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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파랑새7
위 내용을 삭제하지 마세요!!
(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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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cafe.naver.com/sisa33/38372?tc=shared_link
출처: https://youtu.be/u9aIAmp13V4
전단지 가득 넣어 띄우려다 실패 …638명 에워싸 차단 / SBS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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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전 #SBS뉴스 #실시간 #경기
〈앵커〉 납북자 가족모임이 경기도 파주시에서 대북전단을 살포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경기도는 특별사법경찰을 투입해 대북전단 살포를 차단했습니다. …
출처: https://youtu.be/RuwKIdnCgGc?si=YhWNc_nTBbu8sa2w
내란 내각 우두머리’ 한덕수, 미국에 기대 대통령 꿈꾸나?
조회수 7회 · 3시간 전#한덕수 #조기대선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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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시보
638
출처: https://youtu.be/e3WXrlD2rrM?si=aXzNTDVPkKeNlxmB
모두가 놀란 대법원 내부 상황 충격!! "이르면 00일 선고일 지정".. 공소 기각? 정치권이 긴장하는 이유
조회수 3.1만회 · 1시간 전언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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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알아야 바꾼다
75만
출처: https://youtu.be/lsVEV84wukc?si=Cr8ittpxXQg49zP5
터보램젯 복합엔진 시초 SR-71. 6세대 KF-21 복합엔진 가능할까?
조회수 7.7천회 · 4시간 전#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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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아보기Gust&Thunder
7.18만
출처: https://youtu.be/QpC06Vu0ls0
헤그세스 경질설과 이란 공격/ 日이시바 “美에 양보하지 않겠다”/ 美 제독, 중국과 전쟁 예측
스캇 인간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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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전 #관세전쟁 #대만전쟁 #이란
APR.23.2025 본 채널은 시청자님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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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주를 주기 싫으면 8개 주를 줄 것/EU, 미국 평화협상안에 반대/푸틴의 우크라이나 평화유지군 계획/우, 유럽에 5500억 유로 지원 요청/트럼프 협상안에 대한 러시아의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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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6.5천회 13시간 전
출처: https://youtu.be/uUQJVW8bQWM
벨 통신 756 호, 트럼프, 젤렌스키 축출할까? // 미국, 우크라 평화 중재 포기 // 우크라, 정면으로 미국 평화안 반대// 러시아 입장은 ?
러시아 학당 (Russia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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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전
4/23, Время покажет 시사프로그램입니다. 사회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젤렌스키는 미국의 평화 휴전안 거부했습니다, 젤렌스키는 말하기를 크림은 우크라 영토로 헌법에 이미 규정되어 있다, 크림 포기할 수 없다라고발표를 합니다. 런던에서의 유럽, 미국 평화회담참석전에 트럼프 제안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뉴욕타임즈, 젤렌스키 크림 영토 포기 거절이후 미국무장관 마르코루비오외 위트코프특사는 런던행을 취소했습니다, 이것은차후 우크라 평화휴전안에 대한 미국의 추진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며, 독일,영국, 프랑스 외무장관도 런던회의에 참석을 취소했습니다. 결국 어제 런던에서 개최될 평화 회의는 고위급참석이 무산되 버리고
출처: https://youtu.be/jkos4qM0SH4
벨 통신 755 호, 푸틴과 러시아 공산당과의 관계는? // 모스크바 영화제 개최 // 러시아, 오만과 노비자 협정 // 러시아의 위대한 조각가 소개
러시아 학당 (Russia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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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183회 20시간 전
4/22, 1 TV, 러시아와 오만오늘 양국간에 노비자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오만의 술탄이 러시아를 방문해서 푸틴과 회담을 하엿습니다, 이 자리에서 농업, 에너지 분야등 10개 항목에 관해 양국간 협력을 합의했습니다. 오만 술탄을 맞이하는 푸틴입니다. 라브로프 외무와 오만 외무장관은 별도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오늘 회담에서오만의 술탄은 푸틴을 오만국가에 초청하였으며 푸틴은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푸틴이 말하고 있습니다. 1985년 오만과 국교수립시 본인이 사인한 기억이 난다고 말하자 술탄은 40년전 외교관계수립후 양국은 꾸준한 협력 발전 수행해 왔다고 화답하자 푸틴은, 작년에 오만은 상페테르부르크의 국제 경제포럼에 회원국으로 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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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youtu.be/vWeDG-doS5k
트럼프가 완패한 미중 관세전쟁!/제프리 삭스, "트럼프가 내 학생이면 낙제처리"/린이푸, "중국은 오래전부터 무역전쟁 시뮬레이션!/WSJ, 냅킨과 같은 트럼프의 원칙없는 경제정책"
월드 리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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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대중관세율 145%는 지나치게 높다면서 그 수치를 상당히 낮추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로 관세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가 145%를 매기겠다고 해놓고 지나치게 높다고 하니 황당한 노릇입니다. 그는 과거 관세가 제로였을 때 미국이 완전히 망가졌다고도 했습니다.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열린 폴 앳킨스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 취임 선서 행사 이후 중국과의 협상 상황을 묻는 질문에 이 같이 답했습니다. …
출처: https://youtu.be/jxWXDWGnMH4
제2의 플라자 합의를 앞둔 일본의 선택은?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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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5회 21시간 전 #일본 #플라자합의 #트럼프
#일본 #플라자합의 #트럼프
출처: https://youtu.be/YTdZ6eoQB-Q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우크라·나토 발언 주목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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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2025. 4. 23.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요 발언과 행보를 우크라이나 전쟁, 한국 사안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출처: https://youtu.be/drq0eFncyxQ
김태형의 세상읽기 159회ㅣ부르키나 파소 자주화와 한국의 교훈
통일시대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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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전
출처: https://youtu.be/I5ZRVl7eveU
'사람에게 충성 않는다'는 양심적 군인들의 심리 ㅣ 심리학자 김태형
촛불행동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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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529회 19시간 전 백자-김태형의 ㅆㄷㄱ
촛불행동 공식 유튜브입니다. 촛불민심을 담아내는 방송과 영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촛불행동tv에 더 많은 지지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
출처: https://youtu.be/mxzwBR1kAM4?si=oLN1L_-3gAPu4SSI
밴스의 오만함을 꾸짖은 중국학자의 패기!/"중국인은 샹바라오(촌놈)이 아니다"/"중국의 중산층은 미국 전체 인구보다 많아"
조회수 2.2천회 · 6시간 전...더보기
월드 리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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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youtu.be/lXrYFnxeoI0
놀랍도록 유사한 서방 민주주의와 소련 공산주의의 위기!/역사의 종언, 그리고 보이지 않는 대안!
월드 리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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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758회 19시간 전
박상후입니다. 이번 방송에서는 서방 민주주의 위기는 소련 공산주의 위기와 유사하다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2014년 1월 말 러시아매체 Regnum.ru에 실린 바짐 본다르라는 정치 평론가의 글입니다. 그는 영국 FT를 인용해 글을 시작했습니다. FT는 이 혼란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이라는 제목의 매우 주목할 만한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출처: https://youtu.be/KUlGY9LroeA
이재명 대구·경북 지지율 40% “국민의힘 붕괴 시작” 신용한 “내란 세력 척결을 위한...”
