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규 시집 <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를 읽고
글이란 것, 시란 것, 그것이 ‘그 사람’에게서 나왔기에 ‘그 사람’과 연관 지어 읽고 생각함이 당연하지만, ‘그 사람’을 떼어놓고 일단은 ‘그 시집’ 그대로를 직관할 필요가 있다. 한 권의 시집에 담기는 언어의 세상 -상상이든 실제든-은 다양하지만 현실의 ‘그 사람’은 존재론적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에 실린 55편의 시를 소재 및 주제 별로 분류하면 자연 6, 지역 2, 상상 12, 생활 12, 사물 4, 역사 10, 종교 1, 가족 4, 문학 4편 등이다.
강 시인의 시적 인식의 범위는 가장 멀게는 ‘여덟 개의 발을 가진 생명 하나’와 ‘날개를 가진 생명 또 하나’, ‘조약돌’과 ‘선蟬’에까지 닿아있고, 가깝게는 ‘저렴한 촛불’이 켜진 ‘재산리才山里’의 ‘늙은 대추나무’와 ‘고로쇠’, ‘아들’과 ‘빵집 주인 박태용’, ‘아버지 姜志中’과 ‘학도병 이용모’, ‘양조장집에서 정중히 하룻밤 지내고 간 인민군 소좌’, ‘리영희 大記者’와 ‘산판 할아범’. ‘공중화장실 그녀’와 ‘칡소’와 같은 일상의 인물들에 닿아 있다. 그들과 만나 한참 동안 가슴에 서린 언어를 나눈 다음, ‘‘어떤 그리움’과 ‘사랑가’의 옷으로 갈아입고 ‘늙은 다리’를 건너 ‘사억 오천만 년 전 영월’과 ‘그 행성의 작은 별’을 함께 생각하며 아득히 ‘태백산맥’을 걸어가고 있다.
멀든 가깝든 그의 시들은 반드시 ‘꽃 피는 봄날’에 ‘예배당 계단’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즉 ‘예배당 계단’이라는 틀이 작용하기 때문에 부정적이거나 비극적인 이미지보다는 긍정적이고 평화적인 이미지가 전편에 흐르고 있다. 그러기에 그가 이 시집에서 노래하는 대상들은 서정적, 관념적인 것보다는 실제적, 현실적인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강 시인의 시적 토양은 일정 부분 개인적 서정성이 함유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토질은 실제적인 현실인식과 실천의지이다.
시집 앞부분에 배치된 개인적 서정성의 ‘산’과 ‘바다’를 지나면 그의 장기라 할 수 있는 현실참여성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우선 가족과 이웃에게 깊은 시선을 주어 시가 결코 ‘유리된 개인의 독창물’이 아님을 표징 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답답한’ 시대와 역사에게 오랫동안 벼린 표창을 날린다.
그러니 하늘의 말씀도 그러하듯 너의 마음자리를 돌비에다
새기지도 말고 나무에도 새기지 말고 맘속에 꼭꼭 넣으라고
하셨네
마음속의 십계명도 탐심으로부터 지워져 버리고
이제야 알았네 나그네 이곳에 와 백비白碑를 보며 맘속으로
명문하라고
그러니,
빈 돌 바라보며
마음 한 자,
글 한 획
⌜문화재앞 명문銘文⌟ 부분
시인의 ‘백비白碑를 보며’ 새롭게 출발하는 스스로의 시적 자세를 다짐한다. 그러한 자세는 시적 인식에 깊이 작용하여
그런데 말이지 글이 맛이 없으면 어떻게 팔지 서푼도 안되는
이름값 걸고 살과 피로 만들었다 딱지 붙여 그래도 맛없으면
어쩌나
맛없는 인생에 무슨 양념으로
맛을 내어 글을 팔까 詩를 팔까
무허가 글쟁이 글 판다고 단속하면 어쩌지
장날, 목 좋은 자리 놓일까
⌜빵집과 시집⌟ 부분
하고, 껍데기는 말고 알맹이가 실한 시를 향한 구도자적 자문자답에 맴돈다.
그러다가
어디, 날 때부터 詩人이었겠어
자라면서, 또는 껍질을 덧입으며
억 만 광년 우주에 있는 생명
그리고 세상, 죄다, 귀하고 아름다워지고서야
詩人이 되었을 걸
⌜新시인시대⌟ 부분
하고 내적 맴돌기를 일단 매듭짓고 시대와 역사를 기록하는 실천형 詩人이 되고자 결연히 맹서한다.
