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의 교육선교 Ⅱ
작은 교구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구인란 주교는 학교 운영에 계속 관심을 기울였다. 1962년경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대학을 설립하려고 하자 구인란 주교는 춘천에 성심여대를 초청하였다. 교구에서 대학 설립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며 교구의 여학생들이 이 대학에 진학하여 천주교 문화 안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수도회에서 책임운영을 하고 교구에서도 지원을 하였음에도 학비가 비싼 사립대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당시 성심여대는 학교에 대한 평도 좋고, 기존의 여자대학과 달리 천주교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멀리 제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많은 학생들이 진학하였다. 서울 출신의 학생들이 많았으며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그렇다 보니 교구에서 기대했던 만큼 지역 사회 안에서 역활을 다하지 못하였다. 성심여대는 1980년대부터 캠퍼스를 경기도 역곡으로 이전하기 시작하여 3-4년 후에 완전히 춘천교구를 떠났다. 교육은 긴 안목을 갖고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뒷받침할 수 있는 재정도 갖추어야 했지만, 당시 춘천교구는 이를 감당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한 심정이었다.
교육적 환경이 좋지 않았던 강우너도에서 교회는 초등, 중등, 대학등의 정규학교뿐 아니라 자기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활도 하였다. 실업학교를 세워 청년들이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교구에서 정식으로 학교를 세워 운영할 수는 없었으나, 강원도 여러 곳에서 여성들에게 기술 교육을 하였다. 1970년대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화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적인 갈등도 내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변화 속에서 교회는 나름대로의 대응 방안을 모색을 하였다.
강릉의 야재학원과 안토니오 학원, 그리고 훗날 성심중학교로 개칭한 성심굥민학교, 묵호의 남호고등공민학교, 풍수원의 광동초등학교, 성심여자대학교, 춘천과 강릉에서 명문 유치원으로 자리 잡은 성심유치원과 소화유치원, 폐원된 춘천의 대건 유치원, 포천의 복자유치원 등을 통해 춘천교구 사제들은 교육 선교에 헌신하였다. 특히 양재학원은 편물학원이라고 불렸는데 배움의 길이 닫혀 있었던 여성들에게 매우 유익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그 배움을 바탕으로 삶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물론 함께 한 신부들과 수녀들로부터 종교적인 영향도 받았을 것이고 나중에 신자가 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 교구가 교육의 토대를 이루는 초등, 중등학교를 육성하면서 현대 상황의 요구에 따라 직업학교, 기술학교, 성인교육과 사회사업 증진을 위한 교육기관, 특수학교, 교사 양성학교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카톨릭 교육 시설의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지금부터 이에 대한 준비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별히가난한가정 자녀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거나 지원을 하는 본당이나 기관의 활동은 참으로 가난한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에 응답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후원자인 교우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글 / 교회사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