섭정의 지위에 올라 정치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편 82편에서는 이들이 신이라고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왕의 직분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요,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대신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역이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능력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모형으로 영향을 입었던 것과 같은 거룩한 위엄의 옷을 입지는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이 땅의 다른 임금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하게 된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스림을 받으려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이나 세습적인 왕권에 의해서 다스리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시편 110 편
또 다윗은 세상 임금들이 행운이 그에게 따른 덕에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리 생각 하였습니다.
다윗은 특별한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 왕국의 통치가 자기 위임된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땅 위의 다른 왕들은 그들 자신만을 두고 볼 때는 합법적으로 다스릴 자격을 갖지 못한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왕들은 그들을 세워주신 은혜로운 하나님의 손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명령이 이들에게 적절하게 전달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음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통치권을 위임받을 때까지 조야(粗野)한 은둔자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다윗은 때가되자 왜 자신이 세상의 다른 왕들과 함께 분류될 수 없는가 그 합당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다윗은 곧 자신이 하나님의 권리에 의해서 통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전적이며 배타적으로 다윗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수 없음이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답변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마22:44).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로 말했을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향하여 “그러면 다윗이 ....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하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답변이 잘못이라고 제기한 유대인들의 반론은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고 백성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가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다윗이 성도의 무리 중에 한 사람이고 같은 머리에 속한 몸의 한 지체였기에 다윗이 그 자신을 결코 이 무리들로부터 구분하거나 이 머리에서 잘라 낼 수는 없었습니다.
성도들과 한 무리에 참여함 없이 성도들을 위해 이런 시를 쓸 수 없었습니다.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다윗은 예언의 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예언했다는 원리 또는 격언이 당시 일반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런 해석상의 원리를 인정한다면, 다윗이 장차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하실 것을 말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교회의 유일하고도 최고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조상이 되는 다윗의 주(主)로 불려지고 있기에 그리스도에게는 인간성 이상의 한결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견해는 이 절의 하반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세상임금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통치하기에 그의 우편에 앉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에서는 보다 차원 높은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편 110 편
즉 한 왕이 특별한 방법으로 택함을 받아 하나님 다음가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지위에 높임을 받는데 이 왕의 권위가 다윗에게서는 오직 그 그림자가 나타날 뿐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모든 빛과 영광을 발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모든 천사들보다도 훨씬 높임을 받은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앉은 자는 모든 피조물들 위에 높임을 받은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이 다윗에게 종의 위치로 불려지기 위해 높은 위치에서 낮춤을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보좌가 예언의 영에 의해서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들보다도 더 높임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 다른 무슨 결론이 있겠습니까?
이 비유는 임금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자는 임금 다음으로 높은 자라는 세상 임금들 사이의 관습에서 따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자께서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 성부에 의해 이 자리에 올라 최고의 통치권을 부여 받으신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2) 본문 1절 하반은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입니다.
이 표현은 정복자들이 원수들의 목을 발로 밟던 동방 관습에서 온 것입니다(수10:24).
이 말씀으로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왕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오는 원수들의 모든 반대를 굴복시키실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무수히 많고도 흉악한 원수들을 정복하실 때까지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결국 평온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여기서 심지어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전복시키기에 가진 음모를 다 부린다 해도 그 보좌는 확고부동하고 요동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일어서는 모든 자들이 멸망당하게 될 것을 선언 합니다.
이러한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키고 그의 왕국을 전복시키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비록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해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목적을 거슬러 이길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이요, 그러기에 모두 쓸데없는 짓에 불과할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마지막 날이 되기 전에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왕국은 세상 끝 날까지 많은 원수들에서 끊임없는 능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연고로 곧이어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기까지”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완전히 살육을 당한 이후에 일어날 일인데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시편 110 편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하나님께 드릴 것이요, 아버지께서는 그로부터 받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5:24).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것을 중단하시고 한 사람의 사적인 개인으로 되실 것을 의미하는 말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방법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하나님으로서의 엄위하심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는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발 아래로 떨어져 버림받은 자들이 다만 파멸과 멸망을 당할 것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 인류는 본능적으로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꺼이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이 과오가 고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는 먼저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주께서 자신의 영광에 참여할 사람으로 여겨 주십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내쫓아 영원히 버림받은 상태로 남아 있게 하실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입니다.