우리는 글쟁이가 무신 면허를 내고 으시대고
문화나부랭이 예산이나 따먹고 그늘막에 앉아
배짱이 꽃타령 별노래나 해대면서
꿀 발라 맛있어, 간장타서 싱겁지 않게
왕휘지 일필휘지 선비흉내 한문타령.
그런게 글쟁이라면 난 그 줄에 서지 않겠네
땅파고 땀 흘리고 뼈와 골이 빠지도록
흙과 살던 우리의 민중이 있었고
그들의 노래가 구전되어 이 땅 속에 스몄네
⌜재산리才山里 생각 ⌟ 부분
그의 시적 태도와 인식은 간고한 세상살이와 폐쇄적인 지방문단 권력 속에서 몇 번의 굴절을 겪는 동안 자칫 쇠잔해지려하다가도, 白碑 앞에서 한 맹서를 다시금 떠올리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러한 인고의 시간을 통해서, 시에 대한 의지와 정열로만 처리할 수 없었던, 지금까지 막연했던 시적 대상이 그의 눈앞에 뚜렷이 떠오른다.
그것은 ‘땅파고 땀 흘리고 뼈와 골이 빠지도록/ 흙과 살던 우리의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언어예술로 기록하는 ‘민중시’이다. 그의 ‘민중시’에 대한 믿음은 매우 직설적이면서 강렬하다. ‘구전되어 이 땅 속에 스미고’, ‘제사음식 주변에 돌고 도는 원귀’와 ‘무덤가’를 거쳐 ‘염라대왕께 죄다 직고할’정도의 처절한 분노는 마침내 ‘反민중시’적 작태를 보이는 자들을 ‘시멘트 속에’ 묻어버리고 만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양과 질만큼 그가 언어로 노래하고 싶은 대상은 지천이다. 우선 그의 분노는 시대와 역사의 정의롭지 못한 부분에 작용한다. 그는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꽃을 지긋이 억누르면서 ‘서로 사랑 하거라 서로의 얼굴에 분칠하지 말거라 분명한 것은 시와 노래와 촛불로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는 것이야’라는 시적 화자 속으로 접어든다.
벼락에 맞아 죽거나 평상에서 굴러 떨어져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죽음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맛있는 수입 소고기.
내장탕 실컷 먹다가 죽을 수 있는 확률은
어떤 우아한 계산으로는 7경분의 1 이라하기도 하고
어떤 무서운 계산으로는 일 백만분의 1 이라는 거야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확률보고 안심하라고
확률보고 포기하라고
⌜확률의 위로⌟ 부분
시인은 ‘헛되고’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어용 언론이 갖는 교묘한 알리바이성 확률론의 중독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 중독성을 시인뿐만 아니라 다수 대중이 꿰고 있었기에 몇 달 동안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켠 것이다. 지난 2008년 봄을 뜨겁게 달군 촛불 정신은 과거로는 수십 년 전까지, 현재로는 우리의 식탁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미래에는 ‘심판론審判論’에까지 이른다.
그 불 조차 없던
평화도 없던 평화시장
홀로 온 몸 촛불 되었더니
⌜불의 소통 -전태일의 환갑날에⌟ 부분
하얀 밥에 고깃국을 위한 해방전쟁은
여전히 물대포 속에
저렴한 평화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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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표준화는 여전히 진행 중
거룩한 평화는 여기에
⌜저렴한 촛불⌟ 부분
이렇듯 평화적 이미지를 띤 ‘작은 촛불’에 대응하는 이미지로
인디언과 아랍인의 땅과 하늘에
위협하리라는 칸트적 신념으로
하느님이 제 편 일거라는 복음주의 믿음으로
네이팜탄과 소이탄을 놓았다
육십육 쪽
시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생명에서 물건으로’
⌜제국의 봄 -이승하 시집을 읽다가⌟ 부분
라고 신제국주의가 놓는 -짐승이 마구 쏟아 붓는- ‘네이팜탄과 소이탄’을 제시한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폭력과 불의를 감당하지 못하는 그의 언어적 절망은 엄숙한 ‘예배당 계단’을 훌쩍 뛰어넘어 마침내 ‘성경’ 앞에서 자폭하고 만다.
