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에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는 공간, 백제 개로왕 시절 고구려 장수왕의 3만 군사에 쫓기듯 자리 잡은 웅진성에서 60여 년 동안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방점을 찍지 못했던 백제 중흥에 대한 염원이 묻혀 있는 공간 이기도 하다. 공산성을 지나 이곳까지 이어져 있는 길을 거닐며 당시에 길게 늘어진 왕 또는 귀족들의 장례행렬을 잠시 동안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해보기를 30분, 어느새 송산리 고분군 바로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석가탄신일을 중심으로 2박 3일 일정으로 내려왔던 공주 여행도 어느새 마무리되고 있었다. 숙소 체크아웃을 마친 후 도착한 송산리 고분군 주변의 날씨가 심상치 않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냥 좋을 것 같았던 날씨는 급작스레 부는 바람과 함께 불어닥친 먹구름이 맑은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고분군 주변에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기 시작했다.
(1) 송산리 고분군 모형 전시관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오면 송산리 고분군으로 통하는 입구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급하게 비가 떨어지기 직전 또는 석가탄신일이 지나고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없어 마치 전세라도 낸 것처럼 편하게 돌아볼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 좋았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도록 모형 전시관이 자리해 있어 고분군을 돌아보기 전, 이곳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전시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모형 전시관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송산리 고분군이 어떻게 등재되게 됐는지에 대한 이유도 자세히 나열돼 있었다. 더불어 연대별로 백제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도 나열되어 있었으며 주요 사실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잘 짜인 구성이 돋보여서 참 좋았다.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도록 한동안 주변을 맴돌며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나름의 배경 지식들의 폭도 넓고 깊어지는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들어왔던 건 송산리 고분군의 주요 무덤 형태인 굴식 돌방무덤을 백제에 국한시키지 않고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가야도 함께 곁들 여설명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덕분에 각 시기 별 고대 국가들 간의 차이점을 시각 자료를 활용하여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었으며 시기 별로 조성된 고분들의 차이점 또한 약 1,500여 년 전 시대 상황들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어서 앞으로 다른 곳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자양분도 함께 소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고분 내부를 직접 들어가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도록 모형 전시관 내부에 실제와 똑같은 모형을 제작해 주변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뒀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고분군 내부를 돌아볼 것을 강력히 거부했던 기억이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당시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어 한편으론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상체를 수그린 채 들어간 고분 내부는 간신히 관 하나가 겨우 놓일 정도였고, 무엇보다 왜 도굴에 취약한지에 대한 설명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령왕릉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 왕릉들 중 삼국을 통틀어 유일하게 왕릉의 주인이 알려진 고분군으로 무령왕릉이 밝혀지게 된 사유와 시기 그리고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들까지 자세히 나열되어 있었고 굴식 돌방무덤을 바로 전에 보고 왔던 내게 눈에 바로 들어왔던 건 사뭇 다른 무덤의 형태, 굴식 벽돌무덤의 형태가 눈에 바로 들어왔는데, 백제의 중흥기를 도모했던 왕인만큼 그 모진 세월을 견뎌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점이 무척 고마웠다.
백제의 25대 왕 무령왕은, 전임 왕이었던 동성왕 대에 강화된 왕권을 필두로 외교와 국방은 물론이거니와 백제의 중흥기를 현실적으로 도모하며 고구려에 맞서 방비를 튼튼히 함과 동시에 치세 내내 잦았던 흉년을 대비하고자 곳간을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하천의 제방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다음 백성들을 옮겨 농사를 짓도록 하는 만큼 다방면으로 업적을 남긴 왕이었다.
그랬던 그거 사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 온전한 형태를 보전한 채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의 은덕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왕릉 발굴을 통해 과거 상당 부분 베일에 쌓여 있었던 부분들을 유물이라는 물증들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는 점들 덕분에 학술적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벽돌무덤의 경우 도굴이 어렵다는 장점 때문에 현재까지 그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와 비슷하게 본 따 만든 내부 모습은 우리가 흔히 국사 교과서에 실린 사진에서 본 그 모습과 동일하게 딱 맞아떨어져 있었고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몇 가지 유물들을 살펴보며 부여를 돌아봤을 때 정림사지를 보면서 느꼈던 비스름한 감정을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발견 직후 발굴 과정에서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이 펼쳐지면서 오늘날까지도 발굴 과정에 대한 아쉬움이 회자되고 있었다.
(2) 무령왕릉의 등장, 그리고 무령왕릉 지석
1971년, 송산리 고분군 6호분에 유입수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베일에 싸인 고분 하나를 우연의 일치로 발견하게 된다. 굴식 돌방무덤과는 무덤의 형태도 달랐고 벽돌무덤의 형태로 발견된 이 무덤은 도굴이 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됐으며 발굴 당시 무덤 내부 묘비석에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라는 정보를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백제의 제25대 왕 무령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해당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전국적으로 센세이션 한 반응을 동반하게 된다.
