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간도 조선인대학살을 세계에 알린 제창병원 스탠리 마틴 의료선교사에 대한 기록 - 플로렌스 J 머레이 저 ⌜내가 사랑한 조선⌟에서 발췌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포상 받은 마틴 선교사는 캐나다장로회 파송 선교사로 한국 이름은 민산해 다. 그는 1916년에 용정선교지부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는데 그가 도착해서 1922년 안식년을 떠날 때까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간도 조선 독립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그가 1918년 현대식 건물로 새 병원을 완성하자마자 병원은 조선 독립 운동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다름 아닌 제창병원이 지어진 곳이 영국이 청나라로부터 조차한 영국의 조계지로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외국인들, 특히 일본 경찰들이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틴이 용정에 도착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드디어 조선 독립운동의 횃불이 불타올랐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의 서전대야에서 일어난 ⌜독립선언 축하회⌟에 일본 경찰 또는 일본에게 사주를 받은 중국의 군인들의 발포로 말미암아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중상자 중의 4명은 병원으로 옮기는 중에 죽었으며 50명에 가까운 중경상자들이 제창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물론 19명 사망자들의 조문과 장례식도 제창병원에서 치렀다.
3.13 만세시위 후에 만들어진 ⌜간도국민회⌟의 중요한 비밀모임이 제창병원에서 진행되었으며 중요한 문건은 의란구나 하마탕(합마당)에 두지 않고 병원 안 지하실에 두었다.
1920년 정초에 일어난 ⌜15만원 탈취사건⌟의 모의와 계획도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이루어졌다.
6월 초에 봉오동전투와 10월 하순의 청산리전투 시에도 그는 조선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원하였다.
1920년 10월 하순에 훈춘, 왕청, 연길, 화룡, 용정 등지에서 조선인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21년 4월까지 계속된 일제의 간도 조선인 대학살은 일제의 언론 통제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마틴 선교사는 일본군의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간호사 페르소프나와 함께 장암동 학살현장을 방문하여 사진을 찍고 ⌜장암동 학살사건⌟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그 진상을 폭로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불령선인⌟을 비호하는 선교사로 낙인이 찍혔으며 일제의 모함과 비난에 시달렸다.
여기까지가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된 마틴 선교사에 대한 나의 지식의 다였다.
나는 자주 벅찬 가슴으로 제창병원의 유지를 찾아갔으며 조선독립을 위해 수고와 고난을 아끼지 않은 마틴 선교사를 비롯한 모든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하여 늘 감사를 드렸다. 또한 그들을 파송해준 캐나다장로회와 후원자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한번도 그가 남의 나라, 이방의 땅에 와서 혼란과 격변의 시간에 겪은 심신의 고통과 슬픔, 절망과 분노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소명을 받았고 훈련받은 선교사니까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늘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로렌스 J 머레이가 편지글과 ⌜내가 사랑한 조선⌟에서 마틴 선교사에 대하여 쓴 글을 읽고 비로소 그가 과로로 쓰러지고 아파서 의료행위를 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일을 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면 의사 스스로가 진료를 포기하였을까? 의사 본인이 병원 문을 닫을 때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그리고 본국 캐나다선교부에 곤고한 조선인들을 위해 의사를 요청하는 그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3개월째 문을 닫고 지원 의사가 오기를 기다리며 병든 몸을 가누며 그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가 겪은 고통과 절망이 얼마나 깊었을까? 등을 묵상하였다. 그는 그냥 선교사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 아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썩어진 밀알이요, 조선인들을 위하여, 그리고 후대에 태어난 우리를 위하여 종이 되고 밥이 된 분이었다.
할렐루야!
마틴 선교사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한다.
아래는 플로렌스 J 머레이가 쓴 ⌜내가 사랑한 조선⌟에서 마틴 선교사에 관련된 글만 발췌하였다.
“조선어학교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조선 국경 너머 만주의 용정 선교부에서 어학교로 전갈이 왔다. 그곳에 있는 의사 스탠리 마틴이 석 달째 아파 그곳 진료소가 문을 닫고 있으니 나더러 빨리 그곳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마틴은 안식년 휴가를 떠날 차례이므로 그의 병이 조금 호전되어 여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곧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그가 없는 동안 임시로 내가 그 자리를 메우기로 결정되었다.” 31,32쪽
“다음 날 아침이었다. 마틴 박사는 병중이라 걷기조차 힘든 데도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는 캐나다 뉴펀들랜드 출신의 젊은 의료선교사로 이 병원을 스스로 설계해 지었다. 병원은 내가 본 당시 어느 선교병원보다 훌륭하였다. 그때만 해도 그 지역에 연관공이나 전기공이 없었던 터라 연관시설이나 전기시설을 그가 직접 다 설치했다. 그가 갖고 있던 작은 발전기가 그 지방에서는 첫 번째 전력이었다. 그 전기로 병원 전등을 켰고 병원 물을 공급하는 펌프를 돌렸다. 그는 이번에 안식년 휴가를 갔다 모연서 작은 엑스레이 장비를 가지고 와 이 발전기로 작동시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틴은 중간 키의 남자로 병 때문인지 야윈 체구에 얼굴이 창백했다. 숱이 많은 눈썹 아래의 파란 두 눈은 하찮은 사물 하나라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다 했다. 능력이 있는 그의 두 손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훌륭한 기계공일 뿐만 아니라 무선 전신 기술자 자격까지 갖추었으며, 아마추어 천문가이기도 했다. 또 뛰어난 내과의이자 훌륭한 외과의였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6년 전에 이미 시료소를 차렸다. 병원이 지어질 때까지 이곳 신교부 여선교사 숙사의 방 둘을 빌려서 진료와 수술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조선어와 중국어 실력도 놀라웠다. …생략…
그는 이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자격을 갖춘 의사였고 1년에 2만 2천 명이나 되는 많은 환자들을 돌보았다. 또 그는 의료 일 외에도 행정사무, 의료요원 훈련, 등 엄청나게 많은 일을 도맡아 했다. 그의 수석 조수로 이지사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의과 학교에는 가보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틴 박사가 훈련을 아주 잘 시킨 덕에 이 집사는 대강의 병세 진단은 물론 간단한 수술도 할 수 있었다. 마틴은 이 집사가 할 수 없는 어려운 병과 큰 수술을 주관했다.