조회수 14만회 · 1일 전...더보기
스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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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youtu.be/1rxDNjFmBWc
"이래서 대법원장도 굉장히 위험한 인물이라고 했던거에요" 40대가 15살과 대체 뭘 했길래.. 조희대 결국 사생활논란 터졌다, 역대급 자백에 회의장도 초토화
정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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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명 시청 중 스트리밍 시작: 15시간 전 #이재명 #윤석열 #김건희
출처: https://youtu.be/j5w_6f-NDcg
【요약본】 마약을 덮으려 계엄을 선포했다고?!!!!
열린공감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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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77만회 10일 전 40개 제품
#윤석열 #김건희 #최은순 #마약 #인천공항 #세관 #한덕수 #마약사건외압 #백해룡 #열공 #열린공감 #한동훈 #검찰 #경찰 ◼열린공감TV 제작 극 영화 [앉은뱅이 주술사 ‘쥴리'](가칭) 를 제작안내 (크라우드펀딩 오마이컴퍼니)로 펀딩해 주세요. https://www.ohmycompany.com/reward/16118 …
출처: https://youtu.be/yg66fvLuPP0
[조선구하기1] 조선 농민 VS 일본(전국&에도) 농민, 끝장을 보겠습니다.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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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2만회 5일 전
이 동영상에 추가된 설명이 없습니다.
출처: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9930
[조원씨앤아이 여론조사] 민주당, 2주 연속으로 국민의힘에 10%p 차 이상 우세
21대 대선 프레임 공감도, '정권 교체' 60% 이상
범진보 대선 후보 적합도, 민주당 이재명 부동의 1위
범보수 대선 후보 적합도, 한덕수 1위 & 김문수·홍준표·한동훈 각축전
이재명, 대선 3자 가상대결서 모두 52% 이상 지지율로 압승
기자명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4.23 14:43
출처: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9742
[여론조사 꽃 전화면접] 한덕수 대선 출마 "부적절하다" 70% 육박
차기 대권주자 선호도 조사, 민주당 이재명 1위
尹 재판 관련 지귀연의 행태, "특혜다" 60% 이상
尹 재구속 필요성 조사, "필요하다" 60% 이상
기자명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4.21 15:25 댓글
출처: https://m.blog.naver.com/finch1234/223844082349?recommendTrackingCode=2
지귀연의 기이한 윤석열 구속 취소, 재판 특혜는 기획된 청부 재판일까? 배후는 조희대?
때가올지니깨어있으라
16시간 전
이웃추가
박선원 의원이 정말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 주셨네요.
[최진봉의 핫스팟] '윤석열 석방' 지귀연 하소연 중? 박선원 정보 들어보니...
https://www.youtube.com/watch?v=ed8BNSTVnrI
내용 정리:
2020년 9월..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윤석열 정부들어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서훈 국정원 원장은 구속 까지 되었다..
현재는 보석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기획 수사였다고 하네요.
김태효가 문제 제기를 하였고..
윤석열이 정권 잡자 마자..
전 정부를 때려잡자는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의 재판부가...
바로..지귀연 이었다.
헐...
이 재판이 지금까지 2년 7,8개월 끌고 오고 있다..
아직도 재판이 계속 되고 있다네요.
기획수사를 배당받은 판사...지귀연...
이때부터..지귀연이 맡은 재판은...
다분히 청부 재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윤석열 내란 수사 재판 역시...
그러한 성격을 띠고 대법원 측에서
지귀연에게 이 재판을 배당한것 아니겠냐는 추론이다..
서해공무원 사건은 전정부를 고통주려는 재판이었다면..
지금 윤석열 재판은 어떻게 하면..
특혜를 더 줄까 하는 재판이라고 합니다.
1월27일...이상하게도
심우정이 윤석열 구속을 최대한 늦춘다..
그 급박한 시간에...검사장 회의라면서
엉뚱하게 8시간 지연시켰다..
그것이 그들의 고도의 기획인지는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귀연이 날짜가 아닌...
시간으로 계산하며.. 윤석열을 풀어줬을때..
그리고 심우정이 즉시 항고를 하지 않으면서
내란수괴가 감옥에서 탈옥에 성공한것이다..
당시 지귀연은 이 재판에 자신이 배당된다는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청부 재판의 성격을 띤것이다..
그렇게..심우정과 지귀연은 암묵적으로 구속 취소라는
희대의 기상천외한 위법 행위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한 의심이 드는것이다..
더이상 지귀연은 청부 재판을 하면 안된다..
김용현, 노상원 내란 재판 역시 지귀연이
전부 비공개 비밀 재판을 하고 있다..
세상에...얼마나 중요한 내란 재판인가..
그런데..비공개 라니...
윤석열 재판 역시...
중요 인물을 증인으로 불러야 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증인을 부른것도..
이상하고...
뭔가 봐줄려고 계속 꼼수를 부리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이 재판 역시도..청부 재판으로 본다.
지귀연을 이용한 두가지 청부 사건을 볼때...
이 두 재판이 상당히 대법원 쪽과 조율된...
누구가에 의한 의도된 느낌이 든다...
출처: https://youtu.be/X0AEtASnP0U?si=H82BY7vYeKgdQDE1
민주당 첩보!! 대법원이 속도를 내는 '진짜' 이유 떴다!! 헌X가 키맨이었구나 ㅋ
조회수 1.9만회 · 42분 전언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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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알아야 바꾼다
75만
출처: https://youtu.be/6OT0bmon7I8
이재명 해냈다, 사상최초 대구 경북 40% 돌파.. 검찰 작정했다, 김건희 다이아 목걸이 비밀 공개 (윤석열이 밀던 후계자 나경원 탈락.. 임은정 검사 반격 이번엔 법무부)
정치파랑새
구독자 66.8만명
조회수 140,050회 12시간 전
채널에 가입하여 혜택을 누려보세요.
출처: https://youtu.be/nDNOcABsDSY?si=Oli5if4KCzRXZzBK
미국에 배 까고 누워버린 한덕수 ㅣ 심리학자 김태형
조회수 391회 · 3시간 전백자-김태형의 ㅆㄷ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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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동tv
37만
출처: https://youtu.be/5SGJYsOpb3g
충격! 주한미군이 북한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김정은! [코너별 다시보기]
[팟빵] 매불쇼
구독자 241만명
조회수 72,089회 23시간 전 #매불쇼 #최욱 #트럼프
#매불쇼 #최욱 #트럼프 #김정은
출처: https://youtu.be/dzz0GpKO7n8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영토 "고려 500년 역사의 진실. 중국 땅까지 우리 국경이었다고?" | 이덕일 박사 풀버전 #역사
싴 - 내가 찾는 지식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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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시간 전
*본 영상은 이덕일 박사님 인터뷰(1~4부)를 통합한 풀버전입니다. 시청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시는 분들께는 더 많은 유익한 정보가 무료 제공됩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sisa33/5015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13024002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입력 :2018-03-12 17:48ㅣ 수정 : 2018-03-12 17:53
<10> 한국사 줄기 바꾼 ‘철령의 위치’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자국사가 암기과목이 된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교과서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많으니 따지지 말고 외우는 것이 점수 잘 맞는 유일
한 방법이 됐다. 철령의 위치도 그중 하나다. 고려 우왕 14년(1388)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것은 한국사의 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반발한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군을 북상시켰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조선을 개창했기 때문이다.
