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한강의 <채식주의자>
의도 임무 그리고 책무의 관계
한 여인 「영혜」에 관한 인간관계를 이렇게 세 사람의 입장과 관계에서 또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며 그리고 임무와 책무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채식주의자」
구성 의도 : 그저 평범한 듯한 여인「영혜」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다른 시점과 시각으로 쓴 3단 연작 단편을 나중에 연작 형태로 묶어 출간하였다. 작가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세 작품(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을 처음부터 구상하고 하나씩 썼다고 이야기한다.
작품 의도 : 책을 읽기 전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이 주는 의미는 책의 내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읽으면서 점점 더 작가의 내면적인 이야기가 낯설면서도 그럴 수도 있다는 데에 어느덧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어갔다.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일단 긍정하면서도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는 통념에 비추어볼 때 이유가 있지만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이거나 차마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릇 나 자신도 이유 없이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참 많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정해진 길인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작품의 줄거리가 굳게 형성되어간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남편과 또 친정 식구와의 관계까지도 소원해지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전반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마지막 ‘동박새’ 이야기는 시적인 표현일 정도로 암시하는 바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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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작품 의도 : 미술가 작가 화가 음악가 비디오작가 등등 모든 창작자들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위대한 인생의 또는 삶의 창조자라면 참으로 높게 평가하고 싶어진다. 무엇인가 만들고 싶다는 그 창작 의욕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의욕으로 만들어지는 내면의 의식 또는 잠재해 있는 자신의 욕망을 ‘몽고반점’이라는 단어를 통해 분출시키고 싶었을 따름이다. 한국인에게 있는 몽고반점은 10세가 넘어가면서 사라진다고 하지만 작가는 그것의 의미를 새롭고 또한 다르게 정립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의 속성을 위장 또는 숨기어가면서.
마지막 부분에 결국 베란다 밖으로 떨어질 수 있는 영혜의 모습에서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상과 영혜가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나무 불꽃을 상상하는 표현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영혜’ 또한 희생자가 아닌 참여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 아닌가? |
「나무 불꽃」
작품 의도 : 저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나무로 변신해 가야만 하는 작가의 의도에 또한 놀랐습니다. 언니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영혜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처연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역시 나무 불꽃은 너무나 순간적으로 불타오르면서 끝난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현실처럼. |
임무와 책무
평범 속에서 이렇게 한 작품을 이루고 시사하는 바를 많이 암시해 주는 것에 대해 독자는 자신을 다시 돌아보아야 하겠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 진앙지가 자신의 법적 · 정서적 파트너인 아내라 하더라고 타인의 열정에 감염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열정, 즉 냉정의 열정이 그의 열정이었다.>는 영혜의 남편에 대한 해설이 우리에게 주는 임무이며 책무이기도 한 것 같다. (해설 234쪽)
<파괴적인 열정에 부딪혀 깨져버린 이들이 숭고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인내의 근육을 가다듬으며 일상의 곡예를 아슬아슬하게 연마한 그녀의 삶을 감히,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또 어디 있겠는가. 욕망을 감추는데 들이는 에너지는 욕망의 나신을 드러내는 데 들이는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막대할 것이다.> (해설 238쪽)
<그녀, 작가는 상처와 치유의 지식체계를 오랜 시간 동안 기록해 온 신비로운 사관(史官)이다. 그녀의 많은 소설은 일상의 트랙을 벗어나 증발해 버린 타인을 찾아 나서는 이들의 움직임을 그린다.> (해설 239쪽) |
읽고 나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잘 살아왔는가? 또 잘 살 수 있는가?
나도 언제나 쫓고 쫓기며 산다. 목표는 있지만 목표에 충실하지는 못한다. 왠지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말이다. ‘채식주의자’는 나에게도 역시나 알면서도 모른 체 하게 만들고 모른 체 하면서도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끝없는 의문점을 제시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즐거우면서도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요사이는 자꾸만 미안한 사람이 하나둘 연속적으로 더 생기는 것 같다. 어제 그제 만난 사람이 아니어도 왜 그렇게 미안하고 만나서 사죄라도 하고 싶은 사람이 자꾸만 많아지는 것일까?
시간 때문이리라. 아니 나 때문이라는 것이 더 솔직한 이야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