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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글쓰기
의복을 입을 때에는 모든 공덕을 입는다는 생각으로 항상 참회하여야 합니다.
옷을 입고 허리띠를 두를 적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진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손에 양치질하는 도구를 들었을 때에는 마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었으니 자연히 청정하게 되어야 합니다.
대소변을 볼 때에는 모든 더러움을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버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물로 손을 씻을 때에는 그 깨끗한 손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 말할 때에는 청정한 가르침을 향하여 해탈을 완성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길을 갈 때에는 청정한 진리의 세계를 밟고 나아가 마음의 장애인 번뇌를 없애야 합니다.
올라가는 길을 보고 있을 때에는 드높은 경지에 올라가 삼계(三界)를 초월하고자 해야 합니다.
내려가는 길을 보았을 때에는 부처님의 법 저 깊숙이 내려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험한 길을 보고서는 인생의 악도(惡道)를 버리고 사견(邪見)으로부터 떠나도록 해야 합니다.
바른 길을 보았을 때에는 마음을 정직하게 하고 거짓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커다란 나무를 보았을 때에는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분노나 원한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높은 산을 보고서는 위없는 깨달음을 향하여 불법의 뿌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가시밭을 보았을 때에는 삼독의 가시를 빼어버리고 상처입은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부드러운 과일을 보았을 때에는 불도(佛道)의 큰 실천을 일으켜 위없는 결과를 거두도록 하여야 합니다.
(<화엄경> ‘제 7장 정행품(淨行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그로부터 만 이 년이 지나서, 바로가 꿈을 꾸었다. 그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잘생기고, 살이 찐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올라와서, 갈밭에서 풀을 뜯는다.
그 뒤를 이어서, 흉측하고 야윈 다른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올라와서, 먼저 올라온 소들과 함께 강가에 선다.
그 흉측하고 야윈 암소들이, 잘생기고 살이 찐 암소들을 잡아먹는다. 바로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다시 잠들어서, 또 꿈을 꾸었다. 이삭 일곱 개가 보인다. 토실토실하고 잘 여문 이삭 일곱 개가 나오는데, 그것들은 모두 한 줄기에서 나와서 자란 것들이다.
그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이삭 일곱 개가 피어 나오는데, 열풍이 불어서, 야위고 마른 것들이다.
그 야윈 이삭이, 토실토실하게 잘 여문 이삭 일곱 개를 삼킨다. 바로가 깨어나 보니, 꿈이다.
아침에 그는 마음이 뒤숭숭하여, 사람을 보내어서 이집트의 마술사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그가 꾼 꿈 이야기를 그들에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그 꿈을 해몽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에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이 바로에게 말하였다. "제가 꼭 했어야 할 일을 못한 것이 오늘에야 생각납니다.
임금님께서 종들에게 노하셔서, 저와 빵을 구워 올리는 시종장을 경호대장 집 감옥에 가두신 일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같은 날 밤에 각각 꿈을 꾸었는데, 두 꿈의 내용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때에 그 곳에, 경호대장의 종인 히브리 소년이 저희와 함께 있었습니다. 저희가 꾼 꿈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었더니, 그가 그 꿈을 풀었습니다. 저희 두 사람에게 제각기 그 꿈을 해몽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해몽한 대로, 꼭 그대로 되어서, 저는 복직되고, 그 사람은 처형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불러오게 하였고, 사람들은 곧바로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냈다. 요셉이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니,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것을 해몽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나는 네가 꿈 이야기를 들으면 잘 푼다고 들었다. 그래서 너를 불렀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꿈에 내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살이 찌고 잘생긴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올라와서, 갈밭에서 풀을 뜯었다.
그것들의 뒤를 이어서, 약하고 아주 흉측하고 야윈 다른 암소 일곱 마리가 올라오는데, 이집트 온 땅에서 내가 일찍이 본 일이 없는 흉측하기 짝이 없는 그런 암소들이었다.
그 야위고 흉측한 암소들은 먼저 올라온 기름진 암소 일곱 마리를 잡아먹었다.
흉측한 암소들은 살이 찐 암소들을 잡아먹었는데도, 여전히 굶은 암소처럼 흉측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깨어났다.
내가 또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서 자란 이삭 일곱 개가 있는데, 잘 여물고 실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의 뒤를 이어서, 다른 이삭 일곱 개가 피어 나오는데, 열풍이 불어서, 시들고 야위고 마른 것들이었다.