▲ ①
고려, 조선 및 중국 사료들이 말하는 고려의 북방강역. 지금의 요령성 진상둔진이 옛 철령이고, 흑룡강성 영안현이 공험진이다. 이케우치 히로시가 함경남도로 끌어내린 북방 강역을 100년째 추종하는 것이 이 나라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조선 개창의 계기가 된 철령위에 대해서 현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 후기 명나라가 안변(安邊), 곧 철령 이북의 땅에 설치하고자 했던 직할지”라고 설명하고 있고 국정·검인정 교과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한 곳이 함경남도 안변이란 것이다. 철령위를 설치한 곳은 동쪽인 함경남도 안변인데, 정작 고려군사는 왜 동쪽이 아니라 북쪽인 요동으로 향했을까? 앞뒤가 안 맞으니 따지지 말고 외우는 수밖에 없다.
●철령 두고 다투는 주원장과 고려 우왕
철령은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明史)에 다수 나온다. ‘명사’ ‘조선열전’은 철령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 말기에 요심(遼瀋:요양과 심양)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난을 피해 고려로 이사했다. 황제(명 태조 주원장)가 고려의 말을 사는 기회에 수색령을 내리자 요심 백성 300여호가 돌아왔다.”(‘명사’ ‘조선열전’)
원나라 말기 요령성 일대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고려로 이주하면서 철령의 귀속 문제가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시작부터 요령성에서 발생한 이야기지 함경남도에서 발생한 이야기가 아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홍무(洪武) 20년(1387) 12월 우왕에게 국서를 보내 이렇게 통보했다.
“철령 북쪽과 동서의 땅은 예부터 (원나라) 개원로(開元路)에 속해 있었으니 (명나라) 요동에서 다스리게 하고, 철령 남쪽은 예부터 고려에 속해 있었으니 본국(고려)에서 다스리라. 서로 국경을 확정해서 침범하지 말라.”(‘명사’ ‘조선열전’)
주원장이 철령의 동서북쪽은 명나라 땅이고, 남쪽은 고려 땅이라고 통보하자 우왕은 요동정벌군을 북상시키는 한편 재위 14년(1388) 4월 표문을 보내 “철령 땅은 실로 우리 조상 대대로 지켜왔으니 예전처럼 고려 땅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주원장은 “고려는 예전에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은 철령이라고 꾸미니 거짓임이 분명하다”면서 불화의 단서를 만들지 말라고 받아쳤다. 압록강이 고려 경계라는 주원장의 말은 압록강 서북쪽이 명나라 땅이라는 주장이지 함경남도가 자국령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두 임금은 압록강 서북쪽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지 함경남도는 관심 사항 자체가 아니다.
주원장은 철령을 개원로(開元路) 소속이라고 말했는데, 개원로는 원나라가 요동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했던 관청이다. 그 치소(治所·다스리는 관청)를 중국에서는 지금의 길림(吉林)성 장춘(長春)시 북쪽 농안(農安)현으로 보고 있다.
주원장이 고려 국경선을 압록강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은 고려 고종 45년(1258)의 사건에 있다. 이해 고려의 반역자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서 항복하자 원나라는 여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자국령으로 삼았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자국사가 암기과목이 된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교과서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많으니 따지지 말고 외우는 것이 점수 잘 맞는 유일한 방법이 됐다. 철령의 위치도 그중 하나다. 고려 우왕 14년(1388)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것은 한국사의 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반발한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군을 북상시켰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조선을 개창했기 때문이다.
99년 후인 공민왕 5년(1356) 5월 공민왕은 이 땅을 되찾기 위해 평리(評理) 인당(印)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삼아 “압강(鴨江:압록강) 서쪽 8참(站)을 공격”하게 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두만강을 건너게 했다. 이 구강수복전쟁으로 고려는 압록강~두만강 북쪽의 옛 강역을 수복했는데, 명 태조 주원장이 압록강 서북쪽에 철령위를 설치하자 우왕이 반발한 것이다.
▲ ②
검인정(왼쪽), 국정(오른쪽)교과서의 철령. 공민왕이 되찾은 강역을 함경도 중심으로 표기하고 있다. 공민왕이 되찾은 강역은 압록강~두만강 북쪽의 옛 영토였다.
●중국 사료가 말하는 철령의 위치
‘명사’ ‘지리지’에 따르면 철령위는 둘이 있다. 하나는 주원장이 홍무 21년(1388) 옛 철령성에 설치했던 ①철령위다. 또 하나는 고려의 반발에 밀려 홍무 26년(1393) 북쪽의 옛 은주(銀州)로 이전한 ②철령위다. ①·② 두 철령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다. ‘명사’ ‘지리지’는 철령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철령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에 범하(汎河)가 있다. 또 남쪽에 소청하(小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들어간다.”
철령이 함경남도 안변이면 그 서쪽이 랴오닝성 요하일 수는 없다. 또한 근처의 모든 강이 요하로 흘러갈 수도 없다. ‘명사’ ‘지리지’는 또 ①철령위에 대해서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으로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에 현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는 봉집현이 명나라에서 ①철령위를 설치했다가 고려의 반발 때문에 폐지한 철령이라는 설명이다. 봉집현의 위치는 ‘요사’(遼史) ‘지리지’에 나온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916~1125)나라 ‘집주(集州)·회중군(懷衆軍)’에 봉집현이 있었는데, 원래는 발해가 설치한 현이라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①철령위가 있던 봉집현을 현재 심양(瀋陽) 동남쪽 55㎞ 진상둔진(陳相屯鎭) 산하 봉집보(奉集堡)로 보고 있다. 요령성 본계(本溪)시 조금 북쪽인데, 이 일대는 원래 철광(鐵鑛)으로 유명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철령(鐵嶺)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중국 학계에서도 요령성 진상둔진이라는 철령위를 한국 학계는 함경남도 안변이라고 우긴다.
‘요사’ ‘지리지’는 또 봉집현이 속해 있던 집주·회중군은 “한나라 때는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에 속해 있었다”고 말한다. 요령성 진상둔진이 위만 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세운 한나라 요동군 험독현 자리라는 기록인데, 한국 학계는 위만조선의 도읍지를 지금의 평양이라고 우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명나라는 요령성 진상둔진에 ①철령위를 설치했다가 고려에서 강하게 반발하자 홍무 26년(1393) 심양 북쪽의 고 은주(銀州)로 이전하고 ②철령위를 설치했다. ②철령위는 현재 심양 북부에 있는 철령(鐵嶺)시 은주구(銀州區)다. ①철령위나 ②철령위나 모두 요령성 내에 있었다.
