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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1장
1. 생명의 약속(1-2)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건 안하건 상관없이,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주인으로 버젓이 존재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향해 ‘왜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느냐? 제발 인정해 달라’고 사정하지도 않으시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의 원칙을 따라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의 때가 되면 버림받는 것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역시 세상이 멸시하고 조롱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외면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반응에 대해 민감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무지하고 어리석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한 세상이 외면하고 조롱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성도가 낙심하고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그 속셈을 의심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과연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길에 서 있는 성도라면, 세상에 대해 눈치 보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절대로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의 당연한 반응으로 여기면서, 말씀이 인도하시는 믿음의 길에만 모든 마음을 둘 뿐입니다.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이 구절을 보면 ‘생명의 약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명의 약속이라는 것은, 약속이 곧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를 말할 때는, 돈과 연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시간은 돈이다’라는 옛말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돈에 빗대어 말합니다.
곧 돈을 사람들이 목적으로 삼는, 참으로 가치 있고 중요한 것으로 전제하고, 시간이 곧 돈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말함으로써, 시간의 중요함과 가치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점에 가면 ‘금융지식이 돈이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역시 금융지식이 곧 돈이 되어 돌아오게 됨을 말함으로써, 금융지식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뭔가의 가치를 말할 때는, 세상이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과 연결하여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사도가 말하는 ‘생명의 약속’은,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혀 가치 없고, 쓸데없는 것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약속은 전혀 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믿는 것이 돈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돈도 안되는 것을’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약속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거리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의식에도, 생명의 약속을 세상의 시각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사도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라고 말하면서,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을 참으로 중요하고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흥밋거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그런 말들이, 내 육신의 문제에 보탬 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귀함과 가치는, 그 약속으로 인해서 사망에 있던 우리가, 생명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바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은 생명에 대해서조차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이 귀중할 뿐, 영혼의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설사 영혼의 생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세상에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라면, 그 영혼의 생명마저 팔아버릴 수 있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세계에서, 사도라는 것은 불필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가 자신을 생명의 약속대로, 사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도의 일이 곧 생명의 약속을 전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생명의 약속의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에게는 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재미를 제공함으로써 교회로 오게 하고, 교회에 흥미를 갖게 함으로써, 교회를 키워 보겠다는 의도나 관심이 아니라, 사도 자신이 맛보고 누리고 있는, 생명의 약속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재미가 있는 교회였겠습니까? 초대교회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하니까, 초대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그래서 재미있는 교회였겠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도 초대교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초대교회는, 자신의 것을 다 팔아 나누고 함께 통용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여러분께 과연 재미있는 일입니까? 과연 이런 교회를 원하고,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그러고 보면 사람은 대단히 이기적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전혀 손해를 보지 않고, 자신은 힘들지 않고, 자신은 포기하는 것도 잃어버리는 것도 없이, 재미와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섬김과 희생을 내어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내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를 원하고, 사랑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곧 교회도, 사랑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향한 기쁨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이익과 재미를 위한 종교인의 모임일 뿐입니다.
성도는 돈 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세상에서, 생명의 약속을 받은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성도된 것은, 생명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 속에서, 세상이 보지 못한 기쁨이 있으며, 세상이 알지 못한 세계가 있으며, 세상이 맛보지 못한 가치 있는 세계가 있음을, 증거할 자로 부름 받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2절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디모데와의 관계를 좀 더 친밀감이 있는 관계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약속 안에서의 관계입니다.
성도와 성도는 세상의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지는 조건과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생명의 약속만으로 연결된 관계입니다. 바울에게 디모데가 사랑하는 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도, 생명의 약속이라는 관계에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명의 약속의 기쁨으로만 모인다면, 그 교회는 자연히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모임으로써 훼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약속이 무엇보다 귀한 것으로, 우리의 마음에 깊이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의 약속 밖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생명의 약속 밖에 있다면, 그것은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약속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멸망에 있는 우리를 구출하여, 하늘의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심으로써, 멸망의 자식인 우리가, 이처럼 놀라운 복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기쁨과 감사가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2. 고난을 받으라(3-8)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예수 잘 믿고 복 받고 천국가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니, 과연 이러한 말을 기쁘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현대인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의 대부분은, ‘복’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어려움에 대비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힘을 써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재앙을 다 막아 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도는 오히려 반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과연 사도와 같은 복음을 선포한다면, 사람들이 모일까요? 아마 어렵지 않겠습니까?
