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호 브라질 선교사 간증... “기도만 했는데 물질 복 쏟아져”
“목사님 사례비에 ‘0’ 하나 빠졌어요”
거센 파도가 쉼 없이 몰아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돌아보니 하나님이 주신 평안 가운데 잔잔한 강 같은 인생을 살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
20세 친구 따라 처음으로 중앙성결교회에 간 이후 10년 동안 주일이 되면 몸만 습관적으로 교회로 향했다.
브라질에 이민 와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세계적인 통신회사에 근무했다.
33세 어느 주일 여느 때와 같이 교회 맨 뒷줄에 앉아 예배가 끝나기만 기다리는데 예배 뒤 공동의회를 한다며 인쇄된 종이를 나눠줬다.
교회가 1년 동안 쓸 예산을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평소 교회 일에 관심이 없던 나는 별 생각 없이 목사님 사례비가 얼마인지 보게 됐다.
나도 월급 받는 입장에서 깜짝 놀랐다.
내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 수준에서 ‘0’이 하나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의 없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통과 됐습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번개같이 통과되고 있었다.
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목회자 사례비 액수가 잘못 기재된 것 같습니다. ‘0’이 하나 빠졌는데요.”
“아니요, 맞습니다.”
순간 머리에 열이 솟았다.
“나도 직장생활을 하는데 이 액수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사모님께서 간호사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제 아내가 유치원을 운영하는데, 그러면 회사에서 내 아내가 일하기 때문에 내 월급을 깎습니까. 어떻게 교회에서 세상 사람도 하지 않은 상식 밖의 일을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의견을 제시하시죠.”
“이 정도 액수로 수정하시고 매년 일정액을 올리는 것으로 제의합니다.”
투표는 거수로 결정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손을 들어 압도적으로 내가 제시한 의견이 통과됐고, 공동의회가 끝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목사님을 싫어하던 핵심 집사들이 뜻을 모아 목사님의 사례비를 말도 안 되게 책정해 스스로 교회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야비한 수법이었다.
그들은 다음 주일 나오지 않았고, 따로 새로운 교회를 차렸다.
나는 갑자기 목사님을 살린 일등공신이 돼 몇 안 남은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살리기 위해 성가대 지휘부터 재직회 서기 직분까지 맡게 됐다.
이제는 맨 앞줄에 앉아 예배에 집중하며 찬송을 부르며 매주일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의류사업 승승장구에도 인생허무 느껴
1983년 우리 부부는 브라질에서 의류사업을 했다.
다른 가게에는 손님이 없어도 우리 매장에는 항상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주위 상인들이 구경 올 정도였다.
10년간 사업이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한인변호사 부부와 상파울루의 초호화판 식당들을 누비며 다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내 가슴에 인생의 허무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먹고 즐기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내가 태어난 목적인가.”
그 때까지 성경을 한 번도 완독해 본적 없던 나는 처음으로 매일 구약과 신약을 한 장 이상 읽기 시작했다.
두 달 쯤 지나자 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알게 됐다.
성경 읽기가 꿀같이 달았고, 퇴근 하면 저녁을 먹은 뒤 서재에 문을 닫고 성경 읽는 것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됐다.
1년 만에 성경을 여러 번 완독했다.
“성경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다니던 교회 한국진 목사님이 말했다.
“주 집사님, 신학공부를 해보시오.”
나는 내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마른하늘에 번개 같은 일이었다.
아내는 한술 더 떴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당신을 부르고 계시니 순종하세요.”
나는 미국 필라델피아 신학교 브라질 캠퍼스에 등록했다.
1992년 미국으로 와서 신학대학원에서 계속 공부했다.
그런데 교회 장로님이 기막힌 조언을 했다.
“주 집사님, 따끈따끈한 사업체가 매물로 나왔으니 한번 가봅시다. 금방 나온 것이라 사람들도 모르니 이걸 놓치면 평생 후회합니다.”
어느 쇼핑몰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내가 살펴보니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아 별로였는데도 한 달 순수입이 1천만 원은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주인이 우리 교회 교인이라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가 쇼핑몰이라 주일에도 영업을 해야 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주의 종으로 가겠다는 신학생이 그 가게를 인수했다.
처음에는 열정과 희망에 부풀어 시작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가게에서는 단돈 1달러도 집으로 가져 오지 못했다.
매달 직원들 월급, 쇼핑센터 관리비, 가게세, 물건 재료값 등을 내면 오히려 엄청난 돈을 더 집어 넣어야 했다.
꼬박 밑지는 장사를 하면서 밤 10시에 가게 문을 닫으면 바닥에 무릎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주여, 이 고통을 속히 끝내 주소서.”
전 주인에게 남아 있는 인수대금을 면제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같은 교회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디차게 단번에 거절했다.
신학대학원을 다니면 대부분 교회에서 전도사 직분을 주는데 나는 주일에 장사를 한다는 이유로 전도사 임직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교만한 결정으로 인해 4년 동안 심신의 고통을 당하고 전 제산을 거의 잃어버렸다. 가게를 그만 둔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전도사로 임직을 허락하셨다. 1995년 신학교 3학년 때였다.
전기 끊어질 무렵 기도하니 물질 밀려와
사례비가 거의 없는 전도사, 강도사 기간을 지나는 동안 아무리 지출을 줄여도 적자였다.
심지어 전기도 끊어질 지경에 이르자 나는 속수무책으로 기도만 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 여고 선배인 김 집사님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분의 남편은 워싱턴에 있는 월드뱅크에 근무했는데 아내에게 봉투를 건넸다.
1만 달러인 1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왠지 이 돈을 우리에게 갖다 줘야한다는 부담감이 들어 가져왔다고 했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어려운 상황에 대해 내색조차 한 적이 없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 돈으로 급한 불을 끄고 얼마 뒤 다시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김 집사님이 돈을 가져와 총 3천만 원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냥 드리는 것이니 갚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브라질에서 매주 고급 식당을 함께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겼던 친구가 뉴욕을 다니러 왔다가 우리를 만나러 워싱턴에 들렸다.
미국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사는 형편을 물어왔다.
신학생이 돼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다고 하자 자신이 좀 돕고 싶다며 가까운 은행을 찾아 수만 달러를 입금했다.
며칠 함께 있는 동안 은행에서 수표 한 상자가 우송돼 오자 그는 150장 수표에 모두 서명해서 상자를 내게 주며 필요한 만큼 사용하라고 했다.
이런 불가사의한 배려로 나는 집이 팔리는 날까지 수억이나 되는 돈을 빌려 사용했다.
지금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는 가슴 깊이 새기며 이후 브라질 선교사로 기꺼이 내 삶을 드렸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장 2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