이 말씀은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들과 관련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시인은 앞서 말했던 것을 다른 표현을 사용해서 확증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홀(笏)을 멀리, 또 넓게 펼치셔서 주의 나라가 거대하게 확대될 것을 덧붙입니다.
다윗은 사실상 적지 않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아왔는데 다른 나라에 비교해 볼 때는 그의 나라가 항상 좋은 지역 내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함축적인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지구상의 가장 먼 지역에까지 넓히사 그리스도께서 시온산에서만 왕으로 통치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나라가 “주의 권능의 홀” 이라고 불립니다.
‘주의 힘의 지팡이’ 나 ‘주의 권능의 홀’ 은 주께서 그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리시는 권능의 홀을 가리킵니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적하여 동맹을 맺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나라는 계속해서 넓혀지고 왕성하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윗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불화와 무질서를 불러 일으키려고 무모한 시도를 벌이는 자들로 인해 낙담하지 않도록 거룩한 자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시편 110 편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보좌의 영광을 오랫동안 지탱하시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권능을 쏟아 내시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혼란으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동요를 받을 때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아무리 많은 분노를 발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떨어져 나가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이러한 도우심에서 우리의 평안을 찾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다스리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스리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무적의 임금께서 내리시는 보호아래서 모든 과오로 부터 보호하심과 지켜 주심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 처지가 수많은 고난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많은 원수들로 에워싸여 있도록 하는 것과 아울러 우리들이 변치 않는 복의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해 주는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내하고 온유하며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확신하고 온 세상의 격한 분노를 담대하게 무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부르심에 대한 교훈을 얻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에 대한 말씀을 여기에서 우리에게 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분류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담이 무너지고(엡2:14) 복음이 널리 반포 되었기에 우리는 교회라는 몸에 한 데 모였고 그리스도의 권능이 우리를 지키고 변호해 주시게 되었습니다.
3. 본문 3절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입니다.
시인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종들의 숫자와 연관해 그의 왕국이 지닌 영광을 말하고 아울러 주의 명령에 대한 종들의 신속하고도 즐거운 순종을 말합니다.
시인이 사용한 히브리어는 종종 ‘자발적인 희생’을 의미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진실한 양의 무리인 택한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즐거운 백성으로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를 섬기게 될 것을 말합니다.
‘주의 군대가 모여들 때에’(칼빈 ; 주의 백성이 ... 헌신하니 -한글개역)라는 말씀은 엄숙하고도 합당한 무리가 가능한 한 자주 소집될 것과 왕이 자기 백성을 자주 헤아려 보시기를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프랑스어로는 au jour des montres (돌이켜보는 날에) 지만 처음 번역이 좋습니다.
시편 110 편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을 모으기 원하실 때는 백성들이 마지못해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주저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왕국이 다른 모든 왕국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특별히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임을 확신시키려는 의도로 “거룩한 옷”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종이 된 모든 자들이 세상의 왕들에게 대하듯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 하나만을 가지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심령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것임을 뜻합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라는 구절에 관해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해석들을 다 살펴본다고 해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구절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캐낼 수 있다면 다른 관점의 해석들을 일일이 들지 않더라도 무관하리라 믿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구절에서 다윗이 그리스도의 백성이 크게 늘어나는 역사 가운데 유감없이 드러나는 하나님은 은총을 찬미하고 있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같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놀라웁게 늘어난 결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젊은이들 또는 전체 사람들을 이슬에 비유하고 있는바, 이는 사람들이 이슬이 내리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아침 이슬이 땅을 적시고 또 새롭게 소생시킴을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듯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온 땅에 퍼지게 될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새벽의 이슬 방울들과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가리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고 명명합니다.
히브리어 ילדות (얄두트)는 집합 명사로서 단순히 하나 하나의 개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 또는 집단을 가리키는 명사입니다.
이 용어에 대해 혹 보다 더 명확하고 특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의미를 파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새벽의 이슬 방울들과도 같이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은 소산이 그리스도의 태로부터 탄생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예언이 합당한 근거를 가짐은 곧 경험이라는 증거가 뒷받침하는 바와 같습니다.
짧은 시간에 모여 주의 지배에 따랐던 무리들은 이 사실을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 생명의 탄생은 오직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만 성취되어 왔고 더구나 온 세상의 무서운 대적을 무릅쓰고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이제 막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나이 많은 사람들이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들로 불린다고 해서 별로 놀랄 것은 없습니다.
