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까지 아 가 없다
물결 떠나 물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어 있든 수증기가 되든 오직 물일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반야의 세계에는 오직 반야만이 있을 뿐입니다.
般若의 世界가 무엇입니까?
바로 無相이고, 無我인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我 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가든 철저하게 밝고 깨끗하여 나는 없습니다.
凡夫이든 聖人이든, 초심자이든 익숙해진 사람이든
끝까지 無我로 宗을 삼아야
一切法이 모두 佛法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분의 내용은 앞에서의 선현기청분
제2와 대승정종분
제3의 문답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렇게도 경의 뜻이 불가사의하고
과보도 불가사의하니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는 것입니다.
말은 같아도 뜻은 다르다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끝까지 無我니까 색깔이 달라지는
정도의 차이로 보면 됩니다.
한 번 말할 때와 두 번 말할 때의 그 무게와 색깔이
달라지는 정도의 차이로 보면 됩니다.
초심자로서의 문답과 익숙해진
사람으로서의 문답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縟多羅三먁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지금까지 계속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 相이 무너진
그 곳에 반야의 등불이 빛난다는 것을 어지간히 알았지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 또 다시 부처님께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일으킨 사람은 진정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고 마땅히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여쭈어 봅니다.
이러한 자세는 참으로 권장할 만한 자세입니다.
웬만큼 알아차렸다고 해서 중도에서
마음을 놓아 버리면 그 무엇도 되지 않습니다.
佛 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縟多羅三먁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우리들은 본래로 부처이고, 깨어 있으며, 解脫되어 있는
우리들을 가지고 제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맞지않는 말입니다.
본성으로 지니고 있는 이 재산,이 보물은 부처님 같은 능력자도
털 끝만큼 손상시키지 못하고, 가져오지 못하며
또한 보태줄 수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결국은 자기가 갖고 있는
자기 재산을 자기가 썼을뿐입니다.
제 중생 제가 제도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부처님께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오시어
우리들에게 큰 공헌을 남기셨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는 각자가 본래로
모든 것을 구족하고 있는 보물 창고일 뿐입니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天地與我同根) 이라 하늘, 땅, 參羅萬象은
전부 다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니, '너니'하고 구분지울 게 없습니다.
본래가 동일한 자리여서 평등할 뿐인데
거기에는 이리 저리 금을 긋고 비교하고 분별할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相見衆生 인지라 아직도 바깥으로
드러난 色相 에 마음을 빼앗끼고 기준으로 삼습니다.
지금까지 그만큼 우리 내부에는 다 동일한 부처의 성품뿐이라고
공부를 해 왔는데도 아직까지도
나라는 자만의식, 너라는 차별의식, 못났다 라는 열등의식,
나이에 집착하는 한계의식을 갖고 있다면
불교에 뜻을 두고 있는 진정한 불자로
보기 힘들다는 것을 거듭 말합니다.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縟多羅三먁三菩提心者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 아니니라."
진정한 보살은 四相 을 내지 않는데
깨달음의 마음을 내는 데에 있어서도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깨달음의 마음은 낸다거나 내지 않는다 하는
의지나 분별의 대상이 아니고
나와 너, 고저, 우열, 미추를 떠나
있는적적대의한 자리이므로 깨달음의 마음을 발함에 있어서
이것이 고정된 근거이고 법이다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得阿縟多羅三먁三菩提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 於燃燈佛所
無有法得阿縟多羅三먁三菩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 연등불 머리를 풀어
지성껏 공양 올리고 발심 수행하여 수기를 받고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마는 사실로는 '이것이 법이다' 할
무엇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금생의 깨달음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수행에 있어서도 실로 어떤 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부처님이 묻고 공의 도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수보리가 답합니다.
부처님 스스로 단정짓는 것보다 제자의 입을 통하여
무상의 이치를 설하는 것이 더욱 더 공의 이치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佛言 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떠나보낸 보살의 삶과
부처님의 금생에 있어서의 깨달음이나
과거생에 있어서의 보리심 그 무엇도 매인 바 없이
없음을 부처님만큼이나 잘 밝히는 수보리의 높은 안목을
부처님께서 흔쾌히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같은 소리는 서로 울리고 상승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과거 수보리의 한마음과 과장이
수천 년이 지난 우리에게까지 벅차게 전해오는 것 같습니다.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縟多羅三먁三菩提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아니니라."
