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 금석 수집가 진개기
진개기는 고대의 관이대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유명한 금석 수집가이다.청사고에는 "적학호고소장종정(,)이기(彝)금석이 근대의 관("。)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명성이 자자한 루쉰 선생조차 소장을 논하면 潍현의 천스케기("。)다.우리나라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여러 개의 고대 대형묘지 발굴을 주관했던 곽모조 선생은 모두 진개기를 수집가의 '전무고인(前無。人, 후무래꾼)'으로 알고 있다.
진개기 소개
진개기((18, 1813~1884) 청의 유명한 서화가, 금석학자, 장서가.자는 수경, 호는 簠재, 별호는 해변병사, 제동도부. 산동潍현인.도광 25년(1845) 진사, 한림원 편수, 가시독 학사.진개기는 전형적인 벼슬아치이다. 그의 아버지 진관준은 청나라 관지공부, 이부상서, 협치대학사에서 도광황제의 총애를 받아 사후에 태자를 추봉하였다.그리고 진개기는 진관준의 외아들이어서 어려서부터 금의옥식 생활을 했다.관 2세지만 진개기는 다른 부자집 공자형처럼 배우지 않았다.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공부했고, 총명했으며, 23세에 거인을 취득했고, 33세의 중진사가 한림원 편수를 맡았다.벼슬아치로서 진개기는 할 일이 없으면 김석고를 찾아 놀기를 좋아한다.특히 부친이 돌아가신 후 함풍2년, 태평천국은 갈수록 흉포해지고, 조정은 재정이 빠듯해지며, 한 때의 궁핍을 구제하기 위해 임금을 바치는 전조 신들에게 임금을 바치게 하였다.왕좌의 집에서 만 팔천 은을 내고도 상납을 했건만, 이때 진관준이 세상을 떠났건만, 진가는 힘이 약하고 권력자에게 아부를 하지 않았건만 조정은 진개기에게 기한 내에 거금을 내라고 하였다.어쩔 수 없이 돈만 써서 무사했다.이에 당시 사람들은 '대화령'이라고 부러움을 표시했다.그러나 진개기는 이 일로 소희하지 않고 오히려 이 일을 통해 썩은 조정과 세상 물정을 깨닫고 환해의 험악함을 느꼈다.그래서 용퇴를 결심하고 함풍 4년(1854)을 어머니의 슬픔을 등에 업고 벼슬을 그만두고, 그간 모은 문화재를 조용히 潍현의 고향집으로 가져와 금석 연구에 전념하며 학문을 시작했다.
함일생은 오로지 문고헌을 사로 삼아, 웅대한 부와 정묵 탁본을 소장하고, 최초로 모공정과 한대의 상주 청동기 및 진한고인의 이름을 수집하였다.천하를 방송하다.주간·진·한 3대 인새 7,000여방, 종·정·존·이 등 235점, 기물 80여 점, 도광 30년(1850)에 '만인루'를 조성하여 성급 보호하였다.장쑤의 학자 판주린과 함께 '남반북진(南北北陈)'으로 불린다.송, 명래 산동 유명인의 서화 진품 수십 권을 찍어 《상재지유》라고 한다.저서 '상재의 유인 고략', '상재의 유록문', '석문잡록', '전고별록', '정재길금록', '십종산방고목', '정재장고목'근인(实人) 덩실집록(邓)이 소장한 이기의 탁본은 '簠재길금록(金金。)' 8권이다.
진개기
진개기는 질량부: 청동 이기, 권량 조판, 새판, 봉토, 도문, 경감, 각석, 기와, 고화, 천범, 비첩, 서화 등 무소.상주 청동기 수백 점, 진한 청동기와 동권량 조서판에는 백 점, 청동고창노기 등 병기 수십 점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마오공정, 비보가 방정, 진씨 십중, 갑.
그 중에서도 마오궁정은 서주 말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유물이다.명문 32행 500자로, 지금까지 발견된 명문으로는 가장 긴 청동 중기로, 곽말약에 의해 '상서(书)'라고 불리며 근대 교육자이자 서예가인 이서청(李瑞)이 "모공정(毛)정(鼎)명문의 내용은 주선왕을 중흥주실로 하고, 숙부 마오공을 최고보정대신으로 책명하였다"'총재', 왕가를 충직하게 보좌하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라.청도광말년에 모공정은 산시성 기산에서 출토되었고, 함풍2년에는 진개기가 소장하였다.진개기가 세상을 떠난 후, 선통 2년은 그의 손자인 진구가 직예총독단 측에 판매하였다.후에 몇 차례 손을 바꾸어 지금은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을 소장하고 있어, 진원의 보배이다.이번에 전시된 모공정 탁본은 진개기감탁의 원기전형 탁본이다.당시 진개기는 모공정을 소장한 후, '회벽'으로 인해 재앙을 초래할까 봐, 일생 동안 비밀로 하고 남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당시 전탁고수였던 진준에게 단지 10여 부(유기도)를 탁본으로 써달라고 하였다.생존한 이 탁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이번 전시는 처음이다.다른 청동기들은 흉후처럼 방정, 초공종, 진조량 및 한기 8종 탁본을 다루었는데, 모두 정교하고 절륜하며 미족이 귀중하며 학술성과 예술성을 겸비하였다.
