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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선 지연전(공주/대평리 저투, 대전전투)
1. 작전개요
가. 작전개요
금강선 지연작전은 미 제24사단이 7월 12일 조치원에서 철수하여 금강을 연하는 방어선에서 북한군 제3,4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금강-갑천-대전지역에서 실시한 전투와, 이어서 증원된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황간-김천에 이르는 경부 국도 축선에서 실시한 지연전이다.
미 제24사단은 제34연대가 7월 8일 천안전투에서 패하여 공주방향으로 철수하고 미 제21연대는 전의-조치원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7월 12일에 대평리방향으로 철수하여 금강방어선(바로 제19연대로 교대, 21연대는 예비로 대전 비행장에 위치)을 점령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은 전의-조치원전투에 이어 미 제24사단을 소명시키고자 제4사단을 공주 방향, 제3사다을 대평리 방향, 제2사단을 청주에서 대전 방향으로 기동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지만 제2사단의 기동이 늦어져 제3,4사단 만으로 공격키로 하고 7월 14일 공주방향에서 먼저 제4사단이, 7월 16일 대평리 방향에서 제3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7월 20일에 대전이 함락되면서 7월 22일부터 북한군은 제3사단이 경부국도를 따라 영동-김천으로, 제4사단은 금산-안의-거창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대전지구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장은 직접 전쟁 발발 후 최초로 보급된 3.5" 로켓포로 적 전차를 격파하기도 했으나 결구 퇴로가 차단되고 우회 길을 잘못들어 시종과 동시에 포로가 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7월 22일 영동지역으로 진출한 미 제1기병사단은 25일까지 영동에서 버티다 철수를 개시하며 북한군이 26일 영동을 점령한후에 26일 새벽부터 29일 사이에 경부 국도 축선을 따라 공격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1950년 8월 1일 15시경에 차후작전을 고려하여 전군에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게 된다.
나. 피. 아 지휘관 현황
(1). 미군현황
"우리의 지휘관과 다른점 : 상급자가 앞을로 나서다"
먼저 미 제24사단의 직위자를 보면 사단장 딘소장은 7월 20일 실종-포로가 되고 새로운 처치소장이 임무를 하게 되며 제19연대장 멜로이 대령이 7월 16일 부상, 제1대대장 윈스태드 중령 7월 16일 전사한다. 제34연대 연대장 보챔프는 7월 16일 부임하고 제3대대장 스미스는 7월 8일 후송되며 그 후임인 랜트론 소령은 7월 20일 실종된다. 포병연대 제63포병 대대장인 다우손은 7월 8일 후송 된다.
다음 미 제1기병사단은 7월 18~22일어간에 포항으로 들어오게 되며 사단장은 게이소장이다.
(2). 북한군현황
제3사단장 이영호 소장은 소련군 소위출신이고 제4사단장 이권무는 소련군 중위였다. 제105전차 사단 사단장 유경수 소장은 소련군 전차중대장을 역임했으며 제107연대가 제4사단에 배속 운용되고 제203연대가 제3사단에 배속 운용되었다.
2. 공주 -대평리 전투 / 탐사 및 탐문결과
7월 13일 대구에 지휘소를 개소한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미 제24사단으로 금강선을 연하여 방어배치를 완료하고 미 제25사단을 10~15일 사이에 이동완료하여 제27연대를 의성, 제24연대를 상주에 진출시켜 국군을 지원토록 하고 제35연대를 예비로 1개 대대를 차출하여 영일 비행장을 방어토록 한다.
국군은 제1군단(수도사단 :제17연대 배속, 제2사단)이 괴산-미원일대에서, 제2군단(제6.8사단)이 이화령-죽령간에서 제3사닺 제23연대가 영해 남방으로 물러나 방어태세 중이였다.
가. 공주방면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14일, 공주 북방에서 금강을 은밀 도하하여 미 제34연대를 측방에서 공격한다.
화력지원하는 제63포병대대 진지부터 기습하여 공주 오룡리일대의 포병은 단 한발도 사격못하고 초토화 되어 버렸다. 반면에 공주 전방의 제3대대는 1개중대가 전장피로증으로 심신 쇠약에의해 모두 후송되는 등 병력배치가 미흡했지만 북한군의 정면공격이 없었다.
결국 포병은 마침 진출한 국군 기병중대등의 지원이 있었지만 화포 10문과 차량 60~80대를 버리고 진지를 탈출해야 했다.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9일 전의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뒤로 빠져 제3사단의 초월공격을 지원한 후에 7월 10일 경로를 바꿔어 23번도로를 따라 정안-공주 방면으로 기동했다.
"저수지에서 빨가벗고 목욕하는 미군"
이곳일대는 용성천이 흐르고 많은 지류들이 발달해 있다. 웬만한 논에는 둠벙 하나씩은 다 있는 곳이다. 검상리 대안상에는 보흥천이 흘러 금강에 이르고 나루터가 있지만 어천-공주간 개통도로가 '20년도에 완공될만큼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다.
우린 이인면에 가서 먼저 노인정을 찾았으나 마침 농번기라 어르신들이 없다. 부여가 집인 유법사가 앞으로 나서서 수소문끝에 한 어르신을 보건소 앞에서 대면하게 되었다.
"혹시 6.25전쟁 당시에 이곳에서 미군들을 보셨습니까?"
"그야 내가 12살인데 다 보았지요. 전쟁이 뭔지도 몰랐고 어느날에 미군이 왔다는데 얼굴이 까만 사람이 많이 와서 떠들어대는데 정말 씨그럽더라고."
"우리 전사기록에 이 일대에서 미군이 많이 전사했다는데 보셨는지요?"
"나는 원래 밤고개가 있는 태봉동에 살았는데 대포들이 많이 들어와 밭작물을 밀치고 그냥 들어가 미군들이 진을 치는데 다 봤지요. 북한군이 몰래 강을 건너 들어와 신흥리를 막아버리고 콩닥거려 다 죽었다는데 시체는 못보고 차량이 불타서 길 옆에 있는 것은 많이 보았지요."
"바로 발굴을 해간 미군유해"
우리는 미군이 목욕했다는 길옆 둠벙으로 갔다. 실개천 옆에 있는데 그리 크지도 않았다. 그해 여름은 무척 비가 자주 내리고 덥기도했는데 미군이 들어와서는 밭에다 대포를 갔다놓고 죄다 이곳에 들어와 빨가벗고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미 사전에 침투해 들어온 북한군들이 앞 뒤에서 총질을 하니 어떤 군인은 옷도 안입고 뛰다가 복룡리 구주리고개 중간쯤에서 죽어서 동네사람들이 묻었다고 들었다 한다.
우리는 구주리 고개로 갔다. 40번 국도 이인에서 697번 지방도가 갈라져 나가는데 여길 넘어가면 논산이다. 가는 도중에 복룡리에 들러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니 전쟁중에 미군이 나중에 와서 발굴해 갔다고 한다. 길에서 멀리도 아니고 바로 인접인데 제보자 아저시기 명확히 알고 있다.
"혹시 다른 유해는 못밨습니까?"
"여기도 내가 본 것이 아니고 미군이 와서 신기해 지켜본 것이고 당시에는 마을 어른들이 좀 있었는데 그 분들이 묻었지 우리는 몰라요."
"전투흔적이 없는 검상리-만수리강변"
우린 다시 이인과 태봉동으로 올라가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방아달산이나 개승산 등이 있지만 200m미만의 산들로 올라가니 사실 아무런 개인호도 보지 못했다. 대평리는 그래도 많은 호들이 강둑이나 야산에 남아 있었는데 여긴 흔적이 없다.
동네분들 이야기는 이구동성으로 미군은 왔으나 총한방 안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다. 와서는 대낮에 발가벗고 개천에서 목욕이나 하고 기타치는 군인도 있고 요즘 말하는 포커치는 군인도 있고전투하러 온 군인이 아니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니 북한군 공격 하룻만에 제34연대는 논산으로 와해되어 철수하고 말았다.
"전사에 남겨진 국군 기병대의 모습을 찾아라?"
빛나는 참전용사의 공훈록에 보면 장철부(본명 김병원)기병대장(중령)의 일화가 있다. 그는 평북 용천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강제징용에 맞서 중국 서주에서 탈출을 기도하여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그 후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일본군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군수품 수송열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해방후에 귀국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48년 4월에 육사 5기로 임관하여 육사에서 교관 등 임무를 수행후 기병 대대장이 된다. 전쟁이 발발 하자 기병대대는 의정부로 출동해 수색작전을 지원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6월 29일에는 신사리 정면의 한강 차안상으로 도하하려는 북한군 수백명을 사살하고 7월 2일~4일까지는 수원등지에서 적의 선견대를 공격하여 진출속도를 지연시켰다.
7월 11일에는 공주 유구리에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하고 그 대대장의 지프를 노획하였다. 7월 14일에는 미군 제34연대 3대대가 공주 남방 삼교리에서 포위되어 있는 것을 구출작전을 시행하였다. 그 후에 8월 4일 경북 청송지구에서 청송-경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과 전투를 하다 어깨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기 직전에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하여 명예를 지킨다.
이미 앞편에서 유구리의 기병할동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였다.
내가 맨 처음 조사한 것이 계룡대에서 멀지않은 이곳의 전쟁관련 내용이었다. 공주경찰서장 등이 말을 타고 나타나고 전사하여 묻혀진 일화와 유가족이 찾아간 사연도 알았다.
하지만 북한군 1개 대대를 무력화 시켰다는 전사의 기록에 대해서는 이곳 주민들이 국군이나 우리 기마대를 별로 목격한 것이 없다는 것이였다.
"서울 강남 신정동에 남아 있는 기병대의 추억"
기병부대는 말이라고 하는 특수성으로 동네사람들의 뇌리에 오래남아 있을 수 있다. 사실 한강변 신사리지역에서의 활동은 강남 신성동에서 우리가 탐문 할동간 기병대의 활동을 접수하여 그 신뢰성이 증명되었다. 기병부대들이 마을에 있는 북한군 탄약고를 습격하고 많은 북한군이 죽었으며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국군이 이곳을 지나다 적과 교전으로 몇이 전사하여 가매장된 것을 우리가 유해를 발굴하여 그 제보내용을 증명한 것이다.
"한국군 전사에는 없는 국군 2개 연대의 천안전투 참여"
오히려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제1권 188p)에 의하면 7월 8일 정오무렵 제4보병사단 주력이 천안전투에서 미 제24사단 제34연대와 국군 2개 연대 잔여병력을 붕괴시켰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 투입된 북한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1군단의 우익을 보호하면서 천안에서 서천방향으로 방향을 돌려 7월 11일부터 진격을 개시한다.
보고서에 의하면 제6사단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않고 7월 12일 아침 6시에 유구리지역에 도달한다. 서해 연안을 따라 예산,홍성,서천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3연대는 예산부근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한다.
이때 미군기의 공군기들이 제6사단의 이동대열을 발견하고 강력한 공격을 가하여 사단은 주간이동을 멈추지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한다. 여기 내용에서 우리 기마부대에 대한 내용이 없으며 유구리전투가 아니라 예산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구리에서 적 1개 대대를 섬멸했다면 그 사실을 이곳 주민들이 까마득히 모를리 없을진데 많은 노력에도 사실 나는 기마부대의 전투흔적을 찾지 못했다.
"오룡리-태봉동에는 전투흔적이 남아 있지않았다"
미군 포병부대가 포 한방 못쏘고 무너진 곳이다. 우린 공주에서 우금고개를 넘는다. 동학혁명군이 대패하여 농민전쟁 실패의 결정적 계기가 된 곳이다. 우린 이곳에 들러 영혼들에게 묵념을 올리고 10여 분을 달려 오곡천이 있는 세다리에 왔다.
"혹시 전쟁때 기병부대 보셨습니까?"