대명 천지에 정치적인 폭력이 지도자들에게 있을 때
‘살인’의 죄를 끝까지 물을 수 없을까
무엇을 잊어야 행복하단 말인가
이제야 다시 떠올리지만 “지옥”은 분명히 있어
하느님의 “심판”은 분명히 있을 거야
사람이 사람을 정죄하지 말라고
그 몫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성경에 써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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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노래 소리에 518 노래 목이 잠겨도
죽지 말자 살아서 그의 심판 보자
예배당에 가는 마음
십자가 많은 나라
끝까지 살아 볼 일이다
⌜심판론審判論⌟ 부분
그러나 그에게 종교적 자폭은 있었을지 몰라도 시적 자폭은 없다. ‘일면식 없던 나를 허락하고/ 오랜 등짐 견디며/ 종부鐘阜에 깃들게’ 한 ‘늙은 다리’가 있는 강원도 평창읍의 남방산 남쪽 자락에 있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따뜻한 봄날’같은 인심이 그에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그는 시적 긴장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가리왕산’에 올라 ‘태백산맥 굵은 등줄기’를 보면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배운 자가 세상을 치유하지 못한다
산은 내게 말한다
산은 대학보다 높다
태백산맥과 차령산맥이 나뉘는
굵은 등줄기 따라 흐르는
굽들이 멈춰서 만든 산조차
서울대학 보다 높다
해장국 할머니는 평생 모은 돈을
대학교에 놓았다
배운 자가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
산은 내게 말한다
⌜가리왕산⌟ 부분
그의 새로운 호흡은 ‘배운 자가 세상을 치유하지 못한다/ 산은 내게 말한다’라는 모세적인 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출발은 ‘말했다’가 아니라 ‘말한다’라는 현재진행형 형태를 띄고 있어 더욱 확실하다. ‘태백산맥의 굵은 등줄기’에서 터득한 ‘배운 자가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 라는 그의 詩法은 앞으로 갈수록 더욱 뚜렷한 형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세속을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별 수 없이 품는 갖가지 감정과 서정으로부터 초월하여, 좀 더 승화된 시적 인식으로 시대와 역사를 본격적으로 읊는 ‘강태규 詩’가 곧 만개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 예감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선, ‘詩’ 란 글자가 ‘言’과 ‘寺’의 합자임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 知性人과 창작 詩人이 지식과 지혜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면서도 분자에서는 각기 다른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강 시인에게 있어 그 통찰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그 통찰이 더욱 심화되고, 타 시인들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갈아엎은 시적 인식의 들판에 굵은 시의 씨앗을 알알이 뿌려 ‘서정성’과 ‘시대-역사성’이 절묘하게 비빔된 멋진 ‘민중시’를 양산하는 계절이 분명 올 것이다. ‘서정성’과 ‘시대-역사성’이 시에서 화학적 화합을 이룸이 최선이겠지만 물리적 혼합이라도 이룬다면 큰 성공이 아닐 수 없다.
‘백비白碑’ 앞에 섰을 때의 그 감동을 끝까지 잃지 않고 가슴 깊숙이 간직하며 시의 길이 외롭게 걸어간다면, ‘배운 자가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라는 깨달음을 생활과 창작에서 실천한다면, ‘시읽기, 시쓰기가/ 삶의 즐거움이고/ 인생을 잘 갈무리하는 것의 준비라고/ 자문자위自問自慰’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문단권력이 제아무리 시끄럽게 떠들고 명예 하나 얻지 못한 白頭로 늙을지 몰라도 詩的 성취는 장대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출신 수의학자, 한성대 겸임교수 등으로서의 비교적 화려한 경력을 쌓고 있는 강 시인이, 50줄 넘어 55편 분량의 첫시집을 낸 것은 사실 시인으로서의 출발점은 늦은 편이다. 그러나 그동안 걸어온 인생 여정에서 체득한 무수한 것들이 분명 시적 인식의 대상이 되어, 앞으로 많은 시를 창작할 든든한 토양이 됨을 예감한다. <영주작가회의>의 동료 시인이 됨을 축하하며 함께 어깨겯고 시의 길을 걸어가길 기대한다.
2009년 7월 14일 열락연재에서 앵백산인 박희용 삼가 쓰다
강태규 시집을 읽고.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