●후세 교육까지 망치는 식민사관
여진족이 세운 금(金·1115~1234)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 ‘지리지’는 “봉집현은 본래 발해의 옛 현이다. 혼하(渾河)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혼하는 심양과 본계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중국 사료들은 주원장이 1388년 설치했던 ①철령위는 심양 남쪽 진상둔진이고, 1393년 이전한 ②철령위는 심양 북쪽 철령시 은주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케우치 히로시는 1918년 ‘조선 우왕 때의 철령 문제’에서 함경남도 안변을 철령이라고 우겼다. 안변 남쪽에 철령(鐵嶺)이라는 고개가 있는 것에 착안한 대사기극인데, 이를 조선총독부의 이나바 이와기치, 조선사편수회 간사이자 경성제대 교수인 쓰에마쓰 야스카즈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일본인 스승님들 말씀은 영원히 오류가 없다”라는 한국 역사학자들이 100년째 추종 중이다.
나아가 이 사기극을 국정·검인정 교과서에 실어서 미래 세대들의 정신세계까지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선조들의 피 서린 강토와 역사를 팔아먹고, 나라의 미래까지 팔아먹고 있건만 이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 있는 당국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인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출처: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20024001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이성계 때 고려 강역도 계승…‘철령~공험진’까지 엄연한 조선 땅
입력 :2018-03-19 17:34ㅣ 수정 : 2018-03-19 17:45
<11> 조선 북방강역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살펴보니
세종 압록강~두만강 확장은 가짜
4군6진 설치 일부 신도시 세운 것
현 국정·검인정교과서 ‘기재 오류’
▲ 온성군 수항루, 6진 중의 하나인 종성읍성의 장대로 뇌천각으로도 불렸다.
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현행 국사 교과서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조작한 역사, 즉 ‘가짜 역사’를 추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조선의 북방강역도 마찬가지다. 현행 교과서는 모두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가 4군 6진을 개척해서 조선의 북방강역이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고 쓰고 있다. 세종 전까지 조선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까지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권 때 만든 중학교 국정교과서는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에게 4군6진을 설치하게 하고 충청·전라·경상도의 주민을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토를 개척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현행 검인정교과서도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삼화출판사)는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출판사만이 아니라 모든 검인정 교과서가 마찬가지다. 교과서 편찬 기준이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세종실록 21년 3월 6일자 “본국(조선) 강역은 공험진부터 철령까지”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조선 북방강역이 심양 남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공험진까지라는 내용이 실록에 계속 나오는 대로 현행 국정, 검인정 교과서는 모두 이케우치가 조작한 설을 추종해서 선조들의 강역을 축소시키고 있다.
조선의 북방강역에 대한 1차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실록은 조선의 북방강역에 대해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태조실록’은 태조 4년(1395) 12월 14일자에서 “의주(義州)에서 여연(閭延)에 이르기까지의 연강(沿江) 천 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공주(孔州)에서 북쪽으로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읍(邑)을 설치하고 진(鎭)을 두어…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라고 쓰고 있다. 태조 이성계 때 이미 압록강~두만강 연안에 읍과 진을 두어 다스렸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 때 압록강~두만강까지 국경을 확장했다는 현재의 교과서 내용에 대해 ‘가짜 역사’라고 수없이 말하고 있다.
세종 때 최윤덕이 개척한 4군의 끝이 여연(閭延)이고 김종서가 확장한 6진의 끝이 경원(鏡源)이다. 그러니 현행 교과서의 논리대로라면 최윤덕, 김종서의 북방 개척 이전까지 여연과 경원은 조선의 강역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태조실록’ 4년 12월조는 여연이 이미 태조 이성계 때 조선 강역이었다고 쓰고 있고 같은 ‘태조실록’ 재위 7년(1398) 2월 3일자도 ‘경원부는 부사(府使) 1명을 두고 영사(令史) 10명, 사령 20명 등을 둔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원은 태조 이성계 때부터 이미 부사를 파견해 다스리던 조선 강역이었다. ‘태조실록’ 7년(1398) 2월 16일자는 동북면도선무사 정도전이 경원부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하는 등 태조 때 이미 조선 강역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 태종실록 4년 5월 19일자, “공험진부터 조선 강역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태종과 영락제의 국경조약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의 북방 경계가 압록강~두만강도 아니라는 점이다. 태조 이성계는 재위 1년(1392) 7월 28일 즉위 조서에서 “국호는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고 말했다. 고려의 의장과 법제를 계승했다는 말은 고려의 강역도 계승했다는 뜻이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서 정종·태종·세종 등은 모두 고려의 북방 강역이 현재의 요령(遼寧)성 심양(瀋陽) 남쪽 철령(鐵嶺)과 흑룡강(黑龍江)성 목단강(牧丹江)시 남쪽 공험진까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태종은 이 국경선을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다시 확인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종은 재위 4년(1404) 5월 19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과 왕가인(王可仁)을 명나라 수도 남경에 보내 두 나라 사이의 공식적인 국경선 획정을 다시 요구했다.
“밝게 살피건대(照得),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의 주(州)인데,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태종은 명나라 영락제에게 공험진 남쪽 땅에 대해서 설명했다. 고려 고종 45년(1258) 12월 고려의 반역자 조휘와 탁청 등이 압록강 북쪽~두만강 북쪽 땅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하자 원나라에서 그곳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지만 공민왕이 재위 5년(1356) “공험진 이남을 본국(本國·고려)에 다시 소속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후 명나라가 심양 남쪽 지금의 진상둔진(陳相屯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고려 우왕이 재위 14년(1388)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명 태조 주원장에게 보내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다시 속하게 하고 공험진부터 철령까지는 본국(고려)에 다시 속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명 태조 주원장이 “철령 때문에 왕국(고려)에서 말이 있다”면서 철령~공험진까지를 그대로 고려 강역으로 인정했다는 설명이었다. 태종은 김첨에게 압록강 북쪽 철령과 두만강 북쪽 공험진이 본국(本國·고려 및 조선) 강역이라는 시말을 자세히 적은 국서와 지도까지 첨부해서 영락제에게 보냈다.
●여진족들의 귀속권
문제는 압록강 북쪽~두만강 북쪽에 사는 여진족들의 귀속 문제였다. 여진족들이 세운 금(金)나라가 원나라에 붕괴된 이후 국가가 없었으므로 명나라에서 여진족들도 사는 이 지역을 자국령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는 삼산(參散) 천호(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여진족 10처 인원(十處人員)이 살고 있었다. 처(處)란 여진족들로 구성된 집단 거주지역을 뜻한다. 이역리불화는 이화영(李和英)이란 조선 이름도 갖고 있었는데 조선 개국 1등 공신이자 이성계의 의형제였던 이지란(李之蘭)의 아들이었다. 태종은 이 여진족들은 조선에서 벼슬도 하고 부역도 바치는 조선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은 비록 여진 인민의 핏줄이지만 본국 땅에 와서 산 연대가 오래고…또 본국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賦役)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의 남은 인민들을 전처럼 본국(本國·조선)에서 관할하게 하시면 일국이 크게 다행입니다.”