"미군들이 이 일대에서 많이 전사했다는데 본 적이 있습니까?"
동네마다 다니며 물어보는 단골 질문이다. 하지만 시원한 답은 얻지를 못했다. 들은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미군이 발가벗고 목욕한다는 말과 까만 얼굴이 나타났는데 무서웠다는 것, 북한군이 사전에 침투하여 있었고 주민들은 무슨 전쟁인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밭이나 길 주변에 죽어있는 모습이 마치 돼지농장에 불이나서 타 죽은 것처럼 까맣게 널려있는데 북한군들이 달려들어 소지품을 다 가져갔다고 한다.
혹시나 눈에 띄지않아 산속이나 풀속에 있는 경우에는 동네사람들이 사실 알게모르게 시계같은 것을 가져갔고 전투화도 베껴 싣었다.
동네 사람들이 당시 치안대의 통제하에 여기저기 파묻기도 했는데 전쟁 중에 미군들이 올라와 다 발굴하여 갔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호 굴토 지역이나 전방 고지에 수북히 남아있는 탄피나 탄알같은 전투 유품도 찾지 못했다. 이유는 먹고살게 없어서 모두 주어서 다 돈과 바꾸던가 엿하고 바궈 먹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곳 공주방면의 제34연대는 사실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포병이 당하였고 보병도 측방이 뚫려 허겁지겁 논산지역으로 철수하기 급급했다.
반면 북한군도 도하장비의 부족과 미 공군의 폭격에 엄청난 인원 장비가 파괴됨에 따라 주눅이 들어 주간기동을 못하고 야간을 기다려야 하는 제한된 공격으로 미군의 제1기병사단의 전개를 보장하게 되었다.
나는 기병부대의 전투공과를 무시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제보나 전투흔적을 얻지 못했다.
나. 대평리 방면
대평리 지역은 북한군 제3사단이 7월 16일에 미 제19연대를 정면과 측방에서 공격하였다. 제19연대는 에비대도 투입하고 후방에 있는 사단장도 연대보급로를 개척하기 위해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투입하였으나 공격 하룻만에 방어선이 붕괴되어 소규모 또는 각 개인별로 야간에 산악소로를 이용하여 후방으로 철수하게 된다.
제21연대는 7월 12일에 대평리에 도착하고 대구에서 정비중이던 제19연대가 7월 13일 들어와 진지를 교대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3사단은 수원에서부터 제4사단을 후속하다 7월 9일 전의에서 초월하여 7월 10일부터 전의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전의 및 조치원에서 미 제21연대의 철수를 강요했으나 미군의 7월 7일부터 감행된 공중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 진출속도가 둔화되었다.
여기서 우리 전사에 크게 부각되지 않은 부강리전투에 대해 다시한번 기술한다.(북한군 제3사단과 105전차사단의 진격관련 소련 라주바에프의 보고서 1권 202p))
"7월 9일부터 11일까지 제105전차사단과 제3보병사단은 조치원부근에서 미 제24사단 부대들과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7월 12일 밤 9시 무렵에야 도시를 점령하였다.
적이 부강리(조치원 동남쪽 10km)지역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조치원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도로상에 지뢰를 매설하였기 때문에, 제3보병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은 부강리 방면에서 1개 땅크연대에 의한 엄호를 받으면서 조치원에서 금강을 도하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3일 오전에 부강리, 금강 뿍쪽 강변으로 진출하여 도하를 시도하였지만 남쪽 강변에 전개한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도하하지 못하였다.
7월 14일 하룻동안 적정과 도하 지점을 정찰하고 포벼을 재배치하고 7월 15일 오전 9시 30분에 포병.박격포의 지원사격을 받을며 도하가 개시 되었으나 적 포병 및 항공기의 강력한 저항으로 도하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6일 새벽 2시에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오후 늦게 남쪽의 도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7월 17일 105전차사단 203연대는 부강리에서 점령전을 벌였다."
7월 17~18일까지의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은 병사 및 장교 1,600명을 상실하였고 105mm야포 21문, 155mm 8문, 차량 197대 등이 노획 당하였으며 18~20일까지의 대전 전투에서는 2,000명이 넘는 미군 및 남조선 병사와 장교들이 전사하였고 각종 구경 포 17문, 전차 6대가 파괴되고 각종 구경포 70문, 전차 8대, 차량 320대를 노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이 금강북쪽 강변으로 진출하자 전의 지역에 집결해 있던 제6사단은 서해 연안의 해방을 위한 기동을 살시하여 7월 14일부터 이동을 개시하여 7월 17일 오후 늦게 강경 북방 2km 지역까지 진출하여 아군 여단급 병력과 조우하고 격파하고 18일 강경을 점령하고 그 우측의 제13연대는 별 저항없이 서천을 점령한다.
또한 진천으로 7월 10일 진출한 적 제2사단은 국군 수도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11~12일간 점령을 못하고 있다 조치원이 점령되자 후방차단을 우려한 수도사단이 뒤로 물러나 13일부터 다시 진격을 개시하여 13일 오후 늦게 청주를 점령하였으나 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고 22일 밤에야 보은을 점령한다.
대평리 지역은 우측 제34연대가 7월 14일 대대적인 공격을 당하는 시기에 부강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며 미군의 강력한 공군과 포병화력에 공격을 이곳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금성교에 남겨진 역사적 교훈을 기억하라"
대평리 정면에 있던 다리다. 적은 '50. 7. 16일 야간에 YAK기 2대가 금강 상공에 나타나 조명탄을 투하 하면서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도 몇번의 시도에서 실패한 적들은 치밀한 게확아례 도하준비와 포병화력을 집중하며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미군의 강력한 포병하력에 움칫하던 그들은 미군의 조명탄이 20여분 밝혀지지않는 상항에서 차안상으로 올라붙게 되었다.
대평리전투는 북한군이 정면공격과 측방공격을 병행하고 침투부대들이 내륙 깊숙히 들어와 후방보급로를 차단해버린 가운데 3개의 포병대대가 봉암리에서안산리 사이에 도로상에서 뒤엉켜 오도가도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적들은 위장을 잘하고 엄폐된 곳을 잘 이용하여 자동화기를 배치함으로써 F-51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사단장이 직접 대전에서 전차 2대를 가지고 와서 퇴로를 열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많은 피해를 남긴체 7월 16일 대평리에서 대전으로 철수하게 된다. 제19연대는 총 3,401명중 650명의 손실을 입었다. 따라서 7월 16일 야간을 기해 북한군 제4사단은 논산을 점령하고 그 일부가 강경을 장악한 다음 대전으로의 공격준비에 들어가고 제3사단은 16일 대평리에서 밤을 세우고 유성으로 직접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제32사단 신교대 뒷산(영곡~국곡리일대 300고지선), 발산리에 남아 있는 전투 흔적?"
공주정면 검상리와는 달리 대평리전역은 많은 전투흔적이 남아있다. 이미 괴화산이나 매방산, 그리고 대평리 금강 남안에 굴토 되어 있는 개인호와 M1탄피나 파편 등을 수 없이 찾아냈다.
지역 주민들의 제보 또한 많이 남아 있어 '02년에 10구, '10년도에 7구 등의 유해가 발굴 발굴 되었다. 모두 지역주민의 제보에서 얻어낸 정보에서다.
하지만 포병부대의 기습 침투에의한 피해는 대포와 차량이 대부분으로 적에게 넘어가고 적에게 넘겨주지않으려 아군의 장비를 파괴하는 포구파열이 진행되고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많은 인원이 포로가 되었으며 발산리일대는 차량과 장비들이 엉켜 아수랑이었다.
그런데 금강을 끼고 남안에는 지금의 신교대 딋산으로 올라서면 개인호가 즐비하게 굴토되어 있었다. 다시말해 이곳은 미군이 점령했다는 증거가 되는데 하필 전방 대대와 좌측의 수색중대 사이로 적이 침투하여 실제 전방에서 전투는 해 보지도 못하고 측방이 노출된다. 그러나 도하장비가 부족하고 미군의 비행기 폭격 등이 불을 뿜어 북한군은 쉽게 도하를 못하였으며 지금 금성교(금남교 우측)의 파괴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서 그 날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3. 대전전투 / 탐사 및 탐문결과
대전전투는 7월 16일 야간에 미 제34연대가 갑천선에 배치되면서 7월 20일 야간에 대전에서 철수할 때까지 북한군 제3.4사단과 대전시내에서 실시한 전투다.
북한군은 금강교두보를 확보한 이후 7월 19일 오전에 유성지역에서 제일 먼저 공격이 시작되고 7월 20일 03:00에 유성지역에서 공격준비사격과 이어 전차와 함께 보병이 제34연대 제1대대의 방어진지를 통과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침투부대들이 금산 및 옥천방향 세천터널까지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여 제34연대의 철수를 방해하여 무력화 시켜버렸다.
딘소장의 한국전 이래 최초의 3.5"로켓포의 사격으로 적 전차를 파괴하는 등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철수과정에 미군 역사상 초유의 사단장 실종과 포로가 되는 엄청난 사건을 격으면서 영동북방으로 진출하는 제1기병사단과 바톤 터치를 하고 오산 죽미령에서의 전투붙터 시작하여 7월 20일까지 15일간이라는 시간을 획득하였다.
가. 유성-대전 가도
북한군 제4사단이 7월 19일 오전에 유성 방향에서 미 제34연대 1대대 주진지와 대전비행장에 있는 연대 지휘소에 포병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대대의 철수를 건의 하지만 20일까지 방어하라는 명령만 있었다.
그 후 야간에 벌써 적 전차가 대전시내로 기동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대대는 공황이 발생하게 된다. 연대장이 직접 3,5"로켓포로 진내에 들어온 적전차를 파괴하여 개전이래 최초로 3.5"로켓포가 전차를 격파하였다.
나. 논산-대전가도
이 지역은 사실 7월 19일 오전까지 제34연대 1개 소대가 갑천의 가수원교에 대한 경비를 맡았을 뿐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다 적 제4사단에게 189고지(지금의 배재대학교 를 폴함한 탄천을 끼고있는 남-북능선)가 피탈 되자 예비대인 제19연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탈환하게 된다.
이 시기에 북한군은 제4사단 제18연대 일부병력을 경무장시켜 미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내륙으로 침투하여 마달령과 세천터널을 확보한 상황이되었다.
여기서 미 제34연대장 보챔프 대령은 7월 19일 북한군 침투부대가 대전 후방지역에 활동하는 징후를 포착하였으나 무시하고 사단장에게 보고않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된다.
"포도밭 우리집에 북한군 여군관이 살았다."
사실 이미 둔산지구 도마동이나 갈마동, 정림동 일대는 주택지 개발로 원형이 보존된 곳은 없다. 그러나 배재대학교를 기고 형성된 200m 미만의 낮은 구릉성 야산이 존재하고 우리가 간 곳에 포도밭이 있었다.
"혹시 이곳에서 오래 사셨습니까?"
"조상대대로 살아왔으니 오래 살았다고 봐야지요. 뭘 알고 싶으십니까?"
건강한 사회인으로 판단되는 분이 공터로 우리 안내하고 안에서 따뜻한 차가 우리앞에 왔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어르신이 황당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때 10살로 국민학교에 다니는데 우리집이 가수원이라 부자요. 이 일대 땅이 전부 우리집 소유였지요. 전쟁이 났다는데 사실 이곳은 그 당시에는 야산밑이고 개발이 않된 상태라서 가옥이 별로 없었는데 이 집만 한옥이었어요. 하지만 제대로 연락수단도 없는 마당에 우리가 전쟁을 알고 피난이라느 것을 가려고 준비하는데 이미 북한군이 여길 들어왔어요."
"그럼 미군은 안들어왔습니까?"
"나는 처음에는 미군을 몰랐어요. 그런데 북한군이 데리고 들어와 우리 광에 가둬두고 밥을 갔다 주는데 그때 알았어요. 얼굴이 까만 사람이 미군이라는 것을."