그 야윈 이삭이 잘 여문 일곱 이삭을 삼켜 버렸다. 내가 이 꿈 이야기를 마술사와 현인들에게 들려 주었지만, 아무도 나에게 그 꿈을 해몽해 주지 못하였다."
요셉이 바로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두 번 꾸신 꿈의 내용은 다 같은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장차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좋은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를 말하고, 잘 여문 이삭 일곱 개도 일곱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 꿈이 다 같은 내용입니다.
뒤따라 나온 야위고 흉측한 암소 일곱 마리나, 열풍에 말라 버린 쓸모 없는 이삭 일곱 개도, 역시 일곱 해를 말합니다. 이것들은 흉년 일곱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임금님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금님께서 앞으로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올 일곱 해 동안에는, 온 이집트 땅에 큰 풍년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 땅에 언제 풍년이 있었더냐는 듯이, 지나간 일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근이 이 땅을 황폐하게 할 것입니다.
풍년이 든 다음에 오는 흉년은 너무나도 심하여서, 이집트 땅에서는 아무도 그 전에 풍년이 든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 41장 1~31절)
오늘 화엄경에서 [커다란 나무를 보았을 때에는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분노나 원한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를 보자.
왜 나무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야 할까? 줄기, 가지, 잎, 꽃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기 때문일까? 하나라도 부족하면 다른 게 생겨나지 않은 모습을 봐서 그런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한 나무에 죽은 가지도 붙어 있고, 파인 줄기도 있고, 잘라진 뿌리도 있고, 꽃이 피지 못하는 가지도 있다. 그래도 전체를 보면 나무를 나무답게 하는 구성 요소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있어 나무 보고 분노나 원한을 버리라고 한 것 같다. 게다가 타원형으로 둥근 나무 수형을 보면 마음이 원만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삼각형으로 솟은 나무도 날 서 있다고 보기보다는 둥글다는 느낌이 전해져 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매일 유심히 나무를 보는 내가 분노하고 다투면 안 될 것 같은데, 차마 그럴 수 없는 성격 은근히 우려된다. 그래서 나는 도덕적 설교를 어려워한다. 실천하기 어려운 인간의 본능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에 두고는 살아야겠지.
오늘 창세기에서 [임금님께서 장차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를 보자.
꿈은 곧 계시라는 해석인데, 어제 내가 꾼 꿈들을 더듬어보니 계시 같은 거는 없을 것 같다. 대략 어디서 본 듯한 일들이 무작위로 펼쳐졌던 것 같다. 이를 영상화시키면 19금을 넘어 아예 상영 불가일 것이다. 황당무계, 폭력, 기괴한 판타지 등이 서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마구잡이로 돌출하기 때문이다. 이런 꿈들이 나타나는 것은 현재의 정신 상태가 어지럽기 때문이다. 몸이 안정화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을 통해 그나마 질서를 잡으려는 뇌 활동이다. 즉 꿈은 그저 생존 활동인데, 거기에 누가 개입한다는 것은 물리 현상이 아니라 믿음일 것이다. 그 믿음의 정체가 늘 궁금하지만, 나는 현재 못 믿고 있을 뿐이다. 믿는 자를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 생각을 여기다 적을 뿐이다.
<향모를 땋으며>에 나오는 글을 보자.
[야생의 장소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 것이 아닌 언어로 이루어지는 대화의 관객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과학으로 이끈 것은, 식물학을 유창하게 말하는 법을 오랫동안 배우도록 이끈 것은 숲에서 들리는 이 언어를 이해하려는 갈망이었다. 그나저나 식물학의 언어를 식물의 언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과학에서 또 다른 언어를 배웠다. 그것은 꼼꼼한 관찰의 언어이자 작은 부분을 일일이 명명하는 친밀한 어휘를 가진 언어다. 명명하고 기술하려면 우선 보아야 한다. 과학은 ‘봄’이라는 선물을 윤이 나도록 다듬는다. 나는 내게 제2의 언어가 된 말의 힘을 존경한다. 하지만 어휘와 묘사력은 풍성해도 그 아래에는 뭔가 빠진 게 있다. 그것은 세상에 귀를 기울일 때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 내면에서 부풀어 오르는 바로 그것이다. 과학은 존재를 구성 요소로 환원하는 분리의 언어이자 대상의 언어다. 과학자가 말하는 언어는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심각한 문법 오류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 누락은 이 호숫가 토박이말들을 번역할 때 중대한 손실을 낳는다.]