우리 인류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이고도 값진 사건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있었기에 우리들의 삶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아 정진할 수 있고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그 거대한 성도도 어떠한 고정된 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에게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빠지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에게도 佛相 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리를 얻었다 하는 菩提相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覺相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佛相 을 모두 다 걷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흔적이 마음에 남아 있다면
부처님은 부처가 못 되는 것입니다.
須菩提
若有法如來得阿縟多羅三먁三菩提 燃燈佛 則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縟多羅三먁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말씀하시되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니라."
授記 는 부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그대는 언제 어디서 어떠어떠한 부처가 되어
이러이러한 교화를 펼 것이다." 하고 미리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 연등 부처님에게서 석가모니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과거생에 보살행을 하시고
깨달음을 얻음에 있어서 어떠한 고정된 법에 머물렀다면
연등불이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보리심을 얻는 데 있어서 그러한 법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는 보리심을 얻었다'하는
상을 갖고 있었다면 부처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지만
실로 그러한 마음의 상이 없음으로 해서 부처를 이루어
우리 인류의 너무나도 큰 스승이 된 것입니다.
이럼으로 해서 현재 우리 모두는 더 멀리
연등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갖가지 고통과 문제 속에서 욕심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실망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밝은 등불을 켜신 연등 부처님에게서
'너는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받았기에 조금도
실망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내부에는 빛나는 반야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 광명덩어리의 지혜를 갖고서 오로지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바로 비추어 복된 인생길로 가꾸어 갈 뿐입니다.
우리들 개인 개인 모두는 수기받은 부처이고
남들 또한 부처인데 부처가 어찌 다른 부처를 해할 수 있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가 다른 부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긍정과 찬탄 일색뿐입니다.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니라."
如는
'그대로이다'
'같다'
'진리이다'
'평등하다'는 불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진리라고 하는 것보다 如 라고 하는 것이 더 구체적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모든 법이 진리이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여래라고도 하는데 如 에서 왔다는 뜻입니다.
즉, 진리에서 왔다, 진리 그 자체이다 하는 뜻이 됩니다.
부처는 진리 그 자체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부처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어떤 특별한 형상을 갖추셨거나
상당한 위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諸法 속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가고 오고 자연이 바뀌면서 돌아오고 심지어는
가만히 있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도 다 제법에 포함됩니다.
얕은 소견에서 보면 이 세상 만유의 이치가 변화 무상하고
낱낱이 차별로 된것으로 보이지만 좀 더 눈을 뜨고 보면
만 가지의 차별 너머로 변화지 아니하고 본래로 평등하고 동일되어서
다를래야 도저히 다를 수 없는 그런 근원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를 如如 하다고 하겠습니다.
若有人 言 如來得阿縟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縟多羅三먁三菩提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는 설산에서의 육년간의 고행을 떠나
보리수 아래에서 납월 팔일 見明星悟道 를 이루었습니다.
생사의 근원적인 의문과 문제가 풀리고 모든 집착을 끊고
광대무변하고도 영원한 진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하고 획기적인 깨달음도
어떤 고정된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게서 증득한 보리심은
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기준이나
선악시비를 떠나서 두루두루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須菩提 如來所得 阿縟多羅三먁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위대한 부처님의 깨달음은 진정 어떠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실다움이 있다고 하면 어떤 고정된 실체가 되니 상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면『금강경』의 도리에 맞지 않게 됩니다.
어디에 기준하여 부처님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하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에 기준하였다 하면 그곳에는 반야의 빛이 갈 수 없을 테니까
悟道 를 이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헛된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부처님이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것은 더욱 더 아닌 것입니다.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 그 자체뿐이니까 實 이니 虛 니 하는
말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식과 분별이 끊어지고 말로써 나타낼 수 없는
言語 道斷 '의 자리인 것입니다.
是故 如來 說一切法 皆是佛法
"일체법이 모두 다 불법이다."라는 말은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맥이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쉽게 佛法 이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합니다.
불법을 뭔가 굉장히 거창하고 뼈를 깎는 듯한 고행을 거쳐야
비로소 도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온 사람은
뒷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또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모든 것이 다 불법이니
온갖 비리와 반도덕적인 행위를 해도 좋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佛法 은 어떤 특정한 장소나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일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떠나 불교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 불법인 것입니다.