"주변에서 탱크나 총소리같은 것은 못들었습니까?"
"나가면 죽는다고 하니 실제 보질 못하고 조명탄같은 것이 하늘에 터지는 것은 보았어요."
"그럼 집에서 함께 살으셨는데 다른 문제점이 없었습니까?"
"몇일이 지났는데 요즘 TV에 나오는 북한군 여군복장으로 여자 한명이 들어오고 남자군인들 몇이 들어와 우리는 할아버지부터 3대가 살았는데 모두 집밖에 있는 비어있던 오두막집같은 곳에 머물게 되었어요. 그런데 먹을 것은 걱정말라고 하며 그놈들이 갔다주어 배고픈 줄은 몰랐어요."
"광에 붙협혀 있는 미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뭐 반동이라며 수시로 끌어다 뭘 하는지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곤 하더니 언젠가는 보이질 않는데 얼마 있어 미군이 들이닥쳐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알고보니 미군이 올라온 것입니다."
"그럼 9월 중순이 넘어서인데 그때까지 북한군 여군이 집에 머물고 있었나요?"
"그 여군은 미군이 오기전에 우리에게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밤에 떠난지 몇일 되었지요 아마~."
"미군이 들어와 우리 누나, 어머니는 꽁꽁 숨어있고 할머니가 밖을 나갔지요."
북한군이 있는 동안에 어르신은 북한군을 졸졸 따라다녔고 여성군인이 귀엽게 여겨 안방에도 들어갔다고 한다. 아니 본래 본인의 집이며 방인데 이상한 느낌은 안들었고 방에 가면 맛있는 옥수수나 감자를 주어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밖에는 북한군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데 장난도 하고 장백산가 노래도 가르쳐 주고 형처럼 따르니 아무런 통제는 없었단다. 다만 밤에는 못나오게 하여 오두막집에 있어야 했다.
어느날에는 아버지가 어딜 가야한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짐을 지고 전선으로 가는 부역이였다. 이제 곧 죽게 된다며 집안이 난리가 났는데 할아버지가 여군을 만나고 나왔는데 아버지가 안가게 되었다 한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나 미군이 들어오는데 북한군은 하룻밤사이에 다 떠나고 말았다. 어르신 집도 짐을 꾸려 북한군을 따라가야 한다고 하다가 어떻게 떠나지않았다.
그런데 나쁜 소문이 돌아 미군이 여자만 보면 다 잡아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나가 한 명 있는데 14살이고 어머니가 있어 벽장속으로 숨어서 얼마동안 지냈다. 그런데 미군이 들어오고 국군이경찰과 함께 들어와서는 다시 우리집을 무슨 지휘부로 쓴다며 비워다라고 해서 다시 오두막집에서 보냈다. 이때는 먹을 것도 안주고 오히려 북한군 여군이 있을 때가 좋았다.
"붙잡혀 가는 아버지, 그리고 그 순경이 저기 지금 땅주인이다?"
얼마있어 순경이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그때 아버지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산에 가 생채기를 구하러 갔다. 할아버지가 나가서 순경을 만났는데 북한군을 도와줬다고 밀고가 들어와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도 어린 나이지만 순경이 별로 좋지않게 인식되어 있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와 순경을 따라 갔는데 7일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 매일 할아버지가 지서에 갔다오곤 했다고 기억된다. 아버지가 갔다온 이후로 말씀이 없이 살다 젊은 나이에 운명했다. 요즘 말로 가혹한 취조를 당했는지 아니면 인격모독을 당했는지 분명한데 그 당시는 순경이란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한다. 졸지에 북한군 부역자 집안이 되어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아니 남의 집에 들어와 진을 치고 있으면서 보상은 못할망정 부역자집안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소리내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버리는 세상이니 어쩔수 없이 살려달라는 조건으로 땅문서 일부를 넘겨주었다고 지금에야 의심하게 되었다.
지금 저기 땅임자가 당시 경찰가족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이곳에 땅이 없던 집안이며 솔직히 당시에 순경이라야 일본놈 짭세라는 평만큼이나 별거 아니였는데 전쟁통에 힘쓰는 꼴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수작을 꾸몄는지 우리 땅을 일부 본인들 소유로 등기 이전해 버렸다. 어르신은 "나쁜놈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도둑놈 집안이다."며 눈동자를 돌렸다.
"도로공사('00년8월)중 대전시내 복판에서 나온 유해는 누구?"
'00년 전반기 유해발굴 사업이 7월 끝나고 우기철인 8월에는 전문 발굴병 집체교육과 후반기 발굴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느날 지역 방송에 대전 복판에서 도로보수 공사중 유해가 나왔다고 보도가 되었다.
그래서 보니 모시나칸트총 탄피와 탄알, 전투화, 철모, 모시나칸트총 대검등이 나왔다. 솔직히 그때는 나는 아무것도 분별력이 없었다. 우리는 국군 유해발굴이었지 북한군이나 미군이 그 대상에 들어있지않았다. 그러기에 지금같아서야 일단 우리 팀이 수습하여 정밀감식을 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당시는 국군이 아니라고 경찰에 넘기고 말았다.
"너무 죄송스럽고 미안합니다."
해당 유해는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일반적인 화장과 일정장소의 납골당에 모셔졌다가 지금은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셨으리라 본다.
다. 갑천 방어선 전투
결국 7월 19일 야간을 기해 모든 전투력이 갑천 대안상에 집결되고 7월 20일 03:00에 공격이 개시되어 대전시내에 적 전차가 들어오게 된다.
유성-대전가도는 7월 20일 적이 제1대대에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미 적 침투부대가 깊숙하게 들어와 도로의 여러 곳을 차단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왔다. 급하게 제34연대 예비대인 제3대대를 투입하려 했지만 이미 요소에 적이 포진하여 출동하다말고 오합지졸이 되어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야 했다.
이미 논산-대전가도에서도 제19-2대대가 7월 19일 적과 밤새도록 전투를 하고 보문산으로 밀리고 20일 13:00부로 논산가도는 개방되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라. 대전 시가지 전투
이 전투는 갑천방어선 전투와 거의 동시에 이르어 진다. 20일 10시경 대전 비행장이 점령되고 적전차가 연대 치중대가 있던 곳으로 밀어닥쳐 150여 명이 살상 되는데 사실 그곳에 3.5"로켓포가 있었지만 있는지도 몰랐고 정신을 차려 포를 들고 적전차를 찾았을 때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다시 적전차가 의무중대 있는 곳으로 나타나 부상자를 만재한 차량에 주포 사격을 가하여 그 부상자 모두를 살상하고 길바닥에 부상을 입고 방치된 생존자를 그대로 깔아뭉갰다.
당일 10대의 적 전차가 파괴되는데 8대가 3.5"로켓포였으며 제공군도 적전차 15대 이상을 격파하였다. 여기에는 사단장이 직접 사격조를 통제하여 파괴한 것이 3대나 된다.
미 제24사단장 딘소장은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유는 정면의 적들이 전차가 파괴되며 멈칫하는 것을 보고 갑천방어선이 무너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북한군은 미군을 포위하기 위해 지금 우회하고 있는 부대들이 주요 목을 차단하는 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계속되는오보에 사단장은 철수시기를 놓치게 되고 논산-대전가도 차단과 대전-옥천가도의 세천터널을 적이 선점함으로써 제34연대는 완전 봉쇄되고 만다.
대전 시내에 남아 있는 연대장 ,사단장 모두 연락두절이 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각자 도생의 길로 들어서 옥천으로 철수하는 과정에 사단장은 금산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
이미 모든 도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사단장은 길거리에 헤매고 있는 부상병이나 낙오병 들을 추수려 이동 중에 적의 사격을 받고 야간후퇴 중 산속을 헤매다 부상병을 살리려 물을 뜨러 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8월 4일 실종처리 된다.
그러나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 박종구 등의 도움으로 진안까지 남하하였으나 8월 25일 자위대에 잡히어 포로가 되고 만다.
마. 부대의 수습
미 제34연대는 대전 전투에서 7월 20일 일몰과 함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된다.
무려 7월 19~20일 전투에 참가한 병력 3,933명 중 1,150명이 손실을 본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48명이 전사로 확인되고 228명이 부사을 입었으며 사단장을 비롯한 874명이 ㅣㄹ종된 것으로 밝혀졌다.
유성-대전가도의 제1대대는 보문산을 우회하여 금산-전주를 거쳐 열차편으로 23일 남원에 도착하여 25일 여수에서 해군 함정으로 부산으로 가서 대구로 집결한다.
논산-대전가도의 제19연대 2대대는 보문산ㅇ에서 금산으로 남하하였다가 산길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7월 21일에 영동에 도착한다.
연대 본대는 시내의 동쪽끝에서 산길로 들어서 7월 22일 영동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옥천도로 들어서던 많은 인원이 판암동 부근과 세천터널에서 적의 사격으로 많은 인원이 전사하고 살아난 인원은 7월 23일 영동에 다다랐다.
"세천터널의 비극-제19연대 2대대 H화기중대"
대전역 광장에서 빠져나와 옥천가도로 달리려던 부대는 세천터널에 이르러 좌우에 포진한 적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았다. M-2반궤도 차량 등을 이용해 적지늘 돌파하는 방법으로 적진을 뚫으려 했지만 운전자가 전사하여 길에 그대로 차들이 서버려 진퇴양난이 되기도 했다.
몇번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은 산으로 올라서 옥천방향으로 빠져 나갔지만 그 숫자는 많치못했다.
"하얀 소금꽃, 너는 영혼이려니~"
나는 2011년도에 이곳 일대를 면밀히 탐사 및 탐문을 했다. 지금 구 세천터널은 출입구를 막아서 봉쇄되어 있다. 한구의 유해라도 숨져간 미군 유해를 찾아서 이억만리 남의 땅 대한민국을 지키려 태평양을 건너온 20살 청년의 넋을 지키려 간 곳이다.
대전 외곽으로 그렇게 번잡스럽지않은 이곳 세천동, 판암동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한여름이라 얼마나 땀이 쏟아지는지 벅찬 기대감으로 일대의 모든 산은 다 올라섰다. 하지만 전투흔적은 다수 찾았으나 유해를 찾는데는 실패하고 안타까운 제보는 많은 것을 발굴했다.
터널 앞에는 당시의 영혼의 한을 표시하듯 쑥부쟁이꽃이 만발하여 마치 염전의 소금인양 우리를 반겼다. 찾아와준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살랑이는 바람에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어서오라 손짓을 하고 있다.
"세천동 마을회관 간담회
1)송내현(85세, '14)의 제보다
중약터널 일대에서 미군이 많이 전사한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나 얼마 지난 후에 보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했다. 당시에 미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이미 북한군이 먼저 좋은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다.
2)송인성(82)의 제보다
산내 낭월 지역 마을 교회 안쪽 골짜기로 수천명을 죽여 매장되어 있다.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은 물론 대전교도소 수감인원도 죽고 미군이나 국군 포로 들도 북한군에 의해 같은 방법으로 죽었고 묻혔다. 우익인사들도 끌려와 죽었다. 대전 교도소 안 우물에 수십구의 우익인사를 프락치들이 집어넣어 죽이고 도망갔다.
3)여연옥(83세)의 제보다
옥천 군서초등학교 인근에서 북한군이 미군.국군.경찰을 끌고 와서 자 골짜기에서 죽였다.
"소외양간에 숨어 있는 미군-배추잎으로 연명했다."
판암동 야산에 올라서면 개인호가 산재해 있다. 사실 이곳은 미군이 점령한 것이 아니라 북한군 침투부대가 들어와 선점하고 있던 곳이다.
지역에서 한 어르신을 찾아갔다. 이곳도 전쟁의 상처가 그래도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대전을 벗어나려는 미군을 엄호하기 위해 엄청난 비행기 폭격과 포병화력이 불을 뿜었던 곳이라 민간인 피해가 컸다. 어르신은 국민학교 3학년으로 전쟁을 맞이했다.