고난을 얘기한다고 해도, 순수하게 고난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고난을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신다고 토를 달아놔야, 고난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난과 함께 복을 얘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 교회에서 십자가는, 교회 부흥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 인간의 열심과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희망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에게 두고 있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빼앗아 버립니다. 인간에게 희망을 두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유일한 소망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고난도 마다하지 않게 합니다. 자신이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복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십자가를 지신, 예수만 믿어주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떠나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그냥 고생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복음과 상관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고생으로 여긴다면,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을 고난 받는 것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생을 의로운 것으로 착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고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복음으로 살지 않는 것 같은 자격지심에 빠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고난을 육체적인 고생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육체적인 고생으로 여기게 되면, 자연히 고생을 하지 않고 편히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고난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복음을 알게 되었으면, 사도처럼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곧 복음이 복음을 받은 자를 고난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환경 문제로 여기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이기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5절을 보면 사도는 디모데의 믿음을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6절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여기서 말하는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란, 5절에서 언급한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는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한다면, 7절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은사’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사’는 5절에서 말한 ‘거짓이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거짓이 없는 믿음은, 7절에서 언급한 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이 있습니다. 반대로 한다면 두려움이 있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이 없는 것은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고, 주님의 사랑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실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붙들고 있고, 사랑 아래 있는 것이 성도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세상에 무엇이 주님의 능력에 대항하여, 주님의 사랑을 끊어 버리고, 성도를 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믿는다면 성도에게 두려움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이 없는 믿음은,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으며 두려움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세상 무엇에도 두려움이 없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긍휼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택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심히 감사하고 자랑해야 할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내어 놓지를 못합니다. 돈이 있을 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면서, 복 받은 자신을 마음껏 자랑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용서도 긍휼도 내어 놓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성도가 누리고 있는 것을, 세상은 전혀 누리지를 못합니다. 성도가 받은 은사를, 세상은 전혀 받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성도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세상이 가지고 있는 돈과 힘을 가지고, 자신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비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향해서 ‘너희는 돈으로 사느냐? 나는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믿음으로 산다’ 이런 당당함이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당당하게 꺼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믿음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보고 ‘부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오직 자신보다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일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은 전혀 힘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세상이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돈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존재는, 이처럼 세상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것을, 세상 속에서 나타내고 증거할 사람으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내어 놓고, 자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돈을 전부로 아는 사람들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믿음을 자랑하면서, 부끄럽지 않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고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전혀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는 것을 내어 놓으면서, 그것을 자랑하고 힘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복음을 기뻐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거짓이 없는 믿음을 받은 성도가 가야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살고 못사는 것을 묻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가 받은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실 뿐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십자가의 은혜와 용서를 자랑하며 살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굴하지 않고, 십자가를 증거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입니다.
