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하순은 매우 추웠다.
군대에서 만기 전역한 뒤로 약 2주 정도 심하게 아팠다.
3년간 내 몸의 모든 세포에 녹아 있던 충일한 '군인정신'과 극도의 '긴장감'이 어느날 갑자기 썰물처럼 일시에 빠져나간 탓이었다.
사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겠지만, '해병대 특수 수색대' 출신들은 부대성격 상 대개 그랬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체의 밸런스가 심각하게 깨졌다.
점점 거동하기가 힘들어 졌고 한동안 누워서 지냈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었던 내 가족들도 어느날 갑자기 고꾸라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싶었다.
식은땀이 많이 흘렀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식사를 하면 토하기 일쑤였다.
음식물이 소화되지 않아 죽과 미음으로 약 보름 가량을 지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이 흐른 뒤에 빙빙 도는 몸을 추스르며 겨우 겨우 집 밖으로 나가보았다.
중환자실에서 막 나온 4기 암 환자의 몰골이었다.
영락없었다.
88년 1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대지를 할퀴며 지나갔다.
차갑고 매서운 칼바람이었지만 그때 그 공기가 그렇게도 신선하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그래, 조금씩이라도 다시 몸을 만들어 보자"
특수부대를 떠나 어느날 갑자기 민간인이 되었는데 그 기쁨도 잠시, 군복을 벗자마자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가장 큰 기쁨과 설명할 길이 없는 아픔이 교차했다.
심각한 역설이었다.
신체의 회복에 진력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드라이브를 걸 수는 없었다.
식사량과 운동강도에 조금씩 텐션을 가하며 약 두 달을 알차게 보냈다.
'묵상'과 '글쓰기'도 내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을 내실있게 보내고 88년 3월에 캠퍼스로 복귀했다.
꽃 피고 새 울던 아름다운 캠퍼스.
다시 접한 그곳은 갓 전역한 나에겐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공부, 운동, 봉사에 진력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곧장 '검도부'에 들어갔다.
단 한 순간도 머뭇거리기 싫었다.
입문하자마자 검도의 세계에 깊이 빠져버렸다.
군 복무 중일 때 나는 많은 생각을 했었고, 내 마음판에 새겼던 사유의 결과물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운동'이었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심신과 영혼을 연마하리라 마음 먹었다.
운동 중에서도 3가지 종목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간절했던 만큼 캠퍼스에 돌아오자마자 하나 하나 그 종목들을 접수해 나갔다.
그것이 바로 '검도', '수영', '싸이클'이었다.
훗날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하기 위한 기반이자 모태였다.
세 가지를 모두 사랑했지만 특히 '검도'는 여타 종목들이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세계였다.
매우 독특하고 분명한 그 운동만의 캐릭터가 있었다.
어느 종목과도 비교를 허락치 않는 검도의 특징이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었다.
다른 운동에선 좀처럼 맛볼 수 없었던 '검도의 혼'을 나는 몹시도 사랑했었다.
일도양단, 무념무상, 호연지기, 예의중시, 찰나결단, 절대집중(一刀兩斷, 無念無想, 浩然之氣, 禮儀重視, 刹那決斷, 絶對集中)이 바로 그것이었다.
캠퍼스 복귀 후부터 취업해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검도는 내가 호흡하는 신선한 공기였고, 나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영과 육의 양식이었다.
검은 '찰나의 세계'였다.
또한 검도는 '일도양단의 무예'였다.
본디 검의 속성이 그랬다.
우유부단이나 옥신각신이 필요 없었다.
깔끔한 정리요 생과 사가 순식간에 갈렸다.
검이 검집을 벗어 나는 순간 삼라만상의 종결 같은 백척간두의 승부가 펼쳐졌다.
찰나의 세계에 방종과 해태란 존재할 수 없는 단어였다.
또한 시공의 여백도 불필요했다.
흥정이나 변명도 구차할 따름이었다.
번뜩이는 일도는 만물의 존폐를 가르는 단 한줄기의 엄숙한 섬광이었다.
그래서 머리는 냉철했고 가슴은 뜨거웠으며 몸가짐은 마냥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오십여 년을 살면서 다양한 운동을 해보았다.
신체적인 에너지도 남들보다 강하고 파워풀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시비를 걸어본 적도, 누군가와 주먹다짐이나 발길질을 해본 적도 없었다.