"어떻게 미군을 위해 먹을 것을갔다 주셨어요?"
"우리 집이 그 당시에도 여기요. 그리고 바로 저 밑에 집이 우리 외양간이라. 그런데 전쟁이 났다고 난리가 나서 대부분 피난갔는데 우리집은 아버지 어머니하고 형이 ㄴ내 위로 한명 있는데 피난을 시장산으로 가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나는 어리니까 남았지"
"그러면 북한군도 보고 미군도 보았습니까?"
"다 보았지. 미군 한명이 우리 집에 외양간에서 거의 1주일 이상을 숨어 지냈어요."
"네? 어떻게 내무서원들이 찾아 다니고 숨겨주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죽지 않았나요?"
"어려서 거기까지는 잘모르고 밥을 갔다주니 매워서 먹지못해요. 몇일 지났는데 가죽만 남았어. 그래서 지금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참 기특하게 들에 나가서 여름이라 배추가 자라는데 그걸 갔다 주었더니 잘 먹어. 그래서 수시로 모르는척 하고 구해서 주었지."
"하지만 계속 숨어 버틸수는 없을 것 아니에요?"
은혜를 잊지않고 찾아온 미군
"그렇지요. 얼마를 지냈는데 내무서원들인지 완장을 차고 다니는 놈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집도 불안했어. 그런데 밤에 미군이 떠나갔어. 고맙다고 탱큐 탱큐하고 갔는데 그 다음 미군이 올라가는데 글쎄 찾아온거야.
"예? 그 미군이 찾아왔다고요?"
"그래요, 빵이며 소세지등 듬뿍 들고 찾아 왔어요. 얼마나 반가운지. 그런데 본대들과 함께 올라가며 다시 온다고 했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어요."
"5인의 미군은 어디로?"
"일대에서 미군이 엄청나게 죽었다는데 혹시 시신을 본적이 없나요?"
"지금은 있는지 모르지만 소깔을 먹이러 저기 야산 산소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더니 미군이 죽어 있었는데 얼마후 다시 가니 없더더라고."
"그 장소를 아세요? 그곳에 묻혀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요. 한번 가보실래요. 그리 멀지않아서 찻길에서 한 20분 올라가면 돼요."
더운 여름날 우리는 그곳을 미군 탐사팀과 함께 가지로 하고 할아버지와 별도 약속날짜를 잡았다. 어르신은 형이 당시에 장티푸스인지 괴질에 걸려 먼저 죽고 본인이 장남역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다뜻한 커피를 한잔식 갔다 주신다.
"미군들이 전쟁후에 와서 유해를 찾지 않았나요?"
"이곳은 온 적이 없어요."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과 같이 다 찾아다녀도 가지 않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미군에 연락하여 함께 제보자를 만나서 현장을 가기로 했다.
그러부터 한 한달이 지나서 미군 조사팀이 들어왔다. 우리는 큰 기대감을 들고 판암동을로 가서 어르신을 모시고 현장을 올랐다. 이미 우리야 사전 탐사로 한번정도는 올라간 장소이기에 낯설지는 않은데 막상 올라서서 어르신이 지목하는 장소를 보니 묘와 묘 사이에 잡목이 있는 곳이다.
"어르신 그 당시에 모습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군이 질문했다.
"소를 저 밑에다 메어놓고 올라와 보니 호가 파있는데 미군 5명이 죽어서 있었지. 총이며 수류탄 같은 것이 옆에 있었어서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어요. 죽은 군인들 알굴은 모두 검정색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 입니까?"
"그것은 잘 기억에 없어요. 왜냐면 어린나이에 보았고 수시로 가보면 있었는데 언제 보니까 호도 없고 죽은 사람도 없더라고."
"북한군이 있을 때는 그대로 있었나요?"
"그건 확실히 맞아요. 우리집에 미군이 한명 숨어서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미군의 유해수습 일지에 이곳에서 수습된 현황이 없다고 한다. 이곳 판암동과 세천도 일대에서 20여 명이 실종되었고 찾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미군은 한국전에서 8,000여 명을 찾지 못했고 2,000여 명이 남한에 6,000여 명이 북한지역에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산내여 산내여"
우리는 세천터널을 찾아가 현재 모습을 미군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4번국도와 세천터널 남죽에 형성된 고지군을 탐사하였다. 역시니 이곳의 개인호는 우리나 미군이 판것이 아니라 침투부대가 들어와 판 것으로 도로를 두고 좌우측에 굴토되어 "인디언의 가혹한 형벌인 태형의 계곡"처럼 완전히 걸려든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미군이 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군의 일부 용감한 전사들의 분전과 비행기 폭격으로 사실 북한군도 치명적인 인명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다.
어르신과 탐사를 마치고 내려와 점심을 우리는 가오동에서 손짜장면으로 해결했다. 어르신이 원하는 음식이다. 그리고 다시 모셔다 들이고 다음 목적지를 정하려는데 길가에 웬 아주머니들이 몇이 모여 있다.
"뭐하러 다니는 군인이어요?"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팀입니다. 저분들은 미국에서 온 같은 이무를 하는 분들인데 오늘 먼저 가신 할아버지가 미군을 보았다하여 그곳에 갔다 왔습니다."
"아니 산내에 가봤어요? 피가 스며들어 울렁울렁 거리고 길까지 흘러 나왔다던데~"
"아 그렇습니까?"
"혹시 가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가보았지요. 난 여자얘가 무섭지도 않아서 두세번을 가본 것 같은데."
"그럼 목격은 안하셨습니까?"
"끌려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민간인이 아니고 군인인지 경찰인지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고 양키도 가는 것 보았지. 그런데 얼마 있어 드륵드륵하는 총소리가 나요. 헌데 가면 없어"
"여러 제보에 의하면 국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많이 죽였다고 하는데 못들으셨습니까?"
"잘 몰라요. 어느날인가 비온 뒤에 가보니 정말 피가 좁은 길바닥에 조금 흘러내리는 것은 보았어요. 하지만 사람이 안살고 있는 동네라 귀신이 산다고 했어요."
옆에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혹시나 소문이나 본 것이 없는지 하지만 답은 같았다.
"전쟁이 났다는데 어느날 트럭들이 사람을 싣고 들어가는 모습을 본적은 있는데 잘 몰라요."
우린 곤룡재를 향하여 출발했다.
6.25전쟁 당시에 있던 길을 따라 한번 산너머 군서까지 내려가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다. 사실 현재 민간인 학살자가 묻혀 있는 바울교회 바로 옆 땅은 과거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조사 및 유해를 발굴하여 가매장되어 있는 곳이기에 우리가 쉽게 그곳을 들어가 보기는 조금 꺼리낌스러웠다. 현역의 신분으로 그 당시의 인식은 마치 그 행위를 인정하는 모양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같은 국민으로써 전쟁의 피해자라는 사실에 광주 망월동 묘지도 가보았고 말없이 보도연맹이 끌려와 죽었다는 곳을 가서 명복을 빌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욱이 할버니들의 이야기가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도 보았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다시금 조사길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주변부터 파악하기 위해 낭월동의 모든 집은 다 들어가 보았다. 낭월에서 군서에 이르는 12번도로 좌우측에는 포도밭이 많았다. 교회에 가보니 신자는 별로 없고 목사님도 안보이고 전도사인지 건물 관리하는 분이 있었다.
"죽은자의 영혼, 그리고 자주 바뀌는 교회 주인!"
대별동에서 만난 어느 분이 상당히 이곳 산내 낭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6.25 전쟁 당시에 수천명의 인원이 죽어 묻혔다고 하며 언제부턴가 어느 교인이 이 일대 땅을 사서 교회를 신축 했다고 한다. 사실 이곳 땅은사람이 죽어있어 매매가 되지도 않고 사람이 오가는 것도 뜸했다 한다. 군서에서 혹시나 대전에 오려면 옥천 경유해서 들어오는 37번도로를 이용한단다.
그런데 어느날 언론에서 민간인 학살 장소로 한번 뜨더니 누가 땅을 사서 교회를 지었는데 오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현재까지 몇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 후로 노무현시절에 이곳을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발굴하려 했는데 땅값을 무리하게 요구해 일부분만 발굴 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저희는 유해발굴단인데 지나는 길에 들렸습니다. 혹시 관련 사실을 아신다면 어느 곳에 집단으로 묻혀있는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은 일부분이고 이 지역일대가 모두 묻혀 있다고 보면 됩니다."
먼저 오석으로 추모비를 조그맣게 세워논 자리에 가서 묵념을 올리고 안내를 받아 발굴된 유해가 다시 가매장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일대에서 몇십 구를 발굴하였으나 유족이 나타나지 안했고 차후 발굴을 고려하여 발굴 장소에 다시 가매장되었다 한다.
발굴을 할 당시에 유해감식을 맡았던 박교수님을 전화로 연결하여 실태를 물어보았다.
"박교수, 소문으로 7,000여구가 묻혔다."
근거는 없다. 다만 6.25전쟁 당시에 이런저런 사유로 끌려가 오지않는 사람의 유족들이 던지는 말을 모은 것이란다. 그러나 내가 주변을 보기에는 그건 너무 과한 숫자로 보였다. 식장산의 작은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개울의 바로 옆이고 곤룡재를 따라 오르면서 좌우에는 밭이나 일부 논이 있기도 하지만 폭이 좁다.
우리는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이 교회의 관리인은 본인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럼 왜 추가적으로 발굴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잘 모른단다.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일대 땅을 산 주인이 터무니없는 보상금을 요구하여 발굴을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포도밭 주인을 만나 보았다. 하지만 3년전에 사서 들어와 아무것도 모른다. 가능한 이곳 주민들은 모른다고 답변을 한다. 판암동이나 대성동 사람도 아는데 모른다니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시에 이곳은 골짜기라 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상여집이나 있고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한 두 가옥 이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곤룡재를 넘었다.
마령골에 들러 한두집을 찾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걸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기막힌 제보자를 만났다.
"내가 직접 나무하고 지켜본 장본인이요!"
90이 다 되어가는 할아버지가 인민군의 지시로 마른나무를 해서 직접 현장에 갔다놓은 장본인이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적어도 이곳은 6번이상 총기로 사살하고 일부는 불로 태워버렸다고 한다. 본인이 참가할 때는 한번은 우리 군인들과 경찰도 있고 미군같은 양키들도 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죄수들이 끌려와 땅을 스스로 파고 그곳에 꿇어앉아 총맞고 죽었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인원들이 묻는 형식으로 이루어 졌다 한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나무하러 참가하게 되었어요?"
"우리 집이 그때도 여기야. 그런데 전쟁이 난지는 모르는데 산 넘어에서 드르륵거리는 총소리가 나고 군인 차들이 군서쪽으로 빠져 나가. 그래서 가 보니까 바로 길 옆에 땅을 판 흔적이 있는데 뭐가 꿈틀거려요."
"묻힌 죽음의 호속에 살아남은 민간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안됐어요. 먼저 도착한 인원이 길게 쭉쭉 땅을 파고 다음에 들어온 인원은 그속으로 들어가면 총을 갈기고 묻어버리고 그 다음 조가 오기전 다시 땅을 파고 이번엔 제1조가 들어가 대기하면 총을 갈려 죽이고 그 다음조가 묻고 반복하면서 몇백명이 죽었지."
"그런 곳을 보도록 하지는 않했을 것인데 참 용기있게 가 보셨네요?"
"나는 키가 쪼그만해서 잡혀가지 안했어요. 그때야 전부 산에서 나무를 해서 불을 태우는 시절이라 산에 자주 갔어요. 소먹이 풀이 낭월지역 개울가에 많아서 쉽게 넘어와 지게에 지고 나오기도 했어요. 소를 몰고 가서 놀기도 해 낯설지는 않는 곳이였어요."