위 글에서 “식물학의 언어를 식물의 언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와 “과학은 존재를 구성 요소로 환원하는 분리의 언어이자 대상의 언어다.”를 보자.
식물학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고 식물의 언어는 식물의 신호라는 것 같은데, 인간의 언어는 문법을 갖춘 문장이고 식물의 신호는 그저 느낌만으로 전달된다는 것 같은데, 그 차이가 뭘까? 식물학의 언어는 지식의 영역이고 식물의 언어 이해는 영혼의 영역일까?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다음으로 과학은 분리의 언어이자 대상의 언어라고 하는데, 이는 설명을 하기 위한 언어일 뿐 인간이 개입된 느낌 있는 해석의 언어는 아니라고 하는 것 같은데, 모든 설명은 사실 주체가 들어가 있는 해석이라고 나는 여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쓰고 보니 여기서 말하는 과학 언어는 수학 공식, 화학식, 이런 거를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거 모르지 않는가. 내가 아는 과학이라는 것은 과학 대중서 읽은 게 전부 아닌가.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글을 보자.
[현상은 무한히 반복된다. 이러한 광대한 우주적 교환 속에 보편적 생명은 서로 오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체의 신비 속에 모든 것을 휘감고 모든 잠의 꿈을 하나도 잃지 않고 일체를 동원하며 여기서는 미생물을 태어나게 할 때, 저기서는 별을 부수고 흔들어 비트는 것이다. 빛을 힘으로, 사색을 원소로 바꾸어 여기저기 흩어 뿌리면서도 분할되지 않게 하고, 자아라는 기하학적 힘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용해하고, 모든 것을 원자적 영혼으로 끌어올린다. 그렇게 모든 것을 꽃피게 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데 이르기까지 모든 활동을 아찔한 어지러움이 있는 기계적 운동의 암흑 속에 헝클어지게 한다. 곤충의 비상을 지구의 운동에 연결하고, 법칙의 일치에 의한 것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어도 창공 속의 혜성의 운행을 물방울 속의 플랑크톤을 향해 종속시킨다. 모든 것이 정신을 재료로 만들어진 기계와 같다. 그 모든 것들은 날벌레를 최초의 기계로, 태양계를 최후의 바퀴로 하는 거대한 톱니장치와 같은 것이다.]
이런 글을 두고 분리가 아니라 하나라는 통합을 통찰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글을 두고 존재 전체를 보여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느낌은 있지만 이렇게 쓰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멋진 글을 써준 빅토르 위고에게 감사드린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그런데 싯다르타는 그런 사소한 것들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내기로 결심하였으며 그 일을 해냈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어제 결심하였던 것, 그러니까 그대의 친구가 되고 그대한테서 사랑의 기쁨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던 것을 이루어내지 못하겠소?]
위 글을 보니 아침에 잠깐 읽은 <연애:생존기계가 아닌 연애기계로서의 인간>이 떠오른다. 성선택이 우리의 문화를 일구었다는 것인데, 이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지 두 개를 비교하며 책을 봐야겠다. 이럴 때마다 늘 진리라고 여기는 것,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막 연결시키면 된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현란하고도 기이하고도 무지막지하고도 창피하기도 한
꿈을 꾸고 난 아침
이런 결심을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어떤 것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글쓰기 컨셉을 겸손 모드로 가자”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묻는다면
대략 이런 것이다.
하늘에서 최첨단 장비를 갖춘 무장 군인들이 내려오고
나는 언덕 풀숲에 숨어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이
어마어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장면 전환
시장에서 가족들과 떡 같은 거를 팔고 있는데
그 군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총기를 난사하고
장면 전환
어느 골목길에서 자동차를 개조해 기가 막힌 무기를 만드는데
그 핵심 인물이 영화배우 신하균 같고
갑자기 나를 포함 몇몇이 하늘을 날아 적진에 갔는데
고작 구덩이에 숨어 있고
모습이 바뀐 적들이 포위해 좁혀 들어올 때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쉬를 하는데
서너 명의 여성들의 눈이 나를 보고 있고
그 다음은 잠시 몽롱해지다가
잠에서 깨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꿈을 꾸고는
겸손이라는 미덕에 글쓰기를 연결시켰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꿈에서 대략 세 번의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고
그때마다 나는 죽음에 대한 이유를 사유하지 않았고
그저 살고 싶은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지독히 공포에 떨면서 말이다.
옴 샨티 샨티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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