영적 탄생은 모든 성도들로 새로 태어난 아이가 되게 하는 까닭입니다(벧전2:2).
시편 110 편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라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교회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미루어 교회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된 호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줄 압니다.
또 비록 그들의 숫자는 적지만 멸망 중에 누워 있고 진노의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놀라운 사실이겠습니다.
더 놀라움은 이 많은 무리들이 주의 영과 말씀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신속하고 기쁜 마음으로 수행하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특별한 영광이요, 하나님의 택하심의 상급이라는 점을 마음 속에 잘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멍에를 기쁘게 메는 자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자기 백성으로 알아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섬기는 것만으로 자기 의무를 잘 수행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은 매우 적절하게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외부적인 의식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르도록 해주시는 것처럼 참된 경외심을 갖고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10 편
시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으로 사역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중보자의 역할을 하십니다(히7:15-28).
본문 4절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입니다.
이 구절은 여기서 말한 사람이 그리스도이신 충분한 증거를 제시해 줍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언을 신비롭게 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כוהן (코헨) 이란 말을 ‘방백’ 으로 번역하는데 이런 번역은 경솔하고 억지요, 추측일 뿐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고귀한 혈통이나 왕족을 כהנים(코하님) 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왕보다 못한 ‘방백’, 혹은 우두머리라는 칭호를 붙여 다윗이 상징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다윗이 말한 그 분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임금이 되셨다고 했을 때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특별하고 유일한 사실, 즉 이 왕은 다른 모든 왕들과는 구별되고 차이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모세가 섬겼던 멜기세덱이 이 칭호를 받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창14:18).
우리는 고대 이방 왕들이 제사장 직분을 함께 행사하기 쉬웠으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참 되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헌신적으로 섬겼기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으로 불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도 이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의 합법적인 계승자였던 웃시야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문둥병으로 하나님의 채찍을 맞았습니다(대하26:21).
다윗의 계보와 연관된 제반 상황은 멜기세덱과 관련된 자들의 경우와 크게 다릅니다.
이 새로운 왕 안에서 제사장의 거룩한 직분이 면류관 및 보좌와 함께 결합될 것이라고 한다면 이들 왕들이 처한 지위의 의미를 확증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10 편
왕의 권위가 멜기세덱처럼 잘 알 수 없는 경우 그 왕을 다른 모든 왕들 위에 자리잡을 본보기로 두드러진 존재였음을 보장할 만한 여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멜기세덱의 왕권에서 유일한 보좌였고, 멜기세덱이 관용으로 다스렸던 살렘은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에 불과했기에 그가 왕권과 제사장 직을 함께 갖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그에 관해서 별달리 살펴볼 만한 아무런 자료가 없습니다.
백성들에게서 보다 큰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이방 나라의 왕들은 제사장 직분을 함께 누리는 영광을 몹시도 갈망 했었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이 이 두 가지 직분을 함께 갖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입히심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이 곧 다윗이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라고 하는 점에 대한 모든 의혹은 사도의 권위에 입각하여 우리 마음에서 깨끗이 씻어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끝까지 반대의 의미를 주장한다 해도,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거룩한 옷” 으로 표현한 이유가 이 구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아울러 이 구절에는 왜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의 지위에 있어 다른 모든 왕들 보다 높으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레위인들의 제사장 직분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하여 특유하면서도 결정적인 표적을 덧붙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관련해서 하찮은 의미의 일과는 결코 함께 나타나는 일이 없는 거룩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맹세’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경우를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은 신중히 경건히 맹세하는 분이며 막중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면 결코 맹세하지 않으심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메시아가 그 백성들의 왕이자 주관자가 될 것이라고 맹세하시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줄 따름 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어떤 특별하고 독특한 사실을 나타내려는 것이 분명한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실제로 증명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 직분이 더욱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우리 구원의 성취 여부가 달려있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보자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자신에게로 불러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변호자가 되어 주실 것을 맹세 하셨습니다.
시편 110 편
자기 자신을 향해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실하지 못하신 분으로, 또 맹세를 깨뜨리시는 분으로 탄핵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들 입니다.