3.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9-12)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입니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사람들은 믿음의 목적을 자기 구원에 둡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으니, 하나님은 내 믿음을 보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은, 9절의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곧 부르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셔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곧 구원을 부르심의 목적에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부르심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합니다. 부르심이 곧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부르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곧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쓸만한 사람을 골라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이미 영원 전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열심과 정성을 보시고, 보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적어도 9절의 이 말씀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역시 인간이 은혜를 받을만한 행동을 하거나, 간구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한 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인간의 열심도 정성도, 그 무엇도 개입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고자 하거나, 행위를 비교하며 신앙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은혜를 떠나 있는 인간들의 작태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것이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면, 왜 성경은 성도의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까? 가령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고, 또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성도의 구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입었는가를 구원을 통해서 확인함으로써,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복을 증거하며 살게 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가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이, 십자가를 증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성도의 사명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합된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결국 증거하고 자랑할 것은, 자기 행위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영원 전부터,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한 은혜대로 하신 것이라면, 부르심을 입은 자가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면, 단지 예수님의 은혜만을 말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뭔가를 이루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란, 영원 전부터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은혜입니다. 곧 하나님이 주시기로 하신 예수 안의 은혜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인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엉뚱한 것을 은혜라며 따라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난 은혜만을 참된 은혜로 여기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할 일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것에서 은혜를 찾고 또한 원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썩어질 것임을 생각한다면, 땅의 것을 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 썩어질 땅의 것을 위해서겠습니까?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은혜가, 썩어지고 사라질 땅의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세상은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영원히 썩지 아니할 기업을 받을 자로 부름 받은 것이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이기에, 놀라운 은혜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1절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사도는 자신을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선포자나 사도나 교사라는 것은, 모두가 복음을 증거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합니다. 곧 사도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복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할 자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사람은 날 때부터 죄와 사망의 세력에 붙들린 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세력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힘과 권세로도 불가능한 일이, 예수님으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세상의 무엇이 귀하다고 해도,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 앞에서는 시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의 전부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복음을 위해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사명인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 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과 위치에서도, 복음을 위해 존재함을 잊지 말고, 복음이 증거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행실을 자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 행실을 자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 안에서 주어진 은혜를 가벼이 하는 것이며,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빙자하여,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시시하게 보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증거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도 부요한 자, 권세 있는 자, 성공한 자를 높이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아들의 은혜로 감사하면서 사는 성도를 시시하게 보시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아는 것이 관건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아는 것이, 성도로 하여금 고난을 받되, 부끄럽지 않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12절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것은, 바울이 주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나님이 마치실 때까지, 주님이 능히 지키실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능력이고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4.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3-14)
세상은 무엇을 볼 때, 아름답다는 느낌을 가질까요? 자연을 바라볼 때 그런 느낌을 가질 수도 있고,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하면서 아름답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름답다고 인정하시느냐에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눈과, 죄에 속한 자로 전락한 세상이 세상을 보는 눈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하시고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이 아름답게 여기는 삶을 사는 것이, 곧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고 성도다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세상이 인간의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될 것 같으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한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믿지 아니한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소위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을 내세워 믿음의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13-1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본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 받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디모데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기에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상태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은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영광을 생각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기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에게서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이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눈에 아무리 좋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고상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결국 제 눈에 안경일 뿐이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 말씀에서 벗어난 악한 자들의 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벨탑이 선한 것입니까, 악한 것입니까? 바벨탑은 인간이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쌓은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무엇을 위해 삽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자기 이름을 위해서입니까?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 모든 노력과 수고를 쏟아 부으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바벨탑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바벨탑이 든든하게 쌓아져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무너져야 할 것으로는, 추호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든 자신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자를, 원수로 규정하고 대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돕지 않는다면, 서슴없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무리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선으로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단지 내 육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선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은,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뿐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성도가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인데, 과연 성도가 말씀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악함을 깨닫고, 구원자 되시는 분의 의의 공로만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심판 받을 자임을 알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우리를 은혜로 부르셔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일을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말씀대로 살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은, 멸망의 자식에 불과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 곧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구속을 위해 일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고 높이며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일을 자랑함으로써,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8-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곧 구원이기에, 어떤 인간의 행위도, 그것이 세상이 볼 때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애당초 죄와 사망의 권세에 붙들린 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 권세를 끊어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로부터 전해진,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는 것이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영원 전에 작정된 일이기에, 내가 어떤 일을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행함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작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를 붙들고 있는 죄의 권세를 끊어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삶을 산다고 해도,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붙들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끊어버리고, 우리를 구출하여 생명에 있게 합니다. 이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복음을 위해서,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도 이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름을 입은 것도,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5. 사도와의 관계(15-18)
성도는 자신의 성도 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무한한 감사가 고백되어야 합니다. 입에 발린 감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안 후, 그 은혜로 말미암은 주체할 수 없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성도라면 이런 감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도 됨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찾아오심과 부르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분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성도라고 말하면서도, 성도 됨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곧 자신을 성도 되게 하신 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혹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한 성도 됨을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교회와 연관된 성도 됨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의 일을 하는 자신에게서 성도 됨을 확인할 뿐,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양합니다. 누구는 밭을 사서 나가봐야 하겠다면서 사양하고, 또 누구는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시험해야 한다면서 사양하고, 또 누구는 장가들었다고 하면서 사양합니다.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일이 바쁘다는 것 때문에 사양합니다. 잔치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노하여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와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아있다고 하자, 이번에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 내용을 보면, 결국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애당초 잔치에 초청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는 것은, 잔치에 오지 않으려고 하거든, 붙들어서라도 집을 채우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잔치를 베푼 주인의 의지입니다.