당시 만주에서는 의료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공식적인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이제 막 의사들을 배출하기는 했지만 전국적으로 볼 때 의사의 수가 너무나 부족해 만주까지 올 위의사는 없었다. 조선 땅에도 얼마든지 좋은 자리가 많았던 것이다.” 42,43쪽
마틴 박사는 1919년 조선의 독립운동 후에 일본인들이 저지른 잔악한 보복행위를 자신이 보고 느낀대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조선인들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유럽에서 평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14개 조항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일 조선인들이 전 세계에 자신들이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린다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10년 일본에 합병되어 있던 처지의 조선인들은 세계가 조선을 위해 어떤 조치를 해주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특정한 날을 정해 전국에서 독립을 외쳤고,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야말로 맨손으로 ‘만세’를 외쳤다.
조선 전 국토가 들썩거린 거사가 한 마디 정보도 새어나가지 않고 조직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 거사에 경악한 일본 경찰과 헌병은 칼과 총으로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죽이고 체포했다. 심지어 길에 서 있던 사람들까지도 잡아가 고문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며칠 후 만주에서도 똑같은 시위운동이 일어났고, 결과는 똑같았다. 이때 마틴 박사는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해주었고 경찰에 쫓기는 조선인들을 자기 집과 병원에 숨겨주었다. 심지어 부상당해 죽은 사람들은 손수 묻어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찍었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병원 지하실에 시체가 줄줄이 뉘어져 있는 사진이었다.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소위 선동자가가 아니라 모든 조선 사람들이 외쳤던 ‘만세’를 부른 죄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생략…당시 용정의 선교부는 법적으로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되어 영국 국기를 게양할 수 있었다.(당시 캐나다는 영국의 속령이므로 캐나다 선교부는 영국 국기를 게양) 덕분에 마틴 박사는 일본 경찰에 쫓기는 조선인들을 피신시켰고, 일본 경찰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치외법권 제도는 얼마 안 있어 없어졌다. 그러나 마틴 박사는 그 이후 많은 조선인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53,5쪽
“병원 일은 평소대로 진행되었으나 그 지방의 공기는 전과 같지 않았다. 용정 주위 평야에 있는 마을들은 마적들의 습격을 자주 받았다. 우리는 밤중에 작은 마을들이 불에 타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주민들은 약탈자들에게 곡식을 다 빼앗기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기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만약 마적들이 그 사실을 아는 날이면 그 벌로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집을 잃고 곡식을 빼앗겨 빈털터리가 된 주민들이 하나 둘씩 용정으로 들어왔다.
…생략…
어느덧 마틴 가족이 안식년 휴가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조선인, 중국인 등 많은 사람들이 마틴 박사를 환송하기 위해 몰려와 환송 기념물을 증정했다. 기념물 가운데 특히 인상에 남았던 것은 빨간 비단에 조선어와 한문이 섞인 새까만 글씨로 마틴 박사의 공적을 기리는 문구를 적은 것이었다.
마틴 가족을 배웅하고 병원으로 돌아왔는데 뭔지 모르게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나 혼자 책임져야 했다.”67,68쪽
마틴 선교사는 안식년을 끝내고 간도로 돌아와 1927년까지 제창병원에서 조선인들을 섬겼다.
그 후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로 임명되어 서울로 이동하였다.
거기서도 그는 세브란스 병원 결핵방지회장으로서 조선청년들의 결핵퇴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0년 태평양전쟁의 기운이 감돌 때 영국과 미국의 영사들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11월 16일 마리포사호를 타고 24년 동안 섬겨온 조선을 떠났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정착한 거는 다음 해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리어 1968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육신의 장막을 벗었으나 조선인들을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그의 삶은 살아서 주님의 사랑을 증언한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위하여 죽도록 수고한 대가로 몸 져 누워 4개월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병원 문을 닫은 그의 삶을 묵상한다.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한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선교의 밑바닥이자 정점이다.
2024년 10월 10일 오후 해시
우담초라하니
이 글을 정리하는 동안에 그가 직접 쓴 편지가 작년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곧 바로 책을 신청하였다.
용정에서 보낸 그의 12년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렌다.
조선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였던 조선의 상놈들이 개발한 용정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예우하며 존중하며 섬겨주었던 마틴 선교사,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 사랑하였던 사람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