도문수집과 연구는 진개기가 개척한 금석학의 새로운 영역으로, 금석학과 고문서학의 발전을 추진하여 선진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진개기는 명고토기 70여 점, 명도편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어 대규모 소장과 연구, 도문을 저술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진개기가 소장하고 있는 70여 점의 완전한 고도기는 대부분 전척고수 야오학환((學桓)이 전형탁을 만들었지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사실이다봉모린각. 이번에 전시된 주야와판의 탁축과 전국토기의 탁판은 모두 진개기감탁, 야오학환의 제도각판 탁본의 전형탁이다.주시경 기와판 탁축에는 진개기가 쓴 장편 고증 발문이 있다.탁공 야오학환은 진개기의 유력한 조수로, 현인으로 기록되어 있다.야오쉐환은 진개기 소장 고물에 받침, 상자, 지지대 등을 배치하기 위해 적목칠기에 금은실을 박고 은박칠기를 만드는 효시(先)를 열고 潍현(县)감은칠기의 창시(。)의 설립자가 되었다.
진개기는 각석(화상석조상 등) 116점, 벽돌 326점, 기와당 815점을 소장하고 있어 소장품 중 수는 적지만 알짜가 적지 않다.반면 고새인은 진개기가 가장 많은 돈을 들여 가장 많은 소장품의 종류로 7000여 쪽에 달해 역사상 가장 개인적인 소장가는 없었다.진씨 장인은 수량이 많을 뿐 아니라 알짜배기가 많고 명품도 많다.신중하게 취하고, 거짓을 버리고 가까운 기초에 가서, 전국과 진한을 정선하다.육조새와 함께 《簠재인집》과 《십종산방인거》 두 편을 편찬하였다.《십종산방인거》에는 진씨 자장인 외에 이소욱·오식인장인과 보강·이좌현이 각각 수인을 찍어, 모두 1만여 璋을 받아 '라고 불린다.이번 전시에는 '십종산방인거' 임신본을 비롯해 고본인 '簠재집한인'과 '簠재선생수제고인'도 함께 전시된다.
감장과 고증을 병거하다
봉토의 발견과 연구는 늦청금석학의 중요한 성과이다.진개기와 절친한 친구인 오식분은 당시 봉토를 가장 잘 간직한 후, 진개기의 사위이자 오식분 차남인 오중철과 함께 두 소장이 수료한 '진토고략'으로 엮었다.이 책은 진한관제 연구지리전각에 중요한 참고 가치가 있는 진한관 사봉토 846매를 수록한 최초의 봉토 전문으로 진씨의 소장품 575매가 실려 있다.석인본인 봉토고략 외에 진개기교 개비고본인 한관사인봉토고략과 청고본인 봉토고략도 전시되어 있다.《한관사인봉토고략》 표지에는 "광서갑술교, 기묘재교"라는 제목과 "광서기묘, 여작인"이라는 제목이 붙고 있다.이에 따라 광서기묘년(1879년)에 이르러서는 학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광서무술년(1898년)까지 이름이 정해졌다.이 원고에는 아직도 주필제에 의한 연구가 많아 진개기가 봉토 연구 분야에서 시현을 훨씬 능가하는 학문적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
김석정탁은 시종 전고(传)를 자임한 진개기(。)의 꾸준한 목표였다.금석의 명가 탁묵을 두루 살펴보고, 전탁고수와의 반복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진개기는 우금탁, 매미익척, 주사탁, 부조탁, 전형탁기법을 익힐 뿐만 아니라 차근차근 탐색해 나갔다.진 씨는 그 전탁 경험과 교탁 기록을 《전고별록》으로 편성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척 전집 전문 저서로, 영향이 깊다.멀리, 오늘날까지도 규례로 모셔져 있다.이번에 전시된 《簠재장종 탁본》《진조량와타쿠책》《簠재길금책》《이재재수집고기명》과 앞에서 말한 모공정(毛公鼎) 등 큰 것을 본 후
진개기 서예도 볼 만하다
진개기의 젊은 서법은 소서(小楷)로 유명한데, 안체(。)에서 입신출세하여 안류 사이를 넘나들며, 안체를 겸비한 풍성함과 유체의 청명함이 돋보인다.금석 수집과 명문 모사, 연구 과정에서 진개기는 만년에 '위상(上上上), 종정(簠) 전예(隶)를 우리 스승으로 모시는' 서학사상을 제시하여, 해서의도 있고 예서도 있다.이번 전시 '한묵유진' 코너에 전시된 21세트의 대련, 병풍과 입축, 행서, 해서, 전서가 모두 준비되어 있으며, 창작 시기가 32세에서 72세까지이며 진개기의 서법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