사도가 레위인들의 제사장 직분 말소를 주장한 것도 이런 바탕 위에서였습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이 그대로 존속하는 동안 어떤 변화가 생각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새로운 제사장의 법도를 맹세하시지 않았을 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제사장을 약속하셨을 때 그 새로운 제사장은 다른 모든 제사장들보다 더욱 우월하신 분이며 그때까지 존속하고 있던 법도를 폐지하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본문에서 “변치 아니 하시리라” 는 말씀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취소되거나 중단될 수 없는 맹세의 절대적인 성격을 가리킵니다.
이해 관계에서 계획과 행위를 변화시킴이 하나님의 뜻을 변화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변하셨다’ 는 말씀은 인류의 악함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창6:6).
이와 비슷한 표현 방법이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선포 하시고 맹세하신 것은 결코 변하지 않은 사실을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 되었습니다(민23:19, 삼상15:29).
어떤 사람들은 (디베라티) 라는 말을 ‘나의 말을 따라’ 로 번역합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이 번역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י (요드)라는 문자는 종종 불필요하게 덧붙여지는 경우가 있기에 우리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처럼 이 말을 단순히 “반차”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봅니다.
또 그리스도와 멜기세덱간의 비교를 잘못 해석한 조상들이 적지 않기에 우리는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그 유사한 점들을 배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의 말씀을 통해 조상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한 점을 쉽게 발견합니다.
성령께서 사도의 입을 통해 말씀 해 주신 모든 신비한 말씀들은 간과한 채 오히려 사도가 말하지 않은 것만을 알아보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오직 떡과 포도주에 관해서만 논쟁을 벌이며 멜기세덱과 그리스도 오직 두 분 모두가 떡과 포도주를 헌물로 바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이 드린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니라, 여행하기에 지친 아브라함에게 새 힘을 주는 음식으로 준 것이었습니다.
성만찬에서는 이러한 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떡과 포도주가 헌물로 바쳐지지 않고, 오히려 성도들 사이에서 서로의 성찬에 참여 합니다.
시편 110 편
본문을 재음미해 보면, 그 유사점은 기본적으로 “제사장 직분의 영원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영원한” 이라는 뜻의 לעולם (르올람) 이란 낱말을 볼 때 분명해집니다.
모세는 멜기세덱을 하늘 나라의 사람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비슷한 점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영원성을 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죽음이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로막지 않았던 까닭에 그리스도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다는 사실이 따라 나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사도가 다룬 점입니다.
이 사실은 나아가 교황주의자들의 미사가 저주를 받아야 할 만큼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인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교황 주의자들의 사제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케 하는 특권을 맡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신 특별하고도 비할 바 없는 영광을 그리스도에게서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시편 110 편
시110:5-7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간단하지만 이 시편에는 신약 시대와 및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사실들이 명백하게 기록되었습니다.
1. 본문 5-6절은 “(5)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6)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입니다.
이 시편에서 1절의 ‘예흐바’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이며, 4절의 ‘아도나이’는 성자, 곧 메시아가 되신 하나님의 칭호로써 그의 신성과 통치, 왕으로서의 권능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사 ‘예수의 이름에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일 것’을 의미 합니다.
이것이 1절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24에서 “저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의 우편에 계신 주’ 라는 말씀은 메시아께서 성부의 우편에서 그의 왕으로서의 권능을 행사하시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여기서 우편은 하나님의 파라스타테스가 되시는 성부의 우편이 아니라 시16:8이나 다른 곳에서처럼 돌이켜 그리스도를 도와주시는 성부의 우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높임을 받은 성자에 대해서 우리는 요5:22에서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아도나이’ (主), 즉 주께서 그의 진노의 날에 열왕을 치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를 대적하던 자들에게 지극히 준엄한 보응을 내리시리라는 것 입니다.
이것은 합당한 말씀입니다.
신약에서 이 보응은 특별히 그리스도께 해당된 것으로 ‘인자의 오심’ ‘구름을 타고 오심’ ‘인자가 천사와 함께 오심’ ‘인자의 나라가 가까운’ ‘인자의 도래’ 등으로 불립니다.
이 시편 5절에서 시인 다윗은 여호와를 향하여 갑자기 돈호법, 곧 글의 중도에서 갑자기 사람 또는 물건의 이름을 부르는 어법을 사용합니다.