자녀들을 낳고 길렀던 그 긴 세월 동안 회초리를 들어본 적도, 욕설을 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잘났다는 말이 아니다.
운동을 통한 수련이 나를 성장시켰으며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검도'가 제일이었다.
"자신에겐 엄격하되 타인에겐 한없이 너그럽게 살아라"
검도가 내게 가르쳐준 삶의 이정표였고 준칙이었다.
그랬다.
언제 어디서나 절대로 비굴하진 않았다.
그러나 가능하면 배려하며 져주려 노력했다.
자신감의 결여나 심신박약 때문에 그리 살았던 건 아니었다.
일도양단, 호연지기, 예의중시, 절대집중 등 검도의 가르침을 늘 마음판에 새기고 있었기에 오히려 치열한 분쟁이나 갈등의 상황에서도 웃는 낯으로 당당하게 양보할 수 있었다.
가끔씩 검도의 매력을 어린 아들에게 설명해 주곤 했었다.
그랬더니 아들도 그 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너무 키가 작을 땐 검도를 연마할 수 없었다.
나는 때를 기다렸다.
아들이 죽도를 들고 뛰고 구르면서 자신의 심신을 제대로 통제하려면 최소 3학년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3학년이 되자마자 아들의 기대와 소망을 적극 수용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들은 처음부터 좋아했다.
검도의 세계에 입문하여 수 년 동안 중단하거나 지치지도 않았다.
매번 훈련에 매진했다.
미더웠다.
아직은 어린 학생이지만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한 해 한 해 어렵고 힘든 수련과정을 잘 극복해 나갔다.
덕분에 성격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해갔다.
자녀들을 양육할 때 조심할 게 있다.
양육의 방향이 아무리 옳고 반듯할지라도 절대로 강요하거나 억지로 시키면 안 된다.
가능하면 부모가 먼저 경험해 본 다음 이런 저런 '장점'과 '값지불'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애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심할 수 있도록 오래오래 기다려 줘야한다.
자신의 자발적인 판단과 선택이 아니라면 끝까지 가기 힘들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분야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값지불'과 '댓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줘야 한다는 점이다.
검도와 산행, 여행 덕분인지 아들 녀석은 항상 밝고 진중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혼자서 배낭을 싸게 했고 홀로 여행을 떠나게 했었다.
중학생 때부터는 겨울이든, 여름이든 방학을 하면 큰 산에 가서 대자연을 경험해 보라고 권장했다.
아들도 씩씩하게 잘 떠났고 또 무사히 잘 돌아왔다.
'설악산', '지리산', '덕유산' 등등 한국의 큰 국립공원을 순차적으로 찾아갔다.
큰 산에서 1박2일이나 2박3일 간 혼자 종주산행을 마친 뒤에 잘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나름대로 사진에 남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집을 떠날 때마다 동행할 같은 반 친구를 찾았으나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바람에 늘 혼자서 갔다.
내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산에서의 부대낌을 통해 담력과 호연지기가 제법 길러진 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당해 졌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 학생이 되었다.
과거를 뒤돌아 본다.
아들의 인성 형성과 심신의 수양에 검도, 산행, 여행이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아들도 그렇게 얘기했다.
아빠의 입장이 아니라 인생을 먼저 산 선배의 입장에서 한솔이의 성장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가 그랬다.
운동, 산행 등 다양한 경험들이 아들의 신체 단련 뿐만 아니라 인성과 정신의 성장및 고양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부인할 수 없었다.
또한 사실이 그랬다.
내가 전역 뒤에 바로 입문했던 검도.
수 년 간 깊은 사랑에 빠져 지냈다.
나에겐 가장 멋진 연애였다.
또한 진중한 배움이었고 엄숙한 영혼의 수련이었다.
한마디로 검도는 '멘탈 운동'이었다.
'무념무상'을 타고 번개처럼 흐르는 '정중동의 세계', 그 자체였다.
굵은 빗줄기처럼 땀이 계속 흘러내렸지만, 대련 후에 갖는 묵상의 시간이 내겐 최고였다.
정말로 행복했다.
긴 인생길을 가면서 '검도'와 맺었던 인연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릴 따름이다.
'劍'은 곧 '道'였다.
'인생' 또한 '도'였다.
2011년 6월 29일.
무념무상, 찰나결단의 마음으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