넘어져도 불법이고 일어서도 불법인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으면 괴로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소음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요하고 맑으면 맑은
그대로가 바로 불법인 것입니다.
봄이 돌아와 새 잎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
아니 꼭 봄이 올 것도 없이 겨울이면 겨울 그대로
여름이면 여름 그대로가 그저 불법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이 눈을 떠야 하는데 자꾸 먼 곳에 가서 불법을 구합니다.
그래서 禪師 들의 禪句 를 보면 불법을 바로 들어보여 주고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열렬한 동경으로 길을 묻는자에게 때로는
엉뚱하고 논리에 맞지 않는 소리만 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불법 적적대의입니까." 하는 진지한 물음에
전혀 얼토당토 않게 대답을 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庭前柏樹子 ."
또, 때로는 법을 구해 헐레벌떡 달려온 사람에게
그냥 "여기 앉게."하며 방석을 권하기도 합니다.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아침 먹었어?
그러면 설겆이 해야지."하고 아주 단순하고
일상적인 말로 일러 주십니다.
또 俱지 禪師 같은 분은
평생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선구나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하는 것은
결국은 같은데 맛이 다를 뿐입니다.
經 은 돌아가고 禪句 는 바로 질러간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활과 같이 둥글게 말씀하시고
선사는 활줄과 같이 팽팽하게 가로질러
명쾌하게 바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육조 혜능대사 이래로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기도 하지만
이런 선구들의 바탕이 될 수 있기에
여러 禪師 들이 참으로 금강경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일체법이라는 상에 매일까봐
일체법이 일체법이 아니고 단지 이름 붙이기를 일체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 言 世尊 如來
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사람의 몸이 몹시 長大 하여 확실하게 자리잡아
우리 눈앞에 보여 주고 있어도 결국은 시대와 오온이
잠시 인연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그 장대했던 몸도 다 흩어지고
본질자리는 텅 비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는 것도
실로 큰 몸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이름을 큰 몸이라 붙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말이 끊어진 眞如 의 그 본체 그 자리를
일체법이라고 이름붙일 뿐입니다.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 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제도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생명의 복을 자신이 캐내어 자신이 쓸 뿐이지
누가 제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도 부처님의 깨달음을 쏟아 놓은 것이 아니고
바로 설법을 듣는 우리들의 보물 그대로를 자랑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어떠한 법이 있어서 보리심을 얻은 것이 아니고,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하는데
도를 구해 나아가는 보살이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분별심을 내어 제도하였다는 상을 내면
그를 보살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한 기준에 근거하여 이렇게 하면 보살이다
저렇게 하면 보살이 아니다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전부 다 공을 근본으로 하여 잠시 인연을 갖고 있을 뿐인데
어떤 법이 있어서 보살이라 하겠습니까.
실로 보살이라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 無衆生無壽者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진실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지혜의 안목에서 볼 때는
잠시의 인연의 결합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의 실체는 말할 것도 없고 불법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도 텅 빈 자리에
나다 남이다 하는 분별은 있다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法 이 공하고 나도 공한 것입니다.
내가 비어 버리면 나로 인해 벌어지는 다른 모든 일체법도 공한 것입니다.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여기에서 좀 더 發心 하면 장엄하겠다는
마음의 상을 내지 않고 장엄할 국토도 없습니다.
너와 나의 能所 가 끊어진 자리에는
지극히 평등한 도리만 있을 뿐인데
장엄하겠다는 상에 떨어질 것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마음으로써 장엄하는 곳에
무슨 국토라는 현상이 벌어지겠습니까.
단지 무심히 체득되어 실천할 따름이지
내가 마음을 낼 것이 없고 마음을 굳힐 국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인 것입니다.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비운 사람은 無我法 의 이치를 완전히 깨친 사람입니다.
아니 깨쳤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바다에는 오직 짠맛뿐이듯이 무아에는 오직 무아뿐입니다.
철저하게 무아뿐입니다.
我 가 없으니 나 이외의 대상인 法 도 없고
그리하여 이 둘 또한 같이 텅 비어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我空 法空 俱空 의 三空 이 혁혁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총달한 사람은 참으로 큰 보살이라 하겠습니다.