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아침을 열어주는 친구들의 카톡 소리에 새벽잠을 설쳤다. 창틀에 앉은 비둘기 한 쌍이 푸드덕 아침을 깨운다. 공복에 따듯한 물 한 컵이 건강을 돋운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온수 한 컵을 들이킨다. 사과 한 알을 보약처럼 먹고 오륙도 골바람을 심호흡한다. 하루의 시작점, 오늘은 무엇을 할까. 누구를 만날까. 어디라도 갈 곳이 있는 날이면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딱히 갈 곳 없는 날이 태반이다. 그래도 수필 창작이란 글 밭이 있어 하루가 바삐 간다.
어제저녁에 쓰다 남은 원고를 주섬주섬 챙겨 살펴본다. 이 녀석은 뱃속에 먹을 귀신이 들어 있는지 주어도주어도 더 달라고 찡찡댄다. 그래도 줄 때마다 조금씩 얌전해지고 이쁜 모습으로 다가와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다. 창작이란 이런 것인가.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고, 그래도 성에 안 찬다. 마냥 배가 고프다. 허기진 뱃속을 보람으로 가득 채워질 그 무엇을 찾아, 눈이 시리도록 글줄을 엮는다.
잠시 글줄을 놓고 해파랑길을 나선다. 양지바른 둔덕에는 코스모스 꽃잎이 한들한들 가녀린 춤을 추고 있고 자줏빛깔 해국이 갯바람에 살랑거린다. 폭염이 날뛰는 날에는 가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찾아 들었나 보다. 계절의 순환은 태양계를 공전 자전으로 돌고 도는 지구의 역할이겠지만 춘하추동이 생로병사의 인생역정과도 같아 삶의 의미를 그 속에 담아 본다.
언제부터인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일 년 후에 다시 오는 그때의 나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도 그 사람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아니면 흐르는 세월에 떠밀려 흩어지는 낙엽이 되었을까. 변화무쌍한 계절만큼 말년의 삶은 너무나도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텅 빈 가슴을 위로해 주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는 이별이 나를 무척이나 슬프게도 하지만 칠순을 훌쩍 넘긴 지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아, 이제는 떠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의연해 진다.
나이 팔십이면 생존율이 30%라는 통계 자료를 보았다. 이제는 다정했던 친구가 떠나가도 “잘 가시게, 함께 해줘서 고마웠네.”라고 담담하게 작별을 고한다. 삶의 여한이야 없겠냐만 살 만큼 산 세상 하루하루가 덤 같은 삶이기에 이별의 슬픔도 그만큼 가벼워진다. 가을이 익어 가면 속절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낙엽처럼 내 삶의 종착역을 알리는 기적이 울리면 나 또한 다해버린 육신을 황혼의 인생 열차에 훠이 훠이 실어 보내리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마가렛 미첼의 경구를 가슴으로 새기며 오늘 같은 내일을 꿈꾸며 산다. 때로는 휑하니 홀로 앉은 하루가 무료하고 떨어지는 별똥별 하나에도 가슴을 조아리던 긴긴밤도 있었지만, 지금은 수필 창작이라는 글동무가 있어 하루하루가 짧기만 하다. 백년지기라도 된 듯 치근대고 달라붙는다. 산길 바닷길 들길을 마다 않고 졸졸 따라다닌다. 때로는 소리소문없이 내 곁을 떠날까 봐 겁도 난다. 죽는 날까지 함께하고 싶은 친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 칭얼댄다. 어젯밤 늦도록 놀아주었는데도 또 손을 내민다. 고쳐 달라고, 생기나는 문장으로 바꿔 달라고, 그래, 열심히 할게. 네가 ‘그만, 그만’할 때까지. 그때는 내가 너를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출거야.
머리가 띵 해온다. 평소에 자주 쓰던 단어인데도 선뜻 떠오르지 않아 끙끙댄다. 문장을 죽일까 살려둘까 햇갈려 눈시울이 머들머들 거린다. 하던 일 잠시 접어두고 심산유곡으로 길 떠날까 보다. 고갈되어가는 소재와 지쳐가는 감성을 충전하기 위해 애마를 타고 설악동으로…….
지난가을, 설악산 대청봉길 오색에서 만난 아담한 할머니를 또 만날 수 있을까. 팔순을 앞둔 연세에 혼자서 오색 야영을 즐기시는 할머니. 캠핑카를 몰고 나 홀로 유럽 일주 여행을 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라고 했다. 그 날을 위하여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 당신의 꿈이 실현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길은 멀어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교훈을 주신 이름 모를 그 할머니가 무척 궁금해진다.
나는 아직도 자동차의 핸들을 잡으면 신바람이 난다. 쾌속 드라이브를 즐긴다. 별빛 쏟아지는공원에서 차박(車泊)의 낭만을 만끽한다. 고즈넉한 산사, 개울물 소리 졸졸대는 자연의 품속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언제나 천국이다. 오가는 길섶에 피어나는 들꽃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이제는 불타는 정열 빨간 장미보다 순애보의 화신 패랭이가 좋다. 싱그러운 라일락보다 화해를 먹고 사는 개망초가 더욱 예쁘다.
눈만 뜨면 손 내미는 글동무가 있어 외롭지가 않고 황혼이 바삐 간다. 넌 정말 좋은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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