국서와 지도를 가지고 명나라에 갔던 김첨이 돌아온 것은 다섯 달 정도 후인 태종 4년(1404) 10월 1일이었다. 김첨은 영락제의 칙서를 받아 돌아왔다.
“상주(上奏)하여 말한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을 살펴보고 청하는 것을 윤허한다. 그래서 칙유한다.”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이 사는 요동땅이 조선 강역임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선도 철령과 공험진이라는 사실이 영락제에 의해 재차 확인되었다. 태종은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심양 남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공험진까지로 확정된 사실을 크게 기뻐하고 계품사 김첨에게 전지(田地) 15결을 하사했다.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재위 8년(1426) 4월 근정전에서 회시(會試)에 응시하는 유생들에게 내린 책문(策問·논술형 과거)에서 “공험진 이남은 나라의 강역이니 마땅히 군민을 두어서 강역을 지켜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서술하라고 명령했다. 세종 때에야 조선의 국경선이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는 현행 국정·검인정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이라면 100% 낙방했을 것이다. ‘세종실록’ 21년(1439) 3월 6일자에 명 태조 주원장이 “공험진 이남 철령까지는 본국(조선)에 소속된다”고 했다고 기록한 것처럼 조선의 국경은 압록강 북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였다. 최윤덕, 김종서 등은 조선 강역 내에 일부 신도시를 세운 것이지 강역을 확장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이케우치 히로시가 조작한 고려, 조선의 북방강역을 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 역사학자가 아니라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도 크게 부끄러워하고 분노해야 할 일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교육부 등 당국자들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출처: https://m.kgnews.co.kr/mobile/article.html?no=645999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두 개의 철령
2021.05.17 06:00:00 16면
고려강역 이야기③
▲ 중국과 한국 사료로 보는 고려강역지도. 지금의 요녕성 심양 남쪽부터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금 아래부터는 고려, 조선의 북방강역이었다. (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대 사기극
한국사에서 철령(鐵嶺)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함경남도 안변에 있는 철령으로서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던 이항복이 북청(北靑)으로서 유배가면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워다가/님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라고 읊었던 그 철령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심양 남쪽의 진상둔진 봉집보(奉集堡)에 있는 철령이다. 고려 우왕 14년(1388) 명나라에서 봉집보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우왕과 최영이 이 땅은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고려강역이라면서 요동정벌군을 북상시켰던 곳이다. 함경도 철령은 ‘쇠로 만든 관문’이라는 뜻의 철관(鐵關)으로 불렸을만큼 험준한 요새였다. 조선에서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조에 함경도 철령에 대해 “(철령은)회양도호부의 북쪽 39리에 있는데, 석성(石城)의 남은 터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였던 이곡(李穀:1298~1351)은 “철령은 우리나라 동쪽에 있는 요해지(要害地)인데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에서 막으면 일만 사람이 덤벼도 열지 못한다. 그래서 철령 동쪽의 강릉(江陵)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 한다.”고 말했다. 이 함경도 철령은 명나라가 철령위를 세우려던 곳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만주에도 철령이 있고 함경도에도 철령이 있는 것을 이용해 만주 철령을 함경도 철령으로 바꿔치기 하는 사기극을 구상하고 실천했다. 명나라에서 철령위를 설치하려던 철령이 만주 철령이 아니라 함경도 철령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철령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하면 초등학생도 사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이 사기극을 아직도 한국 사학계를 장악한 강단사학자들이 추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현재 사용하는 검정 교과서는 명나라에서 설치하려던 철령위를 함경도에 있는 것으로 서술해서 국민들을 속이고, 미래 우리 사회의 주역인 중·고교생들에게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중국 백도백과가 말하는 철령위의 위치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던 철령이 요녕성에 있었다는 사실은 다름 아닌 중국측 자료들이 말해주고 있다. 먼저 세계최대의 온라인 백과사전이라고 선전하는 중국의 《백도백과(百度百科)》는 철령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명나라 때 은주(銀州)에 철령위를 설치했다가 명 홍무(洪武) 26년(1393)에 철령위를 심양과 개원(開原) 사이에 있던 옛 은주 땅으로 이주했다. (철령위의) 남부 강역은 요동도지휘사 철령위에 소속되었고, 서부는 요하의 부여위(扶餘衛)와 겹쳐서 속해 있었고, 북부는 삼만위(三萬衛)에 속했는데, 겸하여 한왕(韓王) 주송(朱松)을 철령, 개원에 봉했다.”
명 시조 주원장의 홍무(洪武) 21년은 곧 고려 우왕 14년인 서기 1388년인데, 이때 은주(銀州)라는 곳에 철령위를 설치했다가 고려에서 요동정벌군을 북상시키는 등 강력 반발하자 1393년에 심양과 개원 사이에 있던 옛 은주 땅으로 이주했다는 내용이다. 은주(銀州)라는 곳이 어디인지만 찾으면 철령위의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다. 《백도백과》는 “당 현종 개원 원년(713) 발해 대씨(大氏)가 이 지역을 차지해서 부주(富州)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나중에 명나라에서 철령위를 설치하는 지역은 대진(大震:발해)에서 부주로 삼았다는 것이다. 《백도백과》는 “거란 신책(新冊) 2년(917)에 요(遼) 태조가 이 땅에서 은를 제련했기 때문에 부주(富州)를 은주로 바꾸었는데, 요나라 때는 강역의 대부분이 동경도(東京道) 요양부(遼陽府)에 속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태조가 부주(富州)에서 은을 제련했기 때문에 은주(銀州)라고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지금의 요녕성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해서 적고 있는 것으로 함경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심양 남쪽부터는 고려땅이라는 《명사》 〈지리지〉
철령위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사서는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明史)》일 것이다. 《명사》 〈지리지〉는 ‘철령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철령위는 홍무 21년(1388) 3월 옛 철령성에 설치했다. 홍무 26년(1393) 4월 옛 은주(嚚州)땅으로 이전했는데, 곧 지금 다스리는 치소다. 철령은 서쪽으로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으로 범하(汎河)가 있고, 또 남쪽으로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흘려서 요하로 들어간다.(《명사》 〈지리지〉 철령위)」
《명사》 〈지리지〉은 철령위 서쪽에 요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하는 요녕성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함경도 안변 서쪽에는 요하고 범하고를 막론하고 강 자체가 없다. 철령 서쪽에 요하가 있다는 구절 하나만으로도 철령위는 함경도 안변이 아니라 요하가 흐르는 요녕성에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철령) 남쪽에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1396) 이곳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설치했다. 또 범하성(范河城)이 철령위 남쪽에 있는데, 범하성(汎河城)이라고도 부른다. 정통(正統) 4년(1439) 이곳에 범하천호소(汎河千戶所)를 설치했다. 동남쪽에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곧 옛 철령으로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년에 봉집현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명사》 〈지리지〉 철령위)」
《명사》 〈지리지〉에서 말하는 주요 내용은 셋이다. ①철령위 서쪽에 요하가 흐른다. ②봉집현이라는 곳이 주원장이 홍무 21년(1388) 원래 철령위를 설치했던 곳인데, 고려에서 반발하자 1393년 지금의 철령시 은주구로 옮겼다. ③봉집현이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곳이다. 곧 고려와 국경을 이루고 있던 곳이 봉집현이다. 따라서 이 봉집현이 어디인지를 찾으면 명나라에서 설치했던 철령위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다.