Horsley 는 ‘주의 우편에’란 원어 다음 본문에 ‘여호와’ 란 말이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구절을 “주의 우편에 계신 주 여호와여” 라고 번역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멸망시키기 위해 소유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무서운 본질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이 말씀을 방편으로 해서, 두려운 원수들의 무리가 에워싸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사악한 시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께서 세우신 왕을 굳게 보호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시편 110 편
“그 노하시는 날에”라는 표현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원수들의 잔악함과 맹렬함이 우세할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마치 얼마 동안 자신들 숨기고 계시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인내로써 그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원수들에게 보응을 내리시기에 충분하고도 적절한 때가 언제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열방과 할례받지 못한 입술을 가진 자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유대 거민들만을 다스리도록 왕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시편2편 8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예언한 바와 같이 멀리 떨어진 나라들도 그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도록 택하셨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또 유대땅 안에서 뿐 아니라 온 지상에 반역과 불순종하는 자들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멸망을 내리시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기필코 그 앞에 부복하여 그들의 완악함이 굴복 당하고야 말 것을 가르쳐 줍니다.
2. 본문 7절은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입니다.
적지 않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매우 조야(粗野)한 방법으로 해석합니다.
즉, 살육이 너무나도 커서 그 흘린 피가 급류를 이루어 정복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마실 수 있도록 흐른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Michaelis 와 Doederlein이 주장하는 견해 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들에 대한 무서운 살육이 종종 시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한다거나(신32:42), 시68:23(24)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들을 무찔러 피를 흘리게 해 그 피에 발을 담근다거나 씻는다는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에 취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처음 두 비유의 말씀과 이 말씀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피를 마신다는 생각을 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본성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특별히 모세의 율법으로 짐승의 피를 마시는 것을 엄격하게 제재 받았던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세속인과 그 공동체의 본성에도, 성도와 교회의 속성에도, 삼위 일체 하나님의 속성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논리가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모든 사태를 평가하는 원리 입니다.
이 말씀을 슬픔과 비통을 비유로 나타내는 말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잠시 이 세상에 계실 때 겪으셨던 환난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들의 해석도 같은 부류에 속합니다.
시편 110 편
그러나 이 비유는 원수들이 맹렬하게 몰려 올 때에 안일한 생각으로 자기의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이, 흐르는 시냇물을 마셔 목을 축이는 것으로 만족을 누렸던 용감하고 힘센 장수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방법으로 기드온은 용감하고 싸움에 합당한 전사들을 골라냈습니다.
엎드려 물을 마시는 자를 용기가 없는 자로 여겨 각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삿7:5).
다윗은 그리스도를 향한 군대의 용감한 행위를 비유로 나타내서 자기 자신이 새 힘을 얻는 여유를 가지려 하지 않고 길을 가다가 만난 강물을 급히 마실 것을 말합니다.
Grotius는 이 말씀이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지극한 열정을 어떤 장애물로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하고 능동적인 전사(戰士)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가 원수를 뒤쫒을 때에 그를 맞아 포도주로 그를 쉬게 해줄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다만 급히 지나가는 길에 물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강물이든지 급류든지 간에 그 물로 만족했다”고 합니다.
Schnurrer는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원수들을 죽이기에 지쳐 있었으나 중단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시내에서 취한 물로 힘을 얻어 가면서 패주하는 원수를 새로운 힘으로 추격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원수들에게 그들의 멸망이 속히 올 것을 알게 하여 그 두려움으로 놀라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 혹 어떤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격어야 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온유하고 유순한 영은 어디에 있단 말 입니까?
이런 질문에 우리는 충족하게 답변 합니다.
이사야(41:1,2, 47:2,3)에서 목자가 자기 양 무리들에게는 온유하지만, 이리나 도둑들에 대해서는 사납고 맹렬한 것 같이, 그리스도도 자신이 보살펴 주어야 할 사람에게는 친절하시고 온유하시지만, 완악한 마음으로 끝내 그리스도의 주신 바 멍에를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그가 가진 엄청나고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대하신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시편2:9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손에 철장을 가지고 자기 원수들의 모든 완악함을 깨뜨리신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원수들에게 보응한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엄청난 두려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온유하고도 부드럽게 불러 주실 때에, 곧은 목과 반역하는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진노가 우리에게로 향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