"묻힌 사람중에 어쩌다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맞아요. 정말 안타까운 모습인데 가보니 바로 직전이였는지 땅이 울렁울렁거려요."
"그럼 파보지 않으셨어요?"
"그건 못했어요. 왜냐하면 곧 또 차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모르잖아요."
"그럼 결국 다 죽고 말았겠네요."
"그렇다고 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누가 살아나서 식장산에 숨어들었다 집으로 가고 나중에 이 사실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아까 질문인데 할아버지는 나무를 해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겁니까?"
"나도 피해자중 한명인데 북한군이 들어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는데 할아버지와 내가 끌려나와 이곳에 와서 한 일이 마른 나무를 몇다발씩 해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갔지."
"그런데 나중에 북한군이 올라갔는데 국군과 경찰이 들어와 동네에서 부역에 참가한 사람들을 잡아 가는데 우린 아는 사람이 있어 빠져 나왔어요."
"그럼 이동네 사람들도 죽었습니까?"
"그럼요, 북한군에 가서 돌아오지않은 사람도 많고 경찰에 끌려가서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병들어 곧 죽어버린 분들도 있습니다."
나는 2020년 정초에 발굴 당시에 현장에서 유해감식을 했던 박교수와 전화로 연락을 했다. 해보니 지금 자녀들이 미국에 거주중인데 바로 미국에 가 있었다.
"박사님, 산내지역 발굴 안합니까?"
"여기 미국이야. 곧 들어가고 발굴이 올해 계속 될겁니다."
"박사님, 민간인만 죽은 것이 아니고 국군 및 경찰, 미군도 있었고 죄수도 있고 인민군이 붙잡아온 유력인사 및 지역주민들도 있습니다. 고려하셔야 합니다."
"들어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종군 위안부 피하려 바보에게 시집가다"
대별동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길가에 앉아서 별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때 몇몇의 할머니들이 증손자들의 유모차를 밀며 다가섰다.
"할머니 혹시 여기서 오래 살으셨어요?"
"여기는 아니어도 중촌동 옛날 대전교도소 근처에 살았고 죽어간 사람들을 보았어요"
"뭘 찾는데요?"
"예, 낭월지역에 6.25전쟁 당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갔다 왔어요."
"그래서 찾아서 뭐해요? 돈줘요?"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라위해 전사했으므로 유해를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입니다."
이때 또 한명의 할머니는 대전 구 KBS방송국(목동)옆에 살았다며 안에 야산이 있는데 그 당시에 많은 군인들이 죽어 있었다 한다.
"혹시 할아버지께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 질문이 할머니를 분하게 만들었다.
들어보니 기막힌 내용이다. 글쎄 일제시대 말기에 여성들이 전선으로 가는데 시집을 간 여자는 대상이 아니였다한다. 할머니는 외동딸이었다. 어떻게 몇번의 모집에서는 피했는데 점점 그 숫자가 늘면서 위기가 다가서고 있었다. 전쟁터에 몸종으로 안가는 방법은 결혼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에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데 목동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와서 보니 나이가 무려 20살 차이다. 아니 아저씨와 결혼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은 부모님들이 결정하면 따라야 한다. 아니 이게 무슨 결혼인가.
그런데 어떻하랴. 하룻밤을 지내고 이틀밤을 지내고 그러다 보니 어쩔수 없이 살게 되고 자식을 낳게 되더란다. 지금같으면 범죄행위란다. 아마 살 여자도 없을 거란다. 부모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차라리 동남아로 친구들 따라 가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많이도 울었단다.
"할머니 가수 유현상이와 앗아의 인어라는 수영선수 최누군가도 15살인가 차이나도 잘 살아요."
"에이 이 양반아, 그건 좋앙서 사는 거고. 나는 강제로 산거야."
결국 남편분이 자식 둘 두고 60도 못먹고 꼴딱해버려 얼마나 서럽게 살았는데 그 아들이 하나는 선생님이고 한명은 자영업을 한다고 한다. "불쌍한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다..."
"우린 중촌동 대전 교도소로 갔다."
바로 주도로 옆에 있어 찾기도 쉽다. 들어가니 당시를 기억하라고 조그만 스토리역사관도 있다. 이미 이곳의 내용은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무려 아군이 반격으로 올라사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500여 명이 죽어 있었다. 지역 양민과 점령지 여러곳에서 잡아온 유력 인사들을 교도소 안에 있는 우물에 살아 있는체로 여러명을 묶어서 집어넣어 수복 당시에 시체 꺼내는데만 3일이 걸렸다고 한다.
또한 교도소 운동장 등 공터를 이용하여 2,000여 명을 생매장하여 죽였으며 국군이 미군과 들이닥쳤을 때는 그 생매장 구덩이에서 꿈틀거려 바로 파내서 살아난 민간인도 여럿이고 국군이나 미군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우리가 남으로 내려갈 때는 이곳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 이들 중에는 보도연맹도 있고 프락치도 있고 4.3사건이나 여수.순천사건에 연루된 죄인들이 포함 되어 있는데 1,800여 명이 바로 산내지역으로 실려가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전 교도소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선생, 여운형 선생, 김창숙 선생 등이 수감된 곳이고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망루를 4개나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도 있다. 우리는 우물 앞에 서서 묵념을 올렸다.
"구 KBS터에 남아 있는 전투 흔적"
지금 우리의 전사기록에는 국군이 대전지구 전투에 참여한 기록을 보지못했다. 그러나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조바예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국군 2개 연대규모를 소멸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나도 자신있게 말 할수는 없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직접 보았다고 한다. 또 우리가 들어가 보니 교통호의 흔적이 있고 몇개의 탄피도 발견했다. 당시에 교통호에 시신이 들어가 있었지만 국군이 진격하면서 대부분 발굴하여 화장도 현지에서 했다고 한다.
"시신 타는 냄새가 너무 심했다."
우린 대전 교도소 자리와 KBS 자리에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많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과 현장에서 나중에 발굴하면서 화장도 하여 냄새가 독했다. 특히 대전 교도소 자리에서는 죄수들만이 아닌 북한군이 들어와 국군포로와 경찰, 때로는 지역 유력인사를 붙잡아 인민재판으로 프락치들이 직접 죽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식장산(598m)에 핀 진달래"
나는 식장산을 올랐다. 대전지구에서 철수하는 병력이 퇴로가 모두 북한군이 점령하여 도로를 따라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산악을 이용하는 것이다. 식장산을 넘으면 옥천이다. 세천터널 일대가 적의 수중에 놓여 17번 도로를 사용하면서 또한 마달령 고개 앞에 적이 기가리고 있는 상황이라 산으로 올라야 하는데 이게 식장산이다.
제보자의 이야기에도 낭월지역에서 어쩌다 살아난 인원들은 식장산으로 숨어들었고 판암동에서 포위된 미군도 산으로 올라섰다.
5월이 오고 있는데 2000년은 뜨거웠다. 우리의 전쟁역사 50년만에 최초로 유해발굴 작전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단 한구의 유해라도 정중히 찾아서 모시려는 발굴팀의 노력은 열심히 그 자체였다. 발굴 팀은 지금 다부동 일대에서 발굴을 1차 종료하고 안강.기계지역으로 옮겨가려는 상황이었다.
식장산 위에는 방송국들 중계탑과 군 중계소가 위치해 있어 방위목표인 모양이였다. 빙 둘러서 철조망이 설치 되어 있는데 그 철조망을 따라 등산객들이 다니는 길이 생겼다. 전설따라 삼천리를 알아보면 삼국시대에 백제의 땅으로 이곳에 성을 쌓고 군량미를 보관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우리가 올라간 싯점에 주변이 철쪽으로 가득차 있어 꽃속에 파묻힌 벌같은 느낌이 들었다. 열심히 꿀을 얻으러 다니지만 실제 몇방울의 꿀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꽃을 옮겨 다녀야 한다.
우리도 지금까지 결과를 부석해 보면 개인호 150개를 굴토해야 한구의 유해를 찾았다. 물론 집단 매장지에서는 영광 삼학리처럼 한구덩에서 30여구가 나오는 경우도 있긴 하다.
눈을 크게 뜨고 울타리 주변을 탐사하고 개인호가 있으면 금속 탐지기를 대여 보고 한나절을 조사했으나 별 얻어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능선을 따라 망경대- 독수리봉(586m)-국사봉 능선을 따라 대전-옥천경게능선을 달려 세천공원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역시 땀은 흘렸지만 원하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세천공원 인근의 구정골 야산에 남겨진 개인호를 발견했다. 물론 우리가 판 것이 아니라 북한군 침투부대가 판 것으로 추정되고 몇개의 굴토를 해 본 결과 모시나칸트 탄피가 몇 개나왔다.
독수리봉에서는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시대에 무학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는 구절사(구절사)에 들어가니 아담한 절에 신도들도 별로 보이질 않는다. 마침 주지스님이 계셔서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하니 전쟁관련 전해오는 이야기는 없다고 한다. 전쟁 전에 이미 페허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와 워낙 깊은 곳에 절이 있어 먹을 것도 없고하니 빨치산도 아군도 머물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마달령에는 전투가 없었다"
마달령은 17번 국도상 대전과 금산의 경계령이다. 우회하는 북한군을 차단하기 위해 미 제24-21연대에서 대대병력이 방어작전ㄴ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적은 그 보다 북쪽으로 지금의 ㅅ산내지역인 낭월을 차단함으로서 실제 미군은 엉뚱한 곳에서 경계임무를 하게 된다. 조금만 앞으로 정찰대를 보냈으면 이곳의 퇴로를 학보하여 조직적인 철수를 보장할 수도 있었는데 안타까웠다. 우리가 실제 마달령 고개에 탐사팀을 투입하여 조사했지만호를 판 흔적은 있으나 전투유품은 확인하지 못했다.
"강경 화산리에 일어난 사건의 진실"
2015년 봄에 전북지역 신문에 군과 경찰이 금강변에서 노출된 유해 처리에 대해 서로 핑퐁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예나 지금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은 이런 기사에 민간하여 곧 본인들의 자릭 떨어지는양 호들갑을 떨게 된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는다고 솔직한 업무처리면 하위직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문제의 발단은 익산 경찰서 과학수사대의 한명이 벌인 쇼에 언론이 춤추고 거짓(?)을 기사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이 사건을 알지도 못했고 제보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마치 군이 과거에 잘못된 일에 책임을 회피하려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처럼 기사가 났다.
나는 사실관계를 확인하라는 임무를 받고 먼저 화산리로 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압려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난 지역 주민이 바로 이 사건의 열쇠를 주고 있는 장본인인데 누구도 찾아와서 물어본 적이 없던 인물이다.
"어르신은 어떻게 저기 강변에 묻혀 있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 집이 바로 여기요. 밤에 차로 실어오고 일부는 저 밑에 길게 땅을 파고 하는 것 다 봤지요."
"그럼 누가 누구를 죽인겁니까?"
"경찰이 어디서 사람을 데려다 빨갱이로 죽였는데 죽으면서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러요."
강변에 도착해서 보니 옛날에 수로공사를 한 자리였다. 10여년 전에 준설공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낚시꾼이 이곳에서 났시를 하다 물이 쭉 바진 상태서 공사를 바닥을 보니 뭔가 이상한 것이 보여 들여다 보니 사람의 두개골이 보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 있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고 달려온 경찰이 가만히 보니 매우 오래된 물속에 칼빈 탄피가 보이고 한 두구가 아닌 여럿이 보여 혹시니 강경경찰서 경찰이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인원을 이곳에 버린 것이 아닌가 해서 전쟁 때에 발생한 것이고 지금 국방부가 유해 발굴을 하니 군에 이첩하려 제35사단 헌병에 상황을 넘겨벌렸다.