▲ 중국에서 지금의 심양시 남쪽 진상둔진 탑산각 아래의 옛 철령성 자리에 세워놓은 봉집보 표지석.(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심양 남쪽부터 고려의 강역
중국의 《역사사전(歷史詞典)》은 봉집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당(唐)나라 발해국에서 집주(集州)를 다스리기 위해서 설치했다. 치소(治所:다스리는 곳)는 지금의 요녕성 심양시 동남쪽 봉집보(奉集堡)이다. 금(金)나라에서는 귀덕주(貴德州)에 소속시켰는데, 원(元)나라에서 폐지시켰다. 명나라 홍무 초에 다시 설치했다가 얼마 후 폐지시켰다.”
당나라 발해국에서 설치했다는 것은 동북공정에 따라서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우기는 것에 불과하다. 봉집현은 대진(발해)에서 설치한 집주를 다스리던 곳인데, 진상둔진(陳相屯鎭) 탑산각(塔山脚) 아래에 있는 곳이다. 현재 중국의 여러 사전들은 《명사》 〈지리지〉에 나와 있는 내용, 즉 봉집현 남쪽부터는 고려 강역이었다는 사실은 슬그머니 빼 놓고 ‘당나라 소속의 발해국…’ 운운하는 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 심양 남쪽의 봉집현 자리를 어렵게 찾아간 적이 있다. 처음에는 찾지 못해서 헤매다가 두 번째 답사 때 겨우 찾은 지역이다. 중국 심양시에서 비록 수풀 속에 숨겨두었지만 봉집현 자리에 표지석을 세워놓은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새롭다. 중국학자들은 물론 당국도 심양 남쪽 봉집현이 옛 철령위 자리이고 이곳부터는 고려 강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표지석까지 세워놓았다. 한국은 아직도 조선총독부 역사학을 추종하는 강단사학자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하고는 함경도 안변이 철령위라고 우기고 있다. 요녕성과 함경도를 구분 못하는 것은 물론 강원도 삼척과 경상북도 영덕·포항도 구분할 줄 모르는 강단사학자들이 왜곡한 《한국사교과서》를 지금도 사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나라는 나라다운 나라가 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 이덕일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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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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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sejun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57
고려말 명나라와의 국경 철령위 ‘강원도 철령’ 아닌 ‘요동의 철령’이었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7일 국회에서 한국간도학회 주최 학술세미나 개최
정태상 교수, “일본 학자들도 일제강점 초기에는 ‘요동의 철령’이라고 주장”
▲ 7일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한국간도학회 주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고려말인 1387년 12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철령을 양국간의 국경으로 할 것을 고려에 제의해 왔는데, 그 철령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강원도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라는 기존 학계와 다른 주장이 제기됐다.
사실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의견이 조금씩 제기되어 왔는데, 이번에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그렇게 잘못 알려진 원인을 보다 분명하게 밝히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따라서 고려말에 문제가 된 철령이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라면, 고려말 명나라와 고려간의 국경이 압록강 이북 요동땅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의 정태상 연구교수는 지난 7일(월) 국회 의원회관 제2 소회의실에서 개최된 한국간도학회 주최 학술세미나에서 이같이 주장하고, 그 근거로 뜻 밖에도 일제 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제시했다.
정 교수는 이날 세미나에서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1913년),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18년) 등 일본 학자들조차도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요동의 철령’이라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 <그림 1> 1387년 12월 명태조가 국경으로 삼고자 한 철령의 위치에 관한 주장의 변화.
◆ 그런데 왜 ‘강원도 철령’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가?
정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부터 조작했다는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한 총35권의 ‘조선사(1938년)’에서 ‘요동의 철령’을 압록강 이남 ‘강계(江界)’로 끌어내리고, 다시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 1941년)가 ‘강원도 철령’으로 굳혔다. 해방 후에도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출신 이병도 박사를 중심으로 스에마츠 야스카즈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러한 주장의 사료상의 근거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고려의 사료가 아니라 ‘명실록, 명사, 요동지’ 등 중국측 사료이다. 명실록(1388.4.18) 등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압록강까지는 고려 땅 임을 분명히 인정했다.(高麗地壤舊以鴨綠江為界) 또한 고려에서 철령과 그 북쪽 땅이 고려땅임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는 철두철미하게 고려가 ‘요동에 있는 철령’과 그 이북 땅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한 것으로 단정하고, 거부하는 외교문서를 고려에 보내왔다는 것이다.
지명이 중국과 우리 측 양쪽의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지금도 중국 요녕성에는 철령이라는 이름의 큰 도시가 있으며, 그 당시에도 요동에 철령이 있었던 것이다.
▲ <그림 2>조선사편수회 『조선사』(1938년)의 철령위 부분.- 조선사편수회(편),『조선사』 제3편 제7권, 조선총독부, 1938, 273쪽.
“명나라가, 철령위를 고려 강역내(강계)에 설치하려고 하였다”고 자의적으로 써넣고, 지명들을 모두 압록강 이남의 지명인 것으로 우겨넣었다.
◆ 왜곡의 근원(根源)은 조선초에 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정 교수는 철령과 관련한 사실이 잘못 알려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위화도회군 세력이 건국한 조선왕조의 초기에 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측 기록에는 고려의 요동정벌 이전에 이미 명나라에서는 요동땅 봉집현에 철령위를 설치(1388.3.27)한 것으로 되어있는데도, 고려측 기록에는 이를 누락시키고(고려사 연표에만 간략히 기록), 고려에서 외교를 잘하여 명나라에서 철령위 설치 논의를 중지한 것처럼 왜곡되게 기록했다.
철령위 설치 문제는 외교적으로 잘 마무리됐으므로 고려 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 정벌은 쓸데없는 짓이었으며, 따라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정당한 것으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 현재에도, 한국측에 보존되어 있는 사료만 보면, 당시 명나라에서 '강원도 철령'을 국경으로 하여 철령위를 설치려고 한 것처럼 보이고, 중국측의 사료를 보면 시종일관 '요동의 철령'을 국경으로 하고자 하여, 요동의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한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주된 원인은 위화도 회군 세력에 의해 고려말의 역사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그 후 실학자의 연구에 의하여도 이러한 왜곡은 바로 잡아 지지 않았다고도 지적했다. 당시에는 중국 측 사료의 수집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실학자라 하더라도 태조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회군에 관한 문제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
▲ <그림 3> 중국 요녕성 철령시 철령박물관.