이 경우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잔치에 참여해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잔치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나같은 자를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는 고백과 함께 말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의 것을 받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이며, 저는 자와 같은 나를 불러 주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속에 둔 성도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15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그런데 이 말씀처럼, 사도 바울을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을 버렸다는 것은, 바울과의 관계를 끊었음을 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믿음과 사랑으로써 증거했던, 복음을 외면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16-17절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이처럼 바울을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가 오네시보로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자주 격려해 주던 사람이고, 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 만났던 사람입니다.
바울을 버리는 자가 있는 반면에, 바울이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가 만나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단지 바울이라는 한 인간을, 싫어하거나 친하게 지내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버렸다는 것은, 곧 복음을 버린 것이고, 찾아가 만나는 것은 복음을 귀하게 여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버린다면, 그것은 생명의 말씀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되든,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가 만난다면,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 그만큼 귀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곧 사람이 싫어서 버린 것이 아니고, 사람이 좋아서 찾아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말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이런 세상에 세상이 환영할만한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환영하지 않는 복음을, 환영받는 복음으로 변개하고자 한다면, 결국 세상에 환영할 수 없는 부분은 모두 삭제하고, 대신 세상이 환영할만한 것으로 대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다른 복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그 속에 거하는 성도는, 사도가 전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고자 할 것이고, 그 마음에서 말하는 복음은, 사람들이 환영하든 환영하지 않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증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에게 복음은 귀한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이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가 만났던 것입니다. 바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의 이런 마음이 바울을 격려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바울과 오네시로보의 관계에는, 인간적 친분이 아닌 복음이 있습니다. 곧 복음으로 인한 관계인 것입니다. 복음이 강력한 능력이 되어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버리고, 자기 마음에 들고 이익이 된다고 해서, 가까이 하는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적 관계와 복음적 관계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고 안들고와 상관이 없고, 내게 이익이 되고 안되고와 상관이 없고, 나에게 잘대해주고 잘대해주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오직 복음이 좋고 귀하기 때문에, 함께 하는 관계가 복음적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관계는, 멀리하고 멀리하지 않는 기준이,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내 마음에 들고 나에게 잘해주면 가까이하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할까요? 두말할 것 없이 복음으로 인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복음만 마음에 두고, 만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만남에 격려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의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격려가 없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 등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보지 않고, 다만 인간으로만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만났을 때 여러분을 격려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어울리고 노는 것으로 격려가 됩니까? 그것도 격려가 될 수 있지만, 교회에 진심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복음의 교통으로 인한 격려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모인다면, 이러한 유격려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와 사도의 관계에 복음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로 모이는, 성도의 관계에도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없이 모인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관계일 뿐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쉽게 기분 상하고 깨어지는 관계말입니다.
여러분께 복음이 귀합니까? 여러분을 성도로 부르시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이 감사하고 기쁨니까? 그렇다면 그 속사람 그대로 성도를 만나기 바랍니다.
복음이 귀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속에 있는 성도에게는, 복음을 귀히 여기는 지체를 만났다는 것이 격려이며 기쁨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18절을 보면 사도는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을 격려해 주고, 부지런히 찾아와 주었으니 그 대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네시보로가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찾아온 것은, 곧 그 속에 복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보로는 이미 그리스도의 긍휼 아래 있는 성도입니다. 곧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은,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나같은 자를 부르신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예수 안에서 은혜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에 복음은 귀한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마음으로 함께 모이고, 교제하고 교통함으로써 서로에게 격려가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