"경찰의 꼼수, 아무것도 모르는 헌병은 자체적으로 조사한다고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몇일이 지났는데 여기서 경찰의 꼼수가 시작된 것이다. 살짝 전북지역 모 신문기자에게 정보를 흘려 마치 본인이 국군 전사자를 확인한 것처럼, 그런데 군이 늑장을 부리고 있다고 기사를 만들게 된 것이다.
나는 최초 신고자인 아저씨를 만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경찰과 마주했다. 이 경찰은 충남채운지서에서 나왔는데 익산 경찰 과학수사대 모경정과 동기였다.
본인이 직접 목격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구 두구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유해가 이곳에 있을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노출되었는지 궁금했다.
"준설공사한다고 강변을 파서 그 속에 있던 유해가 물살에 씻기면서 들어난 것이고 아마 쭉 같은 수준의 강바닥에 더 많이 있을거요" 할아버지 이야기다.
"밤에 투닥투닥하는 소리가 들리면 또 누가 땅을 판다. 그리고 드르륵~"
그해는 유독히 비가 자주 오는데 어느 순간 비가 그치고 달빛이 올라 강가에 비추는데 어디서 수근수근 소리가 들려 나와보면 할아버지가 당시에 살아계셨는데 빨리 들어가라고 난리를 치셨다. 벌써 저기 강경읍쪽에서 트럭 오는 소리가 들린다. 알고보니 사람을 데려다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국군은 남으로 내려갔다 다시 들어와서 한 일이고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시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도대체 가해자는 누구고 피해자는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가해자는 북한군과 이유야 어쨌든 경찰이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다. 지역 유지들과 지주라는 잘 사는 사람들이 타켓이 되었고 북한군에 동조한 부역자나 주로 죽어갔다. 물론 북한군에 포로가 된 경찰도 있을 수 있고 군인도 있을 수는 있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익산경찰서 과학수사대가 왔다. 꼼수를 두고 있는 경찰이 있다. 하지만 지금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더니 입문이 막혔다.
"경찰아저씨, 이렇게 하면 안되지요. 이게 군인이 할 입니까?"
"듣고 보니 꼭 경찰이 해야 할 일도 아닌듯 한데 책임소재는 따져봐야겠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 군에서 책임회피하고 책임을 떠넘겼습니까?"
"그건 언론에서 가정해서쓴거니까 제가 정정하도록 하지요."
"아니 그 전북 매일신문인가 담당 기자와 통화 이미 다 해봤어요. 본인이 마치 진실을 규명하는 것처럼 미화하여 글을 쓰게 하고 뭐 이득이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별도로 이야기 합시다."
꼬리를 내리며 둘만의 대화를 요구하여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리고 본인이 그 해당 기자에게 전화하여 정정을 부탁했다. 군이 의도적으로 책임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절차를 잘못알아 비져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도 체면은 지키려 용쓰는 모습이 역역했다. 죄송하다고 한다.
결국 유해처리는 군과 경찰이 협력하여 민원처리차원에서 발굴은 군이 지원하고 유해처리는 경찰이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 거의 2주일을 발굴을 했다.
"길게 펼쳐진 수로변에서 나온 50여구의 시신은 누구의 형제일까?
현장을 목격하지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그 당시에 집단으로 끌려와 묶인체로 일렬로 정연하게 숨져가고 그 위에 흙이 덮어졌으리.
그러다 세월의 흐름에 강은 역사를 기억하고 강물은 흘러 이 사실을 알리며 쌓였던 흙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고 그 현장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그러니 수로공사하면서 얼마나 많은 유해가 유실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유를 지키려 숨져가기도 하고 공산주의자 총에 죽기도 하고 못나고 못배워서 일시적으로 불온사상에 현혹되어 추종하다 자유의 총에 죽기도 하고 별별 이유가 다 있으리~.
그 경찰은 그 후에도 본인의 영달을 위해 나에게 빅딜을 요구에 왔다. 세월의 사건의 유병언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 이야기도 해주며 본인이 마치 이 유해를 발굴하여 처리되는 것처럼 유공자로 해달라는 부탁아닌 부탁이었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하고 길을 떠났다.
"강경 경찰의 산화"
나는 이런 사건에 대한 사실 규명을 위해 찾아다니는 것이 보람이었다. 지금 미확인 자료 등에 6.25전쟁 당시에 숨져간 인원이 군인을 제외하고 민간인이 100만이 넘고 300만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전국을 돌아다니며 집단 가매장지를 많이도 보았다.
실제로 박교수팀이 참여하는 발굴 현장에도 가보고 묵념을 올리기도 했다. 정말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 이곳도 하천변에서 발굴되는 최초의 민간인 유해의 집단 매장지다.
나는 화산리와 채운리 등에서 지역주민 간단회를 5회에 걸쳐 실시했다. 혹시라도 원하는 제보를 들을 수 있을지 노력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화산리에서는 2회에 걸쳐 실시 되었다."
하지만 이 강변에 이러한 사실이 있었는지를 아는 분이 아무도 없다. 다만 옛날에는 포구 이곳이었고 맞은편 부여의 세도면 청포리에 배가 몇십척이나 정박해 있었다는 사실과 이곳에 일제시대 동양척식회사아 있어 강경평야의 쌀이 군산으로 실려나갔다는 이야기와 그 당시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만났던 어르신은 당시는 화산리 나암천 위에 살았는데 이곳이 강경과 익산의 경계선이고 지금은 강경에 들어가 살고 있어 간단회에는 미참가 했다.
채운리는 강경경찰 충혼 묘지가 있는 곳이다. 서장이하 무려 67명의 인원이 전사했고 당시에 시신 모아서 한곳에 가매장 되었다가 전후에 유족들에 의해서 대부분 찾아가고 일부가 지금도 묘소에 남아 있다고 한다. 문제는 화장되어 있느지 그렇다면 발굴해야 DNA 감식이 불가하다. 당시에 경찰로서 살아남은 경찰 할아버지가 있어서 조회를 해본 결과 전쟁 당시에 이곳에 없어서 화를 면한 것으로 들었다.
현재 묘 내부에는 시신의 흔적이 있을까 없을까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70여 년을 유가족이 그렇게 믿었고 영혼 또한 그렇게 이 하늘을 지켜왔으니 말이다. 채산리 용암사 입구에 경찰관이 죽어서 그대로 방치되어 동네 개들이 물어뜯고 난리였다는 한 제보를 받아 현장을 답사했으나 이미 도로가 확장되고 찾을 길이 없다.
경찰서 앞에서 이곳에 살고 있는 경찰 유가족 몇분과 당시 경찰을 한 유공자를 대상으로 간담회를 가졌다. 경찰관이 알려준 내용은 "첩자에 당했어요. 우리는 처음에는 이겼는데 첩자가 들어와 무너졌어요"라는 한맺힌 이야기를 들었다.
이 전사내용은 전사책에는 7월 17일 서해안지구 사령부(신태영 소장)를 편성했으나 유명무실하고 신편 제7사단 예하의 독립대대(김병화 수령) 300여 명과 경찰 700여 명이 강경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군산에서 장항으로는 해병대 고길훈부대가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강경경찰서가 적에게 포위되어 67명 전원이 전사했다고 한다.(한국전쟁사 상권 275~276p)
신편 한국전쟁사 4권 서남부지역 지연작전 편(p438~441, p450)에는 경찰이 강경에 1개 대대 규모, 제성,웅포,서포나루에는 독립 대대의 각 1개중대가 저지 임무를 했다고 기록 되어있다.
하지만 소련 군사고문단장의 기록에는 강경 전방 2km에서 7월 17일 여단급 규모의 병력과 조우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우리 기록은 왜 경찰만 전투행위를 기록 되고 있을까?"
신편 전사에는 제7사단 병력인 독립대대(김병화소령)는 규모가 300여 명인데 무기도 변변찮고 탄약도 별로 없었지만 전북편성관구사령관 원용덕 준장의 지시로 17일 10:00에 웅포로 진출 금강 남안을 경계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하고 18일 07:00에 적 제6사단 일부병력이 웅포 대안상에서 도하를 시도하였다고 기록한다.
한편 강경 경찰은 7월 15일 전주부근으로 물러났다 서해사로부터 명령을 받고 다시 강경을 탈환하기 위해 16일 17:00에 강경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적 편의대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결국 처음에는 공비도 5명을 생포하고 무장괴한도 10명을 포획하는듯 했지만 17일 03:00부터 적 대대급의 공격에 서장 이하 67명 전원이 산화한다.
강경 서쪽 교동리에 충남혼성경찰 1개 대대가 대기중에 있었는데 18일 05:00에 강경 남쪽으로 진출중인 적을 발견하고 공격하여 35명을 사살하였으며 일시적으로 적은 물러났다 다시 전력을 증강하여 공격해 옮으로써 경찰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곳 일대에서 지역주민을 대상으로한 제보 활동에서 국군이 싸운 것을 목격한 분은 못찾았다. 그러나 경찰이 적과 전투했다는 것은 많이 들었고 실제 충남 경찰관도 만났다.
"우리 국군은 어디서 싸웠을까?" 함열지역에도서 그 답은 찾지 못했다.
"조선의 모스크바 논산 성동, 이곳에 전투지가 있다"
나는 소련 군사고문단장의 기록에 의하면 강경 북방 2km에서 우리 2개여단 규모와 격전을 했다고 하여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차를 몰아 강경읍을 지나 북쪽으로 달렸다. 바로 올라가니 논산 성동면이 나왔다. 이곳에 과거 공주에 있던 교도소가 이곳에 와 있었다.
동네를 들러 탐문을 하는 과정에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와 실제 그 현장을 찾아가서 개인호를 확인했다. 소규모였지만 전투지임에는 명확하고 실제 죽어있는 경찰시신을 묻었다는 곳도 제보를 받아 찾았다.
그러나 언제인가 누군가가 그 지역을 파서 가져갔다는 이야기와 지금 묘는 그 후에 다른 사람이 묻혀있는 주인이 있는 묘라 한다. 동네의 공동 묘지처럼 되어 있는데 이곳에 여럿 묻혀 있다는 이야기와 유족이 찾아와서 발굴해간 곳도 있다는 이야기 속에 분명 경찰이 전투한 사실은 알았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살고 권위있는 분이 살아 있다하여 그 집을 찾았다. 마침 집에 있어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 갔는데 갑작스레 질문을 던져 놀랐다.
"아니 높은 분들이 어떻게 빨갱이 집안을 찾아왔소?"
갑작스런 질문에 잠깐 머뭇거리다 내가 대답을 해야 했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이기지않습니까. 그래서 어르신이 유명한 반공주의자로 거듭나신 것 아닙니까?"
"아아 그런가요. 찾아주셔서 감사 합니다."
사실 이 어르신 집안에 사연이 많다. 6남2녀의 집안이며 막내이신데 제일 큰형이 당시에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고 충남 지역 남로당 재무부장이었다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은 공통이다. 돈줄을 잡고 있으니 빨갱이란 집단에 상당한 발언권을 갔고 있었다.
그러다 전쟁이 나서 인민군이 들어 오는데 이 지역 우곤리나 병촌리에는 많은 민간인과 교인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화정리는 입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재무부장이 막았다는 것이며 그래서 이곳주민들이 탄원서를 내 수복이후 부역자 색출하여 처단하는 과정에 형제들이 살아 남았고 그 형은 북으로 넘어가 생사를 모르고 지내다 한다. 전쟁 종료 후에도 상당기간 형제들이 공부를 잘해도 집중 관리대상이였으며 공무원이나 군인도 못되었단다.
하지만 여기에 개의치않고 생전에 아버지는 없는 분들께 먹을 것을 나눠주었고 또한 지금의 어르신은 반공 응변가가 되어 당당하게 집안내력을 이야기 하고 남들보다 잘나지도 않게 조용히 잘았단다. 그렇게 살기를 한 30년 지나니 동네분들이 진정성을 인정하여 새마을 지도자로 선출하고 전국에서 최우수 동네도 되고 인생 후반부를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병촌리 성결교회 교인 66명 순교지 : 6.25 당시 지역 빨갱이들이 돌로 쳐 죽이다."