이에따라 정 교수는 현재 중국측에서는 고려말에 명나라에서 철령위를 ‘강원도에 설치’했으며, 강원도 철령의 북쪽은 명나라 땅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고 꼬집으며,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로 잡지 않음으로 인해서 중국 측에서 억지 주장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그러면서 “이러한 중국 측의 억지 주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만약에 우리 세대에서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나중에 큰 화근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 https://m.kgnews.co.kr/mobile/article.html?no=647099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공민왕이 수복한 땅이 함경도라고?
2021.05.24 06:00:00 16면
고려강역 이야기④
▲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가 [국사대관]에서 그린 고려강역도, 함경남도도 차지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있다.(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짓의 역사
현재 중·고교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검정 한국사 교과서는 공민왕이 재위 5년(1356) 수복한 영토가 함경남도 지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식 풍습을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하였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고, 원·명의 정세 변화를 틈타 요동지방을 공격하였다(고등학교 한국사, 교학사, 60쪽)”
교학사 한국사교과서는 지도에서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지금의 함경도 영흥에 있었다고 그려놓고 있다. 교학사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를 폐지한 후 현 정권의 검정을 통과한 모든 한국사교과서가 같다. 공민왕이 수복한 옛 강역이 원나라 쌍성총관부인데, 그곳이 지금의 함경남도라는 것이다. 공민왕의 옛 강역수복전쟁은 재위 5년(1356) 5월 벌어졌는데 이에 대해 《고려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평리 인당(印璫), 동지밀직사사 강중경(姜仲卿)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삼고, 사윤 신순(辛珣)·유홍(兪洪), 전 대호군 최영(崔瑩), 전 부정(副正) 최부개(崔夫介)를 서북면병마부사(副使)로 삼아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게 하였다(《고려사》 〈공민왕 세가 5년 5월〉)”
공민왕이 서북면병마사 인당·강중경과 부사 최영 등에게 공격하게 한 지역은 “압록강 서쪽 8참”이라는 것이다. 즉 고려군의 출발점이 압록강이었고, 수복할 지역은 압록강 서쪽 8개참이었다는 것이다.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북상했는데 현재 한국사교과서는 동쪽으로 갔다고 호도하고 있다. 삼척을 강원도라고 쓴 역사학자들이 이번에는 북쪽과 동쪽도 구분하지 못하고 교과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날 전쟁에 나선 고려군은 두 부대였다. 다른 한 부대에 대해 《고려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고, 전 대호군 공천보(貢天甫), 전 종부령 김원봉(金元鳳)을 동북면병마부사(副使)로 삼아 쌍성(雙城) 등지를 수복하게 하였다(《고려사》 〈공민왕 세가 5년 5월〉)”
한 군사는 압록강 서쪽 8개참을 공격했고, 또 한 군사는 원나라에서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원나라 쌍성총관부는 화주(和州)에 있었는데, 그 위치에 대해 한국사교과서는 모두 함경남도 영흥이라고 말하고 있다.
▲ 공민왕이 수복한 쌍성총관부가 함경도라는 교학사교과서, 모든 검정교과서가 같다.(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두만강 북쪽에 있던 원나라 쌍성총관부
원나라는 고종 45년(1258) 고려의 두 민족반역자 조휘와 탁청이 두만강 북쪽 땅을 들어 바치자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했다. 이에 대해서 《고려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들어서 몽골에 붙었다. 몽골이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쌍성총관부의 총관(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고려사》 〈고종 45년 12월〉)”
조휘와 탁청이 고종 45년(1258) 화주 북쪽의 땅을 몽골에 바치자 몽골이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쌍성총관부 천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공민왕이 북강수복전쟁에 나선 것은 바로 이 땅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공민왕은 쌍성총관부 설치 만 98년 후인 재위 5년(1356) 인당·강중경은 압록강을 건너게 하고, 유인우는 두만강을 건너 옛 땅을 되찾게 한 것이다.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되찾으려던 땅을 두만강 북쪽에 있던 고려의 옛 동계(東界)지역이었다. 《고려사》 〈지리지〉는 동계에 대해서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 이남에서 삼척 이북을 통틀어 동계라고 일컫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공험은 윤관이 예종 3년(1108) 2월 여진족을 구축하고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은 공험진 선춘령을 말하는데,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있다.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부터 강원도 삼척까지가 고려의 동계였다. 이중 두만강 북쪽 땅을 고종 45년(1258)조휘·탁청이 원나라에게 바치면서 98년 동안 원나라가 차지했던 것을 공민왕이 되찾은 것이었다. 이 쌍성이 함경남도 영흥이라고 한국사교과서는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원나라 정사인 《원사(元史)》는 달리 말하고 있다.
▲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국립고궁박물관) 공민왕은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옛 고려강역을 회복한 중흥군주다.(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요동에 있었다는 쌍성과 화주
쌍성이 직접 언급된 사료는 《원사(元史)》 〈식화지(食貨志)〉다 여기에 금은(金銀) 등의 세금을 걷는 과세(課歲) 항목이 있는데, 금을 세금으로 바치는 지역 중에 요동의 쌍성이 있다.
“처음 금을 과세하는 것은 (원나라) 세조 때 일어났다. 익도(益都:산동성 청주)는 지원(至元) 5년(1268) 종강(從剛)과 고흥종(高興宗)에게 명해서 호적에서 빠진 민호 4천으로 등주(登州) 서하현(棲霞縣)에서 도금하게 했다. 지원 15년(1278)에는 또 도금호(淘金戶:금을 도금하는 호) 2천 첨군(簽軍)을 익도와 치래(淄萊) 등의 로(路:원나라 행정단위)에 붙이고 예전에 의거해서 도금하게 해서 그 세금을 태부감(太府監)에 수송해 납부하게 했다. 요양(遼陽)에는 지원 10년(1273), 이덕인(李德仁)의 청을 들어서 용산현(龍山縣) 호벽골[胡碧峪]에서 채금하게 했는데, 매해 금 3량을 납부하게 했다. 13년(1276)에는 요동의 쌍성 및 화주 등처에서도 금을 캐게 했다(《원사》 〈식화지〉 2 세과(歲課))”
원나라의 정사인 《원사》 〈식화지〉에 “요동의 쌍성 및 화주 등처에서도 금을 캐게 했다[遼東雙城及和州等處採焉]”고 기록하고 있다. 쌍성이 함경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다는 것이다. 화주는 쌍성총관부를 다스리는 관서가 있던 곳이다. 공민왕은 두만강 북쪽에 원나라가 설치한 쌍성총관부가 원래 고려땅이기 때문에 재위 5년(1356) 인당·강중경에게는 압록강 북쪽의 옛 고려 강역을 수복하게 하고, 유인우에게는 두만강 북쪽의 옛 고려 강역을 수복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고려는 반도도 차지하지 못했다면서 요동에 있던 쌍성을 함경남도 영흥으로 옮겨놓은 것인데, “우리는 뇌가 없으므로 무조건 일본인 스승님들의 말씀을 따른다”는 신조를 가진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사교과서를 거짓말로 써놓고 학생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료가 말하는 고려 북방강역
명나라에서 설치한 철령위를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함경도 안변이라고 우기지만 명나라 정사인
《명사》 〈오행지(五行志)〉만 봐도 이는 거짓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명사》 〈오행지〉는 명나라에서 발생한 큰 화재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철령위에서 발생한 큰 불도 적고 있다. “홍치(弘治) 16년(1503) 3월 경오(庚午)에 요동 철령위에 북두성같은 불이 떨어졌다. 병자일에 불이 일어나서 방옥(房屋) 2500여 칸을 태웠고, 죽은 자가 100여인이었다.”