하지만 유적 발굴의 기쁨도 잠시, 도굴이 전혀 진행되지 않은 채 발견된 온전한 왕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경험이 없었던 국내 학자들은 현장의 온전한 사진을 남겨 가며 수년에 걸쳐 해당 발굴 작업을 진행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현장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아 고분군 주변에 취재 기자들과 얽히고설켜가며 불과 17시간 만에 왕릉 관련 조사를 마무리 짓게 된다. 이에 따른 부작용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나타나게 되는데, 2009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쓸어 담았던 유물들 사이에서 뼛조각이 발견돼 기사로 나온 적도 있어 한숨을 절로 자아내게 만들었다. 물론 이후 진행된 고분 발굴 과정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기회비용치곤 꽤 많은 비용을 치렀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성과도 존재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성과로는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무령왕릉 지석'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유물을 통해 무령왕의 실제 나이와 옆에 묻힌 피장자의 신원과 더불어 다양한 사료의 사실 확인 및 백제 사회 전반의 풍습까지 가늠해 볼 수 있어 그 가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국가의 보물로 지정돼 보전, 관리를 받고 있었다. 송산리 고분군을 다 돌아본 다음 잠시 박물관에 들러 해당 유물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앞에 적혀 있는 설명들과 내부 모형 전시관에서 봤던 내용들을 비교, 대조해 가며 생각을 곱씹다 보니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듯 한 기분을 받을 수 있었다.
송산리 고분군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발굴 당시 사후 처리가 원만하지 못했던 점은 두고두고 회자될지라도 백제 무령왕 사후 약 1,500여 년 간 묵묵히 이 자리를 지키며 온전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선사해 줬다는 부분과 무사히 일제 강점기를 잘 견뎌 냈다는 점만 생각해도 발굴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존재 그 자체에 감사함이 절로 솟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백제사 연구를 위한 기록과 자료들은 부족한 실정이다. 부디 변치 않고 오랫동안 그 유구한 가치를 머금은 채 우리들 곁에서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3) 희대의 도굴꾼 "가루베 지온"
송산리 고분군에도 일제 강점기의 아픔은 보란 듯이 남겨져 있었는데, 바로 '가루베 지온'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반도 고구려 유적을 발굴하면서 고대사를 가르치고자 192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지만, 이미 총독부의 관리 감독하에 발굴 조사가 이뤄지고 있던 평양에서 그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2년 후 1927년 충청남도 공주로 와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과 함께 가루베 지온은 공주보통고등학교에 역사교사로 부임하며 있어서는 안 될 행동들을 자행하게 된다.
조선총독부의 관심이 온통 평양과 경주로 향해 있는 사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가루베 지온은 1933년 총독부의 제지가 있기 전까지 공주 일대의 백제 고분군 총 738기에 대해 발굴조사를 빙자한 도굴 행위를 이어 갔으며 패망 후 이 모든 유산들을 오구라 컬렉션으로 유명한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함께 일본으로 고스란히 빼돌려 소장했다고 한다. 끝까지 관련 사실들을 부정하다가 한국의 공주 국립박물관으로 돌아온 백제 유물들은 기와 4점이 전부라고 하며, 실제로 도쿄 국립박물관과 와세다대학의 야이치 기념 박물관에 가루베 지온의 소장품이라고 표기된 유물들이 '가루베의 소장품'이라고 표기된 채로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4) 여운이 짙었던 공간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처럼 송산리 고분군은 더 이상 고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간 그 이상으로 지금껏 이곳저곳에서 배워왔던 것들이 현실로 와닿게 만들어 준 공간으로 상당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백제는 망국의 역사다. 더불어 일제 강점기 또한 우리나라에 있어 침울했던 시기로 그 아픈 시기의 흔적들이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괜히 감정의 파고가 격하게 일렁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쓰라린 기억들에 대한 분노 대신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점철된 감정들이 이곳을 좀 더 특별한 곳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느껴지는 감정의 파고가 격했던 건 또 처음이어서 홀로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서 추스르기보다는 그 상황을 활용해 순간의 기억을 더 깊게 새겨 보기로 한다. 순간의 선택이 모든 것을 좌우했었다. 빠르게 차 올랐던 달은 급격히 기울었고 백제 중흥의 열망에 방점을 찍지 못했던 그들이 눈물들이 문득 연잎에 덩그러니 맺혀 있는 듯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겹겹이 쌓인 그들이 서사는 저 멀리 보이는 현대식 건물들과 시간의 경계를 이루는 듯했고 이곳에서의 순간을 마무리한 채 발걸음을 옮기는 내게 많은 울림을 가져다주었고, 급격히 내린 소나기로 인해 젖은 땅은 미약하게나마 이곳을 나서는 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느꼈던 아쉬움과 기대되던 내일에 대한 감정들과는 상반된 이 감정은 색다른 매력을 내게 선사했고 다른 곳에서 이런 비슷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공주에서의 시간들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