어르신이 한 곳을 안내하겠다고 하여 따라 나섰다. 간 곳이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 바로 강경에서 들어오는 입구에 강경에서 석성에 이르는 799번 지방도로 변에 교회가 있는데 이곳에 안내되어 담임 목사를 만났다. 조선시대부터 있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역사를 가진 성결교회였다.
그런데 바로 교회 좌측에 순교자 비가 서 있어 가보니 6.25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에 지역 프락치들이 반동이라고 이 교회 교인들을 붙잡아, 어느 교인은 한집안에 10명이나 죽기도 하는데 돌로 치고 몽둥이로 패고 삽과 괭이로 찍고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만행으로 죽여버렸단다. 아마 교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집단 학살지라고 한다.
"왜 이곳을 조선의 모스크바라 하는지요?" 내가 질문한다.
일정시대에 조선땅에 공산주의자(겉으로는 민족주의자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지만 그 세력의 중심이 사상적으로 마르크스-레린주의에 물들어 공산당 독제를 신봉하는 자)들이 태생하게 되는데 이때 성동지역이 잘 살아 일본이나 한양에 유학을 많이 갔고 그 학생그룹이 주로 공산당 우두머리역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성동이 떠오르게 되었다 한다. 여기에 여운형이란 중도 공산주의자(?), 독립 운동가의 "여씨"들이 이곳에 많이 실제 살기도 했다고 한다.(생가는 양평 신원리, 충북 단양에서 임신되어 옴))
"우곤리. 월성리의 제삿날 : 18가정이 같다."
나는 병촌 입구 은행나무 밑에서 햇빛을 피하고 잠시 하늘을 보고 있다. 이곳에 교도소가 들어서게 된 것도 아닌말로 풍수지리와 연관도 있으리라 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얼마 지나니 오토바이를 타고 한 어른이 앞에 오셨다.
"어르신 이 동네에 혹시 6.25 당시에 전쟁이 없었나요?"
"전쟁은 모르겠고 억수로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갔소. 집에일이 있어 가니 마을 창고 앞으로 오쇼."
나는 헐레벌떡 옷을 추수리고 어르신을 따라 창고 앞에 대기했다. 이윽고 어르신이 나타났다.
"뭘 알려고 그려슈. 여긴 민간인이 다 죽었지."
"민간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혹시 아시나요?" 나는 지금 황산대교 밑의 화산리 집단 매장지역에 나타난 유해들의 뿌리를 찾고 있었다.
"말마유. 북한군이 와서는 머슴놈들이 날뛰며 지 상전들을 잡아다 죽이는데 내가 13살인데 죽이는 곳이 저 앞산 계곡이요. 거기서 울부짓는 소리가 밤마다 나요. 비참했어유."
"아니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다면서요."
"말마요. 아들보고 아버지를 죽이라 하고 새파란 부인보고 남편을 죽이라 하고 주로 형제지간이나 일가친척들끼리 죽이게 하는 패륜행위를 했지요. 집주인을 내쫒고 자기집이라고 들어앉고 글씨도 못쓰는 주제에 문패도 거꾸로 달아놓고 이곳이 무법 천지였어요." 그러시면서 죽어갔다는 계곡으로 나를 안내한다. 사실 계곡도 아니다. 낮은 야산이라 집에서 저 너머가 안보일 뿐이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죽이고 나면 시신을 가져와야 하는데 처음에는 무서워 얼씬도 못했단다. 빨갱이가 무섭다 한다. 인정사정도 없이 막무가내로 파리 목숨보다 더 쉽게 사람을 죽이는데 아주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인다고 한다.
"그럼 그 빨갱이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 후에?"
어르신이 어느 기와집 대문 앞에 앉으시며 담배를 하나 꺼내서 입에 대신다. 말문이 막혀 눈물도 않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죽어간 인원이 하룻밤에 18명이 죽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제삿날이 모두 갔아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한다. 담배를 쭈욱 들이키시고 내뱉으신다.
"세상이 인과응보 아니겠어요?"
"네 그렇지요. 하지만 잘 속이고 또는 남에게 뒤집어 씌우고 잘 사는 놈들도 많아요."
"아니요. 그렇지않아요. 언젠가는 벌 받아요."
"그럼 여기 그 날뛰던 빨갱이들이 벌 받았습니까?"
"다시 수복이 되어 군인도 오고 미군도 오고 경찰도 오고 다 왔어요. 그래서 쓰리꼬타에 그놈들을 실어가는데 집식구들 다 잡아가버렸어요."
"그럼 어린애도 다 잡아갔습니까?"
"부모가 가는데 애들이야 뭐 별 수 있어 따라 나섰지."
"어디로 갔습니까?"
"그걸 몰라요. 해질라해서 실려 나갔는데 차량 3대에 실어 이동네에서만 한 50명은 갔을거요."
"그럼 부역했다는 집도 다 포함되어 갔겠네요. 피해 본 사람들이 다 신고했을거 아니예요?"
"그렇습니다. 일부는 어떻게 국군이 올라오느지 알았는지 서울로 가족을 데리고 내뺀 놈도 있는데 경찰이 추적해서 몇 놈은 잡아 왔다고 해요. 아예 북으로 도망가서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집도 있어요. 그래서 그 재산을 몰 수해서 다른 사람이 부리고 있어요."
"결국 이래서 죽고 저래서 죽고 마을사람만 다 죽었네요?"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해요. 북한군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정말 이웃집이 무서워요."
나는 지금 화산리 금강변에 나오는 유해가 혹시 이동네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우회하는 부대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분명 이곳 사람들은 국군을 보았다는 사람은 9월에야 보았지 7월에는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전사에는 국군이 금강변에 방어선을 구축을 했으나 총도 없고 실탄도 없는 독립대대가 제대로 진지편성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하고, 기병중대도 활동 했다, 경찰도 활동 했다고 한다.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은 강경 북방에서 우리 군 2개여단과 격전을 하였다 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나는 모르겠다.
우리는 통상 북한군 제6사단이 천안에서 서해안으로 우회한 것을 일정기간 몰랐다고 하지만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의 이야기는 비행기가 따라 다니며 폭격을 해서 주간 이동을 못하고 야간에만 기동했다 하는데 이것 또한 미스테리다.
"망성 강경천 둑에 묻힌 경찰관 :1구 발굴 되다."
계룡대에 근무하고 있던 '00년 6월에 익산 망성에서 본인이 직접 경찰관이 전사하여 묻힌 장소를 안다는 제보가 왔다. 나는 평일을 피해 주말에 한번 자가용을 끌고 망성에 가서 제보를 만나 현장을 확인해 보았다. 가서 보니 갈대가 완전히 뒤덮어 한 삽도 들어가기 힘든 곳인데 분명 맡단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으세요?"
"내가 어량리에 살았는데 바로 여기 밑에 논이 우리 것이요. 전쟁난지도 모르고 논에 물대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 왔는데 이 둑에 한명, 저기 논 속에 한명이 죽어 있는데 북한군이 총을 들고 다니며 소리를 치는데 빨리 들어가라는 내용이라. 그래서 무슨 일인가 얼른 집으로 돌아왔는데 동네에 북한군이 총을 들고 다니고 있어요. 아버지를 세우더니 어디갔다 오느냐고 따져 물어서 논에 갔다 온다고 하니 집으로 들어가라는 거야. 그래서 집에 왔지."
"그럼 죽은 유해는 그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도 있잖아요?"
"그야 논에 한번 가고 안가나. 또 갔지. 그랬는데 논속의 경찰은 없어지고 이 곳은 그대로 있어서 씨꺼멓게 변해가는데 보기 흉해서 아버지가 묻었어요. 그러니 내가 정확히 알지."
"그 뒤에 경찰에서 찾지 안했나요?"
"그건 내가 군대에 갔다 온 것이 '61년도 박정희 5.16혁명이였는데 그 기간을 빼고는 없었어요."
'00년도에 우리는 35사단 병력을 지원받아서 발굴을 1차로 했으나 찾지 못했다. 어량천이나 강경천이 복개공사는 되었지만 수로 강바닥 위주로 수로를 넓힌 것이지 강둑은 그대로라는 지역주민의 안내도 받으며 발굴을 했으나 실패했다. 혹시라도 깊게 묻혀 있을 수 있어서 1m 깊이까지 굴토를 했으나 찾지를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그 제보자로부터 연락이 와서 찾아가 보니 발굴 위치가 조금 어긋났다며 당시 위치에서 약 30m정도 차이나는 곳을 알려주어 발굴작전을 다시 해서 결국 1구의 유해를 찾았다. 하지만 유품은 없다. 아마도 부상으로 후퇴하며 신분이 될만한 것은 다 처리해 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 일대에서 경찰 병력이 전투를 했다는 사실을 우린 검증하게 되었다.
"대둔산 월성봉(651m)에 부는 바람"
논산 참전전우회에서 나를 보자고 한다. 유법사가 아마 과대 선전을 한 모양이다.
양촌면으로 오라해서 한 10여 명의 참전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서너명은 참전 경찰이었다. 하시는 이야기가 대둔산 영은사 계곡과 법계사 계곡에 많은 전투가 있었고 당시의 전투경찰이 수없이 전사했는데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둔산은 사실 정규전보다는 비정규전으로 공비토벌작전이 벌어진 곳인데 우리 제9사단이 주로 토벌작전을 한 곳이다. 이 말은 전쟁 초기에 이곳에서 전투는 실제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와서 들으니 여러가지 의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후퇴하는 군인과 경찰 병력중 일부가 민복으로 무장하고 산속에 숨어들어 다시 국군이 올라오기전까지 게릴라전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군도 전선이 자기들 맘대로 안되니 이곳에 병력을 집중하여 소탕전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경찰을 한 분도 생존하여 그 당시를 이야기한다.
나는 짧은 지식으로 이야기하기 곤란하여 그저 '예 예'만하다 결국은 "어디에 묻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용사님을 따라 현장에 갔다.
현장은 면에서 멀지않은 신기리라는 곳과 월성봉인데 산악지형은 참전용사님들이 갈 수 없기에 그 곳은 차후에 우리끼리 확인하기로 하고 신기리 입구로 갔다. 바로 길 위에 올라가니 앞에 양촌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데 이곳에서 함께 매복을 하던 동료 3명이 전사해서 현장 개인호에 묻고 떠났다는 것이다.
"용사님, 아니 전우가 전사했는데 그냥 지금까지 그 자리에다 두었다니 좀 이상합니다?"
"그 이야기는 복잡하니 묻지말고 탐지기나 돌려보소. 그리고 소주 한 잔 올려야지!"
"그럼 혹시 이름은 아시나요?"
"전시에 여기저기에서 모인 사람들인데 같은 동네면 몰라도 기억못하지. 무슨 김동뭐하고 채인식인지 뭐 잘 몰라요."
우린 위패카드에 금산이나 논산지역의 현황을 확인해야 했다. 결과는 금산 복수에 무려 307명명, 보령 월사리에 241명, 태안에 167명이 있다. 현충원 묘비는 천안16위, 금산 14위, 강경 10위, 공주 16위, 논산 16위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수는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많은 위패카드가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복수는 산내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란 것 밖에는 아직 밝혀지지않고 있는 미스테리다.
우린 간단한 약식제례를 올리고 '09년 3월 말에 발굴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무려 6구의 유해가 나오고 전투화, 수류탄, 탄피등 수십점의 유품이 발견 되었다.