《명사》는 ‘요동 철령위’라고 써서 철령위가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철령위가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학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던 이여송(李如松)에 대해서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사람이다”라고 말했고 명나라 장수 조여매(趙如梅)에 대해서도 “호는 초암(肖菴)인데 요동 철령위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철령위가 요동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국은 물론 중국의 사료가 말하는 고려 북방 강역은 심양 남쪽의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까지였다. 한국과 중국의 모든 사료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광복 75년이 넘은 지금도 한국사교과서는 고려 강역이 함경남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호도하고 있다. 사료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광복 75년이 넘도록 득세하고 있는 곳이 한국 역사학계다.
출처: https://m.kgnews.co.kr/mobile/article.html?no=643448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고려 강역은 한반도의 2/3인가?
2021.05.03 06:00:00 16면
고려 강역 이야기①
▲ 2014년 검정 교과서의 북방강역,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까지였던 고려국경이 함경남도 남쪽으로 그려져 있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역사왜곡을 추종하는 것이다.(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국사교과서와 김종서
필자는 중·고교 시절 국사교과서에서 고려의 강역을 묘사한 지도를 보고 “고려는 참 볼품없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려는 한반도의 2/3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도로 국한된 “무궁화 삼천리”에서 동북쪽 천리 정도를 싹둑 잘린 2천리 국가가 고려였다. 또한 국사교과서에는 세종이 “김종서와 최윤덕을 보내 4군6진을 개척해서 조선의 강역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넓혔다”는 내용이 나왔다. 이는 현재 대부분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역사상식이다. 그러다가 김종서에 대한 책을 쓰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내린 명령 중에 이상한 내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은 세종이 김종서에게 이렇게 지시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동북방 땅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말이 전해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本鎭:공험진)이 장백산(長白山:장백산) 북쪽 기슭에 있다고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세종실록》 21년(1439) 8월 6일)”
우리나라의 동북방 경계가 공험진이라는 말이 전해진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 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백두산 북쪽 기슭이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북쪽 기슭도 우리나라의 북방 강역이라는 뜻이다. 중·고교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고려강역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 북관유적도첩 척경입도비. 고려의 윤관 장군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는 비석을 세우는 그림으로 조선시대에 그린 것이다. (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윤관이 세운 비석
세종은 아주 치밀한 성격의 임금이었다. 전지 하나를 내려도 자신이 먼저 공부를 한 다음에 내렸다. 강역문제에 관해 지시할 때는 이 문제를 먼저 깊게 공부하고 관점을 세운 후 명령을 내렸다. 세종의 지시는 계속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에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들으니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공험진)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가? 만일 길이 험해서 사람을 시키기가 쉽지 않다면 폐단 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깊게 생각하여 아뢰라(《세종실록》 21년(1439) 8월 6일)”
세종이 《고려사》를 직접 보고 연구해 보니 윤관이 ‘공험진에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라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국사를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바쁜 세종이 《고려사》를 직접 보고 김종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고려는 북방 강역을 양계(兩界)로 나누었는데, 양계란 북계(北界)와 동계(東界)를 뜻한다. 세종은 《고려사》 〈지리지〉에서 윤관이 직접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을 보고 김종서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는 동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종 2년(1107) 평장사(平章事) 윤관이 원수(元帥)가 되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는데, 공험진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려사》 〈지리지〉 동계)”
공험진 선춘령에 이곳까지 고려의 강역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윤관은 예종 2년(1107) 고려군이 되찾은 강역에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 등의 9성을 설치하고, 공험진성 선춘령에 ‘고려의 강역이다’라는 뜻의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세종은 김종서에게 사람을 시켜서 공험진 선춘령에 가서 이 비석을 찾아보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688리
공험진 선춘령이 어디일까?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을 써 놓은 《민족문화백과사전》은 고려의 동계(東界)에 대해서 “대체로 함경도 이남으로부터 강원도 삼척 이북의 지역이 해당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 동계의 북쪽 끝인 공험진 선춘령이 함경도 이남에 있다는 것이다. 남한 강단사학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자주 펼친다고 필자가 여러 차례 말했는데, 이 부분도 마찬가지다. 《민족문화백과사전》은 공험진에 대해서 동계와는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민족문화백과사전》은 공험진에 대해서 “예종 때 윤관(尹瓘) 등이 동북여진을 축출하고 개척한 지역에 쌓은 9성 가운데 하나이다.”라면서 그 형성 및 변천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공험진에는 내·외방어소(內外防禦所)가 있었는데, 내방어소는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 자리에, 외방어소는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공험진에 두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구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공험진’이라는 말이다. 공험진이 함경도 이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두만강의 경원도호부에서 북쪽 공험진까지 정확하게 688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학자들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고 말해왔다.
《민족문화백과사전》은 ‘두만강 북쪽 700리’라는 사실을 마지못해 써줬지만 이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남한 강단사학이 지금껏 추종하는 조선총독부 역사관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만든 논리가 내방어소(內防禦所)와 외방어소(外防禦所)라는 개념이다. 고려에서 경원도호부에 내방어소를 두고, 공험진에 외방어소를 두었던 것처럼 말해서 공험진을 고려 강역에서 제외하려고 하는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조에는 “(예종) 3년 무자(1107) 2월에 또 공험진에 성을 쌓고 이택(李澤)을 함주 대도독부사(咸州大都督府使)로 삼아서, 비로소 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의 4주(州)와 공험진(公險鎭)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라고 했지 외방어소 같은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조에도 “고려의 대장 윤관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라고 나오지 내방어소 따위도 나오지도 않는다. 무슨 수를 쓰든지 고려 북방 강역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이라는 사실을 왜곡하고 축소하기 위해서 설치하지도 않은 내방어소, 외방어소를 설치한 것처럼 우기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반도사관 추종하는 국사교과서
《민족문화백과사전》은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 선춘령을 지우기 위해서 온갖 꼼수를 나열한다. 먼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을 끌어들인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윤관의 9성 개척 범위에 대해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진출한 것이 아니라, 길주 이남에 한정된다는 길주이남설과 함흥평야에 한정된다는 함흥평야설을 제기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윤관이 개척한 9성이 길주 이남에 한정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을 끌어들였지만 그 속내는 이런 논리를 제시하면서 근거로 삼은 참고문헌에 있다. 참고문헌 중에 일본인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윤관정략지역고(尹瓘征略地域考:1920)」과 일본 만주철도에서 편찬한 『만선지리역사(滿鮮地理歷史:1937)』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반도사관에 따라서 고려의 강역을 반도로 축소한 것을 추종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버젓이 있었던 역사강역마저도 지우는 명색의 학자들이 아직까지도 국사 교과서를 집필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