"용사님 3명이라더니 6명이나 전사해 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용사님들은 말을 못했다. 무언가 사연은 있어 보인다. 모두가 9사단 참전용사라는데 정말 이곳에서 매복작전을 하다 전사한 것인지 아니면 월성봉이나 바랑산에 있다 무슨 이유로 마을에 내려왔다 이곳에서 게릴라 매복에 걸려들은 것인지. 용사님들은 매복근무중 산에서 내려온 게릴라에게 당했다는데 왜 유해를 처리하지 못했을까~?
다시 대둔산 월성봉과 바랑산을 발굴했다. 산 위에 올라서니 평원처럼 넓다. 주변에 교통호가 구축되어 있고 탐지기를 돌려보니 유품들이 많이 나온다. 교통호를 파내려 가니 불을 질렀는지 검게 탄 숯들이 일부 나오고 이곳에 누가 오래 머물렀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다. 결국 10여 구의 유해를 발굴 했으나 완전 유해는 없고 일부는 동물뼈도 있고 어수선한 지역의 발굴은 끝이 났다.
"내가 석천암에서 권총도 보았고 실탄도 보았는데?"
대둔산 탐사중에 가장 높은 고지인 마천대에 올랐다. 주변은 아직 얼음이 덜 녹아 길은 미끄러운데 등산객이 상당히 많았다. 이곳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한 젊은이를 만났다. 알고보니 아버지가 하는데 본인이 잠깐 도우러 올라 왔다며 아버지가 한 이야기들 들었다고 아는 곳이 있다 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전화로 바꿔주었다.
"사장님, 저희는 유해 발굴단인데 사장님이 한 곳을 안다고 아드님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예 석천암 아시죠. 그곳으로 한 100번은 오르내렸는데 한 10년전에는 그곳에서 권총도 보고 철모도 보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 불이 난 뒤로는 안보이던데요."
"알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바로 우린 조사에 착수하여 석천암 주변을 탐지기로 정밀 조사하였으나 어떤 유품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조사하는 과정에 지나는 등산객들로부터 바로 옆에 계곡물이 흐르는데 그곳에 옛날에는 바위틈에 유골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 수해가 나고 절도 불이 나서 타버렸는데 보이지않는다고 한다. 우린 다시 석천암에서 마천대 방향으로 올라 그 더운 여름에 땀으로 목욕을 하고 케이불카를 타고 내려서 건천리로 갔다.
"금산 건천리 돌 무덤에 나온 유해 : 고, 일병 조달수님"
해는 긴 여름낮을 헤엄쳐 서서히붉은 노을이 서쪽에 일기 시작한다. 이곳은 남쪽이라고 온통 산뿐이다. 이런 곳은 강원도보다 훨씬 산이 많다. 우린 진산을 거쳐 차를 건천리로 달렸다. 예비군 면대장이 제보를 받았다고 와서 빨리 확인을 해 달라고 보챘다.
현장에 가니 산도 아니고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다. 바로 길 위에 산과 언저리에 수풀이 있고 돌무덤이 있다. 누가봐도 도로 공사중에 나온 돌을 져 놓은 곳이다.
사연은 이렇다. 당시 16살인 제보자 분이 키기 작아서 아군도 안잡아 가고 북한군도 안잡아 가 집에 그대로 있었다. 때는 '5년 9월경이란다. 갑작스레 완장찬 프락치가 동네를 휘저으며 동네사람을 다 모아 데리고 이곳 밑에 있는 논으로 왔다. 이미 추수를 마친 논에는 어떤 군인이 꿇어앉아 있고 인민군이 모여서 지켜보며 닥달을 하고 있다.
"간나새끼 너 소속이 어니니?"
"모른다."
"니 어디서 살기냐?"
"포항에서 사는 조달수다."
"누가 니를 숨겨줬지비?"
"내가 혼자 숨어다녔다."
"간나새끼 독하구만. 그래 죽어도 말않하것지?"
"뭘 말하리. 나는 대한민국 국군이다."
"수령동지 만세 삼창하라우. 그럼 목숨은 살려준다."
"그런데 갑짜기 꿇어 엎드린 용사가 일어서 "대한민국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러면서 총이 당겨지고 죽었는데 하루는 이곳에 그대로 있었지요."
"누가 옮겨서 묻었습니까?"
"개들이 물어뜯고 늑대나 여우들이 산에서 내려와 난리라 냄새가 나니 완장찬 놈들이 동네사람을 시켜 치우라 해서 묻은 곳이 여기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군부대가 지나갔는데 어느부대인지는 모르는데 아마도 9사단 30연대일 것이라 한다. 여기 분들은 9사단을 잘 알고 있다. 제9사단이 '50년 10월에 창설되어 11월부터 12월 어간에 이곳 대둔산일대와 김천 상주 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감행한 적이 있다. 그 후에도 제11사단이 '50. 10월에서 '51년 4월까지, 8사단도'51.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공비토벌 작전을 이 일대에서 했는데 지역주민들은 9사단을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부대던지 후방지역 작전을 하는 과정에 주도권은 국군에게 있었고 북한군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은 '50년 7월부터 9월 중순이다. 주민들의 기억하고는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고 계속하여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떨감을 먹다 기도 노출로 전사한 군인"
"누군가 본 사람도 있을거 같은데 모르십니까?"
"그 군인이 어느날 야간에 숨어 들어와서 어느집에 있다가 인민군들이 냄새를 맡고 집집마다 수색을 하고 찾아내라고 윽박지르고 다니다 보니 어느 집에 있을 수도 없고 하니 여기저기 숨어 있다가 배가 고파 떨감을 먹고 목이 매여서 그만 콜록콜록 하는 바람에 신고가 되고 잡혔다고 합니다."
"그럼 신고한 그 집은 별일 없었나요?"
"아니지요. 나중에 군인이 오면 다 죽는다고 하는바람에 북한군이 물러날 때에 온 집안이 짐싸고 가서 소식이 없어요."
"황금 유해를 발굴하다."
발굴이 시작 되었다. 나는 정중히 약식 제례를 올리고 직접 현장에서 돌을 들어냈다. 어느 순간 황금 빛 물체가 돌안에서 빛난다.
"잠깐 멈춰라. 뒤로 물러나 있어?"
그 순간이 명확히 떠오른다. 얼마나 빛이 찬란하게 나는지 나는 황금이 있는줄 알았다. 아니면 황룡이 버티고 있는줄 착각하여 모두 뒤로 물렸다. 하지만 돌틈에 아무런 반응이 없이 빛만 솟아나와 가까이 접근하여 내부를 바라보니 길게 뻗어 내린 사람형상이였다. 다시금 돌을 모두 들어내니 아뿔싸 이렇게 황금색을 띄고 있는 유해는 처음 보았다.
묻히지도 않고 동네사람들이 던진 돌 속에 용사님이 황금용사님으로 변신한 것이다. 어떻게 미라도 아닌데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발가락까지 남아 있는 완벽한 유해로 총을 맞은 두개골 부분만 함몰 되어 있었다.
우린 전사자 명부에서 근거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포항에 조달수란 분이 없다. 9사단이나 11사단 8사단에도 없고 정읍에 연고지 있는 집이 있어 유전자 조사를 했지만 틀리다라고 한다. 우린 많은 노력에도 결국 유족을 찾지 못해 결국 발굴단 유해 보관소에 남아 계시다.
"용사님 편히 쉬소서."
"00사에 오른 용사님"
부여의 유법사님으로부터 제보전화가 왔다. 대둔산 00사에 올라 바로 좌측에 국군이 묻혀 있다는 제보다. 벌곡 도산리에서 올라서면 수락계곡 위에 승전탑이 있다. 주차장에서 한 20분 걸어서 오르면 승전탑이 나오는데 '50. 10월부터 공비토벌 작전이 종료된'55년 1월초까지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숨져간 경찰, 군인, 애국청년단 등 1,376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남 지방경찰에서 건립한 추모탑이 있다.
이곳에 올라 묵념을 하고 계속 올라서면공비 토벌작전시 제9사단 제28연대 병력이 전사하여 3명을 묻었다는 내용인데 참전용사가 명확하게 증언했다는 내용이다. 이 참전용사님이 제28연대 부연대장이었던 그 유명한 홍천 말고개 전투 제6사단 대대장을 했던 고 김 주영 예비역 장군이다.
우린 먼저 사전조사를 위해 00사에 올랐다. 절이 6.25전쟁 당시에 포격으로 페허가되어 아직 제대로 복구가 안되어 있는 상태로 관리가 되고 있었다. 우린 땀을 흘리며 올라서 주지스님이 주시는 점심을 먹고 현장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탐지결과 금속성 물질의 신호음이 걸리지 않는데 유법사의 이야기가 워낙 강하여 발굴을 해 보기로 했다.
발굴 당일에는 제32사단 병력이 지원나와 땅을 굴토하고 우리는 탐지기를 들고 현장을 점검했다. 유법사님도 현장에 위치하여 해당 지역을 실제 크기보다 넓게 큰 소나무 사이를 굴토했다. 하지만 흔적이 없다. 만약에 이곳에서 화장을 했다면 까만 숯의 흔적이 나오게 되어 있는데 이것 마저 없다.
"법계사에 남겨진 숙제"
논산 채광리에서 오산리로 들어서면 6.25참전 유공자 탑이 먼저 우릴 맞는다. 이 산골에 유공자탑이 세워진 이유는 당연히 대둔산지역에서 그 만큼 많은 인원이 공비토벌 작전간 숨져갔기에 세워졌다. 오늘 우리가 이곳을 오르는 이유는 바로 법계사 윗쪽 좌측계곡에 수 많은 사람이 죽어서 묻혀 있다는 제보에서다.
전쟁 당시에 민간인뿐만 아니고 지역의 유력인사, 미쳐 후퇴하지 못하고 숨어지내던 군인이나 경찰을 빨개이 들이 색출하여 이곳으로 끌고 와서 집단으로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제보자와 양촌 참전용사회 2명, 유법사 이렇게 올랐다. 절에 도착하니 무척이나 깨끗한 최근에 지어진 사찰로 비구니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특히 전국 유일의 비구니 노스님의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는 노승 복지사찰이란다.
찾아온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절을 돌아 집단학살 했다는 계곡으로 갔다. 저기 위의 고지가 바랑산으로 "어느 노스님이 바람을 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산이름인데 그 너머에 국군 제9사단의 충혼탑이 있는 영주사가 있다. 한때는 이 대둔산에 남부군 빨치산 대장 이현상이 머물고(그 아내의 고향이 금산) 공비숫자가 2,000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토벌작전이 있었는지 '50년 말부터 '55년 초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 논산이나 금산이 알게모르게 빨치산의 소굴처럼 되어 전쟁직후에는 인식이 안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찾으러 가본 현장은 몇번에 걸쳐 산사태가 나서 휩쓸고 내려간 모습이 뚜렸했다. 비록 큰 나무들은 없지만 활엽수가 그리크지않게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유해를 발굴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우린 현장을 떠나기 전에 사찰 스님께 인사를 드리며 영혼들을 위해 지장기도를 열심히 해주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논산 양촌 반암리의 진혼곡"
이곳은 4번 도로변에서 농로길을 따라 바로 산밑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은 제보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몇십명의 지역 청방대를 빨갱이들이 끌고와 집단학살하고 산 능선의 흙을 밀어서 계곡을 아예 메꿔버렸다고 한다. 도대체 이곳 양촌은 인구가 얼마나 되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에게 죽고 군경에게 죽고 기막힌 곳이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곳으로 꿀고 들어가고 총소리가 요란했으며 나중에 가보니 산등성이 흙이 까내려간 흔적이 역역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그 유족들이 찾아가지 않았나요?"
"알면 찾아가지요. 하지만 여기 사람이 아니고 인접 면에서 잡아온 사람일 경우 어떻게 알아야 찾아 가지요. 전쟁 중에도 이곳은 빨치산이 우굴거려 경찰도 사실 낮에난 들랄거렸지 해지기 시작하면 나타나지도 